728x90
반응형

애기나리

산행을  하다보면 많이 접하는 야생화 중에 한 꽃으로 애기나리는
다른 꽃과 달라 집단 적으로 군락지를 형성하여 많은 꽃들을 피게한다.
필자는 사실 둥글레와 비슷하여 꽃이 달려 있지 않으면 구분하기가 힘든 꽃으로 생각되며 줄기는 곧게 뻗은 1자가 아니고 잎이 달린 마디 부분이 꺽여 올라간다.
 
 애기나리는 전국의 산 어느 곳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야생화이다.
백합과로 여러해살이풀이다. 키는 15CM~30cm정도 크며 옆으로 비스듬이 눕는다.
잎은 서로 어긋나며 꽃은 1~2송이의 개체가 핀다. 엷은 초록색의 꽃은 땅으로 향하며 꽃잎은 6장이며 4~5월경에 꽃을 핀다. 봄철에 어린 순은 나물로 먹는다 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지금 금정산 장군봉 일원에 가면은 철골로 기둥을 세우고 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기존의 철계단을 두고 바위를 바로 올라가는 작업이 한창 진행중인 것이다.

기존의 철계단은 부산의 모기업에서 설치한 것으로 바위와 적절한 손놀림으로 인해 최소한으로 설치하여 사실 다방리에서나 은동굴에서 장군봉으로 오르는 산행로를 설명할때 험하다는 부분으로 많이 이야기를 하는데 이제는 그런 이야기도 사라질 태세이다. 그자리에 양산시에서 최근에 발주공사를 하여 지금 에스컬레이트(?)공사가 한창 진행중으로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제는 그곳도 쉽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으니(모든사람이 다오르는 곳) 어느 것이 산을 찾는 산꾼을 위한 처사인지 모를 일이다. 도심 한복판에서야 일반 시민들의 불편과 위험성이 있는 곳은 당현히 개선을 하고 안전을 위해 설치를 하여야 하지만 산에서도 그정도의 위험(기존계단으로 충분할 것 같음)과 불편감수를 해야는 것은 당연지사, 그것도 위험지역이라고  더 큰 인공 시설물을 설치 하니 자연과 동화되기 위해 찾아가는 우리에게는 한쉼할 따름이다. 
사실 금정산은 여러 코스가 있지만 다방리 또는 은동굴로 오르는 코스가  인공적인 색채가 덜 가미된 코스로 많이 찾곤 하였는데 이제는 여기도 내마음의 산행길에서 지워야 할 것 같다. 금정산 고당봉 오름길의 계단길 처럼 설치 때 말이 많았는데 장군봉의 계단 작업에도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설치를 하는지 물어 보고 싶다.
오늘 5월12일 공사가 끝난다하니  
제발 금정산의 고당봉처럼 그런 큰 인공 시설물은 이제 그만 하면 좋을 것 같다.  산은 산 그대로 두는 것이 제일 좋은 것 같다. 
은동굴 갈림길을 지나 사각기둥을 박아 놓은 모습들 철쭉이 아쉬운 듯 바라보고 있다.

무슨 ktx공사 현장 처럼 작업도구와 함께 널려져 있는 모습이 앞으로 장군봉의 앞날을 보는 것 같다.
바위면에 박아 놓은 철빔
멀리서 본 모습으로 바위의 이끼를 걷어 내고 지금 계단 설치공사 작업을 하고 있다.

공사 현장 아래에 설치되어 있는 옛 철계단의 모습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은동굴의 금륜사
금정산 북단인 양산시 동면, 동면 초등 학교 아래에서 장군봉을 산행 하다 보면 만나는 특이한 굴이 있다. 흔히 은동굴로 불리며  바닥은 편편하게 되어 있고 두개의 굴로 되어 있다. 위의 동굴은 입구는 좁지만 내부는 10여평에 30여명이 누울 수 있는 규모로 꽤 넓은 편이며 여러사람이 앉아 기도를 드릴수 있다. 아래에 있는 굴은 입구도 넓지만 굴이라 하기 보다는 움푹 들어간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금륜사 주지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은동굴에 대해서 밑의 마을 주민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여주었다. 임진왜란때는 마을 밑의 아낙네들이 굴에 몸을 숨기고 베틀을 놓고 베를 잤다하여 베굴로 불리고, 또 전란때 마을 사람들이 동굴에 올라와 몸을 숨겼다하여 隱동굴이라 한다하였다.  두굴에서 모두 약수가 나오는데 윗굴에서는 심한 가뭄이나 한겨울철에는 물이 마르지만 아래의 굴은 마른적이 없다하며 약수굴 또는 암굴이라 부르고 그리고 은을 캤다하여 은동굴로 불린다고하였다. 은동굴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굴에 피난을 와 거주를 하던 부락민이나 아니면 수도승들에 의해 좁은 벽면과 입구등을 정으로 쫓아 넓인 흔적을 볼 수 있다 . 은동굴에는 또 가지산의 쌀바위와 같은 전설도 가지고 있으며 아랫마을 내송부락에서 매년 삼월삼짓날에는 모든 부락민이 올라와 특이하게 용왕제를 지낸다 한다. 그리고 가뭄이 심하게 들때도 올라와 기우제를 지내고 임진왜란의 전란때에는 여섯성씨가 올라와 8년을 같이 기거하였다는 특이한 동굴인 은동굴. 현재 금륜사 사찰은 1968년 조창현스님에 의해 창건되어 40여년의 연륜밖에 되지 않았고 은동굴 앞에 가건물을 지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아래로 옮겨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을 새로 지어 번듯한 사찰다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윗굴 입구의 모습과 아래 사진은 내부의 모습으로 산신을 모서 두었다.

안에서 밖으로 본 모습으로 임진왜란때에는 앞에 나무가 울창하고 입구가 좁아 동굴을 찾기가 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부락민들이 난을 피하기 위하여 올라와 숨어 지냈다는 전설도 가지고 있다.
바위 틈에 모서 놓은 우스광스러운 모습의 동자 
바위 틈새에 모서둔 불상





새로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의 모습이 웅장한 금륜사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흔히 산행을 하다 보면 족두리풀은 두잎을 보고도 찾을 수가 있다. 하나의 줄기에 두툼한 잎이 있어 습기가 많은 산행로 상에 여기저기 볼 수 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족두리 모양의 꽃은 찾아보기가 힘이 든다. 주의 깊게 찾아 보지 못하면 그냥 지나치기가 쉽상인데 줄기의 맨 밑부분에 서 확인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낙엽등으로 인해 묻혀 있는 족두리 모양의 꽃은 낙엽등을 들어 낸후 확인을 할 수 있다  

족두리풀

쥐방울덩굴과로 전국의 산에서 많이 볼수 있다.
2개의 잎이 달려 있고 그 아래 찐한 자주색의 꽃이 핀다.
반구형의 꽃받침에 끝부분은 3개로 갈라지고
여자의 족두리와 닮았다하여 족두리풀로 불린다.
한방에선 뿌리를 진해 거담제, 진통제 이뇨제,
감기 두통에 등에 사용하며 세신이라 부른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큰꽃으아리

5월의 산자락에 가면 덩굴 식물인 으아리를 만날 수 있다.
꽃이 커고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집 화단에서도 가끔은 볼 수 있는  미나리아제비과의 으아리속에 속한다.
처음에는 약간 녹색을 띤 꽃이 점점 흰색으로 변하며 한방에서는 위령선이라 부른다.
위령선은 풍습을 제거하고 경락을 통하게 하여 손발의 마비에 효능이 뛰어 나 지아비의 풍을 고치는데 사용된후 위령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다.
잎은 서로 마주보고 길이는 2m에서 길게는 10m까지 줄기를 형성하여 길게 이어진다. 


산행을 하다 보면 종종 만나는 큰꽃으아리. 꽃이 커 눈에 잘 뛰는 으아리꽃은 약한 줄기에 여러개의 꽃이 달려 있는 모습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느다란 줄기에 그 큰 꽃을 달고 있어니까

지나가는 등에도 그 모습에 반해 여러번 꽃술에 앉기를 반복하며 큰꽃으아리의 모델에 한 몫 거들었다. 

잎은 서로 마주보며 꽃잎은 5장~8장이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천성산 미타암(彌陀唵)
소재지:양산시 웅상읍 소주리 171
천성산의 동쪽편에는 원효대사사 창건한 미타암이 있다. 큰 바위 아래 석굴을 파고 자리잡은 보물 제998호가 안치된 미타암은 험한 산사면을 깍아 절터로 만들다 보니 좌우로 길게 건물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에 많은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등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옛절의 멋은 사라지고 없지만 절의 앉은 폼새는 원효대사가 당나라 천명대중을 구한 후 당나라 승려를 천성산으로 인도하여 모두 성불시켰다는  전설과 맞물려 더욱 각광을 받고 있는 사찰이다.
미타암의 미타는 아미타불에서 따온 말로서 서방정토에서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여
죽어서도 극락세계로 인도하여 중생을 구한다는 아미타불. 신라 선덕여왕때 창건 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타암은 현재 암자 뒷편의 큰 바위 아래 굴인 미타굴에서 사찰명이 나왔다 한다.


양산 미타암 석아미타불입상
보물제998호
소재지;경상남도 양산시 웅상읍 소주리
감산사 아미타불입상과 미륵보살입상이 미타암의 아미타불과 함께 한장의 돌로 불상을 깍아만든점과 불상의 양식과 수법이 서로 비슷한 것으로 보아 통일 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보고 있어며.  삼국유사에는 서방극락세계로 날아간 다섯비구가 수도하던 석굴에 봉안 된 것으로 유명한 아미타불로 양산의 석굴암으로도 부르는 아미타불.

미타암 미타굴에 안치 되어 있는 아미타불상은 불신과 광배가 한장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나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큼직하며 두 귀는 어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둥굴며 양감이 있어 자비로운 상호를 나타내고 신체역시 양감이 풍부하며 건강하고 둥글게 처리된 어께는 부드러우면서도 탄력 있는 체구를 만들고 있다.
봉견의 법의는 전신에 걸쳐 유려한 옷주름을 이루며  가슴앞에 군의를 묶은 띠매듭이 표현되었다.
U자형의 옷주름이 길게 흘러 내리며 광배는 주형거신광으로 안에 2줄의 굵은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고 그 사이에 좌우대칭으로 꽃무늬를 넣어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돌렸다. 연화좌의 대좌에는 안상을 조각하였다.




미타암으로 오르는 계단길
주차장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서면 만나는 절입구. 일주문은 따로 없고 기암의 형상이 사찬왕상을 대신하고 있다.


