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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둘레길은 고가인 정자 또는 누각, 그리고 산과 들, 하천을 끼고 도는 것이 전부이다.

마을마다 숱한 전설과 이야기 그리고 애환이 스며 있는 밀양의 둘레길은 그중에서도 단장면에 와 절정을 이룬다.
이번에 걷고자하는 바드리 둘레길은 밀양의 3대 고지의 마을에 속한다.
일이 오치요,이가 소월리로 현 바드리를 말하며 삼이 감물리로 밀양의 대표적인 오지마을이다.
먼저 바드리를 가기위해서는 표충사 입구 삼거마을에서 삼평교를 건너 우측 산비탈을 돌아 바딜리 고개를 오르는 도로가 제1코스요 고례리 평리마을 입구에서 산비탈을 타고 오르는 임도가 제2코스이다.



 
차를 이용할 수 있는 길은 두 곳이며 나머지는 등산길과 옛길이다.
그래서 바드리 마을을 오르는 옛길을 범도마을에서 찾아 보기로 하였다.
먼저. 아불마을에서 하차를 하면 우측으로 제2아불교가 보이고 삼거리 길이다.
 
아불마을의 옛 지명은 아화라고 불렸는데 옛날 스님이 지나가면서 이마을에 불이 난다고 이야기를 하였지만, 마을에서는 대스럽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한다. 그 후 2년만에 스님의 예언대로 마을 전체에 불이 나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불이 나고 난후 부처님의 가호를 바란다는 뜻에서 아불로 마을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 아불마을에는 아직도 공동 빨레터가 있으며 한때는 작은 주막거리에 불과하였지만
1922년 표충사에서 사립표충학원을 설립하고 그후 태룡초등학교 산동분교를 설립하며 마을의 규모는 점차 커져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범도마을은 버스에서 내려 밀양댐 방향으로 들어서면 된다.

이곳부터 평리까지 이팝나무가로수 길이 조성되어 봄이면 이팝꽃 축제 행사도 하고 있다.
밀양댐이 생기면서 조성된 이팝나무길이 둘레길을 걷는 둘레꾼들에게 또다른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쉬엄쉬엄 600m를 걸어면 범도리의 중심마을인 범도마을과 만난다.
이곳의 지형이 행주형으로 배가 나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데 선수가 정각산이며
선미는 뇌암산으로 백마산 아래 번데기마을 뒷산을 노 끝을 삼아 나아가는 배의 형국이라 한다.
범도마을 뒤로는 미물산(메물산.374m)이 백마산과 연결되고 마을 앞으로는 단장천의 일부인 고사천이 흐른다.
이곳에 범도연 또는 도연으로 불리는 검푸른 소가 있다.
이곳 마을의 지형이 마치 물위에 떠 있는 돛단배와 같은 지형이라 예로부터
이 마을에는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생겨 침몰한다는 속설 때문에 집집마다 우물을 파지 않았다 한다. 지금도 마을의 식수는 맞은편 진주동으로 넘어가는 큰골에 물을 받아 식수로 이용한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이곳에서는 뱃놀이를 즐기기 위해 배를 탔다는 뱃머리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마을의 표지석에서 마을 뒤 산길을 찾아 나섰다.
깻잎 밭의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길이 없다는 대답뿐,
혹 옛날 나무하러 다닌 길이라도 없습니까 물어니 재실을 지나 올라가면 된다한다.
오르는 길은 두길 달성서씨재실인 화친문을 지나면 미물산으로 포장길이 이어지는데
부근이 모두 대추밭으로 도저히 옛길을 찾을 수 가 없어 할 수 없이 다시 내려와 우측의 능선을 보고 들어서면 임도길은 밤밭을 돌아 올라 능선으로 진입 할 수 있다.
길의 흔적이 뚜렷하지 않으며 산세가 굉장한 오름으로 이어진다.
잠시 뒤 달성서씨재실에서 올라오는 뚜렷한길과 만난다. 오르막을 치고 오르면 미물산(374m), 이곳에 큰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여름철에 덧자란 수풀이 온 무덤을 덮고 있으며 좌측으로 내려서면 둘레길 다운 산길을 만난다.
직진길과 우측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는 갈림길에서 우측길로 돌아가면 무덤, 여기서 다시 넓은 임도와 만난다.


