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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여행/부여여행)정림사지석불좌상. 부여 정림사지에서 거대한 석불좌상을 만나다


여러 곳의 석불을 둘러보면서 이번에는 부여여행에서 규모 면에서 압도하는 석불좌상을 만나고 왔습니다. 부여의 정리사지에 있는 정림사지석불좌상이며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함께 대단한 규모였습니다. 정림사지오층석탑과 정림사지석불좌상은 서로 마주 보게 일직선 상에 배치했습니다.





부여 정림사지 주소: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58

부여 정림사지 전화:041-832-2721




2017/10/22 - (충남여행/부여여행)정림사지5층석탑.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이라는 평제탑 정림사지5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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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의 창건연대는 6세기 중엽으로 추정하며 그 후 백제가 멸망하고 고려 시대까지도 정림사의 규모가 대단했음을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정림사지석불좌상이 고려 시대에 처음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이 웅장한 석불좌상을 보면서 당시 정림사의 사세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정림사지석불좌상은 현재 강단지었던 곳에 보호용 전각을 새로 세워 그 안에 따로 모셔져 있습니다. 강당은 석탑에서 대략 57m 떨어졌으며 보호각은 앞면 39.1m에 옆면 16.3m인 새장형으로 고려시대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이는 기존 강당지의 초석에서 확인된 앞면 31.8m. 옆면 17.9m의 규모보다 더 크게 지었으며 기단은 기와를 합장식 와적기단과 평적식 와적기단으로 쌓아 만들었습니다.





정림사지석조여래좌상은 전체 높이가 5.62m이며 재질은 화강석입니다. 부처 머리는 후대에 다시 만들어져 올려졌으며 현재 불신은 처참할 정도로 깨어졌는데 오른팔과 왼쪽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마멸되어 그 흔적만 어렴풋이 남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석불좌상의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 등을 가늠하는 게 매우 힘들었다 합니다.







그러나 이곳 정림사지 강당지에서 발굴된 기와의 명문을 통해서 고려시대 때 절을 고치면서 석불좌상이 함께 만들어졌고 이 정도의 규모를 보면 정림사의 본존불이 아니었겠나 추정하고 있습니다. 1942년 강당지를 조사하던 중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가 새겨진 기와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명문으로 정림사의 존재와 1028년 헌종 19년에 중건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석불상을 보면 불두에 비해서 몸집이 왜소하며 좁은 어깨는 밋밋하게 내려오고 왼손은 가슴까지 올라가면서 오른손이 왼손을 감싸 쥔 '지권인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정림사지석불좌상은 비로자나불의 특징을 보여주며 지권인은 "불법으로 모든 것을 감싼다"는 뜻입니다.





기단인 연꽃 대좌도 깨어지고 했지만, 석불좌상보다는 조금 상태가 양호한 편입니다. 하대석은 연꽃이 뒤집어져 핀 모습인 복련(覆蓮)에다 팔각형의 간석을 올렸고 각 면마다 안상을 새겼습니다. 또한, 상대석은 연꽃이 하늘을 보고 활짝 핀 모습을 한 앙련(仰蓮)을 하였습니다.

 


이때까지 많은 연꽃 대좌를 만났지만 거대한 석불좌상을 받치는 좌대답게 엄청나게 큰 규모였습니다. 정림사지석불좌상을 정면으로 만나보면 거대해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작아진 나를 압도하였고 자연적으로 머리를 숙이게 하는 그 어떤 힘이 느껴졌습니다.





이래서 그저 인간은 하나의 작은 먼지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저 우러러만 봐도 마음 한구석에 울림이 날 정도로 대단했던 정림사지석불좌상을 정리사지오층석탑과 함께 만나보세요. 정림사지 석불좌상 보물 제1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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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여행/익산여행)익산 미륵사지. 세계문화유산 익산 미륵사지에서 백제의 예술성이 집약된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여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여행이었습니다. 


 익산 여행하면 빠지지 않는 곳이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입니다. 그중에서도 이번에는 익산 미륵사지를 찾았는데 그 이유는 익산에서 가장 유명하며 국보 11호 미륵사지 석탑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처럼 딱 찾아갔더니 수십 년째 복원공사를 진행한다고 모두 해체하여 미륵사지의 아름다운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미륵사지의 엄청난 규모를 보고 놀랐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했습니까? 어쩔 수 없이 미륵사지에는 석탑 이외에도 당간지주 등 많은 볼거리가 산재해 있습니다. 그럼 미륵사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미륵사는 백제시대 최고 최대의 사찰로 알려졌으며 미륵사 창건에 관해서는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와 ‘금제사리봉영기’에 잘 남아 있습니다.

