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제주여행/서귀포여행)김정희의 세한도를 그대로 옮겨 놓은 제주 추사관과 추사 김정희 유배지 여행


제주 서귀포 건축문화기행 두 번째 포스팅입니다. 

서귀포 건축여행을 겸한 세한도(歲寒圖)의 추사 김정희 선생 기념관인 제주 추사관 여행입니다. 

추사하면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아마 모르시는 분이 없을 만큼 알려진 인물입니다.





제주 김정희 추사관 주소: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

제주 김정희 추사관 전화:064-710-6802




2019/06/19 - (서귀포맛집)안먹어봤다면 말을하지마. 가성비 최고인 제주 모슬포항 현지인 맛집 한라전복 전복돌솥밥

2019/06/20 - (제주여행/서귀포여행)제주 특별한 건축물 여행 이타미 준 건축가의 방주교회. 제주 방주교회

2019/06/13 - (제주맛집)서문시장맛집, 제주횟집 가성비 최고인 현지인 추천 맛집 신세계회센타.

2019/06/11 - (제주맛집)한라산 백록담을 보며 먹는 꿀맛의 제주시새우리 딱새우김밥. 제주시새우리

2019/06/16 - (제주여행/서귀포여행)이곳이 비경, 제주에서 꼭 가야할 천연 원시림인 안덕계곡 여행. 안덕계곡

2019/06/14 - (제주여행/서귀포여행)제주도 올레 9코스에 기암절벽의 위용이 대단한 박수기정과 대평포구 여행




금석학의 대가이며 독특한 추사체의 완성으로 서예사에 한 획을 그은 분으로 왜!! 서귀포에 추사 김정희 기념관인 추사관이 들어서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이는 추사 김정희가 서귀포 대정에서 8년 넘게 유배 생활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추사는 경주김씨 가문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영조의 사위인 월성위 김한신이며, 

부친 김노경 역시 예조판서 등 육조를 거치는 권세가의 집안이었습니다.


 


추사 역시 1809년인 순조 9년에 생원이 되고 10년 뒤인 순조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 충청우도 암행어사,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판 등을 지냈습니다.

 


추사는 1840년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되었다 해서 제주 유배길에 올라서며 그의 나이 55세였습니다. 

포교 송계순의 집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강도순의 집으로 옮겼으며 다시 창천리로 옮겨 유배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세한도의 추사관





추사 김정희 동상





현재 추사관이 있는 추사의 유배지는 강도순의 집터로 1948년 제주 4·3사태에 불탔던 것을 1984년 강도순 후손의 고증으로 복원됐습니다. 

화산석으로 돌담을 둘렀으며 탱자나무가 담장을 돌아가며 심겨 있는 것을 보면 위리안치형의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위리안치는 유배생활의 최고 형벌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해야 했으나 대정향교 현판을 쓰는 등 대정현 안에서는 그래도 자유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하였으며 1844년 헌종 10년에 추사의 최대 걸작인 세한도를 그렸습니다.

 




세한도에는 공자의 글인 “추운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발문을 적어 그의 제자 이상적에게 주었습니다.

 




이상적은 스승이 제주로 유배를 떠나자 스승을 잊지 않고 두 번이나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서 보내주어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은 제자에게 감사의 뜻으로 그려준 편지형식의 그림입니다.





세한도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각각 두 그루 그려져 있습니다. 

소나무는 김정희 자신이며 오른쪽의 잣나무는 제자인 이상적을 뜻한다고 합니다. 

현재 국보 제180호에 지정됐습니다.





강도순의 집을 추사는 ‘귤중옥(橘中屋)’이라 불렀으며 손님들은 수성초당(壽星草堂)이라 불렀습니다.



제자 강위는 ‘수성사’라는 시에서 스승이 ”달팽이집에서 10년간 가부좌를 트셨다”라며 수성초당을 달팽이집에 비유했습니다. 



추사는 제주에서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다도의 대가인 초의선사와 교류하며 제주에 차 문화를 도입하였습니다.

 


현재 추사관에서 시작하는 ‘추사유배길’이 만들어 있습니다. 

1코스가 `집념의 길‘로 명명되었는데 집념으로 완성한 추사체를 보는 듯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기념관인 추사관은 세한도를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추사관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1984년 제주 지역인들이 건립한 추사유물전시관을 2007년 10월 추사 유배지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하면서 그에 걸맞은 전시관의 여론에 따라 2010년 5월 건립되었습니다.

 




추사관은 3개의 전시실과 교육실, 수장고 등을 갖추었으며 기증품과 예산 김정희 종가 유물 일괄과 선생의 현판과 편지 글씨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728x90

728x90

암곡동 왕산마을에서 무장골을 따라 40여분 올라가면 왼쪽 담벼락에 걸려 있는 무장산사지 안내판. 여기서 우측으로 무장골을 건너간다. 




무장사지터로 우측은 무장사지 삼층석탑가는 길 좌측은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성사적지 가는길이다.