미타굴의 아미타불

찾아가는 길:
미타암 들머리인 주진교까지는 부산 노포동 종합터미널(전철 1호선 종점)에서 수시 운행하는 웅상행1002번 좌석버스 , 301번, 또는 울산행1127·1137·2100·2300번  노선버스 이용 주진마을 하차를 한후 미타암 아래 주차장까지는 걸어가는 방법과 미타암 서틀버스를 이용하면 된다.7번 국도상 웅상읍 주진리 웅상도서관 맞은편 동해주유소 부근의 미타암 버스정류장에서 1일 8회(07:10, 08:10, 09:10, 10:10, 12:10, 13:10, 15:10, 15:10). 미타암 전화 055-365-4184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금창초는 꿀풀과의 다년초로 흔히 우리 주위의 산과 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다.

화려하지도 않으며 남에게 들어내기를 싫어하는 듯 땅바닥에 착 달라붙어 살아가는
꽃으로 그래서 주위에 흔한 만큼 대우를 받지 못하는 꽃이다. 화려하면 그 만큼 주위의
눈을 타서 채취를 당하는 신세가 되지만 자신의 처세술 인지는 모르지만 요즘같은 세상에는 들어내지 않고 몸을 낮추는 금창초 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줄기와 잎에는 흰털이 무성하게 나며 뿌리 잎은 넓은 도피침형으로 사방으로 퍼지며 높이는 5~15CM정도 자라고 거의 땅바닥에 퍼져 자란다.
그래도 자신은 우리에게 이로운 꽃으로 온몸을 불태운다. 한방에서는 흔한만큼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전초를 채취하여 말려 해수, 천식, 기관지염,토혈,중이염등에 달여서 먹고 부스럼과 타박상,목안이 붓고 아픈증상에 찧어서 바르거나 즙을 내어 양치칠을  하면 효과를 볼 수 있다 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내변산의 봉래구곡으로 불리는 골짜기에 직소폭포가 암벽을 비집고 흘러 내린다. 깍아내린 암벽사이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변산의 지축을 흔들고  크고 작은 폭포와 소가 이루어져 부안호으로 들어간다. 망포대, 신선봉,관음봉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물이 모두 직소폭포로 들어가고 20m의 높이는 흡사 모습이 설악산의 비룡폭포와 빼어 닮았다.
봉래구곡을 거슬러 오른 용이 직소폭포 아래 용소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하늘로 승천하였는 지는 모르지만 주변의 나무들과 함께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며 변산8경의 하나이다. 직소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용소에서 휘돌아 제2폭포로 빨려 들어가는 분옥담, 그 아래가 선녀탕로 한사람이 들어 가 목욕할 수 있을 정도의 물이 항상 일정 하게 담겨져 있는 봉래구곡의 변산은 봄에는 진달래와  가을에는 단풍잎과 떨어지는 낙엽이 아쉬워 속살까지 보여주는변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찾아가는 길은 남여치에서 산행을 한 후 월명암을 거처 봉래 구곡으로 가는 방법과 내변산산의 사자동에서 봉래구곡의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방법. 또 하나는 내소사옆 원암마을에서 제백이고개를 거쳐 직소폭포로 가는 방법이 있다.
교통편은  부안버스 터미널에서 내소사행 버스는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사자동행 버스는 8회 있다. 부안금일여객 163-583-2624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 정읍IC~30번 국도~곰소~격포~변산~남여치 순.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변산의 월명암은 쌍선봉 즉 정확하게 말하면 낙조대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산상 암자이다.
예로 부터 월명암을 호남의 삼대영지라 말하는 명당 터인데 백암산의 운문암, 대둔산의 태고사와 함께 호남의  삼대 영지라 한다.
변산 월명암에는 四聖과 八賢人 十二法師가 나올 명당 터로 월명암의 창건주 부설거사와 그의 부인 묘화, 아들인 등운 딸인 월명을 일컬어 四聖이라 하고 8현인은 성암, 행암, 학명의 3현이 났고 앞으로도 5현과 12법사가 더 나올 자리라 한다. 부설거사가 창건한 월명암은 사적기에 따르면 1300여년전에 통일신라시대 신문왕11년 691년에 경주사람인 부설거사에 의해 창건 되었고 흔히 부설거사는 요즘 말로  대처승의 신분이였다. 그러나 출가후 파계승이 되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둔 스님이지만 득도하여 도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부설전에 전해 온다.
부설거사의 속명은 진광세로 20세때 출가하여 불국사 원정스님의 제자가 되어 전국의 명산을 두루다니며 수도에 전념하다가 도반인 영조, 영희스님과 변산의 쌍선봉 아래에 현 월명암 자리에 작은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전념하게 된다.
그러나 더 큰 공부를 위하여 오대산으로 가던 세사람은 김제에 도착하여 두릉의 백련지에 있는 구무원의 집에서 묵게 되는데 그의 딸 묘화가 부설거사에게 반해 결혼 해 줄 것을 청하지만 부설거사는 일연지하에 거절을 한다. 간곡한 묘화의 청에 의해 할 수 없이 오대산가는 것을 포기하고 파계하여 묘화부인과 혼인을 하고 등운과 월명을 두게 된다.
그리고 월명과 부목한의 색보시 이야기가 전하는데 부목한은 월명에게 반해 연정을 품고 있었는데  밤마다 치근되며 요구를 하니 월명은 오빠 등운에게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니 등운은 월명에게 한번 그의 요구를 들어 주라 하여 월명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는데 다시 요구를 하니 월명이 또 다시 오빠에게 이야기를 하니 한번 더 들어 주라고 한다.
그러나 그후에도 계속 요구를 하니 할 수 없이 등운과 월명은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고 있는 부목한을 아궁이에 밀어 넣고 불에 태워죽이니 두 남매는 더욱 수도 정진하여 도를 깨우쳤다하는 이야기이다. 부설거사는 부인과 남매를 데리고 변산으로 들어와 공부하던 옛 자리에 부설암을 짓고  딸 월명을 위해 월명암, 아들 등운을 위해 등운암, 그리고 그의 부인 묘화을 위해서는 낙조대 아래에 묘적암을 짓고 수도 정진하여 네분모두 득도하였다 한다. 주로 월명암은 남여치에서 쌍선봉옆을 돌아 가는 방법과 사자동이 있는 내변산 탐방소가 들머리이다.


부설전(浮雪傳)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40호
소재지: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월명암을 처음 세웠다는 부설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책으로
행서체로 쓴 한문 필사본이다. 표지에는 부설전이란 책의 제목이
표기되어 있으며 표지 안쪽에는 월명암 연역표를 적어 놓았다.
내용에는 부설스님이 월명암에서 영희, 영조 스님등과 수도생활을
하던 중에 있었던 일화와 부설선사가 지은 시등이 수록되어 있다

월명암 뒤로 변산8경인 낙조대가 펼쳐진다. 


월명암 마당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부안댐 건너편의 쇠뿔바위봉과 군사시설물이 있는 의상봉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변산의 내소사
전라북도 기념물 제78호
소재지: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내소사는 백제무왕 34년인 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창건당시에는 소래사로 불려 지게 되었는데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다 한다. 대소래사는 폐사되고 지금의 내소사는 소소래사가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인조 11년인
1633년과 고종 6년인 1869년에 중창을 하였다.
내소사는 소래사로 불렸으나 임진왜란 이후
내소사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대웅보존은 조선 인조때 청민스님이 지었고 문살의 아름다움과 단청 솜씨 또한
일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조선 태종 15년 어느 이씨 부인이 사별한 남편의 명복을 빌며 묘법연화경을 필사하여 만든 법화경 묘법연화경도 이사찰의 자랑거리이다. 경내에 있는 고려시대 종은 청람사지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며 새겨진 문양이 세련된 작품이다. 


내소사 대웅보전

보물 제291호
소재지: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내소사 대웅전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우측에 보현보살, 좌측에 문수보살을 모신 내소사의 중심건물인 본전이다
조선 후기에 건립한 대웅보전은 건축과정에서 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목침의 나무만으로 서로 엮어 건물을 완공하였다.
천장의 화려한 장식과 연꽃 국화꽃을 가득 조각하여 마치 화려한 꽃밭에 들 정도의 착각을 일으킬 문살의 예술이 인상적이다.
반대로 법당 안에서 보면은 단정한 마름모꼴 상의 그림자만 비친다한다.



