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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여행/함양가볼만한곳)함양 화림동계곡 동호정. 하늘의 선녀도 시샘할 풍경 동호정을 여행하다. 함양 선비길 동호정.



남강 상류 60리의 금천을 화림동 계곡이라 합니다. 그 화림동계곡의 가운데에 동호정의 정자가 있습니다. 선비들의 시와 담론장소로 이용하였던 자리에 정자라 하기에는 큰 동호정을 주춧돌도 없이 구불구불 다듬지 않은 나무를 너른 암반에다 그대로 세웠습니다.







2016/08/29 - 함양여행/함양가볼만한곳)함양 선비길 화림동계곡 거연정. 선비의 고고한 기풍이 느껴지는 함양 화림동 계곡 거연정에서 가을 하늘을 만나다. 함양 거연정

2016/08/26 - (함양여행/함양가볼만한곳)화림동계곡 군자정. 일두 정여창이 유영하였다는 영귀대 암반에 새운 군자정의 아름다운 모습에 가는 여름을 잡아보다. 함양 군자정




 

 


층층이 포개어진 단애는 깊은 소를 이루어 함양 화림동 계곡에서 최고의 누각이라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동호정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 크기의 중층 건물로 겹처마의 팔작지붕입니다. 화림동 계곡의 거연정과 군자정, 농월정 등 여러 정자보다 더 크고 웅장하며 주변의 진경산수와 함께 한 폭의 한국화 소재로 가장 잘 어울립니다.


 

 

 

 


누마루를 오르는 나무 계단에서 동호정은 꾸밈이 없는 모습을 하였습니다. 통나무 두 개를 자연스럽게 붙여 도끼로 찍어내어 투박하게 계단을 만들었지만, 그 어떤 오성급 호텔의 이탈리아산 대리석 계단보다도 훨씬 좋으며 운치 있고 양복에 짚신이 아닌 삿갓과 짚신같이 한 몸을 이룰 정도로 동호정과 정말 잘 어울려 자연에 동화하는 선비정신을 닮았습니다.


 

 

 

차일암과 동호정 

 

 


군자정은 이마에 밭고랑이 움푹 팬 수더분한 시골 촌로와 닮았다면 거연정은 연지곤지 예쁘게 색칠하고 시골 오일장을 걷는 품새 있는 아낙네 모습입니다. 그에 반해 동호정은 예쁘고 화려하게 치장하고 잘나가는 도시녀의 모습이지만 화려함에 비해 추하지 않으며 주변의 녹색에 스며들어 자연과 동화된 모습입니다.


 

 

 

 

 

 


그만큼 단청이 화려한 동호정을 마주하면 이때까지 답답했던 가슴에 생기를 불어 넣어줍니다. 삐꺽 삐꺽 소리를 내는 투박한 계단을 밟고 누마루를 올라 단청을 자세하게 들여다보았습니다. 동호정을 지탱하는 대들보에는 용과 호랑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두개의 나무를 가지런하게 붙여 도끼로 찍어 만든 투박한 나무 계단

 

 


여의주를 문 황룡과 청룡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이는 용이 물을 다스리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궁궐이나 서원, 누각, 사찰 등 주로 목재건물에 청룡과 황룡을 많이 조각해놓았는데 이는 불에 취약하기 때문이며 호랑이 두 마리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악귀로부터 막는 비보 역할로 보입니다. 그리고 연꽃과 화려한 꽃무늬를 돌려놓았고 공자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니구산에서 기도하여 태어난 공자부터 74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모습을 보면서 동호정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동호정은 조선시대 학자였던 동호 장만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의 9대손인 가선대부 오위장 장재헌과 지역 유림이 뜻을 모아 1890년에 건립한 정자로 공의 호를 따 동호정이라 하였습니다. 동호 장만리는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진하는 선조를 등에 업고 피난하셨던 분입니다.


 

 

 

 

 

 


당시 충신이라 떠들던 신하들은 전란 통에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지만 장만리는 끝까지 선조 곁에 남아 주군을 보필하니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선조는 호국공신의 원조공신에 책록하셨습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선생은 그의 고향인 함양군 서하면 황산마을에 낙향하여 화림동계곡의 차일암에서 마음을 닦으며 가끔 낚시를 즐겼셨는데 그의 후손이 모여 선조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다 동호정을 건립했습니다.


 

 

 

 

 

 

 

 


1892년 조선 말기에 고종황제는 공을 좌승지에 추증하고 충신정려를 다시금 내려 그의 충절을 기렸습니다. 공이 유영하던 백옥같이 하얀 암반인 차일암에서 보니 파란 하늘과 울울창창한 녹색의 숲, 물감을 푼 듯 파란 옥수와 동호정의 붉은 단청이 너무나 잘 어울렸습니다. 이만한 모습이면 화림동 계곡의 동호정은 선녀도 시샘할 것 같습니다.


 

 

 

 

 


함양 동호정 주소: 경남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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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가야산 해인사.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전 불법종찰인 가야산 해인사를 여행하다. 합천 가야산 해인사. 



합천의 명산인 가야산은 해인사를 품고 있습니다. 가야산이 해인사고 해인사가 가야산으로 통할 정도로 서로 떼고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불교 성지로서 가장 신령스런 산중 한곳입니다. 가야산의 산 이름에서도 불교색채가 아주 강한데 '가야(Gaye)'의 뜻은 ‘최상의’라는 뜻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드신 ‘붓다 가야’에서 가야산을 따왔다고 하며 또한, 옛날 가야국이 있던 산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만큼 가야산은 성스러운 장소로 알려졌으며 이런 곳에 해인사가 창건한 것은 어쩜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2016/08/24 -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 유정이 입적했던 암자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을 여행하다. 홍제암

2016/08/23 - (합천여행)가야산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왜!! 사명대사 석장비는 쪼개졌을까요?, 부도에는 왜! 대사의 명문을 새기기 않았을까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2016/08/20 -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가야산 홍류동천 농산정. 고운 최치원이 갓과 짚신을 걸어놓고 신선이되었다는 명경산수의 해인사 소리길 농산정을 여행하다. 농산정





해인사가 가야산에 창건하기 훨씬 이전에 중국 남북조시대의 지공(418~514)스님이 예언하기를 “해동의 가야산에 대가람이 세워져 불법이 번창하리라”고 하셨다는데 약 300년쯤 후인 802년 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해인사를 창건하여 오늘날까지 부처님의 법등은 꺼지지 않고 이어져왔습니다.





해인사의 이름을 보면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나왔다 합니다. 해인삼매란?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말할 때 들어간 선정의 이름으로 “바다에 풍랑이 그치면 모든 형상이 온전히 비치듯이 법계의 실상을 본래 모습 그대로 자각할 수 있는 상태” 즉 ‘마음의 고요함’을 뜻합니다. 사부대중인 필자는 해인사 이름에서 벌써 복잡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내 마음이 평정심을 되찾은 듯 평안함을 느꼈습니다.





해인사는 창건과 함께 화엄종의 근본 도량으로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선원, 강원, 율원을 포함한 최초의 총림으로 지정했으며 국보인 고려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한 법보종찰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95년에 유네스코에서 고려팔만대장경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장경판전을 세계문화 유산에 이름을 올렸으며, 2007년에는 고려팔만대장경경판과 해인사의 모든 경판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였습니다. 이런 문화재의 보고인 해인사를 늦었지만 여행하고 왔습니다.





먼저 부도전을 지나면 독특한 유래를 가진 ‘길상탑’이 있습니다. 길상탑의 유래는 신라 진성여왕 9년인 895년을 전후하여 7년간 궁예와 견훤의 싸움에 흉년으로 굶주린 장병을 위해 해인사 훈혁스님이 탁발하여 군량미를 조달하고 그 나머지로 길상탑을 세워 문수사리보살의 가피를 빌고자 무명으로 전쟁터에 나가 죽은 승병 56위의 넋을 기린 위렵탑입니다.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른 삼층석탑으로 높이는 약 3m이며 1965년 탑 속에서 최치원이 지은 ‘운양대묘길상탑지’와 157개의 소탑 등 유물이 나와 당시 사회 상황과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탑의 건립 내력을 소상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그리고 특이하게도 길상탑앞 도로에는 지금은 없지만 해방 이후까지 홍살문이 존재했으며 당간 석을 지나면 일주문이 나옵니다. 해인사 일주문은 1940년대 주지였던 변설호스님 때 대목장 이화백에 의해 중건하였습니다. 정면 현판의 ‘가야산 해인사’ 글씨는 해강 김규진이 섰으며 판각은 임환경 스님이 새겼고 뒷면의 ‘해동제일도량’ 현판은 박해근이 걸었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도 해인사를 찬미하였는데 “해인사의 사기는 가야산의 전국적 중심지로 그 자세가 당당하고 그 환경이 수려 명미 하여 아려한 위인이 칼을 잡고 설교하는 것 같다. 완연히 움직이는 활화일폭이다. 해인사는 명구라고 하느니보다 승지이며 승지라고 하느니보다 성경이다. 나는 국내외 사찰들을 많이 보았으니 해인사에 필적할만한 사기를 보지 못하였다. 거룩하다는 한 말 이외에 무슨 형용사를 붙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합천의 숨결 해인사의 향기/내암사상연구회)


 

 


 

 

 

 

 

 

 

 소원나무

 

 

 

 

 

 

 

 

 

 

 

 


해인사의 중심건물인 대적광전을 가기 위해서는 마당을 가로질러 갑니다. 그전에 먼저 석등을 만납니다. 석등은 부처님의 광명을 상징하며 사찰 경내를 어둠에서 밝히는 진리의 빛입니다. 해인사의 석등은 섬세하고 우아한 조각수법을 보면서 그 뒤쪽의 삼층석탑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여덟 잎 연꽃무늬가 엎어진 복련과 팔각의 화사석 아래에 연꽃무늬가 위로 향한 모양의 앙련 사이에 세운 팔각석간이 짧은 것은 1926년 석탑을 개축하면서 함께 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석등 북쪽에는 정중삼층석탑이 있습니다. 탑은 부처님의 사리 등을 봉안하는 곳입니다만 정중삼층석탑은 불상을 봉안한 탑으로 9세기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마 해인사가 창건하면서 함께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며 대적광전 앞마당 한 쪽에 석등과 함께 약간 비켜 서 있습니다.


 

 

 

 


비로탑은 높이 6m 삼층석탑으로 기단은 원래 통일신라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2층 기단이었지만 1926년 중수하면서 3층 기단으로 탑을 높이고 확장하였습니다. 석등과 석탑 사이에 바닥 돌이 놓여있는데 정례석으로 이는 멀리 부처님을 향해 이마를 땅에 대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는 곳입니다.


 

 

 



비로탑과 석등이 있는 마당 좌우에는 궁현당과 관음전이 있으며 궁현당 뒤에는 적묵당, 진영전, 정수당 등 전각 대부분이 해인사 승가대학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사용합니다. 이제 대적광전이 있는 높은 축대를 오릅니다. 가운데 대적광전이 있으며 왼쪽으로 대비로전과 독성각, 오른쪽은 명부전과 응진전 등 예불공간입니다.


 

 


이제 해인사의 중심법당이자 큰 법당인 대적광전을 보겠습니다. 법당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셨습니다. 원래는 해인사를 창건하면서 비로전이 중심법당이었고 비로자나불을 모셨는데 6번이나 화재로 중창하면서 1488년에 대적광전으로 편액을 바꾸어 달았습니다. 지금의 대적광전은 단층이지만 겸재 정선(1676~1759)이 남긴 해인사 그림에 2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1817년 화재로 중창되기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큰 전각으로 추정됩니다.


 

 


대적광전의 의미는 비로자나불이 항상 계시면서 시공을 통하여 화엄경을 늘 두루 설하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대적광전의 수미단에는 모두 일곱분의 불보살을 봉안한 아주 특이한 사례입니다.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을 가운데 모시고 그 왼쪽으로 지장보살, 보현보살, 법기보살을, 오른쪽에는 이전의 본존불이었던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관세음보살입니다. 이중 관세음보살과 법기보살은 쇠로 불상을 만들었으며 그 외 불상은 모두 목조로 만들었습니다.


 

 

 

 


대적광전 수미단에 모셔진 본존 비로자나 부처님은 고려 시대 불상으로 은행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불상의 높이는 233.3cm이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과 함께 처음에는 경북 성주군의 금당사에 봉안된 부처님이었는데 절이 폐사하면서 가야산의 용기사로 옮겨갔고 용기사 마저 폐사하면서 1897년 법운스님이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해인사 대적광전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현재 해인사 대적광전은 팔작지붕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웅장하며 큰 규모입니다. 네 면의 대적광전에는 모두 각각의 현판을 달고 있는데 이는 앞면의 대적광전 현판 글쓴이는 현재 알 수 없으며 뒷면 대방광전, 동쪽 면의 금강계단, 서쪽 면의 법보전은 해강 김규진(1868~1933) 선생의 글씨입니다.


 

 


현재의 대적광전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17년 (순조17년) 제월당 스님과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로 경상도 관찰사였던 김노경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상량문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이 직접 썼다 합니다 해인사의 주련은 당시 명필가로 이름을 떨쳤던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니 해인사의 대적광전은 당대 명필들의 글씨로 더욱 유명합니다.


 

 


해인사 대적광전의 흥선 대원군이 썼다는 주련을 옮겨보겠습니다.

“불신보방대광명(佛身普放大光明) 부처님이 큰 광명을 두루 놓으시니

색상무변극청정(色相無邊極淸淨) 색과 모양이 가없이 청정하네

여운충만일체토(如雲充滿一切土) 구름이 온 국토에 충만하듯이

처처칭양불공덕(處處稱揚佛功德) 곳곳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네

광명소조함환희(光明所照咸歡喜) 광명이 비치는 곳마다 넘치는 환희여

중생유고실제멸(衆生有苦悉除滅) 중생들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네“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



2016/08/25 -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해인사 고려팔만대장경, 대장경전, 고려각판. 부처님의 원력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려했던 고려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여행하다.



 

 

 


가야산이 있는 해인사의 지세는 거대한 방주형으로 가야산이 선체라면 해인사는 선실이고 중봉의 마애석불이 키를 잡는 선장이며 장경각 가운데에 큰 바위가 돛대바위였다 합니다. 그러나 1926년 대적광전 석축 보수를 하면서 이곳 바위를 깨어 사용하였습니다. 배의 돛대를 없애버렸는데 60년만인 1986년에 돛대바위 자리에 돛대를 대신하여 수미정상사리탑을 세워 이제 해인사는 앞으로 순풍에 돛단 듯이 순항할 일만 남았습니다.


