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옥산서원.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

 

경주의 대표적인 양반고을은 현재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유네스코에 지정된 양동마을이다. 이곳 경주 양동 마을은 조선시대 초기의 양반가의 내력을 볼 수 있는데 혼인과 함게 처가에 들어와 살았던 풍습이 있었는 것 같다. 어 그럼 언제부터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처가와 똥간은 멀리 있는게 좋다는 말이...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옥산서원.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지정.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마을인 하회마을 보다 150년이 바른 이곳 양동마을은 월성손씨의 손소가 이곳으로 들어게 되고 그 뒤에는 여강이씨 이번이 손소의 딸에게 장가를 와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이곳 양동마을은 천하의 길지라 3명의 인물을 배출된다고 한다. 월성손씨는 청백리로 불리는 우재 손중돈을 낳았고 여강 이씨는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을 배출하였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옥산서원.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 옥산서원 진입로 울창한 숲길.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는 회재 이언적선생의 고향이자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그의 사후인 선조 5년인 1572년에 경주부윤의 이제민이 지방 유림들과 함께 세웠다. 옥산서원 입구에서 150m의 진입로는 자계천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이 숲길을 이루어 햇볕 한 점 들어올 틈이 없다. 시냇물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이곳 옥산서원은 그야말로 낙원이 따로 없을 것 같은 곳이다.

 

 

 

현재 공사중인 옥산서원 전시관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옥산서원.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 옥산서원 정문의 역락문 뜻은...

 

 

먼저 정문에는 ‘역락문(亦樂門)“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논어의 학이편에서 '유붕이자원방래 불역락호아(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왔다한다. 그 뜻은 서원을 찾는 손님에게 더 없이 정답고 편안하다는 의미로 당대의 명필가 한석봉의 필체라 한다. 또한 유생들의 휴식장소인 무변루와 강당인 구인당의 필체도 한석봉의 글씨이다. 구인당의 맞은 편에 흰바탕에 검은 글씨인 옥산서원의 현판 글씨 또한 추사 김정희의 필체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옥산서원.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 한석봉과 김정희 현판 글씨.

 

 

또 다른 옥산서원의 현판은 아산 이산해선생의 필체다. 이곳 옥산서원은 규모면에서는 작은 서원이지만 당대의 명필가들의 필체가 서원의 여러 곳에 현재에도 남아 있어 회재 이언적 선생이 당대에 어떠한 분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옥산서원.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 세심정에서 마음을 씻다.

 

 

옥산서원을 나와 회재 이언적선생의 사랑방이었던 독락당을 가기위해서는 도덕산과 봉좌산 그리고 어래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모여드는 자계천을 건너야 한다. 암반을 타고 흐르는 자계천에는 작은 폭포를 이루고 ‘ㄷ’ 모양의 소는 금방 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스산한 느낌이다. 회재이언적은 이곳에서 매일 얼굴만 세수 한 것이 아니고 마음도 딱 고 씻었다 한다. 지금도 암반에 ‘세심정’이란 글귀가 뚜렷하다.

 

 

현판의 역락문은 한석봉의 글씨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이신도비는 1577년 대학자 회재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호남 거유 고봉 기대승이 짓고 아계 이산해가 썼다.

 

 

 

 

한석봉의 글씨

 

 

추사 김정희의 글씨

 

 

 

 

 

 

 

 

 

 

 

 

바위에 새겨진 세심정의 글씨

 

 

 

 






728x90

728x90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토함산 석굴암 여행. 앙코 없는 찐빵, 경주 토함산 석굴암

경주의 석굴암은 어릴때의 추억을 생각나게 한다. 초등 학교 수학 여행의 단골 코스로 불국사에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현재의 주차장에 올라 석굴암을 찾던 생각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석굴암을 여러번 찾아 보았지만  반백년을 앞 두고 다시 들러 보니 감회가 새롭다.
석굴암은 매표소를 지나 오솔길을 따라 걸어들어가니 최근에 많은 눈으로 잔설이 남아 있어 동심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 같다. 어느듯 석굴암 아래. 예전에는 없던 여러채의 건물이 새로 지어져 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10년 751에 재상 김대성에 의해 창건되었다.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짓게 되었다는 석굴암은 그 후 혜공왕 10년인 774년에 완공이 되었는데 23년의 긴세월이 흘렀다. 그래서 인지 김대성은 완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

았지만 그로 인해 현재의 석굴암이 남아 있어니 감사할 따름이다.. 처음에는 석불사로 불렸다 하는데 인위적으로 만든 석굴로 중앙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과 그를 둘러싼 보살상과 제자상, 역사상, 천왕상을 좌우로 모섰고 일제 강점기와 1962년 경의 대대적인 해체복원 공사로 인해 그의 잔재물인 석물들이 널려 있다. 국보24호로 1995년에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하였다.

들어서는 오솔길로 운치가 있다. 그러나 많은 관광객으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룬다.

좌측의 건물이 석굴암으로 본존불을 모신 건물이다.

석굴암 건물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관광객

해체당시 나왔던 석물들

석굴암 입구. 사진촬영금지로 본존불을 찍지 못하였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