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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구미선산여행)선산 금오서원. 고려의 충신 야은 길재를 배양한 선산 금오서원


구미 선산읍의 금오서원을 찾았습니다. 

선산 비봉산과 형제봉 산행을 하고 나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47개의 서원은 제외되었는데 금오서원은 그중 한곳이라 해서 일부로 늦은 시간이지만 찾았습니다. 

아마 꼭 보아야겠다는 열망이 더 컸다 하겠습니다.

 금오서원을 보면서 왜!!! 서원철폐령에서 제외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야은 길재 선생을 배향한 선산 금오서원 주소: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원리 276

야은 길재 선생을 배양한 선산 금오서원 전화:054-482-1435

선산 금오서원 경상북도 기념물 제60호




2014/11/14 - (경북여행/구미여행)채미정. 구미 금오산에 있는 채미정.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야은 길재를 추모 하는 정자.

2014/11/09 - (경북여행/구미여행)금오산 마애보살 입상. 90도 각진 모서리를 깎아 섬세함이 돋보이는 금오산 마애보살 입상.

2014/02/13 - (경북여행/구미여행)태조산 도리사. 아도화상이 창건한 신라 최초의 사찰 냉산 도리사 여행하고 왔습니다.

2011/05/25 - (경북여행/구미여행)금오산 약사암.초생달이 걸여 있는 모습이 아름다운 금오산 약사암

2013/01/02 - (경북여행/구미여행)구미시 선산읍 수다사. 겨울 눈이 내려 흰 연꽂으로 피어난 연악산 수다사가 장관




이는 야은 길재 선생 때문이 아니었는지 싶습니다. 

고려 말에 고려의 충절을 상징하는 ‘삼은’이 있습니다.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 그리고 야은 길재입니다. 

그중에서 금오서원은 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을 기리는 서원입니다. 야은 길재(1353년~1419년)는 고려말과 조선 초의 성리학자로 호는‘야은’ 또는‘금오산인’이며 시호는 ‘충절’입니다.

 

선산 금오서원의 2층 누각 출입문 읍청루







그는 고려가 망하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건국되어 세자 이방원이 태상박사의 벼슬을 내렸지만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절의를 굽히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길재는 낙향하여 선산의 금오산 아래에서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던 분입니다. 

김숙자 등 많은 문하가 그를 따랐으며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로 그의 학통은 이어졌습니다.





선산 금오서원 동·서재







야은은 고려가 망한 후에 옛 도읍지였던 개성(송도)을 찾아 읊은 ‘고려 유신 회고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 시조로 길재선생의 고려에 대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금오서원은 1567년(명종 22년)에 선산의 유학자가 중심이 되어 선산부사 송기충에게 서원 건립을 건의하였습니다. 

이에 경상감사를 거쳐 조정에까지 알려져 재가를 얻어 1570년(선조3년)에 금오산 아래에 건립하였고 1575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에 모두 불탔습니다.



1602년에 금오서원은 현재의 장소인 선산읍 원리의 남산 아래에 옮겨 복원하였고 1609년 광해군 원년에 다시 중건했습니다. 

금오서원은 김종직과 정붕, 박영, 장현광을 추가하여 5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금오서원은 2층 누각인 읍청루, 강당인 정학당, 동·서재, 내삼문, 사당인 상현묘로 구성하여 전묘후학 양식을 따랐습니다.













선산 금오서원의 오현을 모신 사당인 상현묘









정학당은 강당으로 앞면 5칸에 옆면은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입니다. 

가운데 3칸 마루를 넣고 양쪽에 1칸의 온돌방을 앞쪽에는 툇마루를 달았습니다. 

5량 형식의 가구구조입니다. 읍청루는 2층 누각에 누하에 서원의 출입문인 문루를 두었습니다. 앞면 3칸, 옆면 2칸 팔작기와지붕 건물로 겹처마입니다. 

사당인 상현묘는 앞면 3칸에 옆면 3칸이며 맞배지붕 건물로 겹처마이고 5량가형식입니다. 

현재 선산 금오서원은 많은 건물이 들어서고 새롭게 변신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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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거창여행)김숙자사당. 영남사림파의 발흥이 된 거창 남상면 강호 김숙자 사당을 보고오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은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왔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영남사림파의 근간이 된 강호 김숙자로부터 시작되었다 합니다. 김숙자는 점필재 김종직의 아버지로 더욱 유명합니다. 또한 그의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성리학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의 태두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김숙자는 1389년에 출생하여 1456년 처가인 밀양에서 사망을 합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본관은 선산이며 호는 강호. 강호산인으로 블리어 졌습니다. 김숙자는 어릴때부터 총명하여 부친 김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숙자 나이 12세가 되면서 그 당시 고려 말의 충신 야은 길재가 공민왕을 폐위하고 왕의 자리에 오른 태조를 향해 고려의 신하로 있던 사람이 어찌 두 임금을 섬기겠는가 하며 고향 구미의 금오산 아래에서 은둔하며 망한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킵니다.