 

 

 

 


여기는 학사대입니다. 신라말의 대문장가인 고운 최치원(857~?)이 만년에 가야산에 은거하여 시와 글씨를 쓰면서 보냈던 곳입니다. 그는 특히 가야금에도 능했는데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면 전나무에 수많은 학이 날아와 가야금 소리를 들었다고 전합니다. 학사대의 전나무는 최치원이 집고 다니던 지팡이를 거꾸로 꽂았는데 그게 살아남아 지금도 가지가 아래로 처져 거꾸로 자라는 듯 보인다고 합니다.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을 보신 법당입니다.  법당에는 중화 3년인 883년에 조성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동형쌍불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끝으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해인사를 찬미한 한시를 해석해 놓은 글을 옮겨 보겠습니다.

“옛 가야에 묻혀 있는 울창한 가람

천리 구름이 떠 있는 산을 대하며 참선을 한다

새가 내려 않은 정원에서 스님은 선정에 들고

담비가 나무를 타고 개염의 달콤함을 맛본다

글 바위 바둑 누각 어느 뉘 살고 있나?

잣나무 오동나무 소곤소곤 이야기 주고 받는다

객은 떠날 날 꼽으며 잠 못 이루고

깊은 밤 달빛은 소나무 탑 사이를 비춘다“


(참고:합천의 숨결 해인사의 향기/내암사상연구회 발행)

 



성철스님의 사리탑


2016/05/12 - (경남여행/산청여행)산청군 단성면 겁외사,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산은 산이요 물은물이로다" 성철스님 생가 율은고거와 겁외사 여행. 산청 겁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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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여행/함양가볼만한곳)함양 선비길 화림동계곡 거연정. 선비의 고고한 기풍이 느껴지는 함양 화림동 계곡 거연정에서 가을 하늘을 만나다. 함양 거연정

 

 

고고한 선비들의 묵향이 흐르지 않는 곳이 없다지만 그중에서도 영남의 안동과 함양을 선비의 고장 중에서 으뜸으로 꼽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영남에서 두 고장을 좌안동 우함양하며 서로 사이좋게 양분하는 모양새입니다. 이번 선비의 고장여행에서 우함양인 그것도 함양 선비들의 보루였다는 화림동 계곡을 여행했습니다.

 


 

 

2016/08/26 - (함양여행/함양가볼만한곳)화림동계곡 군자정. 일두 정여창이 유영하였다는 영귀대 암반에 새운 군자정의 아름다운 모습에 가는 여름을 잡아보다. 함양 군자정


 



화림동은 원학동과 심진동을 합해 안음(안의 옛 지명) 삼동이라 합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1,580m의 남덕유산 정상에서 흘러내린 금천(남강 상류)의 화림동입니다. 삼각형의 조각칼로 후벼 판 듯 골짜기를 휘감으며 빚어낸 기이한 암반은 소와 담을 만들었고 그와 함께 산림 처사를 자처하던 선비들은 몸을 낮추는 은신처로서도 화림동은 최고의 조건이었습니다.


 

화림교


방화수류천


 60리의 화림동계곡을 선비들은 무릉도원에 비교할 만큼 많은 소와 정자가 있어 팔정팔담이라 불렀습니다. 그만큼 소와 정자가 많다는 뜻인지 아니면 화림동계곡에 거연정, 동호정, 농월정 등 진짜 여덟 정자와 소가 있어서 그런지 확인할 수 없지만 지금 남아있는 정자를 고려해도 화림동계곡은 많은 선비들이 정자를 짓고 시문을 서로 나누었을 듯합니다.







오늘날 화림동계곡에서 최고의 꽃은 거연정과 농월정입니다. ‘달을 희롱한다’라는 농월정은 2003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전소하여 최근에 다시 복원하여 새 옷을 갈아입어 아직은 어색한 모습입니다. 그에 반해 거연정은 화림동계곡의 수려한 풍광을 한몸에 담아 날아오를 듯 고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었습니다.


 



거연정이 새워진 자리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던 정선전씨 화림재 전시서공이 1640년경에 서산서원을 짓고 난 뒤 이곳에다 억새를 올린 작은 정자를 지었던 게 그 시초입니다. 전시서는 이곳에서 인근의 선비와 시문을 서로 나누며 유영하였습니다.







1853년에 서산서원이 화재로 전소하였고 그다음 해 새롭게 복원했지만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습니다. 그의 7대 후손인 전재학 등이 억새로 남아 있던 정자를 헐면서 대신에 서산서원를 철거하여 나온 부재로 전시서의 뜻을 받들어 현재의 거연정 정자를 세웠습니다.







거연정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겹처마 합각지붕형식입니다. 거연정의 규모는 중층 누각 건물로 내부에는 뒷면의 1칸을 판재로 막아 따로 작은 마루방을 만들었습니다. 대청과 판재방 사이에 머름을 두어 구분하였고 판재 방은 뒷면을 뺀 3면은 모두 문이 없는 상태입니다.


 



 









누마루는 사면 기둥에서 30cm쯤 덧붙여 계자난간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자연 암반에다 나무를 대강 다듬은 누하주의 기둥을 세우다 보니 울퉁불퉁 바닥이 고르지 않아 높이를 맞추려고 나무 밑 둥을 깎아내고 주춧돌을 쓴 기둥도 있으며 그렇지 않은 기둥도 있습니다. 마루 위의 기둥과 대들보 등을 보면 서산서원의 목재를 이용해서 지은 듯한 흔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거연정의 편액은 주자의 시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의 12수 중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음을 취했는데 “물과 돌이 어울린 자연에 편안하게 살고 싶다”란 뜻입니다. 이곳 거연정에서 다리쉼을 하다 보면 누구나 물과 돌과 주변 자연에 꼭꼭 숨어 살고 싶다는 전시서 선생의 마음이 될 것 같습니다. 그만큼 거연정은 ”자연에 내가 거하고 내가 자연에 거하니 길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세상일을 잊게 하는 곳이다”







거연정을 들어서는 무지개다리는 화림교이며 그 밑을 흐르는 담은 ‘방화수류천’이라 따로 부르고 있습니다. 금방 이무기라도 솟아오를 듯 바위에 갇인 물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감청색이며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간다”로 풀이하여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거연정 정자에는 구한말 유학자였던 은진 송병선(1836~1905) 선생의 편액이 걸려 있어 이곳 거연정에서 영호남의 선비와 함께 교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을 고종에게 상소하고 을사늑약의 반대를 주장하다 비분강개한 심정으로 음독 자결한 애국지사입니다.




 




학처럼 고결한 선비의 지조가 살아 있는 함양 화림동계곡의 선비길에서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올곧은 선비의 정신을 담아갑니다.

경남유형문화재 제433호이며 거연정을 위시한 이곳은 대한민국 명승 제86호에 지정되었습니다.






 


 

 

함양 화림동 계곡 선비길 거연정 정보 안내

 

★함양 거연정 주소: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2006

★함양 거연정 연락처:055-960-5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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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여행/함양가볼만한곳)화림동계곡 군자정. 일두 정여창이 유영하였다는 영귀대 암반에 새운 군자정의 아름다운 모습에 가는 여름을 잡아보다. 함양 군자정



경상남도 함양군의 화림동계곡은 남덕유산에서 흘러내려 온 물이 굽이굽이 에돌아 빚은 심산유곡으로 지금이야 너도나도 찾고 있지만, 오래전에는 절간이라 할 정도로 조용하고 한적한 깊은 골짜기였습니다. 좌우로 1,000m 높이의 대봉산과 거망산, 황석산 등이 치솟아 빚어놓은 절경에 취하다 보면 화림동계곡에 세운 많은 누각처럼 나도 저절로 이곳에서 초가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화림동계곡을 따라 많은 누각과 정자가 지어져 있습니다. 골골마다 암반마다 터 잡은 정자는 거연정과 군자정, 영귀정, 동호정, 농월정 등 특색있는 정자에 화림동은 새로운 정자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군자정은 거연정의 유명세에 찾지 못하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화림동 정자 여행에서 거연정과 불과 150m 거리에 있는 군자정을 먼저 만났습니다. 이곳 군자정은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이라 불렀는데 1802년에 영귀대의 암반에 세워졌습니다. 군자가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어떤 분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군자정이 있는 서하면 봉전리 봉전마을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처가 동네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남자가 결혼하면 처가 입향을 하였는데 정여창선생도 이곳 처가에 내려와 있을 때는 영귀대 암반에 앉아 화림동계곡의 절경에 심취해 넋을 놓고 바라보았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풍경도 이러한데 당시의 이곳 화림동 전경은 어떠했을지 짐작만으로도 흥분이 됩니다.









그럼 일두 정여창선생에 대해 조금은 알고가야겠습니다.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일두 정여창은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가 됩니다. 무오사화 아시죠. 1498년 연산군 4년에 연산군이 훈구파인 유자광 등과 합세하여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으로 그 발단은 김일손의 ‘사초’에서 기인합니다.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성조 실록 사초에 넣었는데 내용의 속뜻을 보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에 관한 문서입니다. 이 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게 됩니다. 또한, 정여창은 김종직의 문하라는 이유로 다른 사림파들과 함께 귀양을 가 함경도 종성에서 병으로 사망합니다.







무오사화 뒤 유자광의 권세는 날로 커졌고 폐출된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복위문제로 일어났던 갑자사화로 정여창은 다시 목이 베이는 부관참시에 처했습니다. 1506년(연산군 11년) 중종반정으로 신원이 회복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년)에 정몽주,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와 함께 동방 5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습니다.







군자정은 정선 전씨 입향조인 화림재 전시서의 후손 전세설, 세택 형제가 일두 정여창 선생을 기념하여 세운 정자입니다. 군자정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 규모로 앞면의 주칸은 5자, 옆면의 주칸은 4자로 규모는 화림동계곡의 여러 정자에 비해 그리 크지 않습니다.


 



영귀대의 천연 암반에 세운 누각 건물로 사면을 개방하였고 앞쪽에다 판재로 출입하는 계단을 만들었습니다. 군자정은 네면의 기둥 바깥으로 15~18cm 정도를 달아내어 계자난간을 돌렸으며 현재 장마루가 깔렸는데 처음에는 우물마루였다 합니다. 건물의 수리 과정에서 변형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자정은 천연 암반 위라 초석을 쓰지 않았으며 둥근 기둥에다 누하주는 큰 나무를 원형 그대로 대충 다듬어 사용하여 계곡과 함께 너무 잘 어울려 더욱 운치 있는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건물의 추녀 끝에는 활주를 각각 세워 건물의 무게감과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가구는 5량 구조이며 홑처마 팔작지붕에 단청을 입히지 않은 수더분한 촌로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일두 정여창이 즐겨 찾았다는 영귀대 암반에 올라 군자정에서 지나가는 여름을 붙들어보세요. 계곡 물소리가 아직은 그리 시원할 수가 없습니다.


 

 


◆함양 화림동 계곡 선비길 군자정 정보◆

★군자정 주소: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2006번지

★문화재자료 3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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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해인사 고려팔만대장경, 대장경전, 고려각판. 부처님의 원력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려했던 고려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여행하다. 



합천에 가야산이 있다면 가야산에는 법보사찰 해인사가 있습니다. 그 해인사를 대표하는 게 법보사찰의 상징인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입니다. 그 큰 해인사 경내를 둘러보면서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관광을 했습니다. 그러나 해인사의 중심건물인 대광보전 뒤쪽 팔만대장경 현판이 걸린 전각 밑 계단에 올라서면 벌써 샤~ 하고 느끼는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대장경의 엄숙한 분위기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대장경의 보안 시스템 때문이었습니다. 곳곳에 CCTV가 설치되었고 많은 경비원이 물샐틈없는 관리를 하고 있는게 역시 팔만대장경은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보배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팔만대장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려 때 부처님의 원력으로 오랑캐의 침입을 막아보고자 국가적인 사업으로 두 차례 간행되었습니다.


 

 

 

 


먼저 1011년 간행된 대장경판은 구판대장경이라 합니다. 거란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부처님의 원력으로 1087년까지 77년간 작업을 하여 완성하였습니다. 구판대장경은 대구 팔공산의 부인사에 보관하던 중 1232년(고종 19년) 몽골군이 침입하여 그만 불타고 말았습니다. 그 뒤 1236년 재차 대장경판 간행 작업을 추진하여 16년만인 1251년 완성하였습니다. 그때의 대장경판이 지금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중인 고려대장경이며 팔만대장경으로도 부르고 있습니다.


 

 

 

 

 

 


왜 팔만대장경이라 할까요? 경전이 새겨진 장경판 수가 팔만 장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불교에서는 아주 많은 숫자를 가르칠 때 팔만 사천이라 쓰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만사천법문이라 하는 데서 기인한다 합니다.


 

 

 

 


팔만대장경은 정확하게 81,350판이며 목판에 양각으로 새겼습니다. 이는 한역 경전에서 가장 오래된 원판 본으로 수정할 곳이 없이 완벽하다고 합니다. 총 1,514 경전에 52,382,960 글자, 6,791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경판으로 해인사를 모두 법보종찰이라 알고 있습니다.


 

 

 

 


대장경판에 사용된 나무는 산벚나무 등이며. 해충의 피해를 막고 조각을 쉽게 하기 위해 펄 밭에 담그거나 바닷물에 오랫동안 통째 쪘다 합니다. 대장경을 만들던 곳이 경남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로 추정하는데 이곳은 조석간만의 차가 커서 밀물 때는 나무 운반이 쉽고 뻘밭과 소금물, 조각에 사용하는 칼과 쇠붙이를 만드는 대장간, 인쇄에 필요한 한지를 만드는 한지마을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대패로 곱게 다듬은 판자에 경문을 새겼는데 먼저 붓으로 한지에다 경문을 쓰고 경판에 다시 글을 쓴 한지를 풀칠하여 조각칼로 하나하나 깎아내었다니 그 작업의 정밀도가 말할 수 없이 힘들었을 듯합니다.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했을까요? 아차 하는 한 번의 실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을 정도이며 한글자 한글자 새길 때마다 절을 한번 했을 정도로 온 힘을 다하여 작업을 했던 것 같습니다.


 

 

 

 


구양순체로 붙여진 글자는 꼴이 한결같으며 아름다워 꼭 한 사람이 쓴 듯 일정하다 합니다. 이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손재주가 정말 뛰어난가 봅니다. 손으로 하는 기술이나 양궁, 골프 등 운동은 세계 최고인 게 이를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글자가 새겨진 경판 면과 경판 양 끝에 각목으로 덧댄 마구로로 만들어졌는데 경판의 총 길이는 약 70cm, 폭은 약 24cm, 두께는 약 2.8cm이며 무게는 대략 3.25kg입니다. 글자는 경판 양면에 돋을새김하였으며 한 면에다 글자를 새긴 새로 줄 수는 23행이며 행마다 14자 정도의 글자를 새겼습니다.


