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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구황동 모전석탑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전설의 사찰인 도림사가 구황동 모전석탑지.  


이번 경주 여행은 폐사지입니다. 황룡사지, 사천왕사지 등 폐사지라도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지를 뜻하는 감투(?)를 하나쯤 모두 쓰고 있는데 구황동 폐사지는 많은 부재가 남아 있음에도 문화재 지정 타이틀이 없이 그저 울타리만 둘려 잡초더미에 묻혀 있습니다. 이곳은 분황사와 황룡사지에서 도로 하나를 두고 있는 폐사지입니다. 사찰의 이름을 확인할 길이 없어서인지 모르지만, 동네 이름을 따와 구황동 모전 석탑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구황동 모전석탑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2016/11/10 - (경주여행)경주 분황사 여행. 가보지 않아도 가본것 같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석정, 화쟁국사비부, 보광전의 약사여래입상을 만나다.

2016/11/09 - (경주여행)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최초의 석탑이자 유일한 경주 분황사 9층석탑을 여행하다. 분황사모전석탑




아니 사실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찰 이름을 비정할 수는 있습니다. 이유를 알아보면 현재 구황동 모전 석탑 지에서 일제강점기인 1930년경에 일본인이 ‘도림(道林)이란 기왓조각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추정해보면 도림사가 맞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며 삼국유사에 ‘도림사는 입도림 곁에 있었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는 신라의 수도 즉 서라벌 입구에 자리했던 절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구황동 모전 석탑지가 도림사 폐사지가 맞다면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옵니다. 무엇이 재미있냐고요? 모두 아시는 이야기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신라 48대 왕은 경문왕입니다. 경문왕 때의 이야기입니다. 경문왕은 어느 날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더니 자신의 귀가 당나귀 귀와 같이 길어져 있었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 큰일 났다며 좌불안석 같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당나귀 귀같이 귀가 길다는 비밀은 왕후와 신하들 모두에게도 비밀로 하였지만, 자신의 왕관을 만드는 사람인 복두장에게 만은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경문왕은 복두장에게 만약에 비밀을 발설하면 죽음뿐이라고 입단속을 시켰습니다. 하하 그리고 보면 사람이란 남이 모르는 비밀을 자신만 알고 있다면 입이 얼마나 근질근질 했겠습니까.

 


그것도 임금님 귀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요즘 같으면 ’특종‘감인데 말입니다. 아마 복두장이는 그 비밀을 말하고 싶어 제 명에 못 살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복두장이는 시름시름 몸을 앓았고 죽기 전에 비밀을 다 털고 갈 욕심에 도림사의 대나무 숲에서 “우리 임금님은 당나귀 귀”하며 큰소리로 외쳤고 복두장이는 죽었습니다. 그 후 바람만 불면 도림사 대나무 숲에서는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며 복두장이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경문왕은 큰일 났다며 사람을 시켜 도림사의 대나무숲을 모두 베게 하고 산수유를 심게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하며 소리가 났다 합니다. 이게 실제 사실이라면 경문왕은 황당해 했겠습니다.

 


모두 초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재미있게 들었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전설의 실제 도림사라면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느낌입니다. 구황동 모전 석탑 지가 도림사였다 생각하니 어디선가 갑자기 복두장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곳 구황동 모전 석탑지의 남아 있는 부재를 보면 통일신라 시대 모전 석탑 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전 석탑은 중국의 벽돌탑을 모방하여 만든 탑이라 하여 모전 석탑 또는 전탑이라 하며 남은 부재로 짐작해보면 분황사 모전 석탑과 같은 형태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허물어져 산산이 조각났지만 남·북 감실의 돌기둥 2쌍만은 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돌기둥이 배치된 모양으로 짐작해보면 탑은 정사각형이며 한 변의 길이가 4.5m쯤 되는 크기입니다.