 

 

야은 길재가 고향으로 낙향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김숙자는 그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됩니다. 스승으로부터 소학과 경서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의 학문의 갈증은 해가 갈수록 더 하였는데 그 때 역학에 밝은 윤상이 황간 현감으로 내려 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배우겠다는 일념하나로 단숨에 김천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그의 가르침을 청하니 그의 열의에 감복하여 주역의 이치를 세세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는 약관 25세 때인 1414년 생원시에 합격을 하고 5년 뒤인 1419년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합니다.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1436년에 추천으로 ‘세자우정자’가 되었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성균관 사예를 끝으로 1456년 그는 벼슬을 사직하고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옵니다.


 

김숙자는 그를 따르는 제자나 아들인 김종직에게 스승이었던 야은의 가르침을 빠짐없이 실천하도록 하였고 또한 김종직은 일생을 스승이자 아버지인 김숙자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도록 행동을 하였습니다.





 

남을 가르키기를 좋아하여 남다른 열정을 학문에 쏟았고 또한 길재로부터 이어온 학풍에 따라 공부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라며 ‘동몽수지’의 유학자설정속편을 알고 난 뒤 소학으로 넘어가는 순서를 두고 그것을 차례차례 따르게 하였습니다.

 

 

김숙자의 고향은 선산입니다. 선산의 낙봉서원에 제향되어 있는데 이곳 거창군 남상면 대산리에도 김숙자 사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6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으며 8월에 찾아간 김숙자사당은 관리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김숙자의 후손들이 1706년에 세운 김숙자사당은 정문인 명성문을 통과하여 본체인 추원당 뒤편에 높은 단을 쌓아 만들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3량 구조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며 명성문은 정면5칸, 측면1칸에 한일자 형태입니다. 중간에 솟을 대문인 출입문을 넣고 양쪽 2칸은 방과 광 등을 넣어 사용 하였습니다.


 

 본체인 추원당은 정면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정면에 툇마루를 넣고 계자 난간을 둘렀고 건물 왼쪽에 방1칸과 대청은 2칸을 넣었고 오른쪽에도 온돌을 넣은 방 2칸으로 되어 있습니다.


 

필자가 찾아간 추원당의 명성문 문짝은 파손이 되었는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추원당을 두르고 있는 담장도 허물어져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루 빨리 관리가 된 김숙자사당을 기대해 봅니다.

 

 

 

 

 

 

 

 

 

 

 

 

 

김숙자 사당을 찾아가는 마을 입구에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이 있습니다. 한국화의 소재로도 너무 잘 어울리는 소나무는 수령이 300년이나 된 보호수로 1982년에 지정되었습니다. 둘레는 6.7m며 높이는 27m 대산리 한산마을 입구에 있어 김숙자 사당을 찾아가는 길에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웃 동네인 남상면 전척리에는 일원정이 있습니다.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의 칠현을 제향하는 곳으로 1905년 김숙자 후손들과 유림들이 건립하였답니다. 꼭 같이 둘러보면 좋습니다. 내비에 '김숙자사당'으로 입력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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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무첨당.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무첨당의 뜻

 

조선 중기의 기왓집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자이자 문신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이 경상감사 재직때 지은 종가별당이다.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생활하였다는데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의 장손자인 이의윤의 호로'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은 여강이씨 종가 별당 건물.

 

무첨당의 용도는 친구와 벗하며 손님접대와 독서등의 용도로 만들었다. 현재에도 무첨당에는 이언적의 장손인 여강이씨 이지락선생과 그의 아들이 지키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은 동방5현의 여강이씨 이언적은...

 

이언적은 어떤 인물인가.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복고 호는 회재 또는  자계옹이다. 아버지  찬성공 이번(1463~1500)은 여강이씨로 성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성균관 생원으로 손소의 8남매중 둘때달과 혼인을 하여 처가인 양동마을로 입향하였다, 그의 맏아들이 회재 이언적으로 동방5현의 한분이다. 중종9년인 1514년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벼슬길에 올랐고 그 후 1530년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 되어 옥산에 독락당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한다.  중종32년인 1537년에 김안로가 죽자 다시 복직하며 중종의 신임을 받지만 명종2년인 1547년에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모함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고 만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은 여강이씨 종가 별당 그 구조는.

 

무첨당의 구조를 보면 조선 중기의 건물로서  앞면5칸 옆면 2칸의 규모로 건물 내부를 세부분으로 나누어  가운데 3칸을 대청을 넣고 좌우 1칸씩은 온돌방을 넣었다. 대청은 앞면 기둥 사이를 개방하고 누마르에서도 대청을 향한 쪽은 개방되도록 하였다. 대청의 뒷면은 벽채를 만들어 문짝을 달았다. 평면은 'ㄱ' 자 형으로 둥근 기둥과 네모기둥을 세워 방과 마루를 구분하였다.(문화재청 참고)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의 편액 좌해금서는 대원군 필체.