 

 

 

 


그런데 이리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팔만대장경판은 보관이 가장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재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은 대적광전 뒤 가파른 계단 위에 네 동의 건물로 이루어졌습니다. 팔만대장경 현판이 걸린 출입문을 지나면 먼저 한일(一)자로 길게 이어진 건물은 수다라장이고 그 뒤 같은 길이의 건물은 법보전입니다.


 

 

 

 


고려팔만대장경은 이 두 건물 안에 봉안되었으며 두 건물 사이의 동서 양쪽 끝에 있는 작은 건물은 고려 각판을 안치한 사간판전입니다.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한 장경판전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장식을 갖추지 않은 그저 평범한 건물에 불과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건물에 장경판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놀라운 과학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보면 장경판전이 자리한 위치부터 건물의 배치와 좌향 그리고 건물의 구조와 창호 처리 및 판가의 구조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따졌으며, 경판 배열은 원활한 통풍과 적당한 일조량 등 목판을 보존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도록 힘썼습니다. 목판 보관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항온, 항습의 상태 유지를 위해서 판전 외벽의 앞뒷면에 크기가 다른 살창이 칸마다 아래위로 나 있어서 건물 뒤쪽에서 들어오는 습기는 억제하고 판전으로 들어온 바람은 건물 안에서 골고루 퍼진 다음 바깥으로 나가도록 설계되어 오늘날까지도 팔만대장경판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중 한장입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장 한장입니다.   


요즘 전자동 전자동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이곳 장경판전이 모든 기후 환경에 가장 잘 조절되는 전자동 시스템으로 설계된 것 같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선조의 혼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조각을 했던 것을 하늘도 알았는지 해인사에 7차례나 불이 났어도 장경판전은 화마로부터 안전했다 합니다.


대장경판 국보 제32호, 대장경전 국보 제52호, 고려각판 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


 


팔만대장경판은 현재 아무나 관람할수 없습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중 한장입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중 한장입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중 한장입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중 한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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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 유정이 입적했던 암자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을 여행하다.


합천 가야산의 해인사 여러 부속 암자 중에서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하여 선봉장이 되었고 백척간두의 나라를 구하시는데 힘썼던 사명대사에게 1608년 전란이 끝나자 선조 대왕의 하사로 지었으며 대사는 말년에 이곳에서 은거하며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 암자를 이름하여 홍제암이라 합니다.







☞2016/08/23 - (합천여행)가야산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왜!! 사명대사 석장비는 쪼개졌을까요?, 부도에는 왜! 대사의 명문을 새기기 않았을까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2016/08/20 -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가야산 홍류동천 농산정. 고운 최치원이 갓과 짚신을 걸어놓고 신선이되었다는 명경산수의 해인사 소리길 농산정을 여행하다. 농산정




 


홍제암은 67세에 스님이 입적하실 때까지 머물렀으며 광해군 2년에 스님이 입적하자 광해군은 ‘자통홍제존자’의 익호를 내리고 대사를 기리는 석장비와 부도를 세웠으며 암자는 익호를 따라 홍제암이라 하였습니다.


 

 


1614년인 광해군 6년에 혜구 스님이 영자전을 짓고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하였습니다. 1674년에 현종에 의해 홍제당(암)을 사액하였습니다. 홍제암은 여섯 차례 보수하였지만, 건물이 너무 퇴락하여 박종성 스님의 원력으로 중수코자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예산문제로 1977년과 1978년 연차 중수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1977년 5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곳에 참배하고자 들리게 되었습니다. 홍제암의 전후 중수과정을 들으시고는 임란공신 사명대사의 구국 얼이 깃던 곳이니 특별 예산 조치를 편성하여 한꺼번에 보수 할 것을 지시하여 1979년 10월에 홍제암은 현재의 모습으로 완전하게 해체 복원하였습니다.


 


 

 

 


홍제암은 처음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6호로 지정되었으나 문화재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 9월에 보물 제1300호에 승격되었습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홍제암의 편액이 걸린 100여 평의 인법당 건물과 영자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인법당에는 지장보살과 후불탱화를 봉안하였고 영자각에는 16명의 고승 영정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대사

 

 사명당영정

 

 


 

 

 

홍제암 왼쪽에는 부도전이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홍제암은 사명대사께서 입적하신 곳입니다. 이곳에 사명대사의 행장을 기록한 석장비와 대사의 부도가 있습니다. 석장비는 스님이 입적 후 2년 후인 1612년에 세워졌는데 최초의 한글 소설을 쓴 교산 허균이 글을 지었습니다.



 

 

 


워낙 천재성을 뛰었다는 허균의 글이다 보니 사명대사의 기록으로서는 가장 오래되었으며 문장이 수려하여 빼어나 당 대 최고의 기록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석장비는 현재 네 동강이 났는데 이는 1943년 일본인이었던 합천경찰서장이 법보학원 학생들의 노트에 기록된 “통쾌하고 능란한 대답”이 조선의 민족혼을 깨운다는 핑계를 대며 석수를 대동하여 사 등분으로 깨트렸습니다.


 

 

 

 


 

 


사명대사의 통쾌하고 능란한 대답의 발단을 보면 사명대사와 가토 기요마사와 담판하였는데 가토 기요마사가 사명대사에게 “조선의 보배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명대사가 말하기를 “조선에는 보배가 없고 일본에 있으며 그것은 바로 당신의 머리이다”며 통쾌하게 한 방 먹입니다.


 

 

 

 


이러한 기록이 비문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 사명대사 석장비는 깨어지는 수난을 당했습니다. 광복과 함께 사명대사의 석장비는 수습되어 명월당에 보관해오다. 1958년 쇠파이프로 속을 연결하고 석회로 파괴된 부분을 때워서 현재 선명하게 열십자 모양으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사명대사의 부도는 사명대사 석장비에서 산기슭으로 50m쯤 고샅길을 올라가면 숲 속에 독야청청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사명대사의 입적과 함께 1610년 그해 만들어진 부도는 고려 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석종형 부도이며 부도의 주인인 사명대사의 명문도 새기지 않은 상태입니다. 혹시나 모를 왜군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이며 꼭꼭 숨겨두다시피 400년을 이어왔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치욕적인 역사에 사명대사의 행장이 기록된 석장비는 수난을 당했지만, 사명대사의 승탑인 부도는 훼손된 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부도는 3단의 연화 대좌 위에 종모양의 몸돌을 올리고 맨 꼭대기에 연꽃봉우리 모양의 보주를 올렸습니다. 해인사 홍제암에서 나라사랑 사명대사님의 얼을 만나보세요. 홍제암 보물 제1300호


 

 

 


합천서장의 만행으로 열십자로 쪼개어진  사명대사 석장비


 

 

 

 

왜군의 만행을 막기 위해 대사의 명문도 새기지 않은 사명대사 부도 

 

 


◆사명대사 석장비및 부도 홍제암 정보 안내◆

★홍제암

★홍제암 주소: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홍제암 전화:055-932-7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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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여행)가야산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왜!! 사명대사 석장비는 쪼개졌을까요?, 부도에는 왜! 대사의 명문을 새기기 않았을까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임진왜란 때 승군으로 참여한 분을 꼽으라면 전쟁에 참여한 이름 모를 스님들도 많습니다만 모두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 서산대사를 떠올릴 것입니다. 이 두 큰스님은 너무나 유명하고 모두 다 알고 있어 새삼 거론하는 게 쑥스럽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서산대사는 임란 때 묘향산에서 입적하신 것을 알지만, 사명대사께서 입적한 곳이 항상 궁금했는데 부산과 그리 멀지 않은 합천 해인사 홍제암임을 알고 이번 해인사 여행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사명대사 석장비




 


사명대사는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서 출생하셨는데 현재 그의 출생지에 생가 복원과 기념관이 조성되어 많은 관광객이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며 찾고 있습니다. 필자도 대사의 출생지인 고라리는 여러 번 방문했지만, 대사의 입적지는 처음이라 과연 어떤 모습일까 많이 궁금했습니다.


 

 


해인사와 가까운 곳에 홍제암이 있습니다. 단아한 사찰의 규모에 비해 부도전의 규모가 대단한 모습을 하여 홍제암의 사격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곳 홍제암의 부도전에는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가 현재 남아 있습니다. 막상 여러 기의 부도와 석장비가 있어 어느 탑이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석장비는 비신이 열십자로 깨어져 있다는 안내판과 석장비 앞을 가린 가림막을 보고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스님의 부도는 금방 찾을 수 없었습니다. 보통 부도와 석장비가 함께 세워져 있는데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는 따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부도는 석장비에서 뒤쪽 50m 거리인 산 능선에 홀로 안치되어 있습니다.


 

 


부도를 알리는 안내판도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하여 보통석장비를 보고 부도를 찾다가 그냥 내려갈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엉뚱한 부도를 보고 사명대사 부도 인가하며 머리를 꺄웃거렸습니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홍제암의 보살에게 문의했더니 친절하게 알려주어 쉽게 찾았습니다. 먼저 사명대사 석장비를 보겠습니다.


 

 


석장비는 스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문으로 그 높이가 3.15m의 규모입니다. 사명대사의석장비는 지금까지 두 번의 수난을 겪었습니다. 사명대사 석장비의 비문은 홍길동전을 썼던 교산 허균이 직접 지었습니다. 그 후에 허균은 역적 모반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광해군에 의해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참수와 함께 허균의 모든 행적은 지워졌으며 사명대사의석장비 또한 허균이란 이름은 사라졌습니다.


 

 

 

 


현재 석장비는 열십자로 쪼개어졌던 것을 붙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인 1943년 일본인 합천경찰서장 죽포가 법보학원 학생들의 노트에 기록한 사명대사와 가토 기요마사가 나눈 대화 조선의 보물은 당신의 머리라는 “통쾌하고 능란한 대답”의 비문 내용이 조선의 민족혼을 일깨운다 하여 형사와 석수를 동원하여 깨부수려고 했습니다.


 

 


대사의 비신을 땅바닥에 눕혀 사 등분으로 쪼개려하자 하늘도 노했는지 뇌성벽력과 폭우에 놀란 석수는 작업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3일 후에 끝끝내 석장비를 결딴냈고 네조각중 한조각을 당시 합천 해인사 경내 주재소 출입문의 계단 돌로 사용하여 출입객이 밟고 들어오게 했습니다. 이에 죽포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통영서장으로 옮겨갔고 다시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충렬사의 현판과 영정을 훼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치 않았는지 10여 일 뒤에 그는 피를 토하고 급사했다 합니다.


 

 


사명대사의석장비를 쪼갠 사람도 있지만, 사명대사의석장비를 보고 그의 행적을 찬탄한 시를 남긴 일본인도 있습니다. ‘아부충가의 송운탑’ 시로 그는 1929년 불교 제64호, 43쪽에 ‘법지종자 해인사 배관기’를 실었습니다. 그는 새로 부임한 총독 일행을 수행하여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판과 사명대사 부도를 보고 감탄하며 “해인사의 장경판은 참으로 세계적인 지보라 하겠다. 또 송운대사(사명대사)의 부도를 참관할 때에 참으로 감개무량함을 이기지 못하였다"며 칠언절구 한시를 남겼습니다.


 

 


‘합천의 숨결 해인사의 향기’(내암사상연구회)에 수록된 그 시를 옮겨보면

“공산일편석부도(空山一片石浮圖) 빈산 한쪽에 돌로 만든 부도

심장사리부산우(深藏舍利負山隅) 산기슭에 사리 고이 묻고 서 있네

당년장사하안색(當年將士何顔色) 그때의 장군, 어떤 풍모를 하고 있었을까?

일임치의날호수(一任緇衣虎鬚) 의연하게 승복 걸쳐 입고 호랑이 수염 쓸고 있거늘“


 

 


쪼개진 석장비는 1958년 네 조각을 붙여 복원하였으며 그 흉한 모습이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때마침 필자가 찾았을 때 다시 석장비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현수막이 앞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복원된 석장비의 모습을 기대해봅니다.


 

 


허균이 직접 썼다는 사명대사의석장비 내용을 한글로 요약하여 세운 비문을 옮겨 보았습니다.

'자통홍제존자사명당 석장비'


“대사의 이름은 유정 자는 이환 호는 사명 또는 송운이라 히였고 풍천임씨다. 1544년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유학을 공부하였고 13세에 직지사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1561년에 선과에 합격하였고 특히 시를 잘 지어서 당시의 문인대가들과 시를 교환하여 명성이 크게 떨쳤다. 1575년 선종의 주지에 추대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서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서산은 그에게 마음을 닦는 공부를 제시해주었다. 대사는 크게 깨닫고 지금까지 흥미를 붙여온 문학과 학문에 대한 모든 상념을 버리고 마음공부를 체험하기 위한 고행의 수련을 3년 동안 계속한 뒤에 다시 국내 여러 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행을 계속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대사는 유점사에 있었는데 고성에 침입한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을 설득하여 인민을 살상치 못하게 하였다. 선조가 의주에 피난했음을 듣고 수백 명의 승군을 모집하여 순안으로 달려갔다. 이때 서산대사가 전국의 승군을 총지휘하고 있었는데 나이가 늙었으므로 이 책임을 대사가 대신 맡도록 나라에 추천하여 대사는 이 승군을 거느리고 명나라 장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는데 참가하였고 다시 도원수 권율의 부하에 들어가서 경상도 의령에 주둔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나라에서는 대사에게 당상관의 계급을 내렸다. 1594년 봄에 명나라 장군의 지시를 받고 부산에 있는 일본군 진영에 들어가 적장 청정과 세 번이나 회담하여 그의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때 청정이 조선에 보물이 있느냐고 물으니 대사는 서슴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는 보물이 없고 당신의 머리가 곧 우리의 보물이다라고 한 것은 유명한 애기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사는 군무에서 떠나지 않고 어떤 때는 팔공산과 금오산에 성을 쌓았고 또 명나라 장군 유정, 마귀 등을 따라 전공을 세우기도 하고 군량 조달에 힘쓰기도 하였다. 나라에서는 대사에게 동지중추부사의 관직을 내렸다. 1604년에, 사절로 일본에 가서 가강과 만나 평화회담을 마치고 우리의 포로 1,600명을 찾아서 돌아왔다. 뒤에 가야산에 들어가 있다가 1610년 8월에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골은 해인사 서쪽 기슭에 부도를 세워 안치하였다. 제자들은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올리고 대사의 화상을 모신 곳을 홍제암이라 하였다. 대사가 지은 시문이 많았으나 병란에 분실되고 제자들이 수집한 사명집 7권이 있다. 1612년에 허균이 짓고 한호가 써서 비를 세웠는데 이제 이를 한글로 요약하여 이 비를 따로 세운다

서기 1979년 12월“

 


 

 

 

석장비에서 오른쪽 돌계단을 50여m 오르면 산기슭에 단아한 모습을 한 석종형 부도가 있습니다. 사명대사의 부도로 높이 1.8m, 둘레 3.32m 규모로 매우 소박하여 사명대사의 풍모를 그대로 닮은 듯합니다. 그러나 사명대사 부도는 많은 석종형 부도와는 다르게 당당한 모습과 조형미를 갖춘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승탑이라 합니다.