표고버섯 재배를 위해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는 임도를 따라가면
좌측은 삼거마을로 내려가고 바드리(2.5km)로 갈라지는 삼거리길,여기서 직진인 우측길로 진행한다.
포장길이 이어지지만 밀양 제2의 고지마을 답게 덥지가 않다.
예쁜 별장같은 집과 또 한채의 민가인 번데기마을을 지나면 백마산의 모습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상까지 확인 가능한 백마산은 해발 450m로 분포되어 있는 바드리 마을 뒤에서 불쑥 솟은 것처럼 보인다.
미물산에서 백마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흔히 백마에 비교를 하며 걸어온 둘레길을 백마의 등쪽으로 보면 된다.
머리는 미물산이며 백마산이 꼬리에 해당한다.
산상이 별구인 바드리마을은 일조량이 풍부하여 고랭지 채소와 그중에서는 바드리 무가 전국적으로 알아준다.
당도가 뛰어난 사과등으로 바드리는 현재 풍요로운 산상의 마을을 꿈꾸고 있다.
아주 먼 옛날 백마산 정상에 산사태가 져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였는데 소월산(所月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마을이름이 바드리가 되고 소월리로 표기를 하였다.

바드리에서 평리마을로 내려 오는 길을 따라 쉬엄 쉬엄 걸어면
대종교 수도원 앞의 우물에 시원한 냉천수가 장마로 인해 물을 쏟아 내고 있다.
갈림길 여기서 우측 돌아가는 길을 내려서면 뒤돌아 보는 백마산의 위용이 웅대하다.
새로지은 별장 같은 집도 지나고 평리마을 입구인 1051번 지방도로에 내려선다.
좌측이다. 평리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그
 뒤 옛길을 따라가면 황토로 지은 미타원과 만난다.
지장보살을 모신 선원이며 연못에는 거북이를 닮았다는 바위가 있다.
마을 촌로에게 미타원에 대해 물어 보니 원래 그 자리는 논이였으며 몇해전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살고 있다며
거북바위에 대해 물어보니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곳을 지나면 마을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하는 당숲이 성지곡아래에 자리를 하고 있다.
그곳을 벗어나면 평리마을회관앞이다.
평리마을은 농암대와 사회동 그리고 배내골에서 내려오는 퇴적물이 쌓여 들판을 이루어 평지를 이루고 있어 평리마을로 불린다.




달성서씨재실

범도연의 모습




바딜리고개







번데기마을

백마산의 모습




바들리마을입구






바드리마을에서 평리로 내려서는 갈림길 부근의 가옥


대종교의 우물










1051번 지방도로 평리마을 입구


미타원과 연못안의 거북바위


평리마을의 당숲

평리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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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배낭을 메고 떠나 본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도심의 한복판에서 일상 탈출을 꿈꾸며 살아가는 요즘에는 아무 생각 없이 떠난다는 것에 묘한 매력을 느껴 본다.
그곳이 어디 던 지 간 에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의 탈출, 탈출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요즘이다.
이번 주에는 어디로 탈출을 해 볼까. 내 몸 안의 또 다른 내가 내게 거든다.

‘밀양의 감물 리가 어떤냐’ 고.

감물리,

좋은 곳이지,

물이 달다는 그 한마디면 모든 것이 끝나는게 아닌지

그럼 감물리를 가볼까.

가기전에 조금은 그곳을 알아야 하니까. 공부나 해 볼까.

밀양시 단장면 감물리로 구기 중촌 용소 점촌 당고개, 대뱅이마을을 거느리고 있다.
골이 깊고 산이 많은 곳이며 특징은 감물리를 감싸는 모습이 연화형으로 연꽃이 감싸는 형국이다.
그래서 인지 감물리에 들어서면 백두산의 분화구를 닮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
곳에도 천지와 같은 감물 저수지가 자리하고 구기 마을 뒷산을 천지봉 또는 천제봉으로 기우제를 지낸 산으로 감물리를 대표하고 있다

