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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언저리의 하늘은 변화무쌍하다. 부산이나 울산 등 대도시의 하늘이 맑은 날에도 잔뜩 먹구름을 드리운 채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다가 기어코 눈물을 쏟아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일 때도 적지 않다. 1000m급 고산이 9개나 둥지를 틀고 있는 큰 산군인 까닭에 산줄기 자체가 기류 이동의 장애물 역할을 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인가 싶다. 둘레길을 걷다보면 저쪽 하늘은 맑은 데 이쪽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서부 경남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소위 '호랑이 장가가는 날'을 숱하게 맞기도 한다. 그러나 거의 2000m에 육박하는 지리산의 하늘금과는 달리 영남알프스의 하늘금은 위압적이지 않고 적당해서 좋다. 하늘금이 그리는 곡선은 날카로운 듯, 부드럽다. 근엄한 아버지의 표정이 아니라 자애로운 어머니의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경남여행/양산여행/영남알프스둘레길)양산시 유래를 알게 된  영남알프스 둘레길 

그런 영남알프스의 하늘에도 계절이 지나간다. 아직 가을로 가득 차 있지는 않지만, 아무 걱정 없이 밤하늘 별을 헤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 한겨울인 지난 1월초 양산 통도사에서 첫 발을 내딛었던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은 이번 주 다시 통도사로 든다. 1000리 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했던가. 한 달에 세 번씩, 거의 1000리에 육박하는 결코 짧지 않은 길을 걷는 동안 계절이 세 번 바뀌었다. 그리고 네 번째 계절이 눈앞에 왔다. 아직 초록은 지치지 않아 단풍조차 들지 않았건만 둘레꾼의 발걸음은 고단함 대신 약간의 성취감과 또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최초 출발지에서 멎는다. 단풍 든 철의 둘레길 걷기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 둘레길 갈무리하는 12㎞ 알찬 코스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원들이 경남 양산시 하북면 삼감리에서 봉화등 허리를 돌아가는 임도를 따라 걷고 있다. 멋들어진 소나무와 잘 생긴 바위들이 잇따라 나타나는 이 길은 둘레길 마지막 코스를 걷는 둘레꾼들에게 휴식같은 친구가 되어 준다.

이번 주 제20코스는 국제신문이 2011년 신년 기획으로 시작한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는 코스다. 양산시 하북면 삼감리 마을회관에서 출발, 통도사 입구 매표소 앞까지 간다. 직선거리 7㎞ 남짓한 길이지만 숲길과 산허리 임도, 백로가 노니는 들판길을 이으니 12㎞에 달한다. 이 마지막 코스에서 개척단은 양산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내력도 배우고, 올여름 일조량이 적어서 흉년이 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농부의 절절한 마음도 더욱 사무치게 알아가면서 그동안 걸머멨던 봇짐을 내려 놓는다.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4시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영남알프스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에 감사하면서 걸으니 5시간이 더 걸렸다.

삼감리 마을회관 앞 당수나무 밑에서 큰길로 나간 후 왼쪽으로 꺾는다. 100m쯤 가다가 왼쪽 골목길로 들어서서 마을을 통과한다. 잇달아 나타나는 흙담과 대나무숲이 정겹다. 작은 사거리에서 곧장 직진하면 밭 사이 고운 흙길로 연결된다. 길 옆 텃밭에는 붉은고추와 옥수수, 호박 등 흙에서 자라고 농부가 키워 낸 먹을거리들이 탐스럽게 익어간다. 멋스러운 소나무 옆을 통과하면 숲길은 더욱 고즈넉해진다. 20여분 걸어 약간 넓어진 임도와 만나면 왼쪽으로 오르막을 따른다. 잠시 뒤돌아보니 삼감마을 저 너머로 천성산 자락이 멋지게 펼쳐진다. 3분 후 굴참나무 앞 삼거리에 닿으니 벌목작업을 하던 인근 주민들이 가는 비를 피해 간이 천막 쉼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국제신문 근교산 시리즈 애독자라며 저마다 반가운 인삿말을 건넨다.



◇ 삼감리~학원 연결 임도 잘 가꿔진 명품길


☞(경남여행/양산여행/영남알프스둘레길)양산시 유래를 알게 된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 뒤로 보이는 천성산은 구름을 머금고 있다.