일주문에서 내소사로 들어서는 유명한 전나무길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천황봉 정상에서 도갑사로 내려서는 산길에서 본 경관으로 하산할 능선길이다. 뒷 능선 우측 지점의 큰 바위가 구정봉으로 그아래 배틀굴이 있다.
구정봉을 내려서면서 본 영암읍 쪽 전경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 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왕봉에 보름달이 뜬다로 시작 되는 영암 아리랑의 가사이다.
사실 월자가 들어가는 산 이름은 많이 있다. 너무나 유명한 제천의 월악산,
부산과 가까운 좌천의 달음산, 진주의 달이산등 많은 산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번에 소개하는 월출산이 달과 어울리는 최고의 산으로 치고 있다.
영암 아닌 전라남도를 대표하는 월출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면적 또한 여타 국립공원에 비해 규모면에서 가장
적지만 산세는 여타 국립공원에 조금도 지지 않는 호남의 5대 명산이다.
예로부터 월출산은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삼국시대인 백제때는 월나악으로 불렸고 고려시대에는 월생산, 조선시대에 들어와 월출산으로 불려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관이 뛰어난 월출산을 두고 시인묵객 또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금오신화를 집필한 매월당 김시습이
월출산을 두고 "남쪽에 제일가는 그림 같은 산이 있어니 청천에 솟아 있는 월출산이 여기로다"하며 월출산을
격찬하였다.
그림같은 월출산은 사실 산행을 할 수 있는 들머리가 세곳으로 집약된다. 도갑사와 천황사 그리고 경포대로 주로 천황사로 올라 천황봉을 거쳐 경포대로 내려 오는 코스가 일반 산행객에게 이용된다. 그리고 도갑사로 이어지는 월출산 종주 코스는 6시간 이상이 소요 되는 당일 코스로는 조금은 벅차지만 부산에서 오랜만에 찾는 산행지라 월출산 종주를 안 할수 없어 도갑사로 하산을 결정하고 출발하였다.
산행경로를 보면 천황사 입구 들머리~천황사지 갈림길~바람골경유 바람폭포 갈림길~구름다리~경포대 삼거리~통천문 삼거리~통천문~천황봉~남근바위~바람재 삼거리~베틀굴~구정봉~미황재(억새밭)~도갑사 도선수미비~도갑사 순으로 산행시간은 6~7시간을 걸리는 장거리 산행길이다.
그리고 구정봉에서 내려가는 마애불을 볼려면산행 시간은 더 잡아야한다.
먼저 천황사 입구인 탐방 지원센타 앞을 지나면 주차장과 그 뒤로 월출산임을 알리는 큰 표지석이 서 있다.
그 뒤로 펼쳐지는 월출산의 바위와 그림 같은 선경에 월출산의 품안으로 들어 선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인파로 인해 밀려 올라가는 형편으로 월출산은 그 만큼 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조각상이 서 있는 자연관찰로를 통과하면 천황사 야영장 관리소,여기를 지나면서 산행이 본격 시작 된다. 천황사는 우측으로 천황봉3.1km, 구름다리1.41km,천황사0.5km의 이정표가 서있고 들머리를 지나면 산길은 작은 바위 들이 깔려 있고 산죽이 길 옆을
도열하고 있다. 10여분이면 천황사지 갈림길에서 산길은 갈리는데 매번 올때마다 천황사를 경유한후 능선을 따라 구름다리로 올랐는데 이번에는 코스를 달리하여 바람골 계곡을 따라  구름다리로 산행을 하기로 하고 우측 바람폭포방향으로 산길을 잡는다. 잠시 몇해전에 불이난 천황사를 보기 위해 올라서니 한창 불사가 진행중이다.
몇해전에는 가건물을 짓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 현판이 붙은 작은 건물을 볼 수가 있었다. 다시 되돌아와 천황교를 건너면 사실상 바람골로 들어선 것이다. 많은 등산객들로 붐비던 것과 달리 바람골은 한적하게 산행을 할 수 있었다. 가뭄으로 물 마른 작은 폭포에 봄꽃인 자주괴불주머니가 나타나고  산행길은 계곡을 끼고 올라가는 바위로 된 너덜길이다.
천황사를 경유하여 바람폭포 삼거리 까지 오니 30여분이 소요 된다. 바람폭포 삼거리로 좌측은 구름다리 0.3km, 우측은 천황봉1.4km, 바람폭포0.2km을 알리는 이정표, 구름다리를 보기 위해 좌측으로 급한 계단길을 오른다.
철계단을 구름다리 삼거리까지 설치한 된비알의 오름길이다. 쉬엄쉬엄 발걸음을 옮기고 뒤돌아 보는 바람골과 건너편의 바위능선이 장관이다.
천구만별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천마리의 거북이와 만마리의 자라같은 바위 형상이 골골마다 능선마다 모습을 달리하고 서 있는 기암들에 월출산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머리를 들어보니 구름다리가 지나가고  어느새 15분이면 천황사에서 올라와는 구름다리 삼거리, 천황봉1.8km, 우 천황주차장1.9km, 천황사지0.8km의 안내판이 서 있고
좌측으로 돌 계단을 올라서면 구름다리로 들어선다. 많은 산행객으로 붐빈다. 몇해전에 새로 설치한 월출산 구름다리는 사자봉 중턱에서 대봉을 연결하는 현수교로 길이는 50여m. 높이는 120m로 출렁다리에서 새로 공사를 하여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가교를 설치하여 누구나 안심하고 건널 수 있다. 공사 이전에는 흔들림과 고도감으로 인해 여성분들은 건너는데 어려움이 많았는데 지금은 안심하고 건널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다리를 건너면 산길은 사자봉으로 올라가는 철계단으로 이루어 져 있다. 경사가 심해 더운 날에는 땀께나 솓아야 할 구간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면 일렬로 줄을 지어 올라 가야 되고 내려 오는데 내려오는 계단이 좀 비었다고 잠시를 참지 못하고 올라가니 내려오는 사람과 서로 뒤엉켜 병목현상으로 지체하게 되고 다른 등산객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우리 등산 문화의 현 주소이다. 사자봉에서 내려 서면 안부로 정면의 큰 암봉을 좌측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숫제 돌아 간다는 개념보다는 내려 갔다 다시 산행을 시작한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바위길을 급하게 내려서면 산길은 다시 오르막길, 숨은 턱까지 차 오른다. 좌측으로 펼쳐지는 기암들에 힘든줄도 모르고 올라선다. 다시 능선, 정면에 천황봉으로 올라서는 능선을 시원하게 볼 수 있는 자점이다. 올라가는 사람들의 힘든 모습도 여기서는 볼 수 있다. 정상이 가까워 보이지만 실제로 산행을 해보면 이번 산행의 제일 힘든 길이 기다리고 있다.
이곳을 벗어나면 경포대 삼거리, 천황봉0.4km, 좌측 경포대2.6km 이정표를 뒤로 하고 한발한발 올라선다.
통천문 삼거리로 바람골에서 바람폭포를 지나 올라오는 지점으로 통천문 삼거리라 부른다.
여기서 좌측으로 0.3km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하늘로 통하는 통천문이다.
천왕봉을 오를 수 있는 문이 열리는 곳으로 좁은 바위 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통천문을 통과하면 정상은 눈앞이 보이고 주위로 얼레지가 한창이다.
힘듬도 잠시 정상에는 넓은 암반으로 사람으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룬다.
속칭 물반고기반일 정도로 북적이는 인파를 뒤로 하고 하산을 서두른다.
좌우를 돌아보는 경관은 영암 땅에 불쑥 솟은 듯 산세를 이루는 월출산이라 그 어떤 산과 비교를 하리오. 
사실 도갑사로의 하산길은 이제 산행 시작이라 할 정도로 먼 거리이다.
정상석 앞을 지나 내려서는 하산길은 떨어진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급 내리막 하산으로 꾸불꾸불 내려선다,
좌우로 보여 주는 기암들의 행렬에  잠시라도 눈을 땔 수가 없다.
남자의 거시기와 닮았다는 남근바위를 지나면 산길은 바람재 삼거리, 정상에서 50분 소요, 직진하면 구정봉 0.5km, 도갑사1.5km, 좌측은 경포대2.5km 이정표에서 같이 온 회원 한분이 무릎이 아프다며 경포대로 하산을 하신다고 한다.
끝까지 산행을 할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부산에서 온 다른 단체분께 양해를 구하고 그 편으로 부산으로 갈 수 있도록 하게 한후 경포대로 하산을하게 하였다. 나머지 회원님은 도갑사 방향으로 직진을 한다.
오르막 산길은 매본 산을 오르고 하여도 힘들다. 베틀봉 방향의 오름길도 체력 소진으로 인내심을 자아내게 만든다.  베틀굴 갈림길이 나타나고 우측은 베틀굴을 경유하여 구정봉으로 이어지고 직진하는 오름길은 도갑사 방향으로 바로 이어진다.
베틀굴을 보고 가기 위해 좌측으로 0.1km 들어서면 구정봉 아래 여자의 중요 부분과 흡사한 베틀굴과 만난다.
옛날에 전쟁을 피해 근방에 있는 여성들이 올라와 베을 짰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며 항상 축축하게 습기가 차 있다 한다.
 그 위가 구정봉으로  100m을 올라서면 된다. 정상은 바위로 되어 있는데 물이 마르지 않는 9개의 웅덩이로 되어  있는데 가뭄이 엄청 심해 바위 웅덩이의 물이 모두 말라 있다.
구정봉 정상에서 올라 간 바위 틈을 다시 내려오면 국보144호인 마애여래좌상 갈림길로 500m의 거리를 두고 있서 미황재로 하산을 서두른다.
도갑사로 이어지는 산행길은 능선을 타는 것이 아니라 산허리를 따라 돌아가게 되어 있다. 영산강에서 반짝이는 물빛을 뒤로하고 산불 발생으로 인해 자연생태계가 바뀌어 버리고
이제는가을철에 역광을 받아 빛나는 억새로 이름을 날리며 월출산의 새로운 명소가 된 미황재,
이곳은 또 무위사로 하산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비법정 탐방로로 폐쇄가 되어 있고 산행길은 홍계골을 따라 내려선다. 지루한 하산길로 그래도 흙길로 이지고 신선봉에서 내려서는 계곡을 건너는 지점에 작은 샘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있다. 계곡을 따라 내려서는 하산길은 다시 계곡을 건너고 도선수미비를 지나면 도갑사 절집이다. 구정봉에서 60분.
승용차를 이용하면 남해고속도로~순천IC~여수 벌교 17번 국도~벌교 낙안읍성 민속마을 2번 국도~보성~장흥~강진~광주 영암방향~풀치터널~월출산 천황사쪽으로 빠진다. 날머리 도갑사에서 들머리 천황사 입구까지 택시(011-608-1733, 018-364-6666)를 타면 된다.
천황사 입구 월출산 국립공원의 들머리로 산세가 예사롭지 않다.








조각상이 있는 자연 관찰로
천황사와 바람골 갈림길로 많은 사람들이 천황사 방향으로 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화재로 인해 소실된후 최근에 지어진 천황사 대웅전의 모습으로 초라하다.

상대적으로 한적한 바람골 계곡
철계단 위에 걸린 월출산의 명물인 구름다리




구름다리
예전의 구름다리 모습으로 현재의 모습과 비교가 된다.
일렬로 줄을 서서 올라야 하는 사자봉 철계단길













통천문













남근바위


아래가 바람재로 좌측으로 경포대로 하산을 할 수 있다.

바람재


구정봉


베틀굴
구정봉 정상:구정봉은 월출산의 제2봉으로 동굴 같은 좁은 길을 올라서면 장정50여명은 거뜬히
앉을 수 있는 넓은 암반과 만나다. 구정봉 정상으로 편편한 바위위에는  항상 물이
마르지 않는 9마리의 용이 살았다하여 구정봉으로 불리며 옛날 구림에 살던 동차진이란
사람이 이곳에서 하늘을 향해 오만과 만용을 부리다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9번의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한다.





미황재

도갑사 도선수미비

도갑사로 최근에 대웅전을 새로 건립하였다.
불사이전의 도갑사 대웅전 모습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금정산장 산장지기 달석 서재석님
영원한 산사람으로 항상 꽁지머리에 호남형인 우리네 아저씨 같은 인상입니다.
형님과 알은지도 벌써 30년이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대학 산악부에서 회장님을 따라 대륙산악회에서 처음 만나 뵈었는데
 벌써 강산을 세번 바꾸는 세월이 흘러갑니다.

그때는 대학 초년생이고 형님도 혈기왕성한 서로의 모습인데
지금은 검은색의 머리카락에 서리가 어느듯 내리고
서로의 모습이 변한 것 같습니다.

항상 그모습으로 웃음을 잃지 않은 형님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베틀굴

남근바위

사실 산행을 하다 보면 자연의 오묘함에 감탄을 자아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고래 모양의 고래바위, 기차바위등 그사물의 모양에 따라
새로운 이름이 붙게 된다. 여기 월출산에도 남성의 심볼과 여성의 중요 부분이 서로 마주 보고 같은 능선으로 배열 되어 있어 음양의 조화가 신기할 따름이다.
월출산 정상을 지나 바람재로 내려서는 능선상에 솟은 남근석은 남성을 상징하는 바위로 봄이 되면 남근바위 상단에 철쭉 꽃이 피어 생명의 탄생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와 마주 보고 있는 도갑사 산행길의 구정봉 아래 여근석인 베틀굴은 임진왜란 대 이부근의 아낙네들이 난을 피해 올라와 이곳에서 베를 짰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 입니다.
굴의 깊이는 10m정도이며 굴속에는 항상 음수가 고여 있다하여 음굴
또는 음혈이라 부르기도 한다합니다.지난 일욜 산행시에도 가뭄으로 먼지 펄펄 날린 산행길과는 달리 베틀굴 바닥은 습기가 차 있어 바닥이 축축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그래서 굴 내부의 모습이 여성의 중요부분인 국부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합니다.




