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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여행/부여여행)정림사지5층석탑.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이라는 평제탑 정림사지5층석탑


우리나라 초창기 석탑의 전형은 목탑이었습니다. 목탑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을 말합니다. 나무다 보니 화재와 눈·비 등에 노출되어 내구성이 약하며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 이를 해결하려는 차원에서 돌로 석탑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목탑이 석탑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탑이 미륵사지 석탑(국보제11호)과 정림사지5층석탑(국보제9호)입니다.





정림사지박물관 정림사지5층석탑 주소: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2015/07/26 - (충남여행/부여여행)부여 서동 연꽃축제 궁남지. 백제의 도읍지 부여의 많은 문화재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 축하. 부여 서동 연꽃축제가 궁남지에서 열렸습니다.

2015/07/31 - (충남맛집/부여맛집)부소산성맛집, 낙화암맛집,고란사맛집 부소산 칼국수. 구수한 콩국수로 여름도 이기고 백제의 사직과 함께한 삼천궁녀 낙화암도 구경하는 부소산 칼국수.

2015/08/05 - (충남여행/부여여행)국립부여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백제시대 문화재를 만나다.

2015/08/07 - (충남여행/부여여행)낙화암과 고란사. 마지막 백제의 흔적 부소산성 백화정 낙화암 고란사를 여행하다. 낙화암과 고란사

2015/08/17 - (충남여행/부여여행)부여 부소산성 여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부여 부소산성에서 백제를 만나다. 사비성



이 두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오는 초창기 과정을 가장 잘 보여준다 합니다. 그중에서도 목탑의 전형이 가장 많이 남은 석탑이 미륵사지석탑입니다. 미륵사지석탑은 목재 석탑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여러 가지 면에서 정형화되지 못했다면 정림사지5층석탑은 그에 반해 외형상 현재 석탑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군더더기가 붙어 있지 않은 깔끔하고 세련된 양식의 석탑입니다.


 


그럼 ‘정림사지박물관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정림사지5층석탑에서 목탑의 형식을 보여주는 게 여러 부분 남아 있습니다. 먼저 기단석 부분입니다. 일반 석탑의 기단과는 다르게 좁고 단층이 낮은 기단입니다.



기단 각 면의 모서리에 새긴 기둥을 우주라 하는데 이는 민흘림 기법이며, 지붕돌인 옥개석의 끝은 살짝 들렸고 낙수면의 내림마루를 보면 목탑에 사용된 기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림사지5층석탑을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이라 부릅니다.

 



사용된 기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림사지5층석탑을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이라 부릅니다. 미륵사지석탑은 석탑인데도 목재의 형식을 많이 따랐으나 정림사지5층석탑은 목탑의 모방에서 벗어나 석탑만의 온전한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첫 작품이라 보고 있습니다..그만큼 의의가 있는 석탑이라 국보 제9호로 지정하여 정림사지오층석탑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의 구조를 알아보겠습니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높이가 8.33m인 거대한 석탑입니다. 정림사지오층석탑도 지대석과 기단부 탑신부와 상륜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기단부는 단면이 방형인 다듬은 긴 돌기둥 8개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다 기단은 단층이며 여러 개의 돌로 낮게 만들어졌습니다.






중석의 각 면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이를 우주라 하고 가운데 지탱하는 돌을 하나씩 끼웠는데 이것을 탱주라합니다....그 위에다 갑석을 올려 기단을 마무리했습니다. 갑석 위에는 1층의 탑신을 올렸으며 네 귀퉁이에 별도의 돌로 민흘림의 기둥(우주)을 만들었고 우주 사이에 각각 두 장의 판석을 끼웠습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몸돌은 작아져 4개, 2개, 1개의 돌로 만들어졌습니다. 몸돌 위에는 지붕돌인 옥개석을 올렸습니다. 지붕돌 아래에는 2단의 지붕 받침인 옥개받침이 있으며 몸돌과 마찬가지로 위로 올라갈수록 옥개받침의 석재 수가 줄어듭니다.






옥개석은 얇고 넓은데 반해 전각에 약간의 반전이 나타나며 또한, 옥개받침 아래에는 사각형의 석재가 목탑의 공포 형태를 간략하게 나타낸 것이라 합니다. 지붕돌 위에는 몸돌을 받치는 1단의 탑신받침이 각층의 지붕돌 위에 있으며 상륜부에는 노반을 두었습니다.