왼쪽 길을 택해 오르면 5분 후 커다란 사슴 몇 마리가 살고 있는 사슴우리를 통과하고 본격적인 임도를 따르게 된다. 오르막이긴 하지만 무척이나 완만하고 굽이 굽이 휘도는 길인 까닭에 평지를 걷는 것이나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다. 시나브로 걷다 보면 20분 후 임도 오른쪽에 툭 불거진 전망바위가 나타난다. 힘들이지 않고 올라보니 정족산과 천성산 자락이 눈앞에 펼쳐지고 그 아래로 경부고속도로가 내달린다. 이어지는 임도는 오룡산 아래 봉화등 또는 늪재라고 불리는 산등성이를 휘도는 길인데 곳곳에 알맞은 모양과 크기의 바위쉼터가 반겨주고 잘 생긴 소나무들이 맞아주니 더욱 평화롭다. 해발 300m 지점을 통과하니 서서히 내리막이다. 붉은색 페인트로 바위에 '해운'이라는 글씨를 써 놓은 곳 주변은 탁 트인 조망과 멋들어진 소나무가 어우러져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해 준다. 조금 더 내리막을 따라 걸으면 길이 5m 가량의 길쭉한 바위 2개가 아래 위로 포개진 '포갠바위'를 지나고 이윽고 하북면 삼수리에 위치한 기숙학원인 부산대성학원 운동장으로 들어선다.



   
봉화등 임도에 바위 2개가 기묘하게 포개져 있다.

공부하는 학생들 방해라도 할 새라, 급히 정문으로 나간 뒤 오른쪽으로 꺾는다. 100m 정도만 가다가 왼쪽으로 열려 있는 소나무숲길로 들어선다. 그윽한 솔향에 취하는 짤막한 길을 따라 가면 1분 후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나는데 왼쪽으로 꺾어 법수사로 향한다. 5분 후 도착한 법수사의 터는 여말선초의 조정 대신을 역임했던 이전생(李全生)이 고려 공민왕때 순찰사의 소임을 받고 이곳을 지나다가 천하명당임을 알아차리고 정착, 세 아들을 모두 조선 초기의 명장으로 키워낸 곳이다. 이전생은 조선 초기 양산부원군으로 책봉됐는데, 현재 양산시의 지명도 그의 책봉 호칭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또 삼수리라는 지명도 세 명의 장수가 배출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아담한 크기의 대웅전은 천성산 홍룡사의 대웅전 건물 부재를 옮겨 지었다고 전해진다.

   
대성학원 정문 아래에서 법수사로 연결되는 솔숲길.

법수사에서 왔던 길로 다시 10여분 내려가면 만나는 야트막한 흙담 앞 갈림길에서 직진, 흙길로 진입해서 좀 더 내려서면 삼수하리 입구에 닿는다. 아스팔트 도로를 건너 직진, 마을 안길로 들어선다. 삭막한 아스팔트길을 최대한 피하고 여러 마을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길을 연결한 것이다. 삼수하리 마을회관에서 다시 왼쪽으로 꺽어 5분만 가면 다시 아스팔트 도로를 만나는데 길 건너 1시 방향 언덕에 큼지막한 비석이 보인다. '삼장수 유적비'다. 도로를 건너 비석앞으로 간다. 양산부원군 이전생의 세 아들인 이징석 이징옥 이징규의 공적과 삶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놓은 '삼수리 유래 안내판'과 비석을 본다. 이징옥은 조선 세조때의 '이징옥의 난'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 지명 유래 알고나니 양산이 다시 보여

   
널찍한 들길은 우산 쓰고 걷기에도 충분하다.

비석에서 삼수상리 마을 안으로 100m쯤 가다가 다담소 산인요 방향으로 우측 골목길을 따르면 삼수당산제단을 지난다. 마을에 즐비한 전원주택과 찻집 등은 한껏 멋을 부린 형태다. 멋들어진 소나무가 도열한 마을길을 통과, 오른쪽으로 휘어져 나가면 다시 아스팔트 도로를 만난다. 도로를 건너 우측 삼수상리 강터 표지석을 감아 돌면 세갈래 길이 나타나는데, 가장 왼쪽 길을 택해 걷는다. 사방이 탁 트인 들판길이다. 7분 후 막다른 길에서 왼쪽으로 꺾은 후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 들판길을 이어간다. 옛날부터 백로가 많이 날아든다고 해서 백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오른쪽 양산천 건너에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드넓은 들판 곳곳에 백로가 평화롭게 먹이사냥을 하고 있다.