이는 한 변이 13m인 분황사보다는 크기 면에서 아주 작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1층 탑신의 사면에다 감실을 넣고 사방불을 모신 형식이며 돌기둥에는 사천왕인 인왕상을 조각했는데 그 섬세함이 통일신라 조각 기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한 쌍의 인왕상 돌기둥은 금강역사상으로 국립경주박물관 고분관 입구에다 배치해 놓았다 합니다. 그러나 구황동 모전 석탑지의 부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게 화강암 석탑의 지붕돌인 옥개석과 탑신을 바쳤던 지대석입니다. 이를 보면 모전 석탑에 의문이 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저는 사학자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구황동 모전 석탑지에 남아 있는 부재인 인왕상 돌기둥 등을 보면 모전 석탑임이 틀림없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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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 영양울진여행) 낙동정맥 구주령이 아닌 구실령.옥녀당의 전설이 있는 구실령 너무 아름다운 고개입니다.


전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곳에는 고개가 있습니다. 수많은 고개에는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요즘은 당산나무와 당집에서 고개를 안전하게 넘어가게 해달라며 길손이 작은 돌을 올린 후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모습은 전설의 고향에서나 종종 볼 뿐 만나기 힘든 모습이 되었습니다.





한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은 물론이며 낙동정맥 또한 동서를 가르다 보니 수많은 고개가 만들어 졌습니다. 모든 고개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다 있습니다. 전설 없는 고개가 없을 정도로 우리 민초와 밀접하게 연결된 수많은 고개 중 육지속의 섬으로 불리는 경북 영양군 수비면과 울진군 온정면을 연결하는 곳에는 구주령(九珠嶺:표지석에 구주령으로 표기)이 있습니다.






지금은 88번 지방도가 뚫여 있어 수월하게 자동차를 이용하여 넘어 갈 수 있습니다. 이곳 구주령에는 특이하게도 현재 옥녀당의 당집이 남아 있습니다. 그 이유를 보면 조선시대 인조 때입니다. 영해부사로 근무하던 지방관리 황씨에게는 옥녀라는 예쁜 딸이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서로 행정관할이 영양군으로 나누어 져 있지만 그 당시에는 영양은 영해부에 예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옥녀는 아버지의 명을 받아 아흔 아홉 구비를 돌 정도로 험준한 구주령을 넘어 수비의 영양관아에 공문서를 전달하고 다시 영해로 돌아가다 이곳 구주령에서 그만 병을 얻어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본신리 주민들은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죽은 옥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구주령에 봉분을 올리고 옥녀당의 사당을 세워 매년 음력 정월 보름달에 동제를 지내왔습니다.


 



현재까지도 옥녀의 무덤은 관리가 잘 된 상태며 이는 아이를 원하는 부인이 옥녀의 무덤에 먼저 벌초를 하면 득남을 하거나 바라는 소원을 이루게 해준다는 속설로 주민과 고개를 넘는 분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성으로 돌보아온 때문입니다.





이곳 온정면 구주령 안내석에는 “이곳이 구슬 아홉 개를 꿰어 놓은 형상”이라 구주령이 되었다는 설명이며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는 사진 찍기 좋은 녹색명소로 지정을 한 아름다운 곳입니다. 특히 동해에서 솟아 오른 해돋이는 장관이라 합니다.

 



 