감물리를 이야기 할때 따라 붙는 수식어가 또 있다.
밀양에서 고산마을 즉 오지마을로 통한다.
첫번째가 오치, 두 번째가 소월리(현 백마산 바드리), 세 번째가 감물리로 밀양의 3대 오지에 속한다.
그래서 인지 이곳은 산상의 별구이다.
안법리에서 감물리를 오르는 길은 갑자기 고도를 높이면서 병주둥이 같은 입구를 들어서면 안쪽이 갑자기 넓어 지면서 감물리 마을이 훤히 들어난다. 그 만큼 안쪽이 넓은 분지형을 이룬다.
그리고 부산 인근에서는 그래도 작은 다랭이 논이 있는 곳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감물리로 들어오고 나가는 길은 모두 네 곳으로 주 통행로가 북서쪽의 표충사 입구에서 올라온다.
또 한곳은 20~30년 전까지 교통이 불편했을 때 단장면 면사무소로 가기위해서 뻔질나게 다녔던 깨밭고개길이다.
나머지 두곳은 모두 삼랑진으로 넘어가는 길로 당고개와 감물고개로 많은 사람들이 넘어 다닌 눈물과 애환의 고개이다.
높은 마을 답게 여기서도 인구의 감소가 심각한 곳이였다.
살고 있는 주민 또한 많은 어려움을 격고 먹고 살기 위해 도회지로 모두 떠나버린 것이다.
몸에 상처가 나면 새 살이 돋듯이 근래에 와 전원마을을 찾는 도시민들에 의해 다시 주목 받는 곳이 되었다.
한 때는 먹고 살기 힘들어 떠났던 곳이 이제는 살기 위해서 들어오는 곳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감물리를 오르는 골짜기와 능선상의 곳곳을 보면 별장 같은 주택들을 수도 없이 보게 되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감물리저수지 위 삼거리에서 감물고개를 넘어가는 2차선 도로를 올라가면 U자형 커브길에 용소마을 가는 갈림길과 만난다.
직진형 왼쪽 길로 들어서자. 농로 같은 마을 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중리마을 가지 이어지는 계단식 다랑이 논이 펼쳐진다.
남해의 가천마을에는 비교 할 수 가 없지만 이곳의 다랑이 논은 편안함과 포근하면서 친근감을 주는 그런 곳이다.
그곳을 지나면 용소마을로 감물리에서는 가장큰 마을이지 싶다.
이마을 아래에 웅덩이가 있었는데 그곳에 살던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 회관을 지나면 사거리 갈림길이다. 직진은 당고개로 삼랑진의 안촌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당고개 만당에는 예전에 당이 있었다 하여 당고개로 불린다.
지금도 큰 당산나무가 당고개를 지키고 있으며 오고가는 나그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중리마을을 가기위해서는 왼쪽으로 다랑이 논 사잇길로 내려서야 한다.

논과 논 사이를 연결하는 농로길이 운치있는 길이다. 당집과 당산나무가 서 있는 곳을 지나 다랑논을 끼고 오르면 중리마을로 감물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뒤편으로는 깨밭고개에서 석이덤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아늑한 마을이다.
마을을 관통하는 계곡의 물소리가 암반의 골을 타고 시원하게 내려간다. 회관앞에서 돌아나간다.
옛 감물초등학교터로 내려 가면 용소마을에서 걸어 왔던 길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다.
고깔봉, 감물고개, 구천산, 당고개하며 그 아래 자리잡은 마을과 다랑이논이 편안한 고향의 모습을 보여준다.

옛 감물초교 앞에는 구기마을 이정표가 서 있다. 여기서 우측으로 들어서면 깨밭고개 구기마을 방향이다. 좌측으로 옛 정미소 건물이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감물저수지가 만수위에 차 있다.
깨밭고개 오름길을 만나고 구기마을 회관 앞에서 왼쪽으로 틀어 감물저수지를 돌아내려 가면 오붓한 옛길이 기다리고 있다.
저수지 뒤로 둘러쳐진 산줄기하며 마을, 물에 반사되는 빛이 별천지에 와 있는 느낌이다.
저수지 둑 아래 대뱅이마을 갈림길로 비탈진 마을에 품질이 우수한 대밭이 있다하여 대밭마을이며 죽방,대뱅이로 불렀다.
지금은 죽봉으로도 부런다.
다음기회에 대뱅이마을을 가기로 하고 안법리로 내려가는 도로를 따라간다.

우측으로는 감물저수지에서 흘러 내린 물이 골짜기를 타고 내리는데 그 위세가 대단하다. 계곡 도한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경치에 취해 슬렁슬렁 내려오면 어느새 안법보건소가 있는 삼거리길이다. 왼쪽으로 법산 사지마을 거쳐 만어사로 해서 삼랑진으로 가는 길이다.

