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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에서 봄나들이 하기 좋은 보문단지에서 만나는 경주천군리삼층석탑. 경주천군리삼층석탑


경주 천군동사지를 여행하고 왔습니다. 

천군동사지는 경주에서 대표적인 위락시설이 있는 경주 보문동 보문단지 인근에 있는 절터로 보문호의 명성에 가려있어 일부러 찾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곳에 자리했습니다.





경주 천군리삼층석탑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5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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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또한 보문단지 인근에 천군동사지가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으며 우연히 자료 검색을 하다 천군동사지에 동·서 삼층석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번 경주여행길에서 찾았습니다.

 


폐사지 대부분이 옛 절의 이름과 창건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 

이곳 천군동사지도 정확한 창건연대와 이름을 확인할 수 없어 천군동에 있는 절터라 해서 그저 경주천군리사지 또는 천군동사지라 부릅니다(천군동사지 사적 제82호)



경주천군동사지는 두 삼층석탑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을 확인 할수 있어 사찰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발견 당시에는 삼층석탑이 무너졌으며 탑재와 추춧돌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일본인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중문·금당·강당 자리를 일부 확인했습니다.

 


두 탑은 그 이듬해인 1939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천군동사지의 가람은 통일신라시대양식인 쌍탑에 1금당 양식을 따랐습니다. 

앞에 중문이 있고 그 안쪽에다 동·서 쌍탑을 세웠으며 쌍탑 뒤로 금당과 강당을 두고 둘레에는 회랑지가 자리했습니다.



남아있는 주춧돌 등의 흔적을 보면 중문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 금당은 앞면과 옆면이 모두 5칸이며 강당은 앞면 8칸에 옆면이 3칸 크기입니다. 

중문에서 강당까지의 거리가 79m이며 폭은 대략 61m입니다.



특히 천군동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 궁궐의 지붕 맨 윗부분 양쪽 끝에 장식하던 치미가 발굴되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우리나라에 치미는 몇 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경주의 관문인 경주나들목을 빠져나오면 만나는 나정교 좌우 앞과 뒤에 황금색 모양의 치미를 세웠는데 그 자체만으로도 정말 웅장합니다.



그만큼 그 크기가 대단하며 이게 기와건물의 지붕 양쪽 끝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치미가 나왔다는 것을 보면서 천군동사지도 당시 신라 궁궐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사찰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천군동사지는 통일신라시대 양식인 쌍탑식 절배치이며 주위에 경작한 논밭으로 변해 있어 당시의 모습은 확인할수 없을 정도로 훼손 상태가 심합니다. 

복원된 동서 쌍탑은 그래도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천군동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168호)은 이중 기단에 삼층의 탑신이며 두탑은 서로 닮은 쌍둥이 탑으로 불릴 정도로 규모나 양식이 거의 같습니다. 

동탑의 머리장식인 상륜부는 분실되어 없지만, 그에 반해 서탑은 탑 꼭대기 머리장식인 노반 등이 일부 남아 있어 탑의 면모를 갖추어 더욱 위엄 있어 보입니다.

 




기단에는 양쪽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2개의 기둥을 새겼으며 3층의 몸돌에도 양쪽 모서리에다 각각 기둥을 조각했습니다. 

몸돌과 지붕돌인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습니다. 

지붕돌의 밑면인 층급받침은 5단이며 처마선은 짧고 급하게 떨어지면서 네 귀퉁이는 살짝 치켜 올려졌습니다.

 




몸돌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하나 도굴되었는지 사리장신구 등은 찾지 못했다 합니다. 

경주 천군동 동서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분위기인 장중함이 느껴지며 8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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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 덕동호로 수몰된 고선사터 삼층석탑과 비석받침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만나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문화재의 보고 경주에서는 현재 많은 절터가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는 문화재발굴조사로 그 빛을 발한 곳도 있지만, 또는 잡목에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곳이 부지기수입니다. 지난봄 경주국립박물관을 보면서 아주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이 고선사터의 비석 받침과 국보 38호인 고선사터 삼층석탑입니다. 

고선사터는 사실 생소합니다. 저도 생소한 절로서 보문호 하면 모두 알 것입니다. 보문호 상부댐을 덕동호라 하는데 원래 고선사가 있던 곳이 지금의 덕동호 물속이라 합니다. 