울진신문 2010년 8월9일자 김용주님 기고에는 구주령이 아닌 구실령으로 불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필자(김용주)의 유년기 시절에도 구주령이 아닌 구실령으로 불렀고 구지재, 도부재로도 불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를 제시하였는데 임진왜란때 탄액을 받은 영의정 이산해(토지 이지함의 조카)는 평해에 유배를 와 ‘기성록’을 남기게 됩니다. 그 책속 달촌기내용중 김용주님의 글을 인용하면 “산이 영동(嶺東)과 접하게 되어서는 서남쪽이 가장 높은데, 기성(箕城, 평해의 옛 이름)에서는 주령(珠嶺)이 되며, 주령의 한 가닥이 다시 동쪽으로 30여 리를 뻗어 삼성산(三聖山 : 이는 지금 평해읍의 뒷산 삼성봉)이 된다.”에서 주령(珠領)의 주는 ‘구슬주’자로 구슬은 경상도 일부에서 사투리 ‘구실’로 발음을 하여 구실령입니다. 또한 1776년 이긍익의 ‘연려길기술’, 1808년 서영보의 인문지리서 ‘만기요람’에도 주령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주잠(珠岑)으로 표기를 하여 잠은 령과 함께 고개를 뜻하니 주령이 되어 구주령으로 불리는 고개는 잘못된 이름이며 구실령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구지재는 구실령의 한 골짜기 이름에서 유래가 되었고 도부재는 경북 북부쪽에서는 보부상을 도부꾼으로 부릅니다. 평해와 영양에서 생산된 해산물과 농산물은 도부꾼을 통해서 험준한 구실령을 넘어 거래가 되어 도부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고개라 도부재로도 불렸다 합니다. 하루빨리 자신의 이름인 구실령을 찾아야 겠습니다.(참고:울진신문 김영주님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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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양산원동여행)낙동강 가야진사. 신라와 가야의 접경지 용당나루터와 용신설화가 전해오는 가야진사.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1300리를 달려와 부산 을숙도에서 남해 바다로 거침없이 흘러갑니다. 그런 낙동강은 황산강의 옛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아마 그 연유는 윗 지방에 홍수가 나면 이곳 하류에는 항상 누런 황톳물이 흘러내려 황산강으로 불린것은 아닌지 개인적으로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도 낙동강의 하류에는 황산이란 이름이 구전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물금에서 원동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길을 황산잔도라 불려지며 물금장을 황산장으로 불렸던 것을 보면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낙동강은 신라와 가야의 접경 지역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크고 작은 충돌이 생겼고 황산강의 상류인 원동과 김해시 상동을 잇는 용당에는 용당나루터 있었습니다.

 



 

 

 

이곳은 신라 눌지왕(재위 417~458)때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강을 건너고 왕래하던 나룻터가 있던 곳으로 일명 옥지주로 불렀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를 이어오기까지 낙동강을 건너는 뱃길의 안전과 강물의 범랑을 막기위해 제사를 지내왔던 곳으로 가야진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재도 원동의 당곡마을 건너편 모래톱에는 1406년(태종6)에 지어진 가야진사의 사당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의 한강, 금강, 포항의 곡천강등과 함께 국가의 주요 4대강에 제사를 지냈덩 ‘사독’의 하나였다고 삼국사기에 나와 있다합니다. 나라에서는 매년 이곳에 향축과 칙사를 보내어 국가의식으로 매년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합니다. 세월이 흘러 현재에도 그 전통은 이어져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과 홍수로부터 마을을 지켜줄 것을 기원하며 가뭄이 들 때에는 이곳에서 용신에게 비를 내려줄 것을 염원하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합니다.

 

 

 

 

사당을 보면 정면 1칸에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작은 건물입니다. 사당 안에는 제상과 함께 머리 셋 달린 용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용은 상상속의 동물로 물을 다스리는 신입니다. 천태산과 강 건너 용산을 잇는 지점으로 땅의 기운이 모이는 곳에 가야진사가 있다 합니다.

 

 

 

 

 

현재 가야진사가 있는 이곳은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사업으로 대대적인 정비를 거쳤습니다. 주위를 모두 정비되고 발굴작업도 거쳐 현재는 공원화되어 자전거 길의 쉼터와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습니다.

 

 

 

 

 

☞(경남여행/양산원동여행)낙동강 가야진사. 신라와 가야의 접경지 용당나루터와 조강지처를 버린 용의 전설이 궁금해요.