15분 후 35번 국도와 만나면 다시 왼쪽의 하북농협경제사업소를 휘감아 돌아서 들판길로 진입한다. 5분 후 재차 아스팔트 도로를 만나면 우회전, 통도사 방향으로 간다. 5분후 삼거리 정자쉼터에서 우측 2시 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20m쯤 가다가 다리를 건너지 말고 왼쪽의 찻집 겸 레스토랑인 '산 들 바람' 앞으로 꺾는다. 하천을 오른쪽에 끼고 걷는 길이다. 지곡마을 회관을 지난 후 4거리에서 직진하면 경주 이씨 재실인 영모정(永慕亭)을 만난다. 영모정 대문 앞의 통도사 경계석이 유난히 눈에 띈다. 영모정 앞에서 하천을 건넌 후 왼쪽으로 200m쯤 가면 통도사 입구다. 둘레길 개척단에게는 반가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 떠나기 전에

- 둘레꾼에게 통도사는 '모든 길 통하는 절'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이 종착점인 통도사 앞에 섰다. 왼쪽부터 이창우 단장 김수원, 김양숙, 권윤혁 씨.

통도사(通度寺)는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 아래에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어 불(佛) 법(法) 승(僧) 3보사찰 중 불보사찰로 불리기도 한다. '영축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라는 일주문의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직접 쓴 것이기도 하다. 이 일주문 현판 아래 좌우 기둥의 주련에 적혀 있는 '국지대찰 불지종가(國之大刹, 佛之宗家)'라는 글씨는 '나라에서 가장 큰 절이며 불가의 종가집'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큰 절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통도사라 이름 지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뒷산의 모습이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한다는 것(此山之形通於印度靈鷲山形), 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계단(戒壇)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爲僧者通而度之),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한다는 의미 등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길을 떠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속가의 영남알프스 둘레꾼 입장에서는 '길이 통했다'는 의미에서 통도사(通道寺)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베낭을 벗은 둘레꾼의 작은 소회다.


# 교통편

- 도시철도 온천장역에서 12, 13번 버스 이용



부산도시철도 1호선 온천장역 앞에서 12번, 13번 버스를 타고 양산시 하북면 용연버스정류소에서 내린다. 이른 새벽부터 15~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삼감교를 건너 10분쯤 가면 삼감마을 회관앞에 닿는다.

코스 답사를 마친 후 부산으로 갈 경우 통도사 입구 삼거리정류소에서 역시 12, 13번 버스를 타거나 신평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행 시외버스를 탄다. 시외버스는 약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경부고속도로 양산IC에서 내려 35번 국도 경주 언양 방향으로 우회전, 내원사 입구인 용연에서 삼감리 방향으로 좌회전, 삼감교를 건넌 후 왼쪽으로 가면 삼감마을에 도착한다. 길 가 적당한 곳에 주차하면 된다.

답사를 마치고 차량 회수를 하기 위해서는 통도사 입구에서 역시 12, 13번 버스를 이용해 용연에서 하차하거나 신평콜택시(055-381-1004)를 이용하면 된다. 미터기 적용 택시요금은 8000원 안팎이다.


# 조선 초 장수 3명 탄생한 양산 삼수리

- 이징석·징옥·징규 형제 종1품 장군으로…

   
영축산~오룡산 능선을 등지고 서 있는 경남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의 삼장수유적비.

영남알프스 둘레길 제20코스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三帥里)는 양산 사람들에게 상당히 특별한 의미를 지닌 마을이다. 바로 이 마을에서 양산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인데, 그 유래는 고려말과 조선초기의 문신인 양산부원군 이전생(李全生)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순찰사(암행어사 역할)로 명받아 전국을 다니던 중, 서북쪽으로는 영축산 동남쪽으로는 천성산이 둘러싼 이 마을이 천하명당임을 감지한다. 이후 우왕6년(1380년) 이 곳에 터전을 잡고 부인인 밀양 박씨와의 사이에 3남2녀의 자녀를 두었다. 3명의 아들은 어린 시절부터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무용이 뛰어났는데, 하루는 서당에 다녀오는 길에 양민의 재물을 약탈하던 도적 50명을 생포했으며 이후 마을에는 도적이 나타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회자된다.