 










현재 정림사지5층석탑은 몸돌보다 지붕돌의 폭이 넓고 작은 석재를 이용하여 석탑을 조성한 게 목탑과 유사한 모습이라 합니다. 그러나 정리사지오층석탑을 보면 우선 안정감 있는 비율로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한 마리의 학처럼 우아하고 격조 높은 모습에 백제 장인의 혼이 담긴 매우 뛰어난 예술 작품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정리사지오층석탑에는 특별한 이력의 글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나당 연합국으로 당나라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했을 때의 일입니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의 1층 탑신 4면에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전승을 기념하는 치적인 “백제를 징벌한 기념탑”을 석탑에 새겼으며 이 때문에 정림사오층석탑을 ‘평제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정림사지5층석탑 탑재의 원재료인 석재는 강경읍에 있는 옥녀봉 일대에서 채취했다고합니다. 이는 이찬희 공주대 문화재과학과 교수의 ‘웅진문화21’에 수록한 논문에서 이곳의 돌이 정림사지5층석탑과 같은 석질로 밝혀졌다 합니다. 아마 다음에 정림사지오층석탑 복원 등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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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여행/부여가볼만한곳)부여박물관 백제금동대향로. 두 눈으로 확인했던 부여 박물관 백제금동대향로


2년 전에 태안반도와 부여를 2박 3일 여행했습니다. 당시 잠은 태안반도의 끝에서 이틀을 자면서 여행은 부여에서 주로 했는데 그 이유는 부여의 여러 곳을 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침 우리가 부여 여행을 할 때 백제 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하며 모든 문화재를 무료로 개방하는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국립부여박물관 주소: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 18-2

국립부여박물관전화:041-833-8562




2015/08/17 - (충남여행/부여여행)부여 부소산성 여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부여 부소산성에서 백제를 만나다. 사비성

2015/08/07 - (충남여행/부여여행)낙화암과 고란사. 마지막 백제의 흔적 부소산성 백화정 낙화암 고란사를 여행하다. 낙화암과 고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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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6 - (부여맛집/부소산낙화암맛집)구드래유람선선착장 맛집 장원막국수. 부여 장원막국수



 


그때 궁남지와 부여박물관, 부소산, 정림사지 등을 둘러보았습니다. 제 취미가 전국의 고적과 고대 문화재를 찾아다니는 여행을 좋아해서 부여에도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당시 부여읍내의 궁남지, 부소산의 낙화암, 거대한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을 만나는 계획만을 세웠습니다.



부여의 유물은 한 번도 구경을 못했지만 부여의 많은 석재유물은 부산과 가까운 경주에서 거대한 감은사지 오층석탑 등 신라의 정밀한 국보문화재를 많이 보았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던 터라 부여의 여러 고대 문화재는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딱히 많은 궁금증을 일으키지는 못했습니다.




신라와 백제는 문화재마다 특징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그게 그것이 아닌가하며 다 비슷하다는 생각 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부여 여행을 한 번도 하지 않았기에 어떤 문화재일까하며 궁금증을 떨칠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부여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이는 부여박물관에 전시 중이던 백제금동대향로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금동대향로를 만남으로 부여여행은 모든 게 상쇄된다는 생각에 부여박물관 여행을 하면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가장 먼저 백제금동대향로 전시관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이 통했는지 그곳에는 불이 꺼진 채 삼성에버랜드에 3개월 동안 대여한다는 짤막한 안내문만 붙어 있었습니다. 그 안내문을 보는 순간 억장이 무너지고 황당하여 얼마나 분통을 터트렸는지 모릅니다.

 


오직 백제금동대향로를 보기위해 부여여행을 계획했었는데 그게 모두 수포가 되어 버리는 순간 너무나 황당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기념 축제를 한다면서 부여 최고이자 최대의 백제 걸작품인 금동대향로를 삼성에다 대여하는 처사를 비난하면서 돌아섰던 기억에 부여 생각을 하면 지금도 그저 개똥쑥을 씹은 듯 씁쓸합니다.




이번에 다시 공주와 부여를 여행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일정표를 보니 당연히 부여박물관과 정림사지5층석탑이 들어가 있었으며 이번에도 부여박물관의 백제금동대향로가 다른 곳에 대관했다면 어찌하노 하면서 걱정 아닌 걱정을 했습니다.



백제관광호텔에서 일찍 조식을 해결하고 바로 부여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이는 가장 먼저 금동대향로를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막상 부여박물관을 찾았는데 그때 시간이 오전 9시30분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개관 시간이 10시로 변경되었다며 지금 청소중이라 입장을 할 수 없다고 10시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아! 이번에도 일이 꼬이는구나 싶었습니다. 오늘 일진이 초반부터 틀어지는 것을 보니 백제금동대향로를 애시 당초 못 보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습니다.




그래도 볼 수 있을 거라며 자신을 위안하고 기다렸습니다. 10시가 되어 부여 박물관에 입장 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금동대향로 전시실로 혼자 향했습니다. 백제금동대향로가 잘 있나 싶었습니다. 전시실을 들어서는 순간 붉은 광채를 내며 빛을 발하는 금동대향로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사진으로만 만났던 금동대향로를 이리 두 눈으로 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과연 명품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사람의 손재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신인이 만든 예술품이었습니다.