 

가야진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옵니다. 옛날 호랑이가 담배를 피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양주도독부의 전령이 공문서를 가지고 대구로 가던 길에 이곳 원동의 주막에 하루를 묵게 되었습니다. 그 날밤 꿈에 용 한 마리가 나타나 자신은 요 앞 용소에 살고 있는 용이라 이야기하며 남편용이 첩만을 사랑 하고 자신은 멀리하니 그 첩용을 죽여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면 꼭 그 은혜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음 날 용의 딱한 사정을 듣고 전령은 용소로 달려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용 두 마리가 밀월을 즐기는 것을 보고 첩용과 남편용임을 직감하고 전령은 단숨에 용을 한 마리 죽였습니다. 그러나 전령은 실수로 그만 첩룡이 아닌 남편용을 죽이게 된 것을 안 본처용은 죽은 남편용 앞에서 슬피울다가 전령에게 보답을 한다며 그를 태우고 강 속 용궁으로 사라졌다는 용신설화입니다.

 

 

 

 

 

그 이후 주변 마을에는 가뭄과 기근등 재앙이 끊이지 않아 지금의 자리에 사당을 짓고 용세마리와 전령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봄 가을에 돼지를 잡아 통째 용소에 던지는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 가야진사에는 그 용신제의 전수를 위한 전수관도 함께 지어져 있습니다.

 

 

 

 

가야 진사 맞은편에 낮이 막한 둥근 산이 용산입니다. 보기에도 용이 강물 안으로 머리를 박고 있는 모습으로 최근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재 이곳 용산 목을 가로지르며 부산대구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목이 끊어져 용의 기운이 다 빠졌다하여 마을에서 진정을 하여 끊어진 고속도로 위를 연결하는 공사를 실시하여 겨우 숨만 이어지도록 해놓았습니다. 용산 앞에는 물빛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여 깊이를 모르는 웅덩이가 전설 속에 첩과 함께 밀월을 즐긴 용소입니다.

 

 

 

 

 

 

 

 

 

 

 

 

 

 

가야진사

 

 

사진상의 강이 낙동강입니다. 강건너편에 흰 건물이 있는 앞이 용소이며 오른쪽 작은 산이 용산입니다. 그 뒤로 현재 신대구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발굴당시 유적지와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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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발톱바위



전설속에 내려오는 동물은 여럿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아시아권에서는 가장 신성시하고 권위의 상징으로 여기는 동물은 용이라 합니다. 물과 하늘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상상속의 동물이라 최고 권력자에게 권력이용의 수단으로 많이 사용을 하였으며 용은 조선시대 우리 왕실에도 친숙한 동물입니다. 임금의 옷을 용포라하였고 임금이 앉는자리를 용상이라 불렀습니다. 용안 등 임금의 모든게 용과 연관되어 불려졌습니다. 그 만큼 용은 감히 근접하지 못하는 신의 존재가 되어 전해왔습니다.


 


 





그런 영향인지 풍수지리에도 좌청용 우백호가 흘러가는 곳을 명당터로 여겨 조상의 묘택과 집터 등을 잡았습니다. 그 영향인지 모르지만 마을 주변에는 용과 관련된 전설이 많습니다. 특히 그 중 용이 살았다는 용소나 용산은 전국의 계곡 중에 깊은 소는 거의 90% 이상이 용소로 통일됩니다.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천일기도를 드리는데 하루를 남겨 놓고 승천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수두룩합니다. 또한 울퉁불퉁한 능선을 두고는 용산, 용두산이라하여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 신성한 산으로 여기는 이야기 또한 전국적으로 늘려 있습니다.


 

  