이 아들 3명은 장남 징석(澄石), 차남 징옥(澄玉), 삼남 징규(澄硅)로 모두 17세 때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장수로는 최고위 직급이나 마찬가지인 종1품에까지 이르는 진기록을 남기게 된다.



세 명의 장수를 배출한 이전생은 조선 태조 때 공조판서, 태종 때 예조판서와 영중추원사를 역임후 태종7년(1407년)에 하야하는데, 태종 임금은 그의 공을 기려 양산부원군으로 책봉한다. 그것이 바로 양산이라는 지명의 시작이다.

한편 3명의 장수 중 장남 이징석은 서북4군 설치에 무공을 세우고 경상도 평안도 병마절도사와 병조판서를 거쳐 종1품인 판중추원사까지 올랐다. 양산군(梁産君)으로 책봉되기도 했다.

차남인 이징옥은 특히 무공이 뛰어났던 인물로 전해진다. 무과 장원급제 후 18세 때 영북진절제사가 돼 현지에 부임한 후 산 채로 호랑이를 잡고 마음대로 부리는 신통력을 보여 현지의 여진족과 부하 장수 및 병졸들로부터 우러름을 샀다. 그는 김종서와 함께 6진 개척에 지대한 공훈을 세워 종1품인 함길도도절제사에 이른다. 하지만 그는 수양대군의 계유정란과 맞물리면서 김종서가 화를 입는 등의 혼란기에 세조에 반기를 들게 된다. 여진족들을 이민족 오랑캐가 아니라 고구려의 후예로서 예우했던 그를 여진족들이 대금국을 세우며 황제로 옹위했고, 그 역시 명나라에 불복하고 여진인들과 함께 대고구려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던 중 부하에게 암살된다. 무공이 출중하고 도량이 컸던 한 인물의 비극적인 최후다. 이것을 역사가들은 '이징옥의 난'으로 부른다. 하지만 이징옥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과연 반란군의 수괴였을까, 조카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사람을 임금으로 모시기보다는 차라리 민족의 옛 영토를 회복해 새 시대를 열고자 했던 비극적 영웅이었을까?



삼남인 이징규 역시 어린 시절부터 무공이 출중했다. 무과 장원급제 후 판관 감찰로서 탐관오리 척결, 세종대왕 시절의 태평성대에 기여한 공로로 원종1등공신이 됐고 세조 때는 종1품인 판중추부사에 올랐다.

이후로 이 마을은 3명의 장수를 배출한 마을이라고 해서 삼수리가 됐다.



문의=주말레저팀 (051)500-5169,
            국제신문    










통도사 정문앞 경기식당의 산채비빔밥과 찹쌀파전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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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다. 회색빛으로 물든 산하가 초록빛으로 옷을 갈아입는 것이 4월이며 계절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등고선을 높혀 가고 있다. 이맘때쯤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서로 교대를 하며 자리바꿈을 하고 그 아래 땅위에는 작은 들꽃들이 각각의 모습을 자랑한다.

 



 

 