감물리 사람들은 감물저수지에 대해 저수지는 감물리에 있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데 정작 혜택은 그 아래 마을인 안법리와 사촌마을에서 그 덕을 본다면서 하소연 하며 빙긋이 웃는다.













































찾아가기

밀양행 무궁화호는 부산역 기준 오전 5시10분부터 20~4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소요시간은 43분이다. 3800원. 밀양역에서 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한 뒤, 감물리행 새마을버스를 이용한다. 오전 새마을버스는 오전 6시10분, 8시10분, 11시50분 등 하루 5차례 출발한다. 약 30분 소요.

자가용의 경우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24번 국도 표충사 얼음골 언양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금곡교차로에서 표충사 방향으로 빠져나가 금곡교를 지나자마자 오른쪽 감물리 방향으로 진입, 계속 직진하면 감물리에 닿는다. 감물저수지 지나 마을 입구 삼거리에서 주차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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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말양 아리랑길 금시당 산책로. 숲길이 아주 인상적인 옛날 학교 등굣길 밀양 금시당 산책로


길...

길은 무엇일까?.

우리들의 삶의 흔적일까.

우리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땅 바닥을 기다가 어느듯 걷기에 익숙해지면 집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때부터 길과 익숙해지며 살아가는 것 같다.
골목길을 벗어나면 찻 길등 많은 길 속에서도 우리들 마음속에 담고 있는 오래된 옛길은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다. 






중년층의 연령대는 학교 갈 때 책보따리 허리춤에 묶고 동네 친구들과 갱빈 길을 뛰어 가던 학교길을 생각할 것이며 지금 세대는 포장된 시멘트길 위에서 걷던 길만 생각할 것이다.
밀양시 산외면사무소에서 만난 아무게씨는 지금이야 교통편이 수월해져 버스나 승용차를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지만 근무초에는 2시간의 출퇴근길을 걸어 다녔다고 한다.
한여름에는 땡볕의 농로길을 지나 금시당에서 용두목까지 이어지는 길을 이야기 할때는 엄지 손각락을 치켜세우며 그때를 회상하며 묘한 웃음도 지어보인다.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의 길이 되어 버린 이길. 또한 단장면 미촌리와 활성동 구서원의 학생들이 밀양의 등굣길로 이용하던 이길, 이 길 도 어느듯 학생들의 등굣길도 끊어져 버리고 출퇴근길도 사라지고 밀양장날의 보따리 장날길도 이용하지 않으니 자연적으로 길의 생명을 다하고 묻혀 버린 길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둘레 길의 붐을 타고 많은 길들이 살아나고 있다.
금시당에서 용두목을 지나 가곡동으로 이어지던 이길도 산책길이란 명목으로 다듬어져 아름다운 길로 탄생한 것이다.
밀양강을 끼고 걸어가던 이 길은 한 때는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어머니, 할머니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삶의 고단한 길이 지금은 한가족이 오순도순 정답게 이야기를 하면서 걸을 수 있는 길로 탈바꿈하였다.
총 길이는 1.8km이며 밀양강으로 불어 오는 시원한 강바람이 그만이다.



밀양시 가곡동 용두목에서 출발하는 이길은 팔각정이 있고
산성산 오름길과 금시당 산책길로 갈라진다.


산림욕장 안내도가 서 있고
 밀양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을 확인 할 수 있다.



금시당 1.8km
이정표를 뒤로 하고
좌측길로 들어서면
갈림길과 만난다.


숲과 강의 어울림,
금시당 산책로 가는 길이란
 안내판에서 왼쪽 계단을 내려가보자. 


계단에서 본 밀양강과
신대구부산고속도로의 신길이 밀양강을 가르지르고 있다.
그 뒤로 밀양시내에서 바라보면 한일자로 보인다하여
일자봉으로 불리는 산성산이
용두목으로 길게 내려 오고 있다.


용두목 취입보

일제 강점기때 건설된 용두목 취입보로
비록 일본인의 구상과 설계로 건설된 것이지만
아직도 그목적 그대로 100년 이상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인상 깊은 곳이다.
 이 관개시설은 1909년 일본인 마쓰시타 데이지로가 구상해서 만들어낸 자연유화식 인공 터널 수로다. 밀양강에 보를 만들고 용두산 아래로 암반의 터널을 뚫어 물길을 낸 다음 
밀양강 건너편 종남산 아래 마을 까지 수로를 만들어
상남면 일대 예림리 등 4개 마을 592㏊의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건설된 것이다. 
현재도 이 수로는 이들 지역의 농사를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한다.
전체 수로의 길이는 6438m이고 산 아래를 관통하는 터널의 길이만 433m에 달한다.