남근바의 꼭데기에 철쭉 나무가 보인다. 저 위에 자리 잡은 자연의 신비를 볼 수 있다.

남근석의 석문을 빠져 나와서 본 뒤돌아 본 모습

다른 각도에서 본 남근석의 모습으로 남근석은 천황봉에서 바람재 방향으로 올때만 남근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계단을 올라 우측으로 돌아가면 월출산의 명물인 남근바위가 나타나고 그 우측으로 큰 바위가 여근석인 베틀바위가 있는 구정봉이다.


베틀굴 안에서 밖으로 본 모습

베틀굴 내부의 모습

베틀굴이 있는 구정봉으로 사진상 가운데 소나무가 있는 곳이 베틀굴이 있는 곳이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월출산 도갑사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79호
소재지: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도갑사는 통일신라말 헌강왕 6년인 880년에 도선국사(826~898)가 창건을 하였다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 도갑사는 번창하였서며 영암 츨신인 수미왕사가 1457년에서 1464년 가지 도갑사를 대대적으로 중창을 하여 966칸의 대가람으로 변모를 하였다 한다. 1597년인 정유재란때 도갑사는 화재로 인해 많은문화재가 불에타 소실되는 불운을 맞이하였다.
그 후에도 중창을 거듭하였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역시 도갑사는 잿더미가 되고 만다. 그래서 도갑사는 뚜렷한 문화재 하나 남아 있는 것은 없지만








도갑사 해탈문(解脫門)
국보 제50호
소재지;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해탈문은 속세를 벗어나 불교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 이문을 지나면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 근심 없는 부처님의 품안에 들어선다는 의미이다. 도갑사의 해탈문은 신라시대 승려인 도선국사에 창건 되었고 고려 말에 크게 증흥 되었다 한다. 이 해탈문은 1960년에 해체하여 수리를 할때 발견 된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 성종 4년인 1473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석조 기단 위에 중앙칸은 통로가 되고 좌우 한 칸씩에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기둥은 약하게 배흘림을 한 기둥으로 사용 되었고전체적인 건축양식은 경북 영주 부석사 조사당과  유사하다. 기둥 위의 구조가 주심포식(하나의 기둥위에 하나의 공포만을 짜 올린 양식)과 다포식(기둥과 기둥사이에도 짜 올린 양식)
양식이 엮인 형태로 국내에서는 유래가 드문 건축물이다.









1995년~1999년 까지 도갑사는 네 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옛 가람의 배치를 확인하고 현재는 복원불사를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대웅전 뒤편 건물지 발굴 조사에서 백제시대 기와편이 출토되어 통일신라시대 이전 부터 이미 사찰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도갑사 석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0호
소재지;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석조는 큰 돌의 내부를 파서 물을 담아 사용하거나 곡물을 씻는데 쓰는 일종의 돌그릇이다.
물을 채워 연꽃을 심는 그릇으로 사용 되기도 하였서며 이 석조는 화강암을 재료로 하여 만든 작은 통나무배와 같은 모양으로 아래부분에 배수구를 갖추었다.
길이 467cm, 폭116cm, 높이 85cm.
강희 21년 임술이라 새겨진 글자가 확인 됨에 따라 조선 숙종 8년인 1682년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도갑사 오층석탑
보물 제1433호
소재지: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도갑사 탑은 5층으로 돌을 깍고  다듬어서 만든 탑으로 기단과 몸체에
해당하는 탑신, 탑의 몸체들을 덮고 있는 지붕 모양의 옥개석과 탑의 머리 부분을 장식하는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탑 전체를 받치는 즉 기단을 만들기 위해 쌓은 돌인 지대석과 하나의 층으로 된 기단부의 면석 즉 기단의 받침돌과 포개어 얹는 납작한 돌 사이에 대는 넓은 돌은 4장의 널찍한 돌로 짜 맞추었다.
1층에서 4층으로 올라 갈 수록 각층의 몸체들이 낮아져 안정감이 있고 한층의 몸체들은 보통 하나의 돌로 처리를 하는 데 4자의 평돌로 짜 맞춘 것이 특이하다. 조성시기는 고려시대 초기로 보고 있다.





영암 월출산의 대웅전이 최근 복원 불사를 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 영암 월출산 도갑사(주지 월우스님)가 550여 년 만에 대웅보전을 중층으로 복원하고 지난 11일 낙성 봉행하였다 합니다. 이 사진은 4월 19일 촬영한 사진 입니다.






도갑사 수미왕사비(道岬寺 守眉王師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52호
소재지: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수미왕사비는 영암 출신 수미왕사의 활동과 자취를 기록한 비로 수미왕사는 조선 세조 때의 승려로 13세에 도갑사에 출가를 하였다. 법주사 등지에서 경전공부후  황폐화 된 도갑사로 돌아와 도갑사 중창에노력하였다. 그리고 한문으로 된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간경도감에서 불경을 번역하였고 세조는 그에게 묘각(妙覺)이란 호를 내리고 왕사로 책봉하였다 한다.






수미왕사비는 돌거북인 귀부와 비의 몸체 그리고 용을 아로 새긴 비의 머리부분인 이수가 잘 남아 있다.
돌거북의 머리는 특이하게 인상을 찌푸린 용의 얼굴을 형상화 하였고 목이 짧아 등 껍질이 두꺼워 보인다. 이수에는 꽃잎처럼 화사하게 피어오른 구름 무늬와 서러 어굴을 마주 보고 있는 두마리의 용이 섬세하게새겨져 있다.
비의 총 높이는 3.34m, 비신의 높이 2m, 비신의 폭 1.08m, 비신의 두께 21cm. 숙종 15년인 1689년에 만들어
19년인 1693년에 세웠고 고려 전기의 양식과 비슷하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아직 이른 봄이라 고목은 새싹을 다 피우지 못하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서 있었다.

봄이면 새잎을 달고 오고가는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독차지 할 것 같다. 가지가 좌우로 뻗어 여름철에는 넓은 그늘을 만들어 쉼터 역활을 할 것이며 도갑사를 450년 동안 지켜온 터줏대감이 이 팽나무이다.
허리둘레는 장골 둘이서 양팔을 뻗어 겨우 잡을 수 있는 4.4m이며 팽나무의 높이 또한 8m로 낮지만 풍겨오는 무게감은 보는 이를 압도 하고도 남는다.  
1924년 12월 3일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고 위치는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58-2번지 도갑사 상가건물 한켠에 서 있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고목 답게 가지를 받이는 기둥이 여러개 서 있어 세월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도갑사 도선수미비(道岬寺 道詵守眉碑)
보물1395호

위치: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이비석은 도갑사 도선 수미비로 도갑사를 중창한 수미선사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이비를 만드는데 17년이 소요 되었다하며 조선효종 4년인 1653년에 완성 되었다 한다. 빗돌을 받치고 있는 돌 거북이는 여의주를 입에 물고 고개를 절쪽으로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며 돌거북의 등 가장자리에 말린 연꽃잎이 세겨져 있다. 용의 모습을 새긴 비의 머리인 이수는 두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항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구름이나 연꽃잎이 아닌 연잎으로 비의 무게를 받치고 있는 것은 조선시대의 양식으로 볼 수 있다한다. 비의 높이는 4.8m, 폭은 1.4m이며 1500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비석의 몸체 앞뒤로는 글씨가 새겨지고 양쪽 면은 용의 모습이 새겨져 더욱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도갑사 절에서 미륵전 방향으로 향하는 월출산 미황재 방향으로 오르는 길에 계곡을 건너면 기와를 인 팔작지붕을 만날 수 있다. 이 곳이 도선수미비로 수미선사의 행적을 기록하여 놓은 비석으로 보통 귀부와 이수만 남고 빗돌은 파괴 된 경우가 많은데 수미비는 깨끗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자주괴불주머니

현호색과로 분류되며 자주색은 몇해 전에 전라도 마이산에서 처음 본 기억이
있어 이번 월출산의 바람골 계곡에서 만났습니다.
 폭포옆에서 시들어가는 모습이 애처러워 몇장 담아 왔는데
야생화는 꽃을 피울 시기와 돌아 갈 시기를 정확히 아는 것 같습니다.
몇일 못 보면 떨어져 버리는 꽃잎.
전체적으로 자주색도 있지만 전라도 산은 머리 부분은 자주색이고 몸통은 흰색을 보이는 게 다른 지방의 자주괴물주머니와 틀리는 것 같습니다.

주로 그늘지고 땅이 촉촉하게 습기가 있는 곳에서 많은 것을 보니 말입니다.
양귀비과의 자주괴불주머니는 민간요법으로 이용을 하는데 피부병에 잘 듯는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게 산괴불주머니가 있습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추운 겨울날 피는 꽃은 드물다. 예를 들면 풀꽃은 복수초, 바람꽃등이 추운 겨울 바람과 눈보라를 뚫어며 꽃을 피운다.
그러나  사실상 겨울 철에 따뜻한 남쪽에서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다. 동백꽃으로 주로 남부 해안지방과 서해 해안지방에 주로 분포를 하는데  그중 선운사 동백꽃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어며  꽃중의 꽃으로 친다. 
야생화는 흔히 곤충인 벌이나 나비등이 수분을 하지만 동백꽃은 겨울에 곤충들이 수분을 하지 못해 특이하게도새에게 도움을 받는데 동박새로 겨울철 동백나무에 수분을 하며 사진가들에게는 한폭의 화조도를 선사한다. 
동백나무 아래에 가면 떨어진 동백꽃을 볼 수 있는데 시들어서 떨어 진 것이 아니라 가장 아름 다울 때 동백나무에서 떨어져 여타 꽃나무, 야생화와 다르다. 떠날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떨어지는 동백꽃을 최근 산행에서 동백나무에 두송이가 걸린 것을 보고 아쉬운 마음에 담아 봤습니다. 떠날때가 가장 아름다운 붉은 동백꽃입니다.







동백꽃의 뒷 모습입니다. 정갈한 여인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얼짱이란?. 말이 있다.
얼굴이 예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럼 들꽃인 야생화에도 얼짱이란 모델이 있을 까.

여러 꽃들이 있지만 얼레지꽃도 얼짱라인에 들어가는 것 같다.  
겹쳐난 잎 사이로 줄기가 올라오고 그 위로 보라색을 띤 여섯장의 꽃잎이 뒤로 말려 올라가 흡사 여성의 족두리를 한 것 처럼 정갈한 여인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습기가 많은 산이면 볼 수 있는 얼레지
최근 야생화 답사에 많이 등한시 한 것 같다.
올해 영암 월출산에서 처음 봤서니 말이다.
얼짱 얼레지의 아름 다운  모습에 푹 빠져 봄니다.