사명대사 부도



 

 

 


돌을 깎아 2단의 기단을 만들었으며 둥근 형태의 윗단과는 달리 아랫단은 밋밋한 모습을 한 사각형에 반해 윗단의 윗면은 연꽃무늬를 돌렸으며 그 위에 종모 양인 몸돌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화룡점정의 마무리는 석종형의 부도 위에 연꽃봉우리 모양의 보주를 올려 더욱 세련된 모습입니다.


 

 


 

 


석종형 부도에는 현재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게 명문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왜인들이 사명당의 부도를 훼손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한 조치라 합니다. 임진왜란 때 많은 분이 전장에 나가 나라를 지키며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신분으로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운명을 보지 못하고 ‘살생을 금한다’는 규율을 깨고 활인검을 휘둘렀던 사명대사의 석장비와 부도 앞에서 다시금 머리를 조아려 봅니다. 

보물제1301호


 


 

 

 

 

 



◆사명대사 석장비및 부도 홍제암 정보 안내◆

★홍제암

★홍제암 주소: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홍제암 전화:055-932-7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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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가야산 홍류동천 농산정. 고운 최치원이 갓과 짚신을 걸어놓고 신선이되었다는 명경산수의 해인사 소리길  농산정을 여행하다. 농산정


빼어난 가야산 홍류동계곡 하면 얼른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857~?)으로 시대의 풍운아이자 대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던 분입니다. 필자는 고운 선생을 여행가라 말하고 싶습니다. 부산, 지리산, 가야산 등 영남에서 고운의 발자취를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00년도 훨씬 넘은 지금도 전국의 명산 대천에는 해운이니 고운이니 임경이니 하면서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고운 선생은 말년을 가야산에서 보냈습니다. 가야산 정상에서 흘러내리는 계곡 물은 섬섬옥수가 되어 바위를 돌고 넘고 뚫고 휘몰아쳐 빼어난 절경을 연출합니다.


 



선생은 가을 단풍이 붉게 온산을 뒤덮어 흐르는 계곡 물까지 붉게 물들인다 하여 홍류동천이라 이름 짓고 이곳에서 은둔하며 수도하고 유유자적한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곳이 오늘날의 농산정입니다.


 



농산정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칠언절구 둔세시 ‘제가야산독서당(濟伽倻山讀書堂)“에서 따왔는데 그 한시를 보면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 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고교류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 짐짓 흐르는 물로 온산을 둘러버렸네“





지금의 농산정 건너편에 치원대 또는 제시석으로 불리는 암벽에 새겨져있습니다. 그 한시의 맨 끝부분 ‘농산(籠山)’의 한 구절을 따와 농산정이라 하였는데 맨 끝에 ‘우암’이란 각자가 남아있어 우암 송시열의 한시가 아닌지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정자는 앞면 2칸에 옆면 2칸 크기의 정방형 목조기와 건물입니다. 농산정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1936년경 후손과 이 지역 유림에 의해 중건되었고, 여러 번 수리를 거치면서 1990년에 전체적인 보수공사를 하였습니다. 지금도 단청이 입혀지지 않은 서까래 등을 보면서 최근에 다시 한 번 부분적인 수리를 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농산정 현판에는 김영한이 쓴 농산정기와 찬양사 4수가 새겨져 있으며 고운 선생의 둔세시를 차운한 시 8수도 있습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12세에 홀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그곳에서 빈공과에 급제하여 지방관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 후 산동에서 황소가 난을 일으키자 선생은 ‘토황소격문’를 지어 최치원이란 이름을 널리 각인시켰습니다.





선생은 17년만인 29세에 고국 신라에 돌아왔으나 나라의 국운이 쇠퇴함을 알고 자천으로 변방을 전전하다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을 상소하였습니다. 신라의 국운은 난세로 세상이 혼탁해지자 894년 가솔을 거느리고 가야산으로 은거했습니다. 그때 입산하면서 남긴 시가 있습니다.





“승호막도청산호(僧乎莫道靑山好) 스님아! 푸른 산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

산호여하복출산(山好如何腹出山) 산이 좋은데 무슨 일로 다시 산을 나오는가!

시간타일오종적(試看他日吾踪跡) 시험 삼아 이다음에 나의 종적을 보아라.

일입청산갱불환(一入靑山更不還) 한 번 푸른 산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지금 농산정 옆 계곡에 홍류동 각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어느 해 엄청난 물난리로 ‘홍류’ 두 글자는 떨어져 나가고 지금은 ‘동’ 자만 남아 계곡에 남아 있습니다.


선생은 “다시는 시류에 얽매이어 속세로 나가지 않겠다”는 시처럼 그의 결연한 의지를 들어내었습니다. 고운은 가야산 홍류동계곡과 해인사. 매화산의 청량사 등에서 신선 같은 삶을 살다가 어느 날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는데 갓과 짚신만 지금의 농산정 자리에 남아있었습니다. 후세사람들은 이를 보고 농산정 뒤 골짜기로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며 최취밭골로 부릅니다.





농산정은 많은 선비가 이곳을 찾아들었으며 고운 최치원을 흠모하며 많은 차운시를 남겼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시 몇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점필재 김종직의 농산정 차운시입니다.

“청시광염사창만(淸詩光焰射蒼巒) 맑은 시의 광염은 푸른 봉우리 내쏘는데

묵지여흔궐륵간(墨漬餘痕闕?間) 먹으로 쓴 흔적은 새긴 바위에 희미해라

세상단운시해거(世上但云尸解去) 세상에서는 신선 되어 떠났다고 말을 할 뿐

나지마렵재공산(那知馬?在空山) 빈산에 무덤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네“





그리고 가야산 홍류동 계곡의 농산정에는 예은 최동식 거사의 칠언절구가 있습니다.

“何日文昌入此巒(하일문창입차만) : 최치원께서 언제 이 산에 들어왔던가?

白雲黃鶴渺然間(백운황학묘연간) : 흰 구름과 황학이 아득히 어우러진 때였도다.

已將流水紅塵洗(이장유수홍진세) : 이미 흐르는 물로서 세상의 때를 씻었으니

不必中聾萬疊山(불필중농만첩산) : 만 겹산으로 귀 막을 필요는 없으리라“




‘고운최선생둔세지’





선생은 1918년 해인사 이회광 주지스님의 부탁을 받고 홍류동 계곡에서 가야산 정상인 상왕봉에 이르기까지 19 명소를 설정하고 칠언절구의 시를 남겼는데 ‘가야십구명소제영’에서 유래한다 합니다 허목선생의 ‘가야산기’에서 “홍류동, 취적봉, 광풍뢰, 음풍뢰, 제월담, 분옥폭, 완재암, 낙화담, 첩석대, 무릉교, 칠성대, 채필암 등 무흘 12곡 모두 고운 선생이 이름을 붙였다”고 했습니다.




갓과 짚신을 벗어 놓고 최취밭골로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는 농산정.





농산정에는 사방으로 농산정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그 중 한 곳에 걸린 최영하의 ‘농산정’ 칠언절구입니다.

“流水聲中聳翠巒(류수성중용취만) 흐르는 물소리에 푸른 산 우뚝하니

淸風百世在斯間(청풍백세재사간) 맑은 바람 백 세 동안 여기에 있네

詩登雅譜亭名擅(시등아보정명천) 시의 족보에 등재되어 이름을 떨치니

長使人○仰若山(장사인○앙약산) 오래도록 사람이 산을 우러르게 하네“





이외에도 고운 최치원의 농산정 차운시는 여러 사람이 남겼습니다. 그중 영재 이건창(1852~1898)과 매천 황현(1855~1910)선생의 한시를 옮겨보겠습니다.

영재 이건창 선생은 당시 부친인 이강학이 안의 현감으로 재직 중에 이곳 농산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百丈紅流萬疊巒(맥장홍류만첩만) 백 발의 홍류동 만 겹 봉우리인데

神仙詩句墮人間(신선시귀타인간) 신선 시구가 인간 세상에 떨어졌네

白雲一片孤飛去(백운일편고비거) 흰구름 한 조각 외로이 날아가니

疑是先生尙在山(의시선생상재산) 선생이 아직 이 산에 계시는가“





그리고 매천 선생은 광양에서 태어나 구한말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빼앗기게 되자 통분하여 구례의 매천 정사가 있는 서재에서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애국지사입니다. 매천 황현 선생은 1887년 이곳 농산정을 올라 차운시를 남겼는데

“雷?百折鎖重巒(뇌랑백절쇄중만) 구불구불 겹겹 산 잠긴 속을 울리며

玉洞春流紫翠間(옥동춘류자취간) 옥동의 봄물이 붉고 푸른 사이로 흐르네

山自孤雲詩益著(산자고운시익저) 산은 고운의 시로 더욱 드러났지만

(籠山未必善藏山(농산미필선장산) 산을 에워쌌으나 반드시 산을 잘 감춘 건 아니구나“.





옛 선인들은 홍류동 계곡의 정취와 농산정의 빼어난 절경을 흠모하며 많은 시와 차운시를 남겼습니다. 실제 농산정을 여행하면 올곧은 소나무의 자태와 함께 비류낙화하는 계곡에서 고운 최치원 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역시 선인은 명경산수를 알아보는 것 같습니다. 이제 입추도 지났고 다시 처서를 지나면 곧 홍류동천은 하늘과 나무와 바위와 흐르는 계곡 물이 온통 이름처럼 붉은 단풍이 드는 장관을 연출합니다.


농산정 주소: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1

농산정: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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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우도여행/제주가볼만한곳)우도여행 비양도, 홍조단괴 해빈 해수욕장. 우도에서 비양도의 현무암과 독특한 해수욕장인 홍조단괴 해빈 해수욕장을 만나다.



제주에서 섬 속의 섬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곳이 우도입니다. 우도는 “물소가 머리를 내민 모습”을 하고 있어 우도라 하며 “물에 뜬 두둑”이라 하여 안평리로도 불립니다. 우도는 제주도의 여러 섬중에서 가장 큰 규모입니다.







2016/08/16 - (제주우도여행)삼천만의 관광지 제주 우도를 가다. 제주도 여행에서 우도 필수 관광지 검멀레해변 동안경굴, 우도봉, 우도등대를 여행하다,

2016/08/04 - (제주에서 우도 배타는 곳)성산항여객터미널. 우도가는 배는 성산항여객터미널에서 타면 됩니다. 성산 우도 여객선 시간표 참고


 



그 우두에는 비양도란 돌섬이 부속 섬으로 있습니다. 본섬인 우도 비양동에서 약 120m 거리에 있으며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곳에는 왜구의 침입을 본섬에 알렸던 봉수대와 바다에서 비양동 주민의 무사 안녕을 빌었던 해신당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제주도에는 두 곳의 비양도가 있습니다. 동쪽 우도면의 비양도와 서쪽 한림읍의 비양도로 동비양은 아침 해가 솟아오르는 곳이며 서비양은 해가 지는 곳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자연의 오묘함은 보면 볼수록 더욱 신기합니다.



해신당


동비양의 비양도는 이글거리는 일출의 기상을 느끼는 곳입니다. 비양도의 이름 또한 일출과 무관하지 않는데 섬에서 해 뜨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수평선에서 해가 날아오르는 것 같다 하여 비양도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비양도에는 전복, 소라, 해삼, 오분작이, 문어 등 해산물이 풍족하여 제주도 내에서도 많은 해녀마을이 있지만 비양동을 첫 번째 해녀마을로 꼽고 있습니다. 남다른 기를 자랑한다는 비양도는 배로 건너는 게 아니고 다리가 가설되어 누구나 쉽게 건너갈 수 있습니다.


 



돌의 기운도 받고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면 먼저 만나는 게 해신당인 ‘돈짓당’입니다. 마을의 모든 걱정과 액운, 무사 안녕과 풍어를 용왕신께 기원하는 곳으로 이곳은 이 지역 여성들의 공동체 참여공간으로 삶의 애환을 기원하던 독특한 장소입니다.


 



현무암이 펼쳐진 비양도에는 현재 펜션과 해녀들이 문을 연 횟집을 겸한 조그마한 식당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소원성취 돌의자가 있는데 아침 일출의 기운과 돌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로 인해 몸 안의 나쁜 독소를 정화해주고 또한 반대로 좋은 에너지를 받아들여 기쁨과 건강을 안겨준다 합니다. 돌의자에 한번 앉아보세요.


 



이제는 비양도의 끝자락인 등대로 가는 길입니다. 이곳은 밀물과 썰물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하다가는 바닷물에 갇혀 버리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등대주위의 울퉁불퉁한 바위 구경도하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면서 크게 심호흡을 하며 짭쪼름한 바닷냄새를 맡아도 봅니다.











이제 되돌아 나와 다시 봉수대 쪽으로 갑니다. 유일하게 초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1653년 조선 효종 14년에 염소를 사육했다는 기록이 탐라지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보기보다 염소의 먹이가 많았나 봅니다.











이곳의 봉수대는 망루 기능도 겸했는데 조선 시대 세종 때 봉수 시설 정비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군사적 통신시설로 이용하다가 1895년 봉수제가 폐지되면서 비양도의 봉수대도 함께 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순환버스로 이동하여 우도 홍조단괴 해빈인 백사장을 찾았습니다.


 



비양도 봉수대












천연기념물 제438호이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우두면 연평리 해안에 있습니다. 이곳은 우도와 본섬인 성산 사이의 넓은 해역에서 광합성 작용을 일으켜 바닷물 속에서 석회조류 중의 하나인 홍조류가 탄산칼슘을 침전시켜 홍조단괴를 형성하였습니다.


 






얕은 바다에서 성장하던 홍조단괴는 태풍 등에 의해 바닷가로 운반되어 해빈 퇴적물로 쌓이게 되었으며 우도 홍조단괴 해빈에는 지름 4~5m에 이르는 혼조단괴가 해안선을 따라 수백 미터 길이에 폭이 15m 정도로 퇴적되어 있습니다.


 







국내와 해외에서도 해빈 퇴적물이 홍조단괴로만 이루어진 경우는 매운 드문 일로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어 보존 관리하고 있습니다. 제주우도의 비양도에서 특별한 경험을 하면서 육지 해안에서 볼 수 없는 연평리 홍조단괴해빈의 특별한 해수욕장을 만났습니다. 또한, 우도의 명물인 땅콩아이스크림을 맛보며 시원한 우도 여행을 즐겼던 하루입니다.