ㅎㅎ 사설이 너무 길었습니다. 부산 금정구의 작은 마을에도 범과 용의 전설을 간직한 곳이 있어 찾아갔습니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의 신천마을입니다. 이곳은 예로부터 장수마을로 전해져 현재는 마을분이 외지에서 새로 들어 오신분이 더 많아 보입니다. 마을 또한 장수마을로 지정이 된 것은 신성시하는 용의 발톱 때문인지 모두 연배가 지긋한 노인분이 젊은 층보다 훨씬 많은 곳입니다. 부산 안에도 이런 장수마을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용 발톱바위를 듣고 찾아간 필자에게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본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만큼 신천마을로 새로 들어온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다. 용발톱바위를 듣고 찾아간 필자가 다 무안할 지경이였습니다. 마을에 대해서 물어보니 꼬치꼬치 물었더니 돌아온 반응은 “교회에서 나왔느냐” 이야기였습니다. ㅋㅋ 이곳 마을 뒷산을 호두술산이라 불리는 범산이며 마을을 멀리서 감싸는 산이 용두산(철마산)이라는 이야기을 하였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아주머니 한분이 “아! 이제보니 들어 본것 갔다”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어느 스님이 저 멀리 보이는 산을 용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 좌청용 우백호의 전설 속에 철마산이 용산이면 마을 뒷산 전체가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 중 용의 한발이 이곳까지 내려와 숨기고 있던 발톱을 내 보여 마을에서는 용발톱바위라 부르는 것은 아닌지.




현재 이 용발톱바위는 밭을 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위주변으로는 밭을 일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용발톱바위가 마을을 지켜주는 신성한 바위로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위를 가까이서 보면 꼭 짐승의 발톱처럼 한쪽이 뾰쪽한 게 발톱 같아 보였습니다. 용의 전설과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또한, 용의 전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이곳에는 어마어마한 회동수원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부산의 수돗물을 책임지는 회동수원지가 있어 용은 물에서 산다는 전설이 성립이 되어 몸을 반쯤 담구고 있다가 올라오는 용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 용 발톱 구경을 못하신 분을 위해 사진을 담아 왔습니다. 용 발톱은 요리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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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을 영남대로라 한다.
시대의 배경은 변하지만 이 영남대로는 변하지 않고 면면이 이어져
현재의 동맥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시대때 과거길, 파발마의 길, 보부상들의 애환의 길, 백성들의 눈물의 길,
피난의 길등 아주 다양하게 이용이 되었다 ,
부산을 출발 낙동강을 끼고 올라가 밀양읍성을 거쳐 올라가는 영남대로는
내일동~교동을 거쳐 지금의 밀양대공원 충혼탑 뒤 제사고개로 해서 청도땅으로 영남대로는 이어졌다.


고개마다 애환과 눈물의 사연이 오롯이 배여 있는 우리의 옛길,
과거길의 선비들도 영남대로를 따라 한양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며
과거급제의 꿈을 안고 걸었던 이길,

과거길에 오르는 선비들은 관로인 영남대로를 두고
이곳 추화산 사잇길인 용평고개로 둘러 현재의 밀양대공원 충혼탑으로 돌아 갔다 한다.



이곳 용평고개에는 보기에도 비범한 모과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 있다.
수령 300년 이상을 이고개에서 오고가는 길손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이고개에는 원래 700살을 견더온 모과나무가 있었다 한다.
언제부터인가 이 모과나무 아래에서 치성을 드리는 무당이 살았는데
무당의 과욕으로 인해 그만 모과나무에 불을 내고 말았다.

그 후 모과나무는 죽고 어느 봄날 줄기에서 모과나무 새싹이 돋아 현재의 모과나무로 자랐다 한다.
이 모과나무를 자세히 보면 한그루가 아닌 여러그루가 자라면서
한그루의 모과나무로 되었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보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 모과나무에도 슬픈 이야기가 전해온다.
용평동에 거주하는 윤할머니는 모과나무에 대해 과거길의 선비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나무였다 한다.
‘과거길의 선비들에게는 관도가 아닌 이길로 다녔제’. 모과나무의 효엄을 믿어
일부로 이길로 돌아 이 모과나무 아래에서 과거급제를 할 수 있도록 빌고 갔다는 것이다.
지금 이 모과나무 믿 둥치가 썩어 큰 구멍이 나 있다.
과거길에 오른 선비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피로가 몰려와 잠깐 눈을 붙일 요량으로
밑둥치의 구멍에 기대어 잠을 자다 변고를 당하고 말았다한다.
그후 한양 과객들은 ‘밀양은 몰라도 모개 남자는 안다’는 이야기가 회자될 정도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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