강원도에 가니 얼레지가 건조된 상태에서
나물로 판매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레지도 먹는 다는 사실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다음 백과 사전을 보시면 얼레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 되어 있습니다..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5a1533a




(다음백과 사전에서 정리)키는 보통 30㎝ 정도이며 잎은 2장으로 마주보게 달린다. 그 사이 꽃자루에  보라색의 한 송이 꽃을 볼 수 있다 얼레지는 땅으로 머리를 숙이고 잎에는 얼룩인 무늬가 생기거나 주름이 지기도 한다. 꽃 잎은 6장으로 진한 자주색으로 W 형의 무늬가 있다.   봄을 알리는 식물로 알려져 있어며 4월에  꽃을 피운다.
봄철에 어린 잎을 나물로 먹는데 초가을에는 비늘줄기를  캐서 이질 구토 도는 강장제로도 사용을 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부산의 금정산하면 서울의 북한산, 대구의 팔공산,광주의 무등산 처럼 수식어로 따라 붙는 산이름이다.
그 만큼 금정산하면 부산 사람에게는 야구와 함께 떼어 생각 할 수 없는 명산이다. 그 산아래는 사실 많은 산길이 조성되어 있고 집앞을 나서면 산길로 연결되는 거미줄 같은 등산로로 봄철에는 더욱 붐비는 부산사람에게는 고마운 금정산이다.
평일 휴일날 오후에 늦게 출발한 금정산 산행, 코스는 별 생각 없이 호포로
지하철을 타고 간다. 호포역에서 나오면 바로 우측으로 주차장으로 가는 통로와 연결된다.
그 통로 한켠에 금정산을 안내하는 대형 지도가 걸려 있다. 여기서 눈요기 삼아 지도를 보고 난후 호포역사를 나오면
우측으로 지하 차도와 만난다. 
사실 부산에서 호포까지만 나가도 시골의 전원에 온 기분이 든다.
앞으로는 낙동강이 흘러가고 그 뒤로 김해 동신어산이 펼쳐지고 우측으로는 양산의 물금과 그 앞 작은 동산인 증산으로 신라와 가야가 대 격전을 벌린 장소로 유명하다,
지금도 증산산성의 흔적을 볼 수 있어며 그 만큼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호포가 최근에 새로운 들머리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산행경로는 호포역~신기마을 금호사~임도~낙동정맥갈림길~고당봉~750m 스텐 사각~미륵사~금정산장~북문~금성동순 산행시간은 4시간정도.

호포역사 우측에서 호포새마을, 등산로(고당봉가는길),
부산교통공사가는길의 지하 통로를 빠져나와 시멘트 길을 걸어 펜스가 끝나는 지점이 나오면 갈림길 우측 다리를 건너 올라서도 고당봉으로 이어지지만 이번에는 포장길을 직진하여 신기마을로 올라가야 한다.
10여분이면 새로생겼다는 뜻의 신기마을인 금호사 제실 앞으로 올라서면 호포농원가는 길, 농원 앞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면 된다.  
소나무 숲길의 오솔길 입구에는 등산로 정비및 숲가꾸기 사업을 동면 면사무소에서 실시하고 있다는 안내문구를 볼 수 있다.
그 한켠에는 제선충을 알리는 글귀와 반출을 금한다는 죽은 나무들을 숙성시키는 흔적도 볼 수 있다. 예전에는 논밭으로 사용 되었던 습지지역을 거슬러 오르면 완연한 봄이 온듯 산벗꽃들이 한창으로 꽃비를  뿌리고 있다.
제잘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올라서니 이번에는 전기톱 소리가 요란하게 산속을 흔든다. 아마 등산로 정비 사업을 하는 분인들인것 같다.  
절터의 흔적에 자란 산죽도 정비사업의 벌초기계에 힘 없이 서러지고 무엇을 위한 정비사업인지 의구심이 든다.
 
산길은 임도에 올라선다. 금정산 산허리를 가른 이 임도에서 우측으로 30m 걸어가면 이정표가 서 있다.
금정산 정상 가는 길1.7km, 직진하면 호포매운탕마을 4.2km, 뒤쪽은 가산 4km,  좌측 좌측 금정상 정상 가는 길을 따라 올라 50m 뒤에 갈림길, 두길 모두 금정산으로 오른 는길로 우측 계곡길이 100m 더 길다.
우측 계곡길로 오르기로 하고 게곡을 따라 오른다. 바닥에는 돌들이 깔려 있고 계곡은 좁아지면서 경사를 더 한다. 발아래는 현호색, 앵초가 봄을 알리며 피기 시작을 한다. 머리를 들어보니 계곡의 품이 갑자기 넓어 지고 키큰 소나무가 서 있다.
큰 바위들이 넓게 분포하고 있는 곳을 지나니 갈림길, 우측은 화명 금곡동에서 올라오는 길, 금정산 정상은 좌측으로 1.1km 더 올라가야 한다.
갈림길에서 1.분 뒤 기도터의 흔적과 만난다. 금정산에 산재해 있는 기도터가 모두 헐리고 그 집터의 자리에 지금 쓰레기장이 착각 될 만큼 많은 물건들이 등산로 옆에 널부러져 있어 이마 살을 찌푸리게 한다.
상류라 그런지 계곡은 가뭄으로 물소리도 죽인지 오래고 좌측으로는 낮은 산죽이 펼쳐진다. 다시 10여분 뒤먄 갈림길로 머리를 들면 고당봉 정상이 서 있다.
좌측으로는 호포새동네에서 올라오는 길, 우측은 금정산 정상 방향, 우측으로 10m 뒤 넓은 임도급의 길과 만난다.
계석으로 내려가는 길로 좌측 금정산 정상 0.4km 이정표를 따라간다. 5분이면 사거리 길인 낙동정맥길로 매봉산에서 내려온 낙동정맥길이 여기서 쳐 받아 올라 금정산의 정점인 고당봉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다. 
일명 고당봉, 장군봉의 갈림길로 넘어서면 범어사 3.4km 방향, 좌측은 철탑이 서 있고 호포 또는 장군봉, 고당봉은 우측길로 0.3km의 지척에 있다.
잣나무 조림지에서 산길은 정상을 향해 쳐 받아 오른다. 고당봉의 장벽을 실감 할 수 있다. 지금은 고당봉 정상 오른길에 철 계단과 달팽이 계단을 설치하여 누구나 쉽게 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지만 설치 이전에는 정맥길의 고당봉 오름길은 크랙을 올라서야만 되는 위험한 곳이 한 곳 있었다.
계단 설치 후 말들이 많은 금정산 고당봉이였지만 지금은 잠잠함 상태가 되었다.  바위를 잡고 올라서면 계단길, 달팽이 계단을 올라서면 고당봉 정상으로 올라서는 임릉길, 우측으로 50m 바위를 잡고 가면 고당봉 정상을 알리는 정상석이 서 있다. 15분 소요. 

사실상 낙동정맥의 끝 지점으로 지금은 몰운대 까지 이어가지만 사실상의 낙동정맥 끝지점이다. 여기서 하산길은 산신할미를 모신 전각이 있는 동문5km,북문0.8km 방향과 화명동 쪽으로 내려서는 능선길이다.
미륵사를 가기 위해 정상석을 지나 바위를 내려선다. 요리조리 바위 틈을 빠져 내려서면 화명동으로 내려서는 능선에 다다른다. 이제는 또 다시 넓은 길, 이 길을 따라 내려서면 미륵사로 갈 수 있다.  
금곡동 4.5km, 화명동 7.9km 이정표를 뒤로하고 금정산성의 흔적을 따라간다. 교육원에서 세운 750m 스텐 사각봉을 뒤러하고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 있어 금정산을 붉게 물들인다. 칠바위 북문1.1km 갈림길 에서 직진하면 미륵암 암봉의 끝지점에 설 수 있다. 기존의 등산로 상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면 된다.
발아래는 천길 낭떨어지이며 여기서 보는 금정산 일원의 조망 또한 장관이다. 돌아나와  내려서면 좌측으로 미륵암 갈림길이다.
 종이를 코팅한 미륵사 안내판을 볼 수 있다. 직지하면  화명동으로 하산을 할 수 있지만 급한 길을 따라 내려서서 미륵사로   들어선다. 원효대사가 창건을 하였다 하며 임진 왜란 때 부산 앞바다에 떠 있던 왜군 5만 병선을 물리치고 적장의 목을 베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서려 있는 호국성지이다. 염화전 뒤로 서 있는 미륵바위와 좌선바위가 예사롭지 않은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다가오는 부처님오신날이 몇일 남지 않아 모두들 바쁜 것 같다. 잠시 절 구경을 하고 미륵사를 나와 금정산장이 있는 북문 가는 길을 따라간다. 오랜만에 보는 산장 관리인 서재석 형님을 보기 위함이다. 여기서 하산은 북문을 거쳐 범어사 또는 산성마을 인 금성동으로 하산을 하면 된다.



  


호포의 신기마을에 있는 금호사 제실을 지나면  만나는 길, 이길을 따르다 좌측으로 들어서야 한다.

금호사제실

예전에는 농사를 지었을 것 같은 흔적이 남아 있는 습지젹으로 산 벗꽃이 떨어지는 모습이 꽃비가 떨어지는 것 처럼 보였다.


임도 갈림길,

앵초

고당봉을 볼 수 있는 지점


낙동정맥의 사거리 갈림길 안부


우측으로 돌아보면 고당봉의 바위장벽을 볼 수 있다. 이 중간으로 올라가야 하는 길이 낙동정맥길이다. 자세히 보면 목제계단과 달팽이 계단을 찾을 수 있다.

목제게단과 달팽이 계단


고당봉 바위 능선에 올라 북문으로 내려서는 나무계단길, 중간의 붉은 지붕이 고당할미를 모신 전각 


고당봉정상



연수원에서 설치한 750m 스텐 사각 기둥

산성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당봉으로 화명동 능선에서 본 모습


미륵사


금정산장

북문 사적 제215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숙종29년 1703년에 국방방호의 묵적을 두고 돌로 쌓은 산성이다.
성벽의 길이는 약17km, 높이는 1.5~3m에 국내산성 가운데 가장 큰 성이다.