 




우도여행시 교통편은 우도관광순환버스가 입니다. 1인 5천원이며 우도 관광시에 아주 편리합니다. 필자일행도 순환관광버스를 이용하여 우도관광을 했으며 간격은 대략 30분, 시즌에는 엄청 자주 오는것 같았습니다. 우도에서는 섬이 작아서 그런지 차와 오토바이 자전거등 여러 이동수단이 서로 엉켜 복잡합니다. 그래서 안전운행에 항상 조심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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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우도여행/제주가볼만한곳)섬속의섬 우도를 가다. 제주도 여행에서 우도 필수 관광지 검멀레해변 동안경굴, 우도봉, 우도등대를 여행하다, 제주 우도



요즘 제주여행의 대세는 ‘섬 속의 섬’을 여행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퍼뜩 이해가 안 간다고요 아! 그럼 설명하겠습니다. 원래 제주도는 섬인데 제주도에서 또 다른 섬을 찾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2016/08/04 - (제주에서 우도 배타는 곳)성산항여객터미널. 우도가는 배는 성산항여객터미널에서 타면 됩니다. 성산 우도 여객선 시간표 참고



 


제주도에서 삼천만의 관광지하면 우도입니다. 성산포 여객터미널에서 아주 가까워 쉽게 우도로 갈 수 있습니다. 우도 선착장에 내리면 제주 본섬만큼 차량과 관광객으로 정신이 없습니다. 저도 일행과 함께 우도 관광을 위해 먼저 우도를 순환하는 관광버스를 이용했습니다.


 

 


우도 마을버스도 있지만 5,000원에 순환 환승하는 관광버스가 정말 편리합니다, 우도 관광지마다 내렸다. 다시 구경하고 돌아와서 다른 관광버스를 타면 되니까 예. 관광버스는 30분 간격으로 계속 있습니다.


 

 

 

 


먼저 우도를 알아야겠습니다. 우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만 년 전~1만 년 전인 신생대 제4기에 홍수와 빙하를 몇차례 거쳐 생성되었는데 이를 홍적세 또는 빙하시대라 합니다. 이때를 인류의 조상이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제주도의 우도도 이때 화산활동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며 1697년 조선 숙종 23년에는 우도에다 국마장을 설치하여 군마를 관리했습니다. 그 후 차츰 사람들이 드나들게 되었고 1842년 헌종이 입경 허가가 시행하여 2년 뒤에 김석린 진사 일행이 처음 입도하여 정착하였습니다.


 

 

동안경굴, 검멀레 해변입구  


 

 


1900년에는 향교 훈장 오유학선생이 연평이라 불렀으며 입도한 주민들이 늘자 영일동, 비양동, 고수동, 주흥동, 우목동, 천진동 등 8개 동으로 마을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우도의 뜻을 보면 “물소가 머리를 내민 모양”이라 했는데 탐라지 기록에는 1651년 효종 2년 이원진 목사가 명명하였다합니다.


 

우도봉 입구 

 

 


처음 우도는 ‘물에 뜬 두둑’이라하여 연평리로 불리며 구좌읍에 속했습니다. 차차 인구가 늘자 1986년 4월 우도면으로 승격하였습니다. 우도에는 우두만의 볼거리가 있습니다. 이를 우도8경이라 합니다. 주간명월, 야항어법, 천진관산, 지두청사, 천포망도, 후해석벽, 동안경굴, 서빈백사입니다.


 

 


그중 관광버스를 타고 첫 번째 만나는 게 우도봉과 동안경굴이 있는 검멀래입니다. 검멀래에서 보는 우도봉과 해안절벽을 이루는 석벽, 동안경굴 등 볼거리에서 가장 좋습니다. 시간도 시간이고 해안가로 내려가지 않고 그냥 전망대에서 조망을 즐겼습니다.


 

 


동안경굴과 후해석벽을 보려면 바닷가에 있는 보트를 타야합니다. 우리 일행도 보트타고 싶었지만, 우도봉 트레킹과 시간 제약으로 원하는 만큼 시간을 할애할 수 없는 게 많이 아쉬웠습니다. 연둣빛과 시꺼먼 해안 절벽이 무시무시하면서 장관입니다.


 

 


생생 달리는 보트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완전 더위를 잊게 합니다. 그래도 우도 8경의 경안동굴은 알아야겠죠. 안내판을 보면 1601년 김사헌이 쓴 남사록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동쪽 바다 가운데 있으며 해안까지 거리는 10리, 섬의 둘레는 100리이며 닥나무가 많은 섬이라 합니다. 섬의 동쪽에 돌구멍이 나있어 배 한 척이 숨을 만하다 하였고 조금 더 가면 5~6척의 배가 숨을 수 있는 동굴이 있으며 왜선이 이곳으로 몰래 숨어들면 며칠 동안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합니다.


 

 


돌구멍, 해식동굴, 고래굴, 코구멍동굴로도 불립니다. 이곳은 신령한 용이 사는 곳으로 7~8월경에는 고기잡이 배가이곳을 지나면 용이 노하여 갑자기 큰바람이 일고 천둥과 비바람이 몰아쳐 나무를 뽑아내고 농사도 망가뜨리게하였습니다. 건너면 오소포에서도 북소리, 악기 소리, 개와 닭 등 짐승의 소리라도 들리면 바람과 벼락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했습니다. 참으로 성질이 고약했던 모양입니다.


 

 


세종 2년 조선왕조실록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는데 “우도봉에는 왜선이 숨는 가장 요해 지역으로 왜적이 밤을 타고 들어오면 군사가 의지할 곳이 없어 대응하기 어려우니 성을 쌓게 하여 적에 대응하게 하였다” 했습니다. 이곳 일대를 검멀레 해변으로 부르는데 검은 모래를 뜻합니다. 우도에 왔다면 우도 등대가 있는 우도봉을 안 가볼 수 없습니다.


 

 

 

 


입구의 나무계단을 오릅니다. 우두 등대에서 먼저 만나는 게 등탑입니다. 1906년 처음 설치하여 97년간 우도 부근의 안전항해를 책임졌으며 2003년 11월 임무를 마치고 등탑은 은퇴했습니다. 그러나 그 항로표지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원형대로 영구 보존하고 있습니다


 

 

 

 우도봉 우도등대 역사관

 

 

 

 


제주도 최초의 등대인 우도 등간은 우도 등대 점등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5년 12월 원형대로 복원하여 1906년 3월 점등하였으며 그 후에 전면에 있는 벽돌을 쌓은 조적조 등대(구동탑)로 변경했습니다. 우도의 많은 여행지중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모이는 검멀레해변과 동안경굴, 석벽, 우도등대와 우도봉에서 우도의 모든 것을 알아보세요.


 

 

 

 

 

 

 

 

 

 

 

 

 

 

 

 

 

 

 

 


 옛 우도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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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맛집)제주공항맛집 제주마당. 점보철판통갈치조림이 한정판매라며 갈치조림으로 아쉬움을 달레야 했던 제주마당, 국물이 자작한  갈치조림도 쨩!!! 제주마당



2박 3일 제주여행에서 마지막 날 우도 여행을 하였습니다. 우도를 한 바퀴 돌고 공항으로 돌아가면서 저녁을 먹기 위해 이른 시간이지만 4시쯤 찾아갔습니다. 우리의 명가이드이신 지인은 이곳 갈치가 제작한 철판에 통째로 나오는데 ‘점보 철판 통 갈치조림이’ 아주 먹을만하다는 평가를 곁들였습니다.






◆제주공항맛집


2014/09/29 - (제주맛집/신제주맛집)제주공항맛집 이가촌. 이가촌은 엄마의 손맛으로 만든 고등어 조림이 맛있습니다.

2016/07/22 - (제주맛집)제주공항맛집, 용두암맛집 도두해녀의집. 그 맛에 반하게 된다는 제주 현지인이 추천한 물회 맛집 도두해녀의 집, 특별하다는 특물회 먹고왔습니다.




 


 나도 최근에 티브이에서 갈치를 통째 철판에 올려 조림과 구이로 나온다는 맛집 프로를 보고 정말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실제로 눈으로 본다고 생각하니 많은 기대를 했습니다. 제주여행 덕분에 겸사겸사 본다고 생각하니 얼렁 먹고 싶었습니다.



 


제주마당은 제주공항과 정말 가까웠으며 주택가 비슷한 곳에 있었습니다. 제주의 유명관광지가 아닌 이런 주택가에서도 제주 맛집으로 알려져 손님이 넘쳐나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음식점 앞 주차장이 꽉 차 부근 골목에 주차하고 제주마당으로 직행했습니다.


 

 


제주에서 반드시 먹고 온다는 음식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뭐 사람들 따라 다르지만, 성게국, 말고기, 단고기와 제주 갈치 등입니다. 보통 생선은 어망으로 통째 잡지만 갈치는 낚시로 한 마리 한 마리 잡아 올립니다. 그만큼 정성을 기울여야만 하는 생선입니다.


 

 


또한, 제주 갈치를 은갈치라 하는데 갈치의 번쩍이는 비늘도 손상을 입으면 상품성이 떨어진다 하여 생선 중 가장 대접을 많이 받으며 애지중지하여 우리 식탁에 올라옵니다. 제주하면 갈치 좋은 거 다 아시죠.


 

 


큰 기대를 하고 ‘점보 철판 통 갈치조림’‘ 두 개를 주문했는데 한정판매라고 지금 안 된다며 ’문어전복철판통갈치조림‘만 된다고 했습니다. 일행은 갈치 먹으러 왔지 문어전복은 제주여행에서 횟집이며 2박 3일 동안 실컷 먹었다며 그냥 갈치조림을 먹자며 의견이 갈치조림으로 통일했습니다.


 

 


사각의 긴 철판에 폼나는 ‘점보 철판 통 갈치조림’을 기대했는데 모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하하 맛집 블로그 사진빨만 빼면야 갈치 통마리나 토막갈치나 먹는 사람은 그게 그거 아닌가요??? 넓은 냄비에 국물이 자작하게 들어간 갈치조림도 아주 좋았습니다.


 

 


 

 



어릴 때 엄마가 잔 갈치로 갈치조림을 해주던 꼭 그런 맛이었습니다. 그때는 갈치도 귀하고 해서 먹기 힘들었으며 갈치국물에다 밥을 비며 맛있게 먹어 섰는데 갈치 맛이 옛날 생각을 나게 했습니다. 갈치 국물에 밥을 비벼 살을 발라낸 갈치와 함께 먹는 그 맛은 갈치조림의 최대매력입니다.


 

 


꿩대신 닭이지만 밥 한 그릇 뚝딱 하고 비행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제주공항으로 황급히 이동했습니다. 제주마당에서 제주 떡인 오메기 떡과 돈가스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원한 콩나물은 갈치조림의 약간 매콤함을 잡아주었데 지난밤 숙취까지 해결해주었습니다.


 

 


제주마당의 갈치구이·조림은 제주 향토 음식으로 지정되었으며 국내산만을 재료로 사용하여 신선한 재료 본연의 맛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다음 제주여행 때는 이번에 먹지 못했던 점보 철판 통 갈치조림을 꼭 맛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점보철판통갈치조림 상표등록증이 입구에 떡하니 붙어 있습니다. 

 

제주마당은 오후 2시30분~3시까지는 직원들 식사시간이라 이 시간만은 피해주세요 

 

 점보철판통갈치조림 가격표

 

 

 

 

 

 


◆제주공항맛집 제주마당 영업정보◆


상호:제주마당

★주소: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914-2

★전화:064-749-5501

★메뉴:갈치회, 고등어회, 갈치조림·구이, 고등어조림·구이,

점보철판통갈치조림,문어전복철판통갈치조림 외

★주차장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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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열전)경상도 남자가 처음 요리한 다른 반찬 필요없는 무더위를 이기는 나의 레시피 돼지김치볶음.


요즘 무더위를 두고 가마솥더위니 찜통더위니 하면서 연일 난리부르스입니다. 진짜 더워도 적당히 더워야 하는데 삼복더위라고 한번 높아진 수은주는 천장까지 붙을 기세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대한민국 전체가 열사의 땅이 되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날씨가 더워도 너무 덥다 보니 입안에 가시가 돋친 듯 밥맛은 뚝 떨어지고 휴가라고 받았지만, 뙤약볕에 밖으로 나가기도 겁나고 해서 집안에서 끼니해결을 해야 했습니다.


 

 


아이들도 못 본 지 오래고 어부인도 출근이고 어디 입맛 돌아오게 하는 매콤하면서 건강한 밥상이 없을까 이 궁리 저 궁리를 해봤습니다. 냉장고 안에 번쩍 생각난 게 구워 먹고 남은 삼겹살 두 줄이었습니다.


 

 


경상도 남자라 평생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았는데 요즘은 세월이 세월이라 자연히 그에 맞추어 쫓아가는 게 사람인가 봅니다. ㅎㅎ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음식을 만들어야 끼니도 해결하고 배고픔이 체면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생각한 게 삼겹살을 구워 총총 썬 김치와 함께 볶으면 '밥도둑' 레시피는 끝입니다. 김치냉장고의 김치통에서 먼저 지난겨울 먹었던 묵은김치를 총총 썰었습니다.


 

 

 

 


그리고 냉장고 한쪽에 있던 삼겹살도 따로 불판에 올려 구웠습니다. 지글지글 삼겹살이 노릇하게 익으면 총총 썬 김치를 불판에 올리고 따로 삼겹살도 먹기 좋게 가위질을 합니다. 그리고 함께 섞어 김치와 삼겹살을 함께 볶아줍니다.


 

 


삼겹살에도 붉은 김치 색깔이 스며들고 김치와 삼겹살이 적당하게 조화를 이루었다면 요리는 끝입니다. 나도 백종원이가 될 수 있습니다. ㅋㅋ 이제 깨끗한 접시에다 밥을 담는데 접시의 반쪽만 사용합니다.


 

 

 

 


나머지 반쪽 접시에는 요리한 돼지 김치 볶음을 놓으면 오늘의 요리가 모두 끝납니다. 요리 끝. 이제 얼마나 맛있게 되었는지 맛을 보겠습니다. 역시 숙성이 잘된 김치만 있다면 다른 양념장이 필요 없습니다.


 

 

 

 


그만큼 맛깔스러우며 무더위에 잃었던 입맛을 돌아오게 하는 밥도둑 돼지김치볶음, 정녕 너를 밥도둑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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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맛집)성산일출봉 종달리 해안 맛집 소금바치 순이네. 무더위를 삭혀줄 매콤한 돌문어 볶음 조합이 인상적인 제주도 구좌읍 맛집 소금바치 순이네 돌문어 볶음.

 


제주도 맛집이라 해서 찾았던 구좌읍 종달리 바닷가의 “소금바치 순이네”. 소금바치 순이네도 순이네지만 식당 앞 종달리 해변이 압권이었습니다. 그래서 밥을 먹고 해안가를 잠시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우리 일행이 식당에 들어간 시간이 아마 오전 11시 30분쯤이었습니다. 점심시간으로는 조금은 이른 시간인지 우리뿐이었는데 잠시 후 두 팀이 들어왔습니다. 그만큼 한적했습니다.