이번 산행은 들꽃 산행으로 정했다. 양산 통도사의 서운암에는 428일인 내일부터 들꽃 축제를 개최한다. 할미꽃, 금낭화, 제비꽃, 조팝나무, 목련등 시간의 주기를 따라 100여종의 들꽃들이 꽃 잔치를 보여준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해서 그래서 통도사를 휘감고 있는 봉화봉에서 늪재봉을 산행하고 들꽃 관람을 하는 것으로 산행을 해 보았다. 산행 경로를 보면 먼저 통도사 입구를 출발해 통도천을 건넌 뒤 경주 이씨 재실인 영금정~샘터 사거리~삼각점~전망대~삼각점~전망대~봉화봉~안부삼거리~늪재봉~옥련암~서운암~안양암(동대)을 거쳐 통도사로 돌아오는 원점회귀다. 총 산행거리는 13로 산행시간은 4시간~4시간30, 휴식시간을 포함하면 5시간~5시간30분이지만 서운암 꽃구경과 안양암의 동대, 통도사 구경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산행은 신평통도사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통도사 매표소 앞까지 간 뒤 입구에서 시작한다. 통도사 정면을 바라봤을 때 왼쪽인 경기 식당앞 도로에 목재 데크로 된 인도로 간다. 100m쯤 인도를 따라가면 반사경을 지나 목재 데크 난간 사이로 난 통로를 따라 통도천으로 내려선다. 하천을 건너 맞은편으로 올라서서 왼쪽으로 10m 간 뒤 오른쪽 수로를 건너서면 영모정 경주 이씨 재실을 만난다. 통도사 경내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녹색 철망 울타리응 만나고 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철망을 따라간다, 잠시 후 울타리와 헤어져 오른쪽 소나무 숲 사이로 들어선다. 6~7분 오르면 정면에 키 작은 나무 너머로 영축산이 우뚝 서 있고 시살등을 거쳐 오룡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길게 드러누워 있다.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지는 답사로 주변에 일찍 핀 연분홍 철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평탄한 길을 10분 정도 가면 자그마한 샘이 있는 사거리다. 소나무 아래 있는 샘은 수량은 통도사로 넘나드는 길손에게는 유용한 샘터일 것 같다. 적지만 맑고 차가운 물이 갈증을 달래준다. 직진한다. 편안한 능선 길의 연속이다. 15분가량 더 가면 삼각점(경남-204)이다. 삼각점에서 2~3분만 더 가면 오른쪽으로 탁 트인 바위 전망대가 나온다. 이번 답사에서 최고의 조망을 보여주는 곳이다. 정면으로 통도사 전경과 맞은편의 영축산 능선이 길게 드러누운 모습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돌아나와 진행방향으로 5분 정도면 다시 오른쪽에 바위 전망대가 나온다. 앞의 전망대와 비슷한 조망을 보여준다. 길은 조금씩 오르막이 나타나지만 큰 부담 없이 갈 수 있다. 갈림길이 여럿 나오지만 무시하고 능선인 주 등산로를 따라간다. 철쭉이 점점 더 많이 눈에 띈다. 능선이 왼쪽으로 틀어나가고 오른쪽 능선으로 내려가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도 왼쪽 능선길을 따른다. 10분 정도 산책길 같은 길을 편안하게 걷다 보면 다시 삼각점(양산302, 364m)을 지난다. 뚜렷한 능선길을 따른다.

 

 

 

 

 

 

유일하게 능선 상에 왼쪽으로 바위 전망대를 만난다. 천성산 능선과 오른쪽 멀리 금정산이 보인다. 철쭉 대신 진달래가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양쪽이 뚜렷한 갈림길과 만난다. 왼쪽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주 등산로이다. 산악회 리본이 많이 붙어 있다. 이길을 오르면 되지만 오른쪽의 직진길은 샘터 방향으로 가고 능선을 넘어가면 늪재봉 밑의 안부 삼거리로 올라가진다. 답사로는 왼쪽으로 가야 한다. 발아래 푹 파여진 흔적을 보고 의아해 했는데 산악오토바이가 지나간 듯 바퀴 자국이 나 있다. 천성산 화엄벌까지 올라온 산악오토바이를 보고 황당하다 여겼는데 여기와서 또 만나니 등산로의 훼손이 불을 보듯 뻔하다. 양산시는 철저한 단속을 하여 천년고찰 통도사가 잘 보존되도록 하여야 겠다.

 

 

 

 

 

 

 