신인이 만든 예술품답게 백제금동대향로의 출토과정도 드라마틱했다합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까딱했다면 영원히 지구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파괴나 사장될 뻔 했습니다. 그 이유를 보면 백제금동대향로의 출토장소가 능산리고분군 주차장 확장공사장이었습니다.



그때까지 큰 유구나 유물이 딱히 나온 게 없었기 때문에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해 다른 큰 이유가 없으면 당장이라도 불도저로 밀고 주차장으로 만들어도 별 무리가 없었다합니다.



사적 제14호인 능산리 고분군과 사적 제58호인 부여나성 사이의 작은 계곡에 자리한 계단식 논은 혹시나 하는 당시 부여박물관장이었던 신광섭의 직감에 당시 문화재관리국 기념물과과장인 노태섭의 지원으로 재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두 분의 촉이 통했기에 오늘날의 백제금동대향로는 우리 눈앞에 찬란한 빛을 발하며 있게 된 것입니다.  1992년의 발굴조사에서 나온 유물로 보아 그저 금속제품을 만드는 공방 정도로 생각했던 곳이 1995년 금동대향로가 발견됨으로써 백제궁궐의 왕실 절터였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발굴된 목탑의 흔적에서 사리장엄구를 보관했던 석조사리함이 발견되었으며“ 567년 창왕 13년에 정혜공주가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었다합니다. 이를 보면 금동대향로의 조성연대를 대략 유추할 수 있으며 백제 황실의 의식과 제사용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 가능합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향로 뚜껑과 몸통이 서로 분리된 상태로 물이 흠뻑 고인 진흙 속에서 발견되었으며 1300여년의 오랜 세월 동안 녹슬거나 부식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는 진흙이 진공상태를 만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99% 상태의 완벽한 대향로가 기적같이 지금까지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금동대향로를 자세히 보고 있으면 받침대를 한 용이 발가락에 힘을 주며 꼭 하늘로 솟아오를 듯 당찬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귀하디귀한 보물 중에 보물인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해 세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금동대향로는 크게 뚜껑 부분과 몸체로 나누어지며 뚜껑 위쪽에는 봉황 장식에다 뚜껑을, 몸체는 향로와 용의 형상인 받침대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뚜껑의 끝부분에는 턱 밑에 여의주를 품은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갈 듯한 모습입니다.

 




또한, 봉황의 목과 가슴에는 작은 구멍이 3개 뚫려 있으며 여러 개의 구멍이 뚜껑에 더 있어 이는 향을 피우면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이라 합니다. 봉황 밑으로는 금, 완함, 꽹과리, 종적, 피리를 들은 5명의 악사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뚜껑을 자세히 보면 산봉우리가 여러 개 겹친 모양인데 모두 74개라고 합니다. 이는 신선들만 드나든다는 삼신산인 봉래산을 뜻합니다. 그 안에 17명의 신선이 있다하며 사자, 거북이, 원숭이, 코끼리를 포함한 37마리의 각종 상상의 동물상에다 나무와 폭포, 호수 등을 표현하여 무릉도원을 뜻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저 또한 향로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도 신선이 되어 함께 그 속에서 놀고 있다는 착각을 들게 했습니다. 향로의 몸체는 연꽃으로 장식했습니다. 이는 뚜껑의 5단 산봉우리와 균형을 맞추려고 5단의 연잎으로 처리했습니다. 여기에도 신선 2명과 25마리의 동물을 새겼는데 뚜껑과는 다르게 물속과 물가 주위에다 물고기 등 수중생물을 나타내었습니다.






향로를 받치는 받침대는 상상속의 동물인 용의 형상입니다. 향로를 지고 하늘로 박차고 오르는 듯한 모습은 박진감과 힘이 넘쳐보였습니다. 상상속의 동물이지만 몸통과 꼬리 수염, 발, 머리카락 의 표현 등을 섬세하게 하여 꼭 움직이는 착각에 살아 있는 듯했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금동백제대향로를 박산향로라고 한답니다. 이는 중국 한대에 구리로 만든 향로로 바다에 신선이 사는 전설상의 산을 박산이라 하며 그 박산은 산과 신선 동물 등이 사는 이상의 세계인 무릉도원인데 이를 표현한 향로를 박산향로라 부른답니다.

 


박산향로는 도교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백제금동대향로를 박산향로로 보는 이유이며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재도 외국에 나가 우리 문화재를 알리는 전시를 많이 합니다. 그중에서도 반출 할 수 없는 문화재가 딱 두 점이 있다고 합니다. 영조어진과 이 백제금동대향로이며 도난과 이동 중 파손, 여러 가지 여건 등을 고려한 조치로 백제금동대향로는 꼭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백제금동대향로 높이 61.8㎝,

백제금동대향로 무게 11.85㎏

백제금동대향로 국보 제2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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