 

 


요번의 제주여행에서 우리 여행의 리드는 모두 인터넷을 검색하여 여행코스와 맛집 계획을 세웠는데 그중 이곳 소금바치 순이네도 한곳입니다. 돌문어 볶음이 유명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제주여행에서 매콤한 돌문어 볶음을 꼭 먹고 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일단 유명해서 반드시 먹고 온다는 돌문어 볶음 대(大)자를 양쪽에 주문했습니다. 밑반찬은 일반음식점과 대동소이하지만, 종달리 해안에서 나오는 미역과 해초는 인기 짱이었습니다. 우리 집도 바닷가라 매일 짠내를 맞고 살지만 역시 부산 짠 내와 이곳 미역의 짠 내는 완전 다른 맛이었습니다.


 

 

 

 


간판의 ‘순이네’는 알겠는데 그 앞에 ‘소금바치’ 이름이 아주 정겹습니다. 그래서 알아봤습니다. 예전에는 이곳이 제주에서 가장 큰 염전이 있었고 많은 소금을 생산했던 곳이라 아마 이름도 이 소금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소금을 많이 생산하여 소금 뒤에 ‘바치’는 접미사를 뜻하는데 ‘점바치’처럼 명사 뒤에 붙어 “그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의 뜻을 더하여 “소금을 만드는 사람”을쯤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주 방언에 보면 ‘소금바치’는 ‘방아깨비’로 나와 있습니다.


 

 

 

 


방아깨비 하면 모두 아시죠. 어릴 때 양쪽 다리를 잡고 있으면 다리가 길어 마치 방아를 찧듯 몸을 앞뒤로 끄떡끄떡하며 움직이는 곤충 말입니다. 종달리 해변에는 방아깨비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그래도 “소금을 만드는 사람”이란 뜻의 소금바치가 맞는 것 같습니다.


 

 


“‘소금바치 순이네’의 옥호가 뭐가 중헌디, 장황하게 설명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실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해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소금바치로 노닥거리는 사이에 돌문어 볶음이 나왔습니다.


 

 


초록색 모자를 눌러쓰고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는 모습이 마구마구 식욕을 돋웠습니다. 마침 제주도의 숨구멍이라는 산굼부리와 미로 공원을 여행하고 왔던 뒤라 배도 출출했는데 빨리 먹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돌문어 볶음쯤 된다면 요즘 이미지 좋은 사진이 천지인데 돌문어 한 마리쯤 떡하니 올라와 있어야 하는 게 아닌지 히히 만구 내 생각인가요. 그런데 먹는 방법이 있다나요.


 

 


깻잎 모자를 옆으로 걷어내고 홍합을 모두 까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홍합과 잘게 썰은 문어 그리고 국수와 함께 먹으면 되는데 국수가 들어간 돌문어 볶음입니다. 조금 매콤한 게 젊은 층에는 인기인지는 모르지만 50대 중반 이후인 우리 일행이 먹기에는 조금 맞지 않았습니다. 매운거 좋아하는 사람은 다르겠지만요. ㅎㅎ


 

 


먹으면서 모두 못마땅한 모습이었습니다. 제주여행을 기획했던 분도 이번에는 실패다며 저녁 맛집을 기다리라 했습니다. 저희 일행에게는 조금 매웠던 것 같습니다. 아마 제주여행에서 한 번쯤은 괜찮을듯하지만 일행 중 나이 드신 분이 있다면 맵다 할 것도 같습니다. 참고하세요


 

 

 

 


그래서 밥하고 함께 먹었더니 딱 좋았습니다. ㅎㅎ 그리고 아무리 볶음이지만 돌문어 볶음에 물기 하나 없는 거 보고 정말 신기했습니다. 요리를 어떻게 하면 이리 수분하나 없이 돌문어 볶음이 되는지 신기 신기,. 다 먹고 밖을 나왔더니 오른쪽에 수족관이 있었습니다.


 

 

 

 


소라와 문어 등이 보였는데 아마 음식 재료에 사용하는 어패류등을 보관하는 곳인가 봅니다. 이제 종달리 해안을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이 길이 제주올레길하고 연결되고 앞에 보는 종달리 전망대 배까지 걷기로 했습니다. 정면에 우도와 성산 일출봉이 정말 가까이 보였습니다.


 

 

 

 

 

 

 

 

 

 

 

 


‘족은 영산이 왓 불턱’과 ‘엉 불턱’으로 불리는 바닷가였는데 검은 화산석이 천지 삐까리이며 지명도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바다로 들어갈 준비 및 작업 중 휴식하는 장소”를 말합니다.


 

 

 

 

 

우도 


엉 불턱에서 엉은 “푹 들어간 곳을 말하며” 종달리 전망대 옆에 툭 튀어나간 자연형 불턱으로 염소 머리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어 ‘염소부리코지’라고도 합니다. 데크를 따라 걷는 길은 종달리 전망대까지 이어지고 전망대의 배에는 망원경도 설치되어 멀리까지 구경 가능합니다.


 

 

 

 

 

 


우도와 성산 일출봉을 더욱 가까이에서 만납니다. 소금바치 순이네에서 돌문어 볶음을 먹었다면 잠시나마 종달리 해안을 걸어보세요. 그리고 순이네 주차장에 한쪽의 커피집에서 시원한 냉커피로 더위도 달래고 다음 여행지로 출발했습니다.


 

 성산일출봉

 

염소부리코지

 

 

 

종달리전망대

 

 

 

종달리 해안은 수국 길이 조성되어 있다는데 우리가 찾았을 때는 너무 늦어 수국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게 정말 아쉬웠습니다.


 

 

 

 


◆성산일출봉맛집 종달리 해안 맛집 소금바치 순이네 영업정보안내◆

★상호:소금바치 순이네

★주소: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42-5(해맞이 해안로 2196)

★전화:064-784-1230

★메뉴:돌문어 볶음, 보말국, 옥돔구이 등

 ★주차장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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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행/제주가볼만한곳)김영갑갤러리 두모악. 제주도의 사진작업은 수행이라 할 만큼 영혼을 바쳤던 김영갑의 사진세계를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에서 접하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찾았습니다. 요즘 제주도의 필수 여행지이며 사진으로 주는 감동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는 곳입니다., 내가 아시는 분 중에는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에서 김영갑님의 대형 작품과 마주 했는데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합니다.





 



 

 


저도 제주만을 사진으로 담았다는 김영갑님 갤러리 두모악이 궁금했습니다. 눈물이 저절로 주르르 흐르더라는 감동을 느꼈다는데 저는 그저 무덤덤했습니다. 살아오면서 그만큼 감정이 메말란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김영갑님은 1957년 충남 부여 출생으로 서울에서 거의 생활했습니다. 1982년 처음 제주도를 찾아 오름을 오르내리면서 사진 작업을 하였고 급기야 제주의 자연에 빠져 1985년에는 제주도에 거처를 잡고 정착하였습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다 그러하듯이 선생님은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당근과 고구마로 허기를 채웠고 제주의 구석구석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선생은 제주도에서의 사진 작업을 수행이라 할 만큼 그의 모든 영혼을 바쳤다 합니다.


 

 

 

 


제주도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사진으로 승화시킨 김영갑님은 폐교된 초등학교를 구해 잠자든 제주도의 살아있는 사진을 전시하는 공간을 마련하였고 그러던 어느 날 찾아온 병마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셔터를 누르려면 손이 떨렸고 허리가 아파와서며 나중에는 걷지도 먹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선생의 병명은 루게릭병이며 3년을 넘기기가 힘들다는 시한부 진단을 받았습니다.


 

 

 

 


선생은 절망 앞에 툴툴 털고 일어나 다시 주어진 삶을 살기 위해 폐교를 사진전시관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은 2002년 여름에 개관하였습니다.


 

 

 

 

 

 


선생님은 투병생활을 한 지 6년만인 2005년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계절인 5월 꽃피는 두모악에서 영원한 제주인으로 영면했습니다.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을 들어서는 입구부터는 제주 특유의 화산 돌로 담장을 만들었고 화단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손으로 이 모든 나무와 풀, 돌이 아름답게 하나의 자연 정원으로 가꾸어져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은 “2006년 잘 가꾼 자연·문화유산”에 선정되었습니다. 전시관 내부는 현재 일체 사진과 동영상 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부 사진은 입장권 대신 지급해주는 김영갑 선생님의 작품을 담은 기념엽서를 올렸습니다.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에서 김영갑님의 작품사진을 보면 주책없이 흐르는 눈물의 감동을 느껴보세요.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영업정보 안내◆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주소:제주시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로 137(삼달로 437-5)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전화:064-784-9907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홈페이지:http://www.dumoak.co.kr/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관람시간:

봄(3월~6월) 가을(9월~10월): 9:30~18:00, 여름(7월~8월) 9:30~19:00,

겨울(11월~2월) 9:30~17:00, 관람시간 30분전 입장마감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휴관일: 매주 수요일, 신정, 추석, 설 당일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입장요금:

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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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


 ☞(서울마포구여행/서울마포구가볼만한곳)절두산천주교순교성지. 병인박해로 천주교 순교현장인 절두산순교성지를 여행하다. 절두산천주교순교성지



서울 양화대교 인근인 절두산 순교 성지를 보고 왔습니다. 절두산 순교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로 많은 천주교인이 이곳에서 순교했습니다. 원래 잠두봉으로 불렸던 봉우리입니다. 병인년에 9명의 선교사 처형 책임을 묻는다며 프랑스함대는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에 상륙하였습니다. 

서울 양화대교 인근인 절두산 순교 성지를 보고 왔습니다. 절두산 순교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로 많은 천주교인이 이곳에서 순교했습니다. 원래 잠두봉으로 불렸던 봉우리입니다. 병인년에 9명의 선교사 처형 책임을 묻는다며 프랑스함대는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에 상륙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양으로 더럽혀진 이곳을 천주교 신자인 서학의 피로 씻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원군은 나라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쇄국정책을 더욱 공고히 하려고 전국에다 척화비를 세우고 수많은 천주교인을 잡아다 이곳 잠두봉에서 목을 잘랐습니다. 그 후 신자들 사이에서 잠두봉을 절두산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신자들을 이곳 절두산에서 처형함으로 프랑스함대의 조선 침략 책임을 신자에게 돌리려 하였으며 그 본보기를 보이려 했습니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절두산 순교는 무명 5인을 합해 29명이지만 이외에도 많은 순교가 있었다 합니다. 1956년 순교터 확보운동의 목적으로 그해 12월에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이곳 잠두봉 부지를 확보하였으며 1965년에 순교기념탑을, 병인박해 100주년인 1967년에 절두산 순교자를 위한 기념성당과 박물관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68년 병인박해 순교자 24명의 시복이 이루어졌으며 기념성당 지하에는 순교자 유해 안치실을 설치하였습니다. 1997년 11월에 양화진·잠두봉이 국가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양화진공원과 양화진 외국인 묘원등을 여행할 수 있습니다. 








절두산 순교성지

주소 서울 마포구 합정동 96-1(토정로6길)

전화:02-3142-4434



 

 

 

 

 

 

 

 

 

 

 


팔마를 든 예수상

“죽음으로써 믿음을 증언한 순교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음을 상징하는 팔마를 손에 들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상(최봉자 수녀 작품)”



 

 

 

 

성 오한 바로로 2세 교황 

 

 

 

 


'절두산성지에서 첫 순교한 가족상'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천주를 섬긴다는 이유로 이땅에서 약 100년간에 걸쳐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 수많은 순교자의 신앙을 공경하기 휘하여 세운 기념상. 절두산에서 처형된 첫가족 순교자로 병인박해때 순교한 이의송(프란치스코)와 그의 처 김이쁜(마리아), 아들 봉익(베드로)을 형상화 하였으며 서울대학교 최종태 교수 작품”



 

 

 

 

 

 

 

 

 

 

 

 

 

 

 

 

 

 

 

 

 

 

 

 

 

 

김대건신부 

 

 


오성 바위로 다섯 성인이 잠시 쉬어 갔다는 바위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인 다블뤼(1818~1866) 주교, 위앵(1836~1866)신부, 오메트로(1837~1866) 신부, 황석두(루카, 1813~1866), 장주기(요셉, 1803~1866)는 처형지인 갈매못으로 끌려가면서 아산군 음봉면 길가의 넓은 바위에서 쉬면서 신앙을 다짐했던 바위로 ‘복자 바위’로 불리다가 1984년 다섯분 모두 성인품에 오르면서 ‘오성 바위’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문지방돌

 


 대원군척화비

 

 김대건신부님상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옛 십자가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요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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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숙박)제주한화리조트. 자연공원 같은 휴식공간에서의 제주숙박을 원한다면 제주 한화리조트도 괜찮을 듯....제주한화리조트.


이번 여름에 8명이 제주 여행을 하면서 2박 3일 묵었던 숙소는 한화 리조트였습니다. 역시나 여러 사람이 묵고 생활하기에는 리조트가 편했는데 내부에서 모든 게 해결되는 완벽한 부대시설이 좋아 여름 휴가차 겸사겸사 떠났던 여행이 더욱 즐거웠습니다.







 



먼저 여행에서 잠자리가 편해야 합니다. 한화리조트는 한라산 기슭의 더 넓은 부지에다 조성되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침에 일어났더니 창문으로 들려오는 온갖 새소리는 “어서 빨리 일어나세요? 여행을 떠나야죠”하는 듯이 쫑알쫑알 소리를 내며 우리를 깨우는 것 같았고 맑은 공기와 제주도만의 자랑인 삼다수인 청량수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본관건물




그리고 한화리조트가 위치한 곳이 조금 높다 보니 내려다보는 해안선의 분위기가 역시나 최고였습니다. 밤바다의 야경과 도심의 불빛을 내려다보는 맛은 한화리조트만의 자랑입니다. 또한, 주차장도 워낙에 넓어 공원 같은 분위기라 이른 아침에 나왔더니 산책하는 투숙객 정말 많았습니다.





우리는 숙소에 들기 전에 먼저 본관 건물에서 수속을 밟았습니다. 참고로 한화리조트는 동관과 서관 그리고 본관인 3동의 건물이며 390개의 객실을 갖추었습니다.









우리 일행 중에서 여름 휴가철 직장에서 직원들에게 한화리조트 숙박이 내 걸렸는데 수많은 사람이 지원하여 일행이 행운을 얻어 한화리조트 숙박권을 차지하게 되어 이번에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여행 경비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게 숙박비인데 덕분에 여행경비의 부담감을 ‘팍’ 줄여주는 효과를 했습니다.