연수원 가는 길

중성의 석문


금성동으로 산성마을이라고도 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부산의 삼광사에서 오는 5월2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 하여 설치한 조형물입니다. 용을 형상화한 모습으로 시간이 되면 입안에서 불을 뿜고 다리도 움직이고 하는 것이 흡사 살아 있는 용이 부산역 광장에 나타난 것 같았습니다.
용은 불교에서 과연 어떤 존재일까?.
흔히 최고의 지존을 두고 하는 말로  예로 부터 용을 지칭하여 왔다.
임금의 얼굴을 용안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금정산은 부산의 진산이다 부산과 양산을 가르는 최고봉인 고당봉에서

동서남북으로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어 부산 사람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이 금정산에 한때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민간신앙 또는 기도처로 금정산이 산불과 황폐화로 많은 노출이 되어 왔었다.
동래구나 금정구에서는 많은 등산객들로 인해 기도처를 볼 수 없지만
호포 쪽에서는기도처가 많이 남아 있었다.  
구청에서 대대적인 단속으로 근래에 와서 기도처등 민간신앙의 은신처들은 많이 정리가 되었지만 그의 쓰레기 들이 온 산을 황폐화 시켜 문제가 되고 있다.
지난 일요일 찾은 금정산은 호포에서 신기마을을 거쳐 고당봉으로 오르는 등산로 상에서 본 기도터의 흔적이다.
가스렌지며 담요등 온갖 쓰레기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추위를 피하기 위해 방구들을 만들어 군불을 땐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쓰레기장을 보는 느낌이었다.
기도처를 단속을 하면서 사람만 내려 보내고 건물을 철거 후 그 흔적까지 깨끗이 정리를
하여야 하는데 쓰레기를 그대로 방치하니문제이다.
봄철에 행락객, 등산객들로 붐비는 등산로상에서  보는 쓰레기가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금정산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니 지자체의 빠른 청소를 기대해본다.





지난 일요일 맑은 날씨로 많은 등산객들이 금정산 고당봉을 차아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금정산 미륵사

금정산 북문옆에서 한적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가면 미륵사와 만난다.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18년인 678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한다.
미륵사는 독특한 모습을 한 암봉을 뒤로 하고 있다.
염화전 뒷쪽의 큰 암봉이 미륵봉으로 미륵봉의 암봉이 병풍을 두른듯이
솟아 있는 그 아래 즉 미륵사가 위치하고 있다.
미륵사는 창건때 부터 산문이 없다 들어서는 입구 양쪽으로 큰 바위가 산문을 대신하며
노적가리 같은 모습이라하여 끼니 걱정을 안해도 된다는 사찰이다.
 범어사는 의상대사가 미륵사는 원효대사가 각각 창건을 하였는데
미륵사와 함께하는 원효대사의 일화는 유명하다.
지금도 미륵봉 중간의 바위 암반에 위치한 독성각 앞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원효대사가 호리병 다섯개를 구해 왜구 5만 병선을 물리치고 왜구 첩자를 유인하기 위해
장군기를 꽂았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그 구멍이다.
"모든 것에 꺼리낌 없는 사람이  번뇌에서 벗어 난다"는 가르침으로  유명하며
미륵불과 독성불을 모신 기도도량으로 알려저 있다. 
미륵사는 절 중앙에 염화전을 모시고 그 뒷편인 미륵봉 중간에
큰 바위들이 얽켜 있는 좌선바위를 볼 수 있다.  엉켜 있는 바위들이 해가 지고 난후
그 틈새가 보이지 않을 때 쯤 좌선하는 스님의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한다...
좌선바위 뒤인 즉 미륵봉이 미륵불이라 하면 그 아래 좌선을 한 스님의 모습을 한 좌선바위가 미륵불을 향해
좌선을 한 모습이라   함께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그 아래 원효대사가 미륵암을 창건하였고
사찰이름인 미륵암도 여기서 유래 되었다 한다.



염화전 뒤로 미륵불을 닮았다는 미륵봉과 바위들이 서로 엉켜 있는 중앙의 좌선바위를 볼 수 있다.

미륵사는 대웅전 대신 염화전을 중앙에 배치를 하였는데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1952년에 지었다. 내부에는 1985년에 조성한 석가삼존불은 중앙에 석가여래와 좌우로 미륵보살과 문수보살을 안치하였다.
1974년에 조성한 후불탱이 중앙에 모서져 있고 신중탱과 지장탱등 모두 최근에 조성을 하였고 석정스님의 작품이다.

염화전 내부의 모습


칠성각


칠성각에서 본 미륵사 전경

오백전

오백전 내부




현재 독성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 보면 작은 샘터가 있다. 이 샘터는 쌀바위의 전설이 전해오는데
매일 아침 작은 구멍에서 한톨 한톨 쌀이 떨어져 스님이 이 쌀로 끼니를 이었다 한다. 그런데 사미승이 구멍을 크게 하면 한거번에 더 많은 쌀이
나오라고 구멍을 작대기로 쑤신뒤 부터 쌀은 나오지 않고 물이 나왔다 한다. 현재도 독성각아래인 미륵 바위아래에 작은 샘터가 있다.

독성각

독성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바위밑의 모습

 
독성각 처마 끝 모서리에걸린 자연 암벽에 미륵바위의 장삼자락을 양각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독성존불의 본 이름은 나반존자로서 미륵존불이 출현하실때 까지
천태산에서 선정삼매에 들어 있다가 미륵존불이 세상으로 나오시면  좌보처가 되어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님으로 현재도 독성각 입구 우측에 그 흔적이 뚜렸하다.



장군기를 꽂았다는 독성각 앞의 구멍.
원효대사는 미륵암에 주석을 하며 미륵삼부경중 상생경종요을 집필하였다하며 왜적 5만병선이 동래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첩자를 육지로 올려 보냈는데 미륵사에 머물고 있던 원효대사가 사미승에게 호리병 5개를 구해오게하여  탑앞네 나란히 세운뒤 가장 높은 바위에
신라 장군기를 꽂았다 한다. 그 장군기를 보고 두명의 첩자가 미륵암까지 올라와
대사는 호리병으로 신통력을 부려  첩자의 목을 졸랐다. 첩자들이 살려 달라고 하자 호리병 3개를 적장의 대장에게 주라며 돌려 보냈다. 화가난 적장은 호리병을 단칼에 내리쳤고 그 순간 적장은 그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다 한다.









염화전의 문살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개인적으로 현호색을 보면 날엽한 물고기가 수초들 사잇로 다니는 느낌을 받는 야생화이며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모습이 무지 귀엽습니다...  몸은 멸치 같은 종류이지만 입을 벌린 상어의 죠스 같은 모습입니다.
부산 호포의 산행길을 따라 올라가면 만나는 봄꽃이다. 
현호색의 종류로는 국내에서 보면 강원도 경기도등에서 자라는 한국특산의 점현호색, 울릉도에서 자라는 섬현호색, 빗살현호색,칼퀴현호색, 댓잎현호색, 현호색등을 볼 수 있다. 현호색의 덩이줄기에는 코리달린, 푸마린등일 포함되어 있어 정열제, 진통제, 진경제등 의약품의 원료로서 한약재로 사용을 한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백과사전의 현호색을 함보세요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5h0991a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집떠나면 고생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금정산 산행중에 모 사찰의 화단에서 본 동강 할미꽃이다.
강원도 정선의 동강 바위벽에 터를 잡고 있어야 할 동강 할미꽃이 금정산 해발 500m대의 사찰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것을 보니 측은 한 생각이 든다 ...생각없는 누군가의 무단 채취로 이곳으로 옮겨와 다행이 죽지 않고 뿌리를 내려 다행이지만 동강 할미꽃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그의 이름을 발하듯이 동강에서 꽃을 피워야 동강 할미꽃인데 이제는 이놈은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야생화가 아닌  원예화로 되어버린 동강 할미꽃. 그래도 서식 환경과 기후가 비슷한 것인지 죽지 않고 뿌리를 내려 꽃을 피웠서니, 다음해도 그 다음해도 죽지 않고 뿌리를 내려 꼭 잘 살아주길 빌 분이다.




동강할미꽃:강원도 정선의 동강 바위벽에 자라는 한국특산으로 여러해살이풀. 몸전체이 흰털이 할미꽃보다  많으며 보라색 계통의 색상이며 꽃밥은 노란색이다. 일반 할미꽃은 꽃봉우리를 아래로 숙이고 있지만 동강 할미꽃 은 하늘을 쳐다 보고 있다. 크기는 15cm정도이며 4월에 꽃이핀다.






모사찰의 화단에 터를 잡은 동강할미꽃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수욜 금정산 산행 중에 만난 앵초 입니다. 봄은 벌써 우리 들 곁으로 와 있는 것 같습니다.
호포에서 오르는 등산로상에서 찾을 수 있었던 앵초이기에 반가운 마음에 몆장 담아 왔습니다.
산행을 하다 보면 많은 들꽃들을 만나게 됩니다. 영남 알프스 일원에서는 쉽게 야생화 들을 볼 수 있는데 집주변의 산인 금정산에도 청초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꽃들이 많이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습니다.  앵초 또한  꽃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일부 몰지각(?) 한 분들로 인해 관상용으로 많이 채취가 된다합니다. 이 앵초는 바로 등산로 옆에 있어 쉽게 볼 수 가 있었는데 내년  그다음해도 생명력을 이어 아름다운 꽃들을 피웠서면 합니다. 
*앵초=앵초는 큰앵초 설앵초 앵초 그리고 북부지방에 있는 돌앵초, 좀설앵초가 있다 합니다. 앵초는 인근의 습지가 많은 낮은 곳에 많이 볼 수 있는 꽃으로 4월에 꽃을 피우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크기는 15cm정도




앵초 다음 백과 사전에 상세하게 설명 되어 있습니다.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5a0528a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천마산~옥녀봉~시약산~구덕산~엄광산 산행


사진상의 중앙 보이는 다리가 영도대교, 그 좌측으로 부산대교도 확인이 된다. 영도의 한진조선과 크고 작은 조선소, 그 좌측으로 봉래산 산줄기와 왼쪽으로 이기대의 용호동과 신선대 컨테이너 하치장도 볼 수 있다.

천마바위에서 본 남항대교 모습과 봉래산, 태종산도 볼 수 있다, 발아래 남부민동의 모습이 확인된다.

발아래 파란지붕을 이고 있는 건물이 수산센타이며 영도대교 자갈치시장의 모습도 확인 할 수 있다.

부산의 산에는 흔히 구덕산 승학산은 빠지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구덕산을 남동으로 잇는 엄광산과 천마산은 부산의 보석같은 산길이다.
흔히 동네 뒷산으로 인식되는 만큼 부산 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만큼 등산로 또한 다양하게 뚫여 있다. 숫제 집에서 출발하여 산으로 들어서면 들머리라 할 만큼 다양한 산길이 거미줄 처럼 얽혀 있다. 그래서 집인 천마산 아래 등대시장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수정동으로 마무리를 하는 산행 경로를 택했다. 




느지막한 오후 1시에 집을 나서 등대시장을 지나 골목길을 오르면 흔히 송도 윗길, 다시 그위의 산복도로인 천왕사에서 산행을 시작하였다. 환히정사란 옛이름과 조계종의 사찰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최근의 작은 규모의 절집이다. 절안으로 들어서 오르면 지금 산벗꽃이 한창이다. 흰 꽃잎을 떨구고 있는 모습에 온산이 마치 물안개에 젖어 있는 느낌이다. 천왕사를 지나면 천마산 산허리를 횡단하는 산길과 만난다. 산길이 뚜렷한 것으로 보아 많은 주민이 찾는 것 같다.