 


취입보를 내려가서 보는
용두산의 모습과
그 아래 흘러가는 용두연의 검푸른 모습에
등골이 오싹한다.


용두보의 모습으로 상남면 일대의 높은 지대에다
물을 대기 위한 보로 작은 폭포를 보는 것 같다.
떨어지는 물소리가 시원한 여름의 땀을 식혀 주기에 충분하다.





본격적인 금시당 산책길로 들어서보자
키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따가운 햇볕도 감히 침투하지 못할 
그늘이 있는 옛길이다.


 


10년
아니면
100년
아니 그 이전 부터
우리와 함께한 이길









산책길을 걷던 꾼들은
신대구 고속도로가 아름다운 이길을 반감시겼다며 흥분을 하였다.
아름다운 이길이 고속도로 밑에서 잘려져 변형이 되어 있었다


 


밀양강에는 작은 모래섬들이 여럿있다.
그중에서 하나인 암새들이라 부르는 이섬도
북천과 동천에서 흘러 내려온 토사들이
모여 작은 섬을 만드니
 암소들이라 부르는 이섬에는 한때 습지가 많았는데
사라호 태풍때 그 습지가 모두 메워졌다 한다.
용두산 용두암의 암자와 모랫섬에 소가 많아서 암소들,
암새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암새들 뒤로는 추화산과 화악산의 모습이 확인된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의 모습으로
이 고속도로가 용두산의 능선을 관통하여
부산으로 향해 달려간다.


용두산과 용두목 천경사의 모습이다.
길게 목을 뺀 용두암이 용두연으로 머리를 쳐 박고 물을 먹고 있는 것일까?.


아름다운 이길을 따라가보자
시누대가 사각사각 바람에 살랑이고
발아레 이름모를 꽃들이 다투어 피어 있고
숲속의 산새가 합창을 하고 있다.


















금시당건물이 보이고 옛길도 이제는 막바지이다.
금시당은 여주이씨 이광진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낙향하여 있는 것을 현재 자신의 처신이 옳았다 하여 금시당으로 편액하였다.


금시당 입구
큰소나무가 장관인 소나무 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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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아리랑길 추화산 둘레길. 밀양의 옛이름 추화군의 추화산 둘레길을 걸어보니


밀양의 진산은 북으로 감싸고 청도와 경계를 잇는 화악산이요, 안산은 남산으로 불리는 종남산을 말한다. 이 외에도 밀양을 대표하는 산으로는 여럿 있다.
가지산, 운문산, 천황산, 재약산등 1000m를 넘는 이른바 영남알프스를 이루는 영남의 지붕하며 그 줄기에서 뻗어 나온 만어산, 정각산, 구만산등 수많은 봉우리들이 밀양을 이야기할 때 대표라 하며 언급된다. 그러나 밀양을 대표하는 산은 정녕 어디 일까?.





1000m 넘는 산도 아니요. 영남알프스에 언급되는 산도 아닌 아주 작은 밀양시내의 한 봉우리에 불과한 추화산이지 않나 싶다.
밀양은 ‘삼국지위서동이전’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변진24개국으로 ‘미리미동국’이라는 작은 부족국가에서 시작을 하였다.
변한으로 가락국에 속해 있던 것을 505년 지증왕 6년에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으로 되었다한다.
그 추화군의 시초가 이곳 추화산에서 나왔다하니 밀양을 대표하는 종산이 아닐까.
200m를 조금 넘는 높이는 사실 등산이란 이름은 무색하고 요즘 열풍을 일으키는 둘레길로 이야기를 하면 간단하게 오를 수 있는 길이다.




추화산을 걷는 길은 여러곳이 있지만 밀양 화장장 뒤에서 둘레길을 시작하였다.
넓은 길을 따라 발걸음을 떼면 좌측으로 자두와 대추나무 과수원이 있고 사거리 고개에 올라선다. 이 고개마루에는 큰 모과나무가 당당히 서 있는데 그의 모습이 아주 특이하다.
여러개의 줄기가 서로 붙어 하나의 줄기로 자라고 있어 신기할 따름이다.