 미륵사 인근 오금산에 홀어머니와 함께 마를 캐며 생활하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이가 바로 백제 30대 무왕(재위 600~641)입니다. 서동(훗날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훗날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을 사모한 나머지 서동은 꾀를 내어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을 만난다”는 서동요를 아이에게 가르쳐주며 퍼뜨리게 합니다.

 이에 신라 왕실에서는 왕실의 권위가 실추되었다며 선화공주를 귀양 보내었고 이때를 놓치지 않은 서동은 귀양 가는 선화공주를 구하여 백제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갑자기 뜬금없는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냐고요. 서동은 무왕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선화공주는 백제의 왕비에 오릅니다.

 그러면서 선화공주는 무왕에게 청하여 익산에다 미륵사(왕흥사)를 창건하는데 지금의 미륵사지가 선화공주에 의해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무왕에 오른 서동은 왕비 선화와 함께 익산 용화산(지금의 미륵산)의 사자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용화산 아래에 있는 연못을 지나는데 물속에서 세 명의 미륵불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신기한 상황에 놀란 왕비는 세 명의 미륵불을 위해 절을 지어줄 것을 무왕에게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절을 짓기 위해 미륵 삼존불이 출연했던 연못을 메워 탑과 불전을 세 곳에 각각 세우고 미륵사라 한게 창건 설화입니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온 ‘금제사리봉영기’에는 “백제 무왕 639년 왕비였던 사탁적덕의 딸이 발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륵사의 탑과 불전을 세 곳에 배치한 것은 현재는 보살이지만 미래에는 부처님을 이어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불인 미륵이 성불하여 용화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설법을 세 번 베풀어 중생을 구제하는 모습을 나타낸다는 뜻이라합니다.

 미륵사는 독특한 가람 배치뿐만 아니라 석탑 건립, 금당을 받치는 기단의 구조, 석등과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등은 뛰어난 백제 예술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륵사는 통일신라 초기에 가장 융숭하였으며 1600년경까지도 미륵사가 존재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현재 미륵사지에는 국보 11호인 석탑과 보물 236호인 당간지주, 보물 1753호인 금동향로 그리고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43호인 석등 하대석과 사리장엄구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1992년에는 동원구층석탑을 고고학과 건축학적인 고증을 통해 복원하였습니다.

 이제 미륵사지로 들어가겠습니다. 현재 미륵사지에는 두 개의 연못이 복원되어 있으며 사찰에서 연못의 의미는 극락세계를 상징한다합니다. 미륵사지의 동·서편 연못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당간지주와 남회랑을 만들면서 함께 만들었습니다.

 동쪽 연못은 동·서 길이가 51m이며 남·북은 48m이고 서쪽연못은 동·서 길이가 54.5m, 남·북은 41m로 두 연못 사이에는 동·서로 50.5m 넓이의 길이 남회랑 중앙 계단까지 이어집니다. 특히 서쪽 연못에 비친 미륵산과 석탑의 반영은 말로서 미륵사지의 아름다움을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직접 두 눈으로 보아야만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습니다.

 

 아쉽지만 폐사가 되기 이전 연못에 비친 온전한 미륵사의 아름다운 반영을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필자를 즐겁게 해 줍니다. 회랑은 신성 공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역할인데 중심건물이나 일정한 구역을 둘러싸는 긴 복도형태의 건물을 말합니다. 미륵사지의 남회랑은 중심 건물인 삼원가람 앞에 통일신라초기에 만들었습니다.

 

 동쪽과 서쪽 회랑은 남·북 길이가 69.9m, 남쪽 회랑은 동·서 길이가 190.4m에다 폭은 각각 4.8m입니다. 남회랑의 남쪽에 문이 세 개 있었으며 이는 삼원가람의 남북중심축에 맞추어 남문을 세운 것입니다.

 

 

 

 

 

 

 

 절에서 행사나 의식 등을 할 때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사찰 입구에 세우는데 그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잡아주는 똑같이 생긴 두 돌기둥을 지주라 합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에 남회랑 안에 두기를 세웠는데 당간은 없고 지주만 남았으며 현재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동원구층석탑은 1974년 동원탑지를 발굴하고 출토유물을 조사하여 미륵사지석탑(서탑)과 같은 백제 때 석탑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원 탑지에 남아 있는 기단석과 옥개석, 노반 등 각종 부재와 그리고 미륵사지 석탑을 보며 고증을 거친 후 동원구층석탑은 1991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2년에 끝마쳤습니다.

 복원된 동원구층석탑은 하층 기단의 한 변은 12.5m이며 상층기단은 10.5m의 2층 기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탑 높이만도 지면에서 상륜부까지 27.8m의 초대형 석탑으로 탑에 단 풍탁은 동원 탑지에서 나온 백제 금동풍탁을 복제하여 달았습니다.