좌측으로 돌아가면 해광사 앞 갈림길로 임도와 만난다. 임도를 따라 왼쪽으로 가도 되지만 해광사 뒷편인 산길을
택해 오른다. 두 길 다 체육공원에서 서로 만난다.  천마바위를 가기 위해서는 체육공원릏 가로 질러 조각공원을 따라가면 철탑이 서 있는 천마바위에 올라선다.
여기서 보는 조망권은 최고로 친다. 자갈치와 남항, 북항 영도 봉래산, 태종산, 멀리 신선대 부두, 이기대등 부산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최근에 만들어진 남항대교와 광안대교의 모습 또한 부산의 풍물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천마바위의 안내판에는  바위 위에 크고 작은 말발굽 같은 구덩이가 여럿 있는데 하늘에서 용마가 내려와 이자리에서 바위를 박차고 날아 올라 대마도로 건너 갔다하며 움푹파인 그 웅덩이가 말이 바위를 박차고 오를 때 생긴 발자국이라 한다. 영도  초장동등 처럼 신라시대에 천마산에도 군사용의 말을 키우던 목마장이 있어 절영도(현영도)로 옮겨 간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바위가 60~70년 대에는 한때 부산 산꾼들의 암벽훈련장으로도 애용을 하였다한다.

천마바위를 뒤로 하고 다시 체육공원을 가로 질러 정면의 계단을 따라 오르면 천마산의 정상인 천마탑으로 오를 수 있다. 작은 체육공원을 지나면 돌탑이 서 있는 보우리로 석성봉수대가 위치를 해 있었다 하며 현재는 1971년 천마산악회에서 주변의 돌을 모아 천마탑을 조성하였다. 석성봉수대는 황령산과 장산의 간비오산의 봉수대와 함께 1461년인 세종 7년 그 이전 부터 존재해 왔던 것을 영조때인 1725년 동래부사였던 이중협의 건의에 구봉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300년 동안 봉수대의 역활을 한 부산의 해안 전초기지였음을 볼 수 있다.


천마탑에서 우측 송신탑이 서 있는 봉우리를 오르게 된다. 일명 천마산 동봉으로 여기서 보는 모습 또한 천마바위에 버금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진행 할 옥녀봉과 시약산, 구덕산, 엄광산의 모습하며 자갈치 앞바다 쾌속선의 물보라를 가까이서 볼 수 도 있다. 현재는 진달래가 한창이라 사진의 밑그림을 도와준다.
내려가는 산길을 지나면 임도, 우측은 다시 체육공원으로 갈 수 있고, 좌측으로 능선을 따라가면 체육공원를 지나 감정초등학교가 있는 감천고개에 내려선다. 이고개는 토성동의 부산대학병원과 감천화력발전소를 연결하는 도로가 뚫여 있다. 옥녀봉으로 가는 길은 직진한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좌측으로 새마을 금고를 볼수 있다.

새마을 금고 앞 넓은 길을 따라가면 된다.  곡각지점 우측으로 영미용실과 천일 쌀 슈퍼 사잇길로 올라선다 좁은 골목길로 파란 물탱크를 지나면 담벽락에 BCDE란 글씨가 적혀있다. 이곳을 지나면 옥녀봉으로 연결되며 공동묘지가 산 전체를 덮고 있다. 능선상의 낙동정맥 길도 산자와 죽은자를 서로 가르는공동묘지, 그 사이로 산길이 나 있어 기분 또한 묘하다.

좌측은 옥녀봉을 거처 낙동정맥의 종착점인 몰운대, 우측은 시약산 구덕산으로 이어지는 주 능선길, 공동묘지를 내려서면 다시 산길은 마을길과 연결된다. 까치고개와 연결이된다. 새로 사용되고 있는 주소인 까치길 95호 집 앞에서 좌측형 직진을 하면 까치고개5길 49호를 확인 할 수 있다. 까치고개와 연결되며 좌측은 대티, 우측은 토성동 부산대학병원으로 연결된다.

대티고개는 정면 까치슈퍼 우측인 까치고개길 552호 좌측으로 내려선다. 우측 산봉우리에 전에는 없던 피오니파크 아파트가 생겼고 그 아래 축대를 끼고 낙동정맥은 이어진다. 대티마을2길을 내려서면 우측으로 대티고개와 만난다. 대티고개는 큰 고개란 뜻으로 그 아래로 터널이 지나간다. 길건너 컴퓨터수리점 우측 대밭3길 안내판을 따라간다.
 작은 계단을 올라 우측으로 따라 오르면 초입을 찾았고 대밭3길과 시약산 1길을 확인힐 수 있다. 한 골목을 두고 두대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데 서구와 사하구인 두 지자체에서 서로 다른 이름을 불러 생긴 현상이다. 좌측은 대밭3길 우측은 시약산1길이면 산길은 제대로 찾았다. 마을 을 빠져 나오면 산불감시초소, 그 뒤로 된비알 오르막이 낙동정맥이자 시약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시약산 정상 2.1KM, 꽃마을 4.6KM 이정표.

밀성박씨 묘 까지 이어지는 산길은 오르막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쉽게 오를 수 있다.꽃마을 4KM, 시약산정상0.9KM. 여기서 부터 시약산 정상의 기상관측소의 둥근 건축물을 볼 수 있다.

다시 시약산 정상까지는 고통의 오르막길로 걸어온 길이로 보면 힘이 들 때 쯤 인 것 같다. 날씨 또한 벌써 초여름 날씨의 모습을 보인다. 한숨을 돌리면 관측소 우측으로 돌아가면 시약정의 4각 전망대로 여기에 올라서면 서구 중구의 모습을 한눈에 다 볼 수 있어 시약산 최고의 전망대이다.

구덕산은 이제 지척으로 갈림길에서 부산항공무선표지소 방향으로 오르면 이동통신 중계소에서 왼쪽으로 넘어가는 길은 꽃마을로 하산을 하는 길이고 정상은 그 좌측 임도에서 묘지를 보고 올라서면 경남고33 산우회에서 세운 정상석과 만난다.

정상은 무선표지국이 있어 정상에는 갈 수 없어 그 옆에다 고육지책으로 정상석을 세운 것 같다. 정상석을 뒤로하고 중계기 건물의 좌측으로 내려서면 꽃마을 까지 산길을 걸을 수 있다. 다른 길은 도로를 따라 내려 가는 길이 있지만 포장길이 지겨워 산행길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내려서면 급한 내리막 길이다 산세를 봐도 매우 급한 하산길이다. 미끄러짐에 주의를 하면 중간에 전망대와 만난다. 시약정의 모습과 별 다르지 않지만 고도가 낮은 모습이다. 산길을 따라 내려가면 청소년수련관과 교육역사관 갈림길, 꽃마을은 교육 역사관 방향인 좌측길이다. 나무를 꺽지 말라는 부산조경개발의 안내 문구를 뒤로하면 꽃마을로 구덕산을 오르는 도로에 내려선다.

우측으로 내려서면 구덕령 고개로 우측은 운동장방향, 좌측은 학장동 방향. 엄광산은 직진하는 길이다. 눈 앞에 큰 산이 버티고 서 있다. 대진 슈퍼 좌측으로 직진을 한다. 송아추어탕에서 우측으로 틀면 좌측으로 산길로 오르는 입구가 보인다. 우측으로 철조망이 처져 있고 능선까지 따라온다. 짐승들의 출입을 막는 것 같아 꼭 산에 이런 철조망이 있어야 하나 생각을 해 본다.

능선에 올라서게 되고 우측은 내원정사0.5KM, 좌측은 엄광산 정상, 직진을 하면 석탑약수터0.9KM, 엄광산까지는 오르막길, 마지막 힘을 쏟아 부어야 한다. 최근에 만들어진 4각정자가 정상석 옆에 서 있다.

한때는 엄광산이 고원견산으로 불렸다, 일제시대때 일본놈이 고쳐 부른 산명으로 일본에서 부산으로 들어올때 멀리서도 보였다하며 부산으로 들어오는 길잡아 역활을 하였다 하여 고원견산으로 불리다가 부산을 가꾸는 모임에서 제이름을 찾아주어 지금은 정상석에 엄광산과 마을 주민들에 의해 많이 알려져 있는 상태이다.

넓은 길를 내려서면 좌측으로 서면 일대와 초읍, 백양산등 부산의 심장부인 서면 일대를 볼 수 있다.다시 돌탑이 서 있는 봉우리 그 직전에 낙동정맥길은 좌측으로 틀어 백병원 방향으로 내려가고 산행은 직진을 하여 안부로 내려선다.  헬기당 갈림길에서 구봉산 방향인 직진 길을 버리고 좌측방향으로 틀어 내려선다.

전망좋은 지점에 낙서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관리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찾을 수 있는 곳과 만난다. 이 전망대가 통일교 목사인 문선명목사가 기도를 하였다는 제단으로 통일교에서는 아주 신성시 여기는 곳이다.

산불초소도 지나고 천암수 약수를 지나 내려서면 좌측으로 동의대학 가는 길, 우측 수정동 방향으로 내선다 직진하면 통일동산 가야봉 안창마을 방향이다. 우측을 다라 내려가면 산길은 수정3동 놀이터와 5동 체육시설방향으로 옛날 성터의 흔적을 지나 최종 목적지는 체육시설방향인 동원빌라 앞이다.

등대시장을 지나 머리를 들면 볼 수 있는 천마바위의 웅장한 모습

천마산의 들머리인 천왕사에서 뒤돌아 본 모습. 남항대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암남동의 모습과 진정산 장군봉의 모습 사진 중앙의 고신의료원도 찾을 수 있다.

<조각공원의 모습>












천마바위의 안내판에는  바위 위에 크고 작은 말발굽 같은 구덩이가 여럿 있는데 하늘에서 용마가 내려와 이자리에서 바위를 박차고 날아 올라 대마도로 건너 갔다하며 움푹파인 그 웅덩이가 말이 바위를 박차고 오를 때 생긴 발자국이라 한다. 영도  초장동등 처럼 신라시대에 천마산에도 군사용의 말을 키우던 목마장이 있어 절영도(현영도)로 옮겨 간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바위가 60~70년 대에는 한때 부산 산꾼들의 암벽훈련장으로도 애용을 하였다한다.


철탑중앙의 뽀족봉이 석성봉수대기 있었다는 정상으로 현재는 천마탑이 조성되어 있다.

천마탑으로 1971년 천마산악회에서 주변의 돌을 모아 세웠다 한다.
석성봉수대는 황령산과 장산의 간비오산의 봉수대와 함께 1461년인 세종 7년 그 이전 부터 존재해 왔던 것을 영조때인 1725년 동래부사였던 이중협의 건의에 구봉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300년 동안 봉수대의 역활을 한 부산의 해안 전초기지였음을 볼 수 있다.



사진 우측으로 용두산공원의 부산탑과 그 우측으로 대청공원,중구와 동구 일대를 볼 수 있다.

