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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 안강 금곡사 원광법사 부도. 오지속의 사찰인 금곡사에 원광법사부도가 있어요?

 

흔히 깊은 산속을 헤매다(?) 보면 반갑다 못해 살았다는 안도감을 주는 절집을 간혹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산행중 만나는 사찰은 산꾼들에게는 하나의 구세주이며 타 종교인도 한번쯤 들러 반가움을 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까운 경주 인근에서는 만나기 힘든 이런 곳도 있나 할 정도로 한적하다 못해 적막감이 감도는 곳이 한곳 있다.
신도들의 왕래로 뻔질나게 닳아빠진 일주문의 문턱을 부산인근에서는 쉽게 만날수 있고 그래서 대웅전도 모양새를 갖추고 절다운 모습을  한 많은 사찰도 있지만 왠지 나 같은 문외한은 믿음이 가지 않는다. 사찰은 조용하면서도 한적하고 사람들이 보기 힘든 곳에 있어야 절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그런 절 다운 모습을 충족시켜 주는 곳이 있어 소개를 할까 한다.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인근의 화산골 골짜기 안에 터를 잡은 금곡사는  천년의 세월은 훌쩍 뛰어 넘은 고찰이지만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최근에 와서 중건 불사를 일으켜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화산골 안의 금곡사는 원광법사가 처음 창건한 사찰로 화랑도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하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초석이 되었으며 황룡사에서 입적한 원광법사가 이곳 금곡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부도탑으로 남아 있다 하니 그 연유가 궁금 할 따름이다.
임진왜란때 가람은 흔적도 없이 소실되고 최초의 부도탑인 원광법사의 부도탑도 파괴되어 화산골에 묻혀 있다 최근 발굴되어 정교하게 짜 맞추어져 하나의 부도탑으로 남아 있다. 화산골 금곡사 밑 사거리 갈림길에는 달랑 민가만 한채 있을 뿐이며 여기서 동서남북으로 민가를 만날 수 있는 곳이 10리를 산을 넘어 가야 만날 수 있어 그 만큼  오지중의 오지에 자리 잡았다. 그래서 인지 금곡사 앞까지는 아직도 비포장도로로 남아 있으며 밑의 화산골 마을 까지는 1시간10분을 걸어 가야만 마을을 만날 수 있어 찾는 신도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아 마음을 씻기에는 아주 좋은 절집인 것 같다.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이라 해보아야 초라한 모양의 기와 건물 한동이며 요사체는 가건물의 수준을 벗어 나지 못한  모습이 더욱 정감이 간다. 금곡산은 산 높이에 비해 깊은 계곡을 거느리고 있고 수량이 풍부하여 큰 저수지인 화산곡지를 가지고 있다.
가는 교통편:포항-영천간 국도를 이용하여 도덕산 옥산서원 입구를 지나면 도로 앞쪽으로 하곡지(딱실못) 재방이 보인다 이곳에서 도로 오른쪽으로 "삼기산 금곡사"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굴다리 지하도를 통과하면 현제 조성중인 두류공단을 지나고 화산골 마을을 지나고 화산곡지까지는 쉽게 접근할 수 있다.그 이후 임도급 비포장길이 금곡사 까지 이어진다.



  





























오지속의 사찰인 금곡사로 이어지는 주변풍경과 화산곡지 그리고 주변의 계곡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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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금곡사 원광법사 부도. 우리나라 최초의 부도탑인 원광법사 부도.

 

이 부도탑은 원광법사의 부도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부도탑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 안강의 삼기산 금곡사에 있는 원광법사의 부도탑은 임진왜란 때 금곡사의 사찰은 불타고 부도탑은 파괴되면서 폐사가 되었다. 그후 작은 암자로 거듭나지만 부서진 부도탑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이 되었다. 탑의 몸돌에다 정교하게 짜 맞추어 놓은 감실속 부처님의 모습이 1400년이 지난 현재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있다.

 



원광법사(553~637)는 신라의 승려로 화랑도의 세속오계 만들었다는 사실은 익히 모두다 알고 있다. 
서라벌에서 태어난  원광의 속성은 박씨 또는 설씨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금곡사에서 수도를 하였으며 589년 중국의 진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한다. 진나라에서도 전도와 교화로 이름을 떨쳐 당속고승전에 그의 전기가 실렸으며 11년 후인 600년에 유학을 마치고 본국인 신라에 돌아오니 모든 백성과 함께 진평왕도 성인인 원광법사를 성대히 맞아 주었다 한다. 귀국후 운문산(현가지산) 아래 삼계리로 추정하는 가슬갑사에 머물며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도의 기본 정신인 세속오계를 내려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는데 하나의 밑걸음이 되도록 하였다.
608년 왕의 요청에 의해 수나라에 걸사표를 지었으며 637년 입적을 황룡사에서 하였다 하며 명활산에서 장사를 지낸후 그의 부도탑은 삼기산 금곡사에 모셨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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