 

무첨당에 걸린 편액중에 흥선대원군이 이곳 무첨당에서 하루  묵고 남겼다는 '좌해금서' 그 뜻은 '선비는 책을 읽어야 하지만 풍류도 알아야 한다'며 조선 선비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하였는데 필체를 보면 그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반마을 양동마을  무첨당 교통편.


일단은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까지는 가셔야 겠죠.

교통편은 경주시외버스 터미널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50m만 가면 시내버스주차장이 나온다. 그곳이 양동마을가는 버스 주차장이다. 안강행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203번 버스로 오전 6시20분, 7시30분, 9시15분, 10시30분, 12시30분으로 30~35분이 소요된다.

그외 안강행 버스를 이용하면 양동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양동마을까지 걸어가면 된다. 양동마을 주차장에서 8분소요.


승용차는 네비에다 양동마을을 치면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안채로 이언적의 후손 이지락 선생이 생활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필체 좌해금서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관가정. 관가정이 있는 양동마을 유래에 대해...

 

경주의 대표적인 양반마을은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의 유래를 보면 경주(월성) 손씨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1433~1484)선생이 청송 안덕에서 560여년전에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처가인 양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살면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여강이씨 찬성공 이번(1463~1500)과 손소의 딸이 혼인을 하면서 처가인 양동에 이주하여 살았다. 두분 사이에 큰 아들로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을 낳았다. 결국 회재 이언적은 손소의 외손자로 이곳 양동마을에는 손씨와 이씨가 서로 마을을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동마을은 어떠한 특징이 있는 마을일까. 손소도 장가를 들어 처가인 이곳에 이주하였고 그의 사위인 이번도 이곳으로 이주와 살면서 처가입향의 마을로 불린다. 그러나 처음 이 마을에 입향한 손소의 처 류씨부인은 그 당시 무남독녀였던 관계로 풍덕 류씨는 절손되어 현재에 외손인 손소의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양동마을 문화관의 무첨당 미니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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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산청여행)시천면 덕천서원. 남명조식선생의 덕천서원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선생이 돌아가진 4년후인 1576년 선조 9년에 제자들의 후원에 의해 건립되었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산림처사로 존경을 받던 남명선생의 학풍을 기리며 최영경 하항 하응도의 주도로 진주목사 구변과 경상감사 윤근수 후원으로 건립되었다. 남명선생이 이곳에서 초당을 짓고 세월을 보내고 거닐던 곳으로 하응도가 터를 기증 하였다.





 

 

 

☞(경남여행/산청여행)시천면 덕천서원. 남명조식선생의 덕천서원 대원군에 의해 훼철


1974년 2월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었고 1609년 광해군때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증 전란으로 인해  전소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중수를 거듭해 오다 대원군의 서원 쳘폐령에 의헤 훼철 되었다. 그 뒤 지역 유림에 의해 1930년에 다시 복원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남여행/산청여행)시천면 덕천서원. 남명조식선생 성리학 주창


 남명선생은 1501년인 연산군때 현재 합천의 삼가에서 출생을 하였다. 당시 퇴계이황과 쌍벽을 이루며 성리학을 주창하여 남명학파의 태두가 되었다. 그는 모든 벼슬을 버리고 이곳 시천면 덕산에서 제자를 가르키며 후진 양성에 힘을 쏟다가 1572년 선조5년에 7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덕천서원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반기는 것이 은행나무이다. 400년이 넘었다는데 하늘로 뻗은 가지가 남명선생의 올곧은 성정을 보는 것 같다. 홍살문을 지나면 솟을 지붕에 맞배지붕을 한 시정문이다. 이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유생들을 가르키며 강당으로 사용하였던 경의당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앞으로 좌우편에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제자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베롱나무가 봄을 기다리고 있다.

 

 

 

 

☞(경남여행/산청여행)시천면 덕천서원. 남명조식선생의 덕천서원


덕천서원의 현판이 걸린 경의당은 덕천서원의 중심건물로 정면5칸 측면 2칸의 팔직지붕이다. 중간에 대청을 3칸 넣었고 좌우로 1칸씩의 작은 방을 2개 넣었다. 방앞으로 툇마루가 달려 있다.

 

 

 

 

 

사당인 숭덕사로 덕천서원 뒷쪽에 있다. 정면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중간에 남명선생 위폐를 모셨고 오른쪽에 제자 최응경의 위폐를 모셔 놓았다.

 

 

 

 

 

남명선생은 이곳 덕산에서 살면서 천왕봉이 되려고 하였던 것 같다. 산천재를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짓고 천왕봉을 노래하였다. '하늘은 울어도 천왕봉은 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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