 

 

안내데스크 수속밟기


한화리조트는 모두 5인과 2인실이 기본인데 한사람 추가시 추가 요금과 침구 추가 요금을 지불해야합니다. 5인 객실 구성을 보면 방 2개에다 거실과 욕실이 기본이며 우리가 묵었던 방은 온돌방 구조였습니다. 2인 객실은 방 1개, 욕실, 거실이 기본으로 럭셔리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한화리조트는 온돌형과 침대형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한롸리조트 부대시설




 한화리조트내부 휴식공간

 

거실


거실과 큰방에는 에어컨이 설치되었고 티브이, 냉장고, 전기밥솥, 드라이기, 전기포트등 기본적인 가전제품과 식기류가 갖춰져 아침은 리조트에서 든든하게 해결하고 나올 수 있어 정말 좋았고 전체적인 공간이 넓어 편리했습니다.



주방




여럿이 친구 또는 가족끼리 여행을 떠나 숙박시설을 찾는다면 복잡한 시내 숙박시설보다 한적하고 멋스러운 한화리조트 숙박도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5인에 맞는 요와 이불 


큰방 화장대와 오른쪽 드라이기


우리는 직장에서 당첨되어 숙박요금을 잘 몰랐지만, 주말과 주중, 준성수기 성수기, 극성수기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리조트는 회원제 운영으로 일반 투숙객은 정상요금이 적용되며 회원요금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큰방


작은방




지인중에 한화리조트 회원분이 카드를 대여해주면 대여요금이 적용되는 방벙도 있어 저렴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주 한화리조트 객실은 예약이 기본입니다. 제주 한화리조트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hanwharesort.co.kr/irsweb/resort3/resort/rs_room.asp?bp_cd=1100&rm_cd=FAM

5인 객실과 2인(럭셔리)객실은 같은 요금이 적용됩니다.



욕실




 

제주 한화리조트 객실 요금표입니다. 참고하세요



◆제주한화리조트 영업정보 안내◆

☞제주한화리조트주소: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명림로 575-107(프라자 CC 옆)

제주한화리조트문의 전화:064-725-9000

제주한화리조트 구성:5인객실 340개, 2인객실 40개.

온돌방과 침대방

제주한화리조트 예약 홈페이지:http://www.hanwharesort.co.kr/irsweb/resort3/resort/rs_room.asp?bp_cd=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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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행/제주가볼만한곳)산굼부리. 제주도의 숨구멍은 어디.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 산굼부리 여행. 


제주에서 가장 큰 분화구는 어디일까요??? 정답 한라산 백록담요 땡!!! 아니 그럼 제주도에 한라산 백록담보다 더 큰 분화구도 있습니까?. 예 물론 있지요. 그곳은 바로 산굼부리이며 일명 제주도의 숨구멍이라 부릅니다.










 


사람마다 모두 머리에 숨구멍을 두고 있듯이 제주도는 이곳 산굼부리가 숨구멍이라는 사실……. 이곳을 확 막아뿐다면 제주도는 그만 팍 죽고 말 정도로 깊이와 넓이에서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산굼부리는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의 해발 400m에 위치합니다. 정확하게 해발 438m이며 제주의 360개 기생화산에서는 제법 높은 축에 들어갑니다. 분화구의 외부 둘레가 2,067m이며 분화구 내부 둘레는 756m 그리고 그 깊이는 자그마치 132m로 꼭 절구통처럼 깊게 푹 파여 그 넓이가 자그마치 30㎡에 달해 한라산 정상 백록담보다도 크고 깊다고 합니다. 이제 그 궁금증이 풀렸습니까.


 

산굼부리 요금/운영시간 

 

 

 

 


일반적인 제주 화산의 형태는 대부분 분화구를 갖고 있지 않는데 또한, 분화구를 갖고 있더라도 넓은 대접 이를 엎은듯하거나 말굽의 형태입니다. 산굼부리 분화구는 기존의 분화구와 다르게 용암이나 화산재의 분출 없이 폭발만 일어나 구멍만 남게 되는 마르(Marr)형 분화구로 우리나라 뿐만 아닌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형태입니다.


 

 

 

 


이곳 분화구 내부에 서식하는 식물은 제주도와 한라산에서 자라는 식물과도 격리 상태로 오랫동안 살아와서 차이가 나 식물 분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분화구와 주위도 지질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어 천연기념물 제263호에 지정보호 관리되고 있습니다.


 

 

 

 


특히 산굼부리를 오르는 오른쪽 사면에는 참억새가 군락을 이루는데 가을에는 한들거리는 억새군무로 장관을 연출합니다. 분화구 내 사면에는 햇볕이 잘 드는 쪽과 그러지 못한 곳이 식생 분포의 차이를 보이입니다.


 

 

 

 


일조량이 좋은 북쪽 사면에서는 붉가시나무, 후박나무, 구실잣밤나무, 생달나무 등 난대림의 상록활엽수가 자라며 그 아래층으로는 금새우난, 자금우, 겨울딸기 등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조량이 충분하지 않은 남쪽 사면에는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산딸나무, 단풍나무 등 온대성 낙엽수 군락입니다.


 

 

 

 

 

 


이외에도 산굼부리에는 이른 봄부터 온갖 식물이 다투어 피는데 세복수초, 변산바람꽃, 고란초, 눈괴불주머니난, 벌깨냉이, 각시족도리 이외 약 450종류의 식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왕쥐똥나무 군락, 상산 군락, 복수초군락, 변산바람꽃이 군락을 이루고 노루와 오소리 등과 조류 파충류 둥 다양한 동식물의 보고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굼부리에는 그럴 뜻한 전설이 있습니다.

공주와 사랑에 빠진 은하 세계의 한감 청년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옥황상제는 하늘의 별도 다스렸는데 그중에는 한감이라 불리는 청년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옥황상제는 여러 공주중에 특히 셋째딸을 귀여워했습니다.


 

 

 

 

 

 


예쁘고 착하며 총명하고 상제의 말을 잘 들어 누구보다도 말잣딸(셋째공주)을 귀여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옥황상제의 생일이 되었고 많은 손님을 초대했는데 한감 청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잔칫날 공주와 한감은 서로 한눈에 마음이 끌렸으며 사랑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두 청춘남녀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서로 만나기를 반복하다 그만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물어 옥황상제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습니다. 상제는 진노하였으며 급기야 공주와 한감이 상제 앞에 잡혀 왔습니다. 공주와 한감은 용서를 빌었지만, 좀체 상제의 화가 풀리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상제의 화가 풀릴 때까지 귀양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들은 인간 세상의 경치 좋은 곳을 찾아보다 제주도의 산굼부리에 자리를 잡고 부부가 되어 귀양살이를 시작하였습니다. 한감은 산을 쫓아 다니며 사냥을 하였고 공주는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며 살았는데 이들은 식성이 서로 맞지 않아 부부싸움이 잦아졌고 어쩔 수 없이 둘은 따로 살기로 하였습니다.


  

 

 

 

 

 

 


공주는 마을로 내려왔는데 오늘날의 제주시 남문 밖 천년 팽나무 아래에 거처를 정했으며 현재 각시당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 각시당을 보고 지금도 옥황상제의 셋째딸인 말잣공주가 귀양을 왔다고 마을 주민은 믿고 있습니다. 각시당은 마을 사람들에게 복과 건강과 행복을 내려주는 마을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한감은 산굼부리에 남아 산짐승들을 돌보며 살게 되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제주도에는 사냥이 성행했는데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야만 별다른 사고 없이 큰 사냥감을 잡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도 산굼부리에서는 시끄럽게 큰소리로 웃고 떠든다든지, 부정한 짓을 하면 산굼부리 일대에 순식간에 안개가 내려앉아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데 이는 산신으로 변한 한감이 노해서 부리는 조화라고 합니다. 

(제주민속박물관장 진성기님 제주도 전설집중에서 정리....)




 

 

 

 

 

 

 

 

 


실제 산굼부리는 여행해보면 야트막한 둔덕같은 높이로 정상에서 분화구를 내려다보면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주위 조망도 시원하고 멀리 한라산의 백록담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곳은 말목장으로 운영하였으며 지금은 초록색 융단이 깔려 있어 한여름 제주여행에서 빠질 수 코스입니다. 제주의 산굼부리 내국인보다 유커가 더욱많아 꼭 중국 관광지를 걷는 기분입니다.


 

 

 

 

 

 

 

 

 

 

 

 



 

◆제주 산굼부리 영업정보◆

 

제주 산굼부리 주소: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비자림로 768

☞제주 산굼부리 문의전화:064-783-9900

☞제주 산굼부리입장료

일반 6,000원, 청소년 3,000원, 어린이 3,000원

☞제주 산굼부리 관람시간

3월~10월 09:00~18:40

11월~2월 09:00~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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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우도 배타는 곳)성산항여객터미널. 우도가는 배는 성산항여객터미널에서 타면 됩니다. 성산 우도 여객선 시간표 참고



제주를 찾는 여행객은 섬 속의 섬이라며 찾게되는 대부분의 섬이 우도입니다. 우도는 소가 드러누워 있는 모습이라 하여 평지로 이어지다 한쪽에 우도봉을 세운 독특한 모습입니다. 이런 우도를 가기 위해서는 출발지와 출발시각 요금 등이 정말 궁금합니다.








 


환상의 섬 우도 출발은 성산항 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성산항이 우도 입도의 주 통로로 이용하기 때문에 엄청나게 큰 주차장하며 접안시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도도항선매표소는 현재 한곳으로 통합되어 있으며 우도↔성산 입도 배편은 계절별로 조금씩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아래 우도 성산 여객선 시간표를 참고하세요.

 

 

◆우도↔성산 여객선 시간표

 

 

 

 


그리고 우도 입도 운임은 선박요금이 편도 2,000원에다 도립공원이라 우도 입장료 1,000원 여객 터미널 이용료가 500원 붙어 총 3,500원입니다. 우도에서 성산으로 나오는 요금 2,000원을 합산하여 요금을 징수합니다. 우도 입도 선박요금에 나오는 운임을 함께 5,500원씩 받습니다. 참고하세요.



 


여름철 시즌이라 우도 입도 관광객으로 여객터미널이 혼잡합니다. 우도에 일찍 들어가서 일찍 나오는 게 좋을듯합니다. 아니면 복잡해서 사람과 차에 치여 왕짜증.




 

 

매표 전에 반드시 작성해야 하는 게 승선신고서입니다. 들어갈 때와 우도에서 나올 때 모두 필요해서 2부를 작성해야 하며 우도 입도 관광객은 모두 자신을 나타내는 주민등록증이나 여권 등 사진이 붙은 증명서를 꼭 지참해야만 배를 탈 수 있습니다. 아니면 배 못 타요.


 

 


여름철 시즌이라 사람들과 자동차가 한 테 엉켜 들어가지만, 워낙 많은 배가 우도로 들락거려 그래도 배는 덜 혼잡했습니다. 우도 사랑 1.2호, 우도랜드 1호 등 관광객이 많아서 그런지 큰 배였습니다.



 


성산항에서 우도까지 빤히 보이는 가까운 거리라 금방 데려다줍니다. ㅎㅎ 순식간입니다.



 


저기 보이는 곳이 우도 대표 항인 천진항입니다.





높은 산 보이지요. 저곳이 우도에서 최고봉인 우도봉이며 우도 등대가 있습니다.


 



우도 여행을 끝내고는 본섬인 성산항으로 나올 때는 딱히 출항시간이 승차권에 기재된 게 아니라 표시된 승차권을 가지고 천진항 배 타는 입구에서 인원 확인 후에 바로 탈 수 있습니다.





개인 생각이지만 우도에 차를 가지고 들어오는 분이 있던데 그것보다는 천진항 왼쪽으로 우도관광버스인 순환버스를 이용하면 편리합니다. 우도의 절경마다 모두 정차를 하는데 첫번째가 우동등대가 있는 검멀레해변입니다. 이곳에서 우도봉과 동굴 구경을 하고 다시 오는 관광버스를 타고 다음 관광지로 가면됩니다. 요금은 1인당 5000원이며  괜찮았습니다. 그러면 이곳저곳 주차 걱정 없이 둘러볼수 있습니다. 또한 섬이 복잡해서요. 참고하세요.



 

 


◆우도행 베타는곳은 성산항종합여객선터미널◆


주소: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347-9

전화::1544-8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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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맛집/서귀포맛집)이중섭미술관 매일올레시장 맛집 쌍둥이횟집, 서귀포에서 안가보면 후회한다는 대박 맛집 쌍둥이횟집에서 진주성찬을 받다. 서귀포 쌍둥이횟집 


제주도 하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막연한 선입견이 있습니다. 유명 관광지라 음식값도 턱없이 비싸고 맛 또한 비싼 만큼 그 값을 못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쌍둥이 횟집에서는 그런 생각은 부질없는 괜한 걱정거리였습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이중섭 미술관


2016/08/01 - (제주여행/서귀포가볼만한곳)이중섭문화거리 이중섭미술관,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화가 이중섭, 서귀포에서 이중섭문화거리와 이중섭미술관으로 만나다. 이중섭거리 이중섭미술관






이번 서귀포의 이중섭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찾아갔던 쌍둥이 횟집은 미술관에서 한 블록 떨어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마침 저녁 시간이었는데 주차장에는 주차할 공간이 없었고 주차관리를 하시는 분이 주위에 다니다가 주차할 자리만 보이면 주차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수족관에 전복이 가득하네요


그만큼 손님들로 북적였는데 역시나 대기 손님으로 본관과 별관 모두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대기번호를 생각해보니 40~50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인근에 있는 매일 올레 시장 구경을 갔습니다. 매일 올레 시장을 구경하면서 조금은 늦은 시간이라 문 닫은 점포가 많았는데 그중 흑돼지 꼬치 집은 손님들로 완전 대만원이었습니다.

 

 

생선 이름은 모르지만 요게 전부 생선회로 올라올 것 같습니다. ㅎㅎ

 


꼬치를 먹기 위한 손님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번쯤 꼬치 맛을 보고 싶어도 줄을 선 대기자를 보고 엄두가 나지 않아 지레 포기를 하고 과일가게에 들러 감귤과 복숭아 자두 등을 샀습니다.



 

우리가 먹었던 별관 모습



쌍둥이 횟집도 처음에는 이곳 매일 시장에서 작은 구멍가게로 시작했다는데 지금은 본관과 별관을 갖춘 큰 음식점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마 저 꼬치 집도 곧 빌딩을 거느린 꼬치 집으로 바뀔듯합니다. 과일을 들고 어슬렁어슬렁 쌍둥이 횟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우리 앞에는 여러 팀이 있었습니다.


 

ㅋㅋ 특이하게도 찹쌀 도넛으로 나왔는데 오랜만이라 그런지 엄청나게 맛있었습니다.