덕동호를 거쳐 경주 시내를 관통하는 하천을 알천이라 합니다. 그 상류는 경주시 암곡동이며 1975년 덕동호 건설로 암곡동의 고선사터가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선사터에 흩어져 있던 여러 문화재와 삼층석탑, 비석 받침 등 부재를 이곳 국립경주박물관 야외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고선사는 일연의 저서인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시대 신문왕(재위 681~692)때 원효대사(617~686)께서 주석하셨던 곳이라 합니다. 그런데 1914년 5월 이곳에서 원효대사 행적을 기록한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 비문조각을 발견했는데 그 내용에 비추어보면 686년 원효대사가 입적하기 이전에 고선사는 사찰의 규모를 갖춰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사(高麗史)’에도 1021년(현종 12년)에 고선사에 금란가사와 불정골 등을 내전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 당시까지도 법통은 꺼지지 않고 상당한 규모의 사격은 계속 이어져 왔던 것 같습니다. 덕동호 수몰로 고선사터 발굴 조사를 진행하면서 금당터, 강당터, 중문터, 회랑터 등의 건물터와 금동불 등 건물의 부재인 기와, 전돌 등 많은 문화재를 발굴하였습니다.








먼저 원효대사의 손자인 설중업이 할아버지 원효대사를 기리며 고선사에다 세운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의 귀부인 비석 받침입니다. 거북을 닮은 받침돌은 머리 부분이 남아있지 않고 몸통 부분만 현재 남아 있습니다. 통일신라 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전체높이는 약 70cm입니다.

 




귀부인 거북등의 가장자리를 따라 무늬 띠가 일정한 폭을 유지하고 등 부분의 귀갑무늬는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거북등 가운데 비좌인 비석을 꽂은 네모난 홈 주위를 돌아가며 연꽃무늬를 새겼습니다.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의 서당화상은 원효대사를 뜻합니다.





1914년 고선사터에서 비신의 아랫부분을 발견하였으며 1968년 경주시 동천동의 한 민가 우물터에서 빨래판으로 사용하던 것을 우연히 발견하여 현재 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남아있는 비신의 명문을 보면 원효의 사상과 업적에 관한 것으로 비문은 33행에 각행은 61자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있는 고산사터 삼층석탑입니다. 덕동호 수몰로 경주박물관 야외전시실로 옮겨온 고산사터 삼층석탑은 682년(신문왕 2년)에 세운 감은사터의 동·서삼층석탑과 너무나 닮아 보였습니다. 필자는 안내판을 보기 전에는 감은사터 삼층석탑의 짝퉁인 줄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렸는데 노반까지 높이가 10.2m에다 총 82장의 돌로 이루어져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판박이라 해도 쉽게 수긍할 만큼 똑같이 닮았습니다. 1.2층의 탑신과 옥개석은 여러 부재를 짜 맞추었는데 다만 3층 탑신석은 하나의 돌로 만든 게 사리함을 넣는 사리공 때문이라 추정됩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다른 점은 1층 몸돌 네 면에 문(문비)을 표현했는데 문화재 여행의 초보인 저는 감은사 삼층석탑에는 찰주가 남아 있지만 고선사터 삼층석탑은 없다는 점으로 구분해야겠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초기인 686년 이전에 새웠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삼층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는 통일신라 석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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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곡동 왕산마을에서 무장골을 따라 40여분 올라가면 왼쪽 담벼락에 걸려 있는 무장산사지 안내판. 여기서 우측으로 무장골을 건너간다. 




무장사지터로 우측은 무장사지 삼층석탑가는 길 좌측은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성사적지 가는길이다.

무장사지아미타불 조성 사적비 이수및 귀부로 보물 제125호, 계화부인이 소성왕의 극락왕생을 빌며 조성한 아미타불의 기록을 적은비문으로 현재 비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빗돌을 받치고 있는 거북이를 귀부라한다. 두마리의 거북이가 빗돌을 받치고 있다. 장수를 의미하는 거북이로 알려져 있는데 계화부인이 부왕 소성왕이 일찍 승하하여 아마 귀부를 깔고 명복을 비는 것은 아닌지....

귀부위에 빗돌을  받치는 테두리에 12지신을 돌여 놓았다. 앞뒤로 4개씩. 좌우로 2개씩으로 마모가 심하여 확인이 힘들다.