아래 마을이 감천고개에 형성 된 마을이며 그 뒤로 낮은 산이 옥녀봉으로 낙동정맥길이다. 그 뒤 왼쪽이 승학산 우측 뽀족한 탑이 보이는 건물이 기산관측소로 시약산이다, 그 우측으로 구덕산 정상,





감천고개

중앙의 감정초등학교와 그 뒤로 천마산과 능선


옥녀봉으로 오르는 능선상에서 본 감천고개, 그 뒤로 중구 자갈치 시장과 영도다리, 영도 봉래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공동묘지 뒤로 시약산과 구덕산

까치고개와 대티고개,

대티고개

대밭3길과 시약산1길로 한골목을 두고 두 이름으로 불린다.


밀양박씨묘가 있는 갈림길


시약정 전망대









통일교 문선명목사가 기도를 하였다는 제단 으로 낙서의 흔적이 뚜렸하다,

수정5동 체육공원으로 내려서면 만나는 초소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흥부네순대(054-653-6220). 토종 한방순대(사진 위)가 기가 막히다. 돼지막창에 파 부추 깻잎 양배추 두부 등 12가지 재료와 약초가루 2가지를 버무려 속을 채워 옛날 방식 그대로 만들었다. 1인분 5000원. 갖은 양념을 한 오징어를 연탄불에 구운 오징어 석쇠구이(5000원·사진 아래)와 순대 전골(사진 가운데)도 일품이다. 비결은 시어머니 황해옥(76), 며느리 양옥자(47) 씨가 20여 년간 맞춰온 손맛이다. 순대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병천순대로 유명한 천안의 단국대 교수들이 우연히 이곳을 들러 한방순대 맛을 본 후 "병천순대보다 훨씬 더 맛있다"고 평했을 정도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흥부네순대는 그뒤 다시 찾아 가 보았지만 주인부부의 친절함에 더욱 정이가는 집이였다. 변함없는 그 맛과 가격에 예천 비룡산 감동을 이어 갈 수 있다.함 가보세요. 후회하지 않고 보는 맛, 먹는 맛, 걷는 맛이 있는 곳입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천군 용궁면 회룡포

경북 예천군에는 용과 관계된 지명을 가진 곳이 여럿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회룡대에서 바라본 회룡포마을, 내성천이 휘감아 육지속의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회룡포,용포,비룡산,용궁면등 용이 하늘로 승천하기 위해서는 필수 조건이 물이있어야 하는 법, 예천군에는 용왕이 살고 있는 바다의 용궁이 뭍으로 올라와 있어니 용이 승천을 하기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하늘로 올라 갈 날을 기다리는 중인 것 같다,낙동강과 태백산에서 발원한 내성천 그리고 죽월산에서 발원한 금천이 서로 만나는 삼강 인근의 회룡포는 내성천이 내려오다 다시 거슬러 역류하는 모습으로 물리 흘러 오메가 형상을 하고 있는 곳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용이 몸을 틀 듯이 휘감은 물동이 마을

국내에는 3곳으로 안동의 하회마을과 동강의 병방치등 물돌이로 한국의 비경이 아닐 수 없다. 그증에서 회룡포는 단연 으뜸으로 한삽만 떠 버리면 육지속의 섬으로 만들 수 있는 곳이다.산은 물을 가르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하는 산태극 수태극의 평범한 순리를 자연은 그대로 순응을 하며 따르다 보니 물동이 현상이 생겨나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또한 회룡포에는 명물이 있다. 공사 현장에 가면 구멍이 뚫인 철판을 볼 수 있다. 그것으로 내성천을 건너 가는 유일한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성천을 건너 회룡포로 들어서는 유일한 뽕뽕다리, 가을동화 촬영으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일명 뽕뽕다리로 얼마전 모방송국 에서 가을동화를 촬영하여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비룡산을 휘감은 내성천과 만나는 지점을 삼강이 만난다하여 삼강이라 부른다. 그 강에는 예전부터 강가를  가로지르는  나룻배와 주막이 있어 강을 건너는 민초들에게 삶의 질펀한 이야기를 나누며 오고가는 장터 같은 모습이였을 것이다. 지금은 새로 생긴 다리로 주막과 나룻배는 옛 꿈속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되어 지나가는 차량들에게는 한낮 추억에 불가 할 것이다. 삼강나루터에는 유옥연 할머니께서 마지막으로 주막을 지켰지만 90세를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어니, 님의 흙벽에 걸린 외상장부만 세월을 잊고 주인을 기다리고있다. 현재는 주막이 경북 민속자료 제134호 지정되어 복원을 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만나는 삼강 나루터. 지금은 새로생긴 다리로 나루터는 사라지고 흔적만이 느낄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성천을 도강하는 사람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금산사는 후백제를 개국한 견훤 빼 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경상도 상주땅의 가현현에서 농민이었던 아버지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는 광주북촌의 부잣집 딸과 지렁이와의 사이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어 호족의 집안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신라말에 나라의 기강이 헤이해지고 가뭄과 기근으로 전국에 농민의 반란이 자주 일어 났다. 이때를 틈타 견훤이 자신의 사병을 동원하여 무진주(현 광주)를 공격하여 무진주를 함락하고 완산(현 전주)주도 공격하여  도읍을 완산주로 정하고 스스로 백제의 왕이라 불렀다.
세력을 점차 넓혀 신라와 대적을 하고 신라와 접경지역을 함락하여 그 위세를 떨쳐 이윽고 927년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게 된다.
그 후 고려 왕건과 신라의 공산전투에서 치열한 싸움을 하여 왕건을 패하게 하고 신숭겸장군의로 인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왕건 군사와 안동에서 최후의 결전을 하지만 안동전투에 패한 견훤은 국운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전주로 돌아온 견훤은 왕이계승을 첫째인 신검에 주지 않고 네째 금강에게 왕위를 물여줄여고 하니 신검과 둘째인 양검,용검이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살해하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 미륵전 지하에 유폐시키니 견훤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망을 쳐 왕건에게 투항을 한다.
견훤은 자신이 세운 백제를 정벌 할 것을 권하며 선산에서 신검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여 왕건에게 패하고 양검과 함께 왕건에게 투항을 하니 삼국통일이 이루어진다. 금
산사의 돌무지개문은 견훤이 신검에게 유폐될때 이문으로 통해 금산사로 들어 갔다합니다. 비운의 석문은 그 때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월의 흐름 앞에는 위풍당당한 돌무지개문도 어쩔 수 없는지 복원공사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악산 금산사 일주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금산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금산사계곡에 걸쳐 있는 해탈교를 올라서야만 금산사 경내로 들어 갈 수 있다.
 세속의 모든 번뇌와 찌꺼기를 벗어 버리고 오라는 뜻 인지 그 이름 또한 의미가 크다. 먼저 반기는 곳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금강문이다.
속새의 인간은 금강이란 예기만 들어도 무엇인가?
특이하고 깨끗함이 있어 근접하기가 힘이 들 것으로 생각한다.
야생화에도 애기나리보다 금강애기나리, 금강초롱등 수많은 꽃에도 금강 이름만 붙어도 한층더 고귀함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금강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밀적금강, 나라연금강, 문수동자, 보현동자 의 모습이 수호신 처럼 모서져 있다.
아쉬움은 앞으로 그물망이 쳐져 있어 보는 이를 안타갑게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밀적금강:금강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입니다.항상 부처님에게 친근하여 부처님의 비밀한 서적을 들으려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밀적금강:금강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입니다.
항상 부처님에게 친근하여 부처님의 비밀한 서적을 들을여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라연 금강:천상의 역사로서 그 힘은 코끼리의 백만배쯤 된다고 합니다. 나라연과 같은 힘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보현동자:보현보살이 동자로 화현 한 것으로 석가모니불의 우협시보살로 진리의 광대행을 맡고 있으며 행원의 실천을 나타내기 위해 코끼리를 타고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문수동자:문수보살이 동자로 화현한 것으로 석가모니불의 좌협시보살로 지혜를 맡고 있으며
위험과 용맹을 나타내기 위해 사자를 타고 있습니다. 금강문을 지나면 기다리는 하늘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천왕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문을 들어서면 속세와 선계의 경계선상을 가르는 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금산사를 지키는 4대천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절을 지키며
1994년 금산사를 새롭게 중수할때 건립을 하였다 합니다.
천왕문안에도 마찬가지로 4분의 수호신이 지키고 있습니다.
일명 4대천왕이라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천왕문울 빠져 나오면 넓은 우측 돌기둥 두개를 볼 수 잇습니다. 가지런하게 서 있는 돌 기둥은 당간지주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간지주:보물제28호. 사찰을 상징하는 괘불이나 깃발을 세울때 버팀목으로 사용하는 석조물이다.
이 지주는 높이가 3.5m이며 양지주가 남북으로 마주보며 서 있다. 기단석과 간대를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는
국내유일의 당간지주이다. 통일신라 시대인8세기 이후에 건립되었어며 간결한 것 같습니다.
범어사 당간지주 보다는 더 기품이 있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용과 거북이
흔히 빗돌의 받침으로 많이 사용을 한다.
그 빗돌의 주인을 기다리는 용과 거북이는 우리에게는 친근감을 준다. 거북이는 무병장수를 뜻하며 용은 전설속의 짐승으로 신비감을 우리에게 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보제루: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에 이어 만나는 보제루는 누각으로 1976년 신축을 한 현대건물이며 1998년 증축하여 금산사 개산1400주년 기념관으로 바꾸었다합니다. 지금은 학술회의, 미륵십선수련회등 강당으로 활용한다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보제루 밑을 들어서면 넓게 조성된 광장을 만나게 됩니다.
금산사를 대표하는 모든 보물들이 이름표를 달고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면에 대적광전이 우측에는 그 유명한 금산사 미륵전. 좌측으로는 대장전과 석등등 짜임쇠 있는 구조와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찬찬히 둘러보면 금산사의 역사를 피부로 느낄 수 있어며 견훤의 한숨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래 넓은 광장입니다. 어디부터 둘러 볼까? 고민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래도 학창시절 국사 교과서에서 본 3층 미륵전이 우선이겠지예.
우측으로 압도하는 거대한 미륵전을 찾아갑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풍도 단단한 미륵전.
견훤의 아픔을 다 받아주고 그의 설음을 다 어루만져준 미륵전입니다.
3층 건물이지만 안으로 들여다 보면 뚫여 있어 1층 입니다.
미륵전은 진표율사가 미륵장육상을 봉안하기 위해 766년 혜공왕 2년애 건립한 법당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법당내에는 삼존상으로 미륵불, 법화림보살, 대묘상보살이 조성되어 있다. 미륵전은 원래 용리 살고 있던 연못이었으나 참숯으로 연못늘 메워 용을 쫒아내고 그자리에 미륵전을 건립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석련대;보물 제23호로 지정,
연화대 형식으로 조각한 불상의 좌대로 높이가 1.52m, 둘레가 10m에 달하는 거대한 연화대이다.
전체가 한개의 돌로 되어 있어나, 여러개의 돌로 만든것처럼  상중하의 3단 양식을 갖추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