이곳을 지나면 독립투사 전홍표의 묘가 왼쪽으로 갈라지고 봉수대 가는 길은 직진한다.
잘 자란 소나무와 넓은 산길은 마치 우리를 수목원의 한 길을 걷는 기분 까지 들게하며 슬렁슬렁 한굽이를 오르면 사거리 갈림길과 만난다. 추화산 산허리를 도는 길이 좌우로 열려 있다.
봉수대는 직진을 하면 작은 고추가 맵다고 둘레길은 곧추선듯 갈지자로 이어진다.
추화산을 대표하는 짧은 순간이지만 구절양장길을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산성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의 둔덕을 올라서면 정면에 돌을 쌓아 올린 추화산 봉수대와 만난다.












옛날에는 통신방법의 하나로 사용을 하였던 것으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봉화를 올려 신호를 전했는데 여기서 추화산이란 이름이 나왔다. 추화산 성은 봉수대를 감싸며 정상일대에 쌓아 올린 가야시대의 산성이다.

한때는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로 신라와 가야가 접경을 이루고 그 이후에는 신라와 백제, 후백제와 고려가 시대를 달리하며 서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돌과 흙을 혼합하였고 이 성벽의 둘레는 약1.4km이며 동,서,남쪽 세군대에 성문을 설치하고 북쪽내려가는 계곡에는 우물과 연못 및 부속건물을 두었는데 현재 우물한개가 복원이 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성황사는 추화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산성의 부속건물로서 두분을 성황신으로 모시고 있는데 박욱은 나말여초에 군도를 토벌하여 태조가 고려를 건국할 때 삼한벽공장군이 되었다.
또한 손긍훈도 고려태조의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사도를 추증하고 광리군으로 봉하였다 하여 이 두분를 사당의 신으로 모섰다 한다.

다시 둘레길로 돌아와 봉수대에서 바라보는 밀양시가지는 산성산에서 내려오는 용의 모습과 삼문동을 섬으로 만들며 흘러가는 밀양강의 운치하며 크고 작은 산들이 좍~ 펼쳐진다.
1.4km의 산성 둘레길도 함 걸어보자. 발아래 성벽을 밟으며 걷는 이 길은 어느 둘레길 보다도 편안하며 우거진 숲속에 불어오는 강바람에 더운줄도 모르고 걸을 수 있는 호젓한 산책길이다.
둘레길은 영천암으로 내려서는 포장길을 따라 영천암의 물맛을 보고 중국에서 들어온 범종을 둘러보며 재사고개를 거쳐 충혼탑으로 내려서면 간단하지만 여운이 남는 걷기를 할 수 있다.



























재사고개는 교동의 충혼탑에서 범북으로 넘던 옛길로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영남대로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에서도 주막껄등 그당시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유적의 흔적을 찾았다한다. 이곳 재사고개는 장삿꾼이나 과객등 많은 사람들이 다닌길로 내려오는 이야기 한토막이 있다.

한겨울 자정이 지나 소금장수가 소금을 지게에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이곳 고개로 올라오더니 지게을 내리고 쉬는게 아닌가. 땀을 딱으며 한숨을 돌린후 다시 청도장으로 가기 위해 지게를 지는데 소금장수는 너무 피곤해서인지 지게에 기댄체 선잠에 들고 마는게 아닌가.

그런데 반대편에서 백발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헐레벌떡 뛰어 이곳에 올라오며 가뿐 숨을 몰아쉬는데 그때 꼬끼요~~~하면서 닭울음소리가 들리는게 아닌가. 노인은 한숨만 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않으며 탄식을 하는데 소금장수가 그 연유를 물어니 노인은 자초지종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은 오늘이 자기 재삿날인데 만주에서 이곳까지만 오면 닭이 울어 재삿날에 음복을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하며 자신이 이곳 밀양에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 만주로 가면 조금 나을까 싶어 식솔을 대리고 만주로 이주를 했는데 그만 병이 들어 죽게 되었고 식솔들은 자신을 만주에다 묻어두고 다시 밀양땅으로 내려간이야기등을 들려 주었다.

자식들이 이곳 고개에서 라도 재사를 지내주면 음복이라도 하고 돌아 갈 수 있는데 하며 한탄을 하는게 아닌가. 소금장수는 마을에서 수소문을 하여 찾아가니 지난밤에 부친의 재삿날이라하며 만주에서 돌아가신 이야기를 하는게 아닌가.
지난밤의 이야기를 자식에게 들여주니 그 다음부터 음식을 만들어 이곳 고개에서 재사를 지냈다하여 재사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하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이일대가 공동묘지로 되어 있어 그 이야기와 맞아 들어가는 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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