기다림이 미학이라고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8명이 한자리에서 먹을 수 있는 식탁이 나왔습니다.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했습니다. 4인 식탁이라 8명이 붙어 한곳에서 먹을 수 없었는데 그래도 한자리에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면 4명씩 이산가족이 될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우리는 모둠 스페샬과 벵에돔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따라 나오는 곁들이 음식은 완전 초대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주도가면 꼭 먹고 와야 한다는 집으로 쌍둥이 횟집을 거론하는군요. 그리고 스끼다시중에서 가장 흔한 것은 다름 아닌 귀하디귀한 전복입니다.


 

비빔쫄면


전복은 구이로도 나오고 회로도 나오고 해물 모둠과 물회에도 들어가 있고 어디 빠지는 곳이 없을 정도로 아주 풍성하게 나왔습니다. 전복으로 배를 반은 채울 것 같다는 웃스게입니다. 쌍둥이 횟집의 모든 음식은 한꺼번에 나오는 게 아니라 천천히 먹고 있으면 차례로 음식이 들어옵니다.



 

 


그 가운데 메인 생선회가 쨘~하고 들어오고요. 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쌍둥이 횟집에서의 식사는 후회는 안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선회 말고도 회덮밥 등이 있어 간단하게 먹을 때도 좋을듯합니다. 맛있게 먹고 힘내서 다음날 제주 우도 여행 마무리 잘했습니다.


 

옥수수

 

 

 

전복과 소라구이

 

해물 모둠에도 전복과 새우 문어. 낙지, 보말 등등 그리고 건강에 좋은 인삼도 뿌리째 올라옵니다.



 

 

여기에도 전복이 들어간 물회

 

 

 

전복 통마리임다. 어떻게 먹을까 고민했습니다. 그저 통째와작와작하며 씹어 먹었는데 살아 있는 놈이라 딱딱하지 않은 게 정말 부드러웠습니다.


싱싱한 전복회가 이쁘게 올라왔습니다.

 

 

 

끝내주는 초밥. 무한 리필이 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ㅎㅎ

 

우리자리에 나온 벵에돔.



 

 

요건 옆 일행의 모둠회입니다 함께 두툼하게 썰어 씹는 맛이 정말 좋았습니다. 제가 부산에 살고 있어 가끔 생선회 맛을 보지만 쌍둥이 횟집 생선회도 수족관에 잠잘 사이도 없이 회로 나오기 때문에 정말 싱싱하고 쫀득했습니다. 역시 소문대로 최고! 최고! 였습니다.



요건 고등어 튀김

 

맛있는 돈가스도 나와요.

 

고구마튀김

 

두툼한 생선회 

 

그리고 생선회의 마무리는 밥과 매운탕인데 주문과 동시에 볶음밥인지 들어옵니다. 매운탕 또한 얼큰한 게 부를 때로 부른 배지만 안 먹을 수 없어 끝 가지 마무리를 싹 하였습니다.

 

매운탕

 

매운탕과 밥으로 마무리를 했다면 후식이 있어야죠. 쌍둥이 횟집의 후식은 여름철 무더위에 따봉인 시원한 팥빙수입니다.



 쌍둥이횟집 메뉴판

 

 

 

식당 내부에 손님들이 너무 많아 내부 사진을 찍을 수 없었는데 회를 먹고 나올 때도 손님 때문에 밖에 나와 살짝 내부를 찍었던 사진입니다. 요즘 초상권이니 뭐니 해서 손님이 많으면 찍기가 좀 곤란하지요. ㅎㅎ



요기는 쌍둥이 횟집 본관건물입니다. 우리 일행은 옆 건물인 별관에서 먹었습니다. 밥 먹고 나오니 사위가 완전 캄캄하네요





서귀포 쌍둥이횟집 수산 영업정보

상호:쌍둥이 횟집 

★쌍둥이횟집 주소: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496-18

★쌍둥이횟집 전화:064-762-0478

★쌍둥이횟집 메뉴:생선회 외

★쌍둥이횟집 주차장 유 

 

 

 

쌍둥이 횟집에서 대기표를 들고 기다리다 매일 올레 시장을 가면서 본 과거의 천지연폭포와 현재 천지연 폭포 비교 사진이 있어 찍었습니다. 옛날 천지연 폭포 주위는 완전 벌거숭이이며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서귀포 매일 올레 시장

 

매일 올레 시장은 서귀포 올레길 6코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ㅎㅎ 올레길을 걷다가 출출하면 든든하게 배도 채울 수 있습니다.

 

 

 

 

 

 

 

매일 올레 시장의 명물 지민원 흑돼지 꼬치 구이(064-763-2523) 

 

 제주특산물 감귤이 가득, 매일 올레시장 구경도 함깨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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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행/제주가볼만한곳)제주김녕미로공원. 거미줄 같이 얽혀있는 오리무중의 김녕미로공원 미로 탈출기. 제주김녕미로공원


제주시에 있는 김녕미로공원은 요즘 제주여행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는 미국인 더스틴이 제주대학교 관광학과에서 근무하면서 정년퇴임을 하면 제주에서 여생을 마무리하고자 1983년부터 직접 땅을 일구고 나무를 심으며 조성한 공원으로 1995년 처음 개장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미로(迷路)는 “어지럽게 여러 갈래로 갈라져 섞갈리기 쉬운 길”을 뜻합니다…. 그만큼 빠져나오기가 어렵다는 김녕미로공원. 국내 미로 공원으로서는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수익금은 교수님의 뜻에 따라 지역사회와 후학들의 장학금으로 기부된다니 정말로 제주도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시는 분 같습니다.


 

김녕미로공원의 입장요금표 

 

 


김녕미로공원의 미로 찾기를 디자인한 사람은 세계적인 미로디자이너인 영국의 애드린 피셔(Adrian fisher) 씨가 3년에 걸쳐 완성했는데 여기에는 “제주 역사 기행”을 담아내었다 합니다


 

 

 

 

 

 


미로 공원의 평면도는 제주도 모양을 하고 있으며 아시아권의 음양문화와 제주 섬사람들의 샤머니즘으로 숭배했던 뱀도 형상화하여 담아내었다 합니다. 이외에도 고인돌과 조랑말,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할 때 타고 온 배의 모습도 형상화 했다 하니 미로 공원은 단순한 하나의 놀이가 아닌 제주도의 역사 여행을 하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김녕미로공원 입구. 여기가 출발점입니다. 

 

 


우리 일행도 그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덩달아 미로 공원을 찾게 되었는데 매표소에서 팀마다 지도를 나누어 주면서 미로 공원에서 주의사항과 입구를 출발하여 짧게는 10분, 길게는 60분이 소요된다는 설명을 곁들었습니다.


 

 

 

 


8명의 일행은 총 4팀으로 나누어 누가 먼저 종을 치느냐며 꼴찌팀은 아이스크림 내기를 하고 출발했습니다. 한사람이 딱 걸어가게끔 랠란디(Leylandii)로 나무벽을 만들었는데 양쪽 벽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갑니다.


 

 

 

 

 

 


렐란디의 특징은 사계절 푸른 상록수로 내 뿜는 향기는 사람의 정신을 맑고 청량하게 해주며 심리적인 입박감을 완화해주어 항상 좋은 기분을 들게 한다고 합니다. 또한, 바닥에는 붉은빛의 화산석 송이를 깔아 오염된 공기 정화는 물론이며 인체의 혈액 순환을 돕는 효과가 있다 합니다.


 

 

 

 


미로 공원을 걷는 것만 해도 상쾌한 기분을 들게 하며 랠란드의 초록색 나무 위로 정말로 에메랄드빛 파란 하늘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원이 미로 길을 빠져나왔으며 물론 꼴찌 팀은 아이스크림을 돌려야 했습니다.


 

 

 

 

 

 


제주여행을 하면서 팀을 나누어 미로게임을 한다면 단합도 되고 그저 눈으로 보고 웃고 즐기는 것보다 실제 동참하면서 그 속에 빠져들어 즐기는 것도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어린이와 어르신도 별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미로 공원의 미로 길을 팀원 간의 조만 잘 짠다면 가족끼리도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나무벽을 이루는게 랠란디

 

 

 

 


미로 공원에는 “고양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사는 세상-김녕미로공원”이란 케치 프레이로 미로의 고양이와 친해지는 방법 등 고양이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혹 미로 길에서 고양이를 만난다면 당황하지 마세요.


 

 

 

 

 

구불구불 뱀 같아 보이나요?  

 

 

 

저기 보이시죠! 저 종을 치면 됩니다.  

 

 

 

 

 

 미로공원의 야옹이. 팔자 늘어졌습니다. 

 

 


◆김녕미로공원 정보 안내

 

김녕미로공원 주소: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산 16번지(만장굴길 122)

김녕미로공원 전화:064-782-9266

미로공원이용요금: 성인 3,300원, 청소년·노인 2,200원, 어린이 1,100원

미로공원운영시간: 3~6월 08:30~18:30. 7~8월 08:30~19:00(야간개장시 22:00), 9~11월 08:30~18:00, 12~2월 08:30~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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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행/서귀포가볼만한곳)이중섭문화거리 이중섭미술관,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화가 이중섭, 서귀포에서 이중섭문화거리와 이중섭미술관으로 만나다. 이중섭거리 이중섭미술관



제주여행에서 쇠소깍의 수상체험은 2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 하여 타지 않아 시간의 여유가 많이 생겼습니다. 천지연 폭포를 관람한 후 저녁 식사시간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많이 생겨 어디로 갈까 하다가 일정에 없던 여행지인 이중섭(1916~1956) 미술관과 문화거리를 찾았습니다.







◆부산 범일동 이중섭 거리


2014/10/09 - (부산여행/동구여행)범일동 이중섭거리. 한국의 고흐 '이중섭 범일동 풍경'으로 만나다.



 

 


마침 우리가 식사하기로 했던 쌍둥이 횟집 옆이라 딱 안성맞춤이었습니다. 화가 이중섭은 ‘한국의 고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의 독특한 화법과 은지화 등의 작품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화가 이중섭은 제가 사는 부산의 범일동에도 ‘이중섭 거리’가 만들어져 찾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중섭은 평남 평원군에서 출생하여 오산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의 도쿄문화학원 미술과에 유학합니다.


 


 


그곳에서 일본 여성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1943년 홀로 귀국길에 올랐고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그와 함께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은 모두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돌아가던 상황에서 마사코는 도리어 목숨을 걸고 사랑을 찾아 바다를 건너 이중섭을 찾아왔습니다.


 

 


마사코는 이중섭을 만나 결혼했지만, 그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고 끝내는 1950년 6.25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1·4 후퇴 때 원산에서 피난길에 올라 그는 부산 범일동에 정착했습니다 다시 1951년 1월 제주 서귀포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때 가족과 함께 피난했던 모습이 ‘길 떠나는 가족’이라는 작품 속에 남아 있습니다. 서귀포에서의 삶은 궁핍 그 자체였습니다. 두 아들과 함께 1.4평 크기의 방에서 그의 가족이 그해 12월까지 생활했으며 ‘바다가 보이는 풍경’ 등 제주에서의 많은 작품이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두 노동 등의 힘든 생활 속에 어쩔 수 없이 호구지책으로 1952년 부인 이남덕은 친정인 일본으로 두 아이와 함께 떠나갑니다. 그런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이중섭의 예술혼을 식지 않고 작품으로 승화되었고 전쟁이 끝나자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1955년 미도파 화랑과 대구 미 공보원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그는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가 1956년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만 40세로 쓸쓸히 눈을 감았습니다. 제주 서귀포에는 전국 최초인 1996년 3월 2일 화가 이중섭을 명명한 거리가 생겼습니다.


 

 


당시 이중섭이 생활했던 초가집을 복원하였으며 이중섭 미술관을 개관하였습니다. 또한, 1998년부터 매년 9월~10월경 이중섭 거리에서 예술제를 4일간 열고 있습니다. 학생미술실기대회, 설치미술, 풍물놀이, 거리무용, 관악연주와 테마행사 등 지방문화예술의 저변 확대와 관광객과 시민이 한마당이 되는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으로 꾸며진다 합니다.


 

 


먼저 이중섭이 1년간 생활했다는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으며 왼쪽 끝 골방에는 이중섭과 그의 가족이 살았던 1·4평 크기의 방을 구경합니다. 이중섭의 흑백사진과 함께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소의 말’ 시를 보면서 당시의 흔적을 느껴봅니다.



 

 

 

 


그의 조카가 이중섭의 시를 보면서 ‘삼촌 시도 씁니까?’ 하자 그냥 웃으며 “소가 하는 말을 받아 적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는 인간 이중섭을 만닉 위해 ‘이중섭 미술관’으로 향합니다. 이중섭 미술관은 1층에는 그의 미술작품이 전시 중이며 2층에는 이중섭과 일본의 가족과 나눈 편지와 근래 이중섭 가족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 전시실 1, 2층 모두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아쉽지만 담을 수 없었고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의 황소 그림만 기념으로 사진 촬영이 가능합니다. 이중섭이 부인과 두 아이가 보고 싶었던 내용은 편지와 아이에게 그려 보냈던 그림에서 절절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중섭의 작품을 “야수파적인 강렬한 색감과 선묘 위주의 독특한 조형 등 서구적인 표현이지만, 향토적인 숨소리와 꿈을 표현하고 한국적이면서도 웅장하고 무한한 세계를 내포하고 있다”라 평가합니다.


 

 

 

 


가장 한국적이자 서정적인 우리의 모습을 잘 나타낸 이중섭의 ‘소’, '흰 소‘, ’투계‘, ’집 떠나는 가족 ‘담뱃갑속의 은박지에 그린 수많은 그림을 이중섭미술관에서 만나 보세요. 제주 서귀포 여행에서 꼭 둘러보면 좋습니다.

 


 

 

'이중섭 문화거리' 풍경 


 


 

 

 

 

 

 

 

 

 

 폐관된 옛 극장입니다. 지금은 문화공연이 열리는 공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중섭 미술작품 거리

 

중섭 식당도 있네요 

 

 

 

 

 

 길거리의 맨홀 뚜껑에서도  



 

 

 

 

 

 


 

 

 

 

보도블럭에서도 

 

 

 

 

 

 

 


 

 

 

 

이중섭 공원의 모습 

 

 


필자가 구입했던 이중섭 그림 엽서입니다. 미술관 내부를 사진으로 담을 수 없어 엽서를 대신 찍어 올려봅니다.  



 

 

 



 

파란 게와 어린이 

 

 

 

 

 


 

 

 

 

 

 

 

 

 

길 떠나는 가족 

 


 

은지화(게와 가족)  

 

 

 

 


◆제주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 정보 안내◆

상호:이중섭미술관

★이중섭미술관 주소: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이중섭로 27-3(서귀동)

★이중섭미술관 전화:064-760-3567

★이중섭미술관 관람시간:개관시간 09:00~18:00(매표마감 17:30), 

하절기(7월~9월):09:00~20:00(매표마감 19:30)

★이중섭미술관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

★이중섭미술관 관람료:어른 1,000원, 청소년및 군인 500원, 어린이 300원

★주차장 있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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