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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밀양여행)밀양 아랑각.

밀양 아랑각

밀양에는 종종 남량특집극인 전설의 고향에 이곳 영남루 아래 아랑낭자의 이야기가 소재거리로 많이 나온다.

그 만큼 전국적으로 아랑낭자의 이야기는 전설이 아닌 실제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밀양의 구석구석을 다니다 보면 정절을 지키다 순절한 분들의 정려각들을 많이 만난다. 상동면의 낙화암에서 뛰어내린 민씨부인은 이 고을의 대단한 자부심으로 남아 있으며 산외면의 장씨 부인 역시 친정인 창녕의 월영대에서 뛰어내려 정절을 지켰다하여 그 마을의 이름을 정문으로 부르게 되었다하며, 단장면의 사촌마을등 숱한 이야기들이 전해 온다.

그만큼 밀양에는 부도를 목숨과 바꾸며 정절을 지키겠다는 부인들이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많이 만난다. 정려각을 대표하는 것이 이곳 영남루의 아랑낭자가 아닐까 싶다. 명종때 죽음으로 순결을 지켰다는 아랑낭자의 사당을 함 가보자. 영남루 아래 돌계단을 내려가면 아랑각을 만난다. 정절문 우측으로는 큰 노거수가 밑둥치의 절반을 도려내고도 아랑각을 지키는 수문장을 하고 있다. 계단을 올라 열린 문을 들어서면 또 한번의 계단을 만난다. 계단위 아랑낭자를 모신 사당이 자리를 하고 있다.

그곳에는 낭자의 영정과 좌우로 유모와 나들이를 나온 모습과 또 하나는 신임부사의 꿈에 나타나 낭자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범인을 잡아온 그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삼문 옆 쪽문을 나서면 계단 위 낭자의 현장을 알리는 비석과 만난다.

아랑은 그 당시 밀양부사의 딸로 윤씨이며 동옥 또는 정옥으로 불렸다. 하루는 유모와 영남루에 밤나들이를 나왔다가 유모와 내통한 괴한에게 겁탈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자결을 하였다. 그의 혼백을 위로하고자 마을에서는 사당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현재는 밀양시의 대표적인 축제가 된 밀양아랑제로 아랑아가씨 선발대회를 개최하여 낭자의 혼백을 위로하고 있다.

1930년에 영남루를 중수하면서 현재의 위치에 ‘정순아랑지비’를 세우며 비각을 세워 아랑각이라 불러서며. 현재 아랑사는 1965년 비각인 아랑각을 헐고 그 자리에 맞배지붕의 3칸짜리 사당과 삼문인 중문을 세웠고 고육영수여사에 의해 이당 김은호가 그린 아랑의 영정과 위폐를 모섰다한다.

바람이 좀 불라치면 아랑각 주위를 감싸고 있는 대나무의 스산함이 그 녀의 슬픔을 대신하듯 울부짓고 낭자의 죽음이 너무나 억울한지 밀양에서는 청춘남녀들이 아랑각에서는 절대로 데이트를 즐기지 않는다 한다. 그 후 반드시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다하니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밀양 여인들의 자부심인 아랑각은 오늘도 영남루를 휘감고 가는 강물 속에 그때의 슬픔을 알고 있는지 말없이 흘러만 간다.






















찾아가는 길;부산역에서 무궁화호나 새마을호 열차로 밀양역까지 간다. 무궁화호 첫 차는 오전5시10분에 있고 20~4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43분 소요, 3800원. 밀양역 앞에서 영남루에 가는 시내버스는 수시로 있다. 1, 1-2, 5, 6번 등 다양하다. 10분 소요.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에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밀양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타고 긴늪사거리에서 직진, 밀산교를 건넌 후 표지판을 따라 영남루 앞으로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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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남기리 정려각과 가곡리 민씨 정려각. 정절과 정려각, 옛길을 가다 만난 슬픈 이야기


시골의 옛마을을 찾다보면은 마을 어귀에 효자각 또는 열녀각을 가끔 만난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비각은 그 마을의 자랑이며
그 마을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 같아 마을 주민들의 자긍심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인지 시골 농촌을 찾아가는 길손 또한 그곳을 지날 때 면
옷깃을 여미고 마음가짐을 자연히 새롭게 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밀양에는 충과 효를 숭상하는 양반골로 마을 마을마다 자긍심이 하늘을 찌른다.
그래서인지 경부고속도로도 마을을 통과하면 시끄럽다고
밀양박씨와 손씨 문중등 밀양을 대표하는 문중들이 반대를 하여 경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와
한일합섬등 공장들이 들어올려고 해도 조용히 살고 싶다고 반대를 하여 마산으로 갔다는 이야기등
밀양은 그만큼 자존심을 가지고 사는 도시이다.



 

 그래서인지 효자와 열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분들의 이야기 또한 많이 전해온다.
상동면과 산외면은 능선을 하나 두고 각각 열녀각이 하나씩 서 있다.
모두 임진왜란때 정절을 지키기 위해 투신한 분들이다.
산외면 남기리 입구에는 정문마을이 있다.
이마을 이름도 정려각에서 따왔다.
밀양손씨 손기후의 처인 창원장씨로 친정인 창원에 있을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변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월영대에서 뛰어내려 정절을 지켰다한다.




창원장씨 열녀각은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어
안을 보니 좌우 앞면에 사군자인 매화, 난초,국화, 대나무
그리고 소나무가 그려져 있어 더욱 숙연한 마음이다






가곡리의 민씨 정려각 또한 박희량의 부인이자
삼매당 밀양박씨인 민구서의 딸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마을로 왜구들이 들이닥치자 뒷산 바위굴로 피신을 하였다 한다.
왜구들이 그곳까지 따라오자
민씨 부인은 화를 피하기 위해 바위에서 몸을 던지니
마을에서는 한송이의 꽃잎이 떨어졌다하여
낙화암이라 부르며 그 봉우리를 낙화듬으로 현재 부르고 있다.



내가곡마을의 전경과 마을 뒤의 낙화듬돠 정상아래 바위가 민씨부인이 투신 하였다는 낙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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