 탑의 복원에 사용된 석재는 기존 동원 탑지에서 출토된 부재와 같은 재질인 익산 황등의 화강암을 사용하였으며 또한, 기존 동원탑지의 기단석과 몸돌 32개를 함께 사용하여 총 2,700톤의 화강암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석탑 복원 기록과 사리장엄은 5층 심주석에 봉안하였습니다.

 이곳은 동원 승방지입니다. 승방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공간입니다. 미륵사지에는 승방지가 총 3개소가 있으며 동원과 서원 승방지는 길이 65m에 폭은 14m이며 방 두 개가 한조로 4조씩 있습니다. 동원의 승방지는 발굴당시 구들시설인 아궁이는 물론이며 사찰 바깥으로 출입하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858년 ‘대중 12년, 미륵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조각이 발견되었으며 북편 기단인근에서 백제 때의 치미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석등하대석

 

 

 

 이곳은 미륵사의 중심건물인 금당지입니다. 금당은 부처님을 모신 건물을 말하며 삼국유사에서는 연못에서 세 명의 미륵이 나타나자 연못을 메우고 그 위에 탑과 금당을 세 곳 두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발굴조사를 하면서 삼원의 가람 속에 각각 금당지가 있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금당지를 살펴보면 각각 남쪽과 북쪽에 계단을 둔 이중기단을 설치하였습니다. 기단내부에는 초석을 받치는 초반석 위에 기둥모양의 높은 초석을 놓아 지하 공간이 만들어졌고 초석의 윗면에는 마루를 깐 흔적인 홈이 파여 있습니다.

 

 미륵사지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미륵사지 석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원래 사찰에서의 석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미륵사지에서는 총 세 개의 탑이 있습니다. 서원에는 미륵사지 석탑이 있었으며 동원에는 동원구층석탑을 그리고 가운데 중원에는 목탑을 세웠음이 2009년 석탑 해체과정에서 발견한 ’금제사리봉영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639년에 백제 무왕의 왕비가 발원하여 세웠으며 1층 가운데 기둥에 사리를 봉안하였다합니다.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오래된 석탑으로 기단은 목탑 양식인 이중 기단을 했는데 이는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층 탑신의 각 면은 세 칸으로 나누었고 가운데 칸에 문이 있어 안으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중앙에 사리를 봉안한 사각형 기둥이 있고, 탑의 외면은 목조양식인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민흘림 기법의 사각 돌기둥입니다. 사각 돌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그 위의 받침돌이 지붕돌을 받치며 네 귀퉁이는 살짝 올라갔습니다.

 2층부터는 몸돌과 각 부분이 대체로 간략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원래는 9층 석탑으로 추정하지만, 현재 북동쪽 부분이 6층까지 남았으며 높이는 16.24m로 그것도 보수와 정비를 위해 2001년 해체작업을 시작하였고 2016년 복원될 예정입니다.

 필자가 미륵사지를 보면서 너부러진 부자재가 얼마나 많은지 석탑의 퍼즐을 끼워 맞추는 것도 예삿일이 아닐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언제쯤 복원되어 미륵사지 석탑을 보게 될지 지금으로써는 가늠하기 어려워보였습니다.

 그 외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에는 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을 전시중입니다. 2009년 미륵사지 석탑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에서 사리 내호와 외호, 사리봉안기 등 19종 4900여점이 나왔고 6종의 원형합에서 금제 고리, 진주, 곡옥 등 4,800여점이 추가로 발견되었습니다. 가로 15.5cm, 세로 10.5cm의 사리봉안기는 백제왕비의 희사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된 배경 등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입니다. (금동제 사리 내호와 외호, 미륵사지 석탑 모형은 익산 보석박물관에서 모형을 찍었습니다.)

 

 

 

 

 

 

 

 

 

 부산에서 익산여행을 가는 길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미륵사지 석탑을 본다는 설렘으로 찾았는데 정작 석탑은 해체되었고 아쉬움이 참 많았던 여행입니다. 그래도 그 많은 석탑의 부자재를 볼 수 있었지만, 퍼즐을 맞추듯 하나하나 완벽하게 끼워 맞추는 과정도 예삿일이 아니게 보였습니다. 하루빨리 복원되어 제 모습을 갖춘 위풍당당한 미륵사지 석탑을 보게 될 날을 기대해봅니다. 미륵사지는 사적 제150호이며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지구로 등록 되었습니다

 

◆익산미륵사지 안내정보

관람료 무료

관람시간:오전 9시~오후 6시

휴관일:매년 1월1일, 매주 월요일

익산 미륵사지 관람문의:063-290-6799

익산 미륵사지 주소: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428

주차장 있슴

상기 팸투어는 전북도청, 전북관광협회에서 초청 진행했던 팸투어에 참가하여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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