무장사지아미타불 조성 사적비 이수및 귀부로 보물 제125호, 계화부인이 소성왕의 극락왕생을 빌며 조성한 아미타불의 기록을 적은비문으로 현재 비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빗돌을 받치고 있는 거북이를 귀부라한다. 두마리의 거북이가 빗돌을 받치고 있다. 장수를 의미하는 거북이로 알려져 있는데 계화부인이 부왕 소성왕이 일찍 승하하여 아마 귀부를 깔고 명복을 비는 것은 아닌지....

귀부위에 빗돌을  받치는 테두리에 12지신을 돌여 놓았다. 앞뒤로 4개씩. 좌우로 2개씩으로 마모가 심하여 확인이 힘들다.

12지신상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보통 비석을 받치고 있는데 귀부라한다. 목이 달아나고 없습니다.

거북이와 거북이 사이에 역삼각형으로 있는 조각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여성 또는 여성의 성기를 의미한다함

빗돌위에 얹혀 있는 머리로 용이여의주를 받치고 있는 형상같이 보인다.


이수에 새겨진 용

이수의 측면 조각입니다.

측면의 전체적인 모습입니다.


무장사지

이절터는 경주시 암곡동 산1번지에 위치한다. 보문단지 뒤 덕동호 인근에 위치한 암곡동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옛 서라벌)에서 아주 멀고도 험한 골짜리임을 알수있다.
그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무장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능선 끝에 자리를 잡은 절터이다. 무장사란 절이름에서 보면 아주 강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사연을 간직한 절터로 짐작을 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절 이름부터 뜻이 있었다. 문무왕때 이르러 삼국을 통일하였지만 태종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지긋지긋한  전쟁은 끝났다 하며 이제는 피폐한 백성을 생각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병기와 투구를 감추어 나라의 평화를 기원했다는 뜻에서 무장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신라38대 원성왕의 부친인 효왕이 그의 숙부 파진찬을 위하여 세운 절이라 한다.
삼국유사에도 무장사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소성왕의 왕비인 계화부인이 소성왕이 임금의 자리에서 일찍 승하하자 무장사에 그의 극락왕생을 빌기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하게 되었다한다.
무장사지에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는 계화부인이 소성왕의 명복을 빌면서 조성한 아미타불상을 만들면서 그에 관한 내용을 기록해 놓은 기록비문이라한다.
1915년 귀부와 이수만 덩그런히 남아 있었는데 주변에서 비석조각을 발견하였다한다. 그 조각에 새겨진 내용을 보고 무장사지임을 알게 되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그 비문이 보관되어 있다한다.
비문에는 금석학의 대가 추사김정희가 32세 때인 순조17년에 무장사지를 두 번이나 방문한 기록을 써 놓았고 당나라 왕희지의 글을 모아 집자해서 써 놓았다고 되어 있다.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이수및 귀부(보물제125호)와 무장사지 삼층석탑(보물제126호)만 현재 남아 있다.
먼저 이수및 귀부를 살펴보면 비문은 없어지고 비석을 받쳤던 거북모양의 받침대인 돌을 귀부라 한다.
그 귀부위에 있던 비석은 파손된 조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비석 위에 올려져 있던 용모양을 새긴 비석머리를 이수라 한다.
귀부인 거북이 두 마리 위에 12지신을 모시고 그위에 비문을 세웠서며 이수인 용이 새겨진 비석의 머리돌에는 아미타불ㅇㅇ란 여섯글자가 두줄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무장사지삼층석탑은 기단을 2단으로 만들고 그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려 놓았다. 1층 기단에는 모서리 기둥과 2개의 안기둥을 조각하고 덮개인 돌을 올려 놓았다. 덮개돌 위의 2층 기단은 8개의 돌로 짜 맞추었다. 2단 기단 네면에 두 개의 돌에다 안상을 넣었다. 둥근 창모양 같은 문양을 모서리기둥과 안기둥에 새겨 넣었다. 1층 2층3층 각각 몸돌과 몸돌을 덮은 지붕돌인 덮게 돌은 모두 1개씩의 돌로 만들었고 아랫면은 5단 그리고 모서리 기둥을 조각하였다.
1963년 무너져 있던 것을 일부 다른 돌을 넣어 다시 세웠다한다. 높이는4.95m


무장사지 삼층석탑 보물제126호. 1962년 복원 작업을 할때 일부 자재를 추가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합니다.

증명사진입니다.

2층 기단에는 창모양의 안상을 조각하였습니다

기단위에 하나의 돌로된 지붕돌을 놓았고 그의에 몸돌도 하나의 돌로 만들어 사각 모서리를 안쪽으로 조각을 하여  놓았다, 지붕돌은 덮게돌로 5단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돌이다.

옆에서 본 모습으로 안상하며 지붕돌이 5단으로 역층의 모습을 하며 몸돌의 네면에 안쪽으로 조각을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장사지 위치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