이곳을 올라서면 돌탑이 쌓인 봉화봉이다. 봉화봉은 기록에 의하면 삼수리 해운청소년수련원 위 봉우리에서 봉화를 피웠다하여 봉화봉으로 부른다. 그래서인지 왼쪽으로 해운청소년수련원 방향 하산로가 있다. 답사로는 오른쪽이며 송전탑이 바라보인다. 허물어진 무덤을 지나면 산길은 봉우리를 왼쪽으로 돌아 가고 소나무 숲 사이 편안한 길이 이어진다. 산길 좌우로는 막 잎이 난 철쭉이 늘어서 있다. 이 길을 20분가량 가면 안부 삼거리다. 우측으로 샘터 방향에서 올라오는 산길이 있다. 이 곳으로 조금만 내려서면 습지지역이다. 삼감리에서 오룡골 내석으로 넘어 다녔다는 고개로 이 일대에 예전부터 늪지가 많았다 한다. 그래서 늪재로 불렸다 한다. 취재진이 확인한 바로는 내석마을의 한 주민에게도 물어보니 예전에는 늑재 늑재로 불렀다하며 통도사에서 렌트카를 운영하시는 분인데 이분이 삼감리가 고향이라 하시며 옛날 어릴적 나무하러 올라가면 늪 천지였다하며 그래서 늪재라 부른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필자도 볼 때 이곳으로 돌아 옥련암 방향으로 틀어 내석이나 오룡골로 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정면으로 올라가는 길은 이번 답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숨 가쁘게 올라야 하는 길이다. 여기를 올라서면 이번 산행에서 최고점이며 늪재 능선에는 가장 높은 GPS 559m봉에 올라선다. 늪재봉 정상이라 정하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우리지 않으면 그냥 지나기가 쉽다.

 

 

 

 

 

 

 

 

 

완만한 내리막을 6~7분 가면 갈림길이다. 왼쪽으로 휘어지는 뚜렷한 길은 오룡산 방향이고 서운암 하산길은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 이내 뚜렷한 능선길을 따라 내려간다. 이 부분만 바위가 전망대를 만들었다. 다시한번 영축산 능선과 자장동천등 영축산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다. 서운암을 바라보며 10분가량 내려가면 갈림길이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이내 길은 산죽 사이를 지난다. 가파른 내리막을 지나면 왼쪽으로 내려가는 넓은 옛길이 나타난다. 그곳을 내려서면 콘크리트 물탱크를 지나면 옥련암이다. 경내로 들어가지말고 여기서는 직진하여 대나무 숲 사이로 내려간다. 20m쯤 가면 나오는 삼거리에서는 직진하지 말고 오른쪽 길로 내려가야 한다. 서운암의 들꽃 단지로 오른쪽 위에 서운암 장경각이 보인다. 여기서는 왼쪽으로 바로 내려가도 되고 장경각 쪽으로 돌아가도 된다. 10분 정도면 서운암과 주차장이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서운암 안내석을 지난다. 여기서 100m쯤 내려가면 초소가 있는 큰 삼거리로 왼쪽 통도로이다. 이 도로는 통도사 산내 암자인 자장암 비로암 극락암등으로 올라가는 도로이다 300m만 도로를 따라가면 안양암 표지석과 만난다. 표지석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안양암이 자리 잡은 평평한 바위를 안양동대라하지만 안양암 청송당을 지나 위로 올라가면 나오는 바위를 안양동대라고도 한다. 이 곳에서는 통도사가 한눈에 들어 온다. 안양동대에서는 임진왜란때 왜병들이 이곳까지 올라와 약탈을 하고 절에다 불을 지르고 하였는데 안양 동대에서 바라다 보는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화살 시위를 당겼다가 그만 두었다는 일화가 있다. 암자에서 콘크리트길을 따라 5~6분 내려가면 다리를 건너 통도사에 닿는다.

 

 

 

 

 

 

 

 

 

통도사는 삼보사찰의 하나인 불보사찰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으로 국보이다. 여기서 30분 정도 걸어 내려가면 다시 통도사 입구에 도착한다.

 

 

 

교통편

산행의 기점이자 종점인 통도사를 오가는 교통은 편리하다. 승용차를 이용하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통도사IC에서 내린 뒤 통도사 입구까지 가면 된다. 대중교통도 편리하다. 노포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신평통도사행 버스를 타면 된다. 터미널을 나와 오른쪽으로 5분 정도 걸으면 통도사 입구다. 오전 630분부터 20~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요금은 2100.

 

 

 

 

 

 

통도사 서운암 들꽃: 20001만 본의 야생화를 심은 뒤 2002년 시작한 서운암 들꽃축제는 올해로 11번째 열린다. 2012428일 개최를 한다. 5만여 평 넓은 꽃밭에는 쉽게 보기 어려운 100여 종의 우리 야생화들을 심어 근래에는 지역의 대표적인 들꽃축제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꼭 봄이 아니더라도 계절별로 다양한 야생화를 볼 수 있다. 취재팀이 답사한 지난주에 이미 흐드러지게 핀 금낭화가 길가 한쪽 사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길을 따라 황매가 터널을 이루고 있고 조팝나무의 진한 향기는 머리를 어찔하게 만든다.