12지신상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보통 비석을 받치고 있는데 귀부라한다. 목이 달아나고 없습니다.

거북이와 거북이 사이에 역삼각형으로 있는 조각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여성 또는 여성의 성기를 의미한다함

빗돌위에 얹혀 있는 머리로 용이여의주를 받치고 있는 형상같이 보인다.


이수에 새겨진 용

이수의 측면 조각입니다.

측면의 전체적인 모습입니다.


무장사지

이절터는 경주시 암곡동 산1번지에 위치한다. 보문단지 뒤 덕동호 인근에 위치한 암곡동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옛 서라벌)에서 아주 멀고도 험한 골짜리임을 알수있다.
그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무장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능선 끝에 자리를 잡은 절터이다. 무장사란 절이름에서 보면 아주 강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사연을 간직한 절터로 짐작을 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절 이름부터 뜻이 있었다. 문무왕때 이르러 삼국을 통일하였지만 태종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지긋지긋한  전쟁은 끝났다 하며 이제는 피폐한 백성을 생각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병기와 투구를 감추어 나라의 평화를 기원했다는 뜻에서 무장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신라38대 원성왕의 부친인 효왕이 그의 숙부 파진찬을 위하여 세운 절이라 한다.
삼국유사에도 무장사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소성왕의 왕비인 계화부인이 소성왕이 임금의 자리에서 일찍 승하하자 무장사에 그의 극락왕생을 빌기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하게 되었다한다.
무장사지에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는 계화부인이 소성왕의 명복을 빌면서 조성한 아미타불상을 만들면서 그에 관한 내용을 기록해 놓은 기록비문이라한다.
1915년 귀부와 이수만 덩그런히 남아 있었는데 주변에서 비석조각을 발견하였다한다. 그 조각에 새겨진 내용을 보고 무장사지임을 알게 되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그 비문이 보관되어 있다한다.
비문에는 금석학의 대가 추사김정희가 32세 때인 순조17년에 무장사지를 두 번이나 방문한 기록을 써 놓았고 당나라 왕희지의 글을 모아 집자해서 써 놓았다고 되어 있다.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이수및 귀부(보물제125호)와 무장사지 삼층석탑(보물제126호)만 현재 남아 있다.
먼저 이수및 귀부를 살펴보면 비문은 없어지고 비석을 받쳤던 거북모양의 받침대인 돌을 귀부라 한다.
그 귀부위에 있던 비석은 파손된 조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비석 위에 올려져 있던 용모양을 새긴 비석머리를 이수라 한다.
귀부인 거북이 두 마리 위에 12지신을 모시고 그위에 비문을 세웠서며 이수인 용이 새겨진 비석의 머리돌에는 아미타불ㅇㅇ란 여섯글자가 두줄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무장사지삼층석탑은 기단을 2단으로 만들고 그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려 놓았다. 1층 기단에는 모서리 기둥과 2개의 안기둥을 조각하고 덮개인 돌을 올려 놓았다. 덮개돌 위의 2층 기단은 8개의 돌로 짜 맞추었다. 2단 기단 네면에 두 개의 돌에다 안상을 넣었다. 둥근 창모양 같은 문양을 모서리기둥과 안기둥에 새겨 넣었다. 1층 2층3층 각각 몸돌과 몸돌을 덮은 지붕돌인 덮게 돌은 모두 1개씩의 돌로 만들었고 아랫면은 5단 그리고 모서리 기둥을 조각하였다.
1963년 무너져 있던 것을 일부 다른 돌을 넣어 다시 세웠다한다. 높이는4.95m


무장사지 삼층석탑 보물제126호. 1962년 복원 작업을 할때 일부 자재를 추가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합니다.

증명사진입니다.

2층 기단에는 창모양의 안상을 조각하였습니다

기단위에 하나의 돌로된 지붕돌을 놓았고 그의에 몸돌도 하나의 돌로 만들어 사각 모서리를 안쪽으로 조각을 하여  놓았다, 지붕돌은 덮게돌로 5단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돌이다.

옆에서 본 모습으로 안상하며 지붕돌이 5단으로 역층의 모습을 하며 몸돌의 네면에 안쪽으로 조각을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장사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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