 

 

 

 

먹을만한 맛집

통도사 정문 앞의 경기식당으로 이곳 안방마님이 인천에서 이곳으로 시집을 와서 열게 된 것이 경기식당의 시초라 한다.

기본 장인 고추장, 된장, 간장등 모든 종류의 장을 직접 담궈 사용하며 어머니의 손맛으로 정성들여 맛을 내니 그 맛 또한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영남알프스의 무궁무진한 산채나물을 이용하여 만든 산채 비빔밥과 정식은 경기식당의 대표 브렌드로 고추장과 갖은 나물로 쓱삭 비벼 먹는 비빔밥은 입맛 없었던 나의 입맛을 돌아 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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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들은 명당이란 말에 수긍을 할 것이다. 아니면 그런 자리가 어디있서 하며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천한 서민은 살아서도 명당자리를 찾고 죽어서도 명당자리에 안장되길 원하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화장을 원하지만....



현재에도 이런데 예전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명당자릴 찾았을까.
뜬금없이 갑자기 웬 명당자릴 운운하느냐 할 것인데 오늘 포스팅의 주제가 명당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볼까 한다.
법수사 대웅전이 자리잡은 이 자리가 명당의 혈로 고려말 공민왕때인 1371년에 순찰사 이전생이 왕명을 받고 전국을 순찰하면서 양산땅에 도착을 하여 주위의 산세를 보니 뒤로는 영남알프스 영축산이 병풍을 두르고 앞으로는 정족산과 천성산이 솟아 있어 주위의 산세가 빼어나고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이곳이 삼장수가 나올 명당자리임을 발견하고 그는 뛸듯이 기뻐하였다 한다.


왕명의 소임을 마치고 우왕6년인 1380년 그는 이곳에 내려와 밀양박씨와 결혼을 한후 3남2녀를 얻었다.
아들 삼형제는 징석, 징옥, 징규이며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하여 모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무과의 최고 벼슬인 종1품 판중추원사에 모두 올라 마을이름 또한 삼수리가 되었다.
이전생은 조선 태조때 공조판서, 태종때는 예조판서 영중추원사에 올라 1407년인 태종7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니 태종은 그의 공을 치하하고 양산부원군으로 책봉을 하였다 그 후인 1416년에 지명마저 양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진짜 명당자리를 알고 이곳으로 내려와 터를 잡아 아들이 모두 장수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모두 쟁쟁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된 것으로 보아 삼형제의 부단한 노력과 명당이 어울려 모두 장수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 그 자리에는 법수사란 작은 사찰이 자리를 하고 있다. 대웅전의 모습은 군더기 없는 단아한 모습으로 간결하게 지어져 있는데 건너편 천성산(옛 원효산) 아래 홍룡사에서 낡은 대웅전을 새로 건립하면서 나온 대웅전 건축 부재를 이리로 옮겨와 지었다 한다.



어느 사찰과 다른점은 보통 화재로부터 절을 보호하는 물을 다스리는 용을 조각하는데 법수사 대웅전은 봉황을 조각한 것이 여느 사찰과 다르다 하겠다. 현재의 법수사는 누가 봐도 아 이런곳이 하며 명당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
그래서 인지 이곳은 그림 그리는 스님으로 유명한 일당 김태신스님이 기거하며 그림을 그린 사찰이다.
현재 대웅전 앞에는 이름모를 불상이 있다. 국내에서는 보기가 힘든, 의자에 걸터 앉아 있는 모습을 하여 궁금하여 스님에게 여쭈어보았다.

“스님 이 불상 아주 오래된 것 같습니다.”

“예. 몇천년 되었습니다.”

“아. 그러면 보물 같은 문화재인가요.”

“문화재로 지정 된 것은 아니고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불상을 보니 우리나라의 불상 재질과는 다른 사암으로 만든 불상이였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서 모래 알갱이가 떨어져 나가 있어 다시 물어보았다.

“스님. 이불상은 화강암으로 만든 것이 아니네예. 우리나라 불상은 화강암으로 많이 만들던데...”하며 말것을 흐리니.

스님들은예

“중국 부처님이나, 미국 부처님이나 다 똑 같은 부처님 입니다”하면서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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