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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단석에 연꽃문양이 좌우로 정면과 귀로는 인왕상을 돋을 새김하여 놓았다. 그리고 연꽃좌대을 아래위로 두어 서로 대칭을 두었어며 탑신의 문양과 연꽃봉우리 또한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산스크리스트 글자를 새겨 놓았다..

연꽃좌대를 서로 돌여 놓아 안정감과 부도탑의 전체적인 균형감각과 예술성을 배가 시켰다.

앞뒤로 인왕상을 돋을 새김해 놓았다.

좌우로는 연꽃문양을 돋을 새김하였어며




부도란 흔히 유명한 스님들의 사리를 보관하는 탑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오래된 사찰이나고승들이 수도를 하였던 사찰에 가면 절 입구 한 켠 에 부도 탑이 전시되어 있어며 그 사찰의 전통을 나타내고 있다.
부도탑에 이끼류가 끼여 있어면 어쩐지 모르게 옷메무시를 정리하고 다시한번 그 부도탑을 보게 된다. 어느분의 사리탑인지를...

남암산 아래에는 고색창연한 사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청송사지란 절터가 있다. 신라 효소왕때 처묵(處默)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으며 그 외의 정확한 자료는 찾을 수 가 없다 한다.
청송마을로 불리는 그 자리가 청송사 절터로 부도탑과 삼층탑등을 보면 규모가 엄청 큰 절이 들어 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송사지의 부도탑은 유형문화제 재3호로 지정되어 있어며 망해사의 부도탑과 다른 형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망해사의 부도탑은 탑의 형태를 보여주는 현재 보기 드문 형태의 모습이고 신라시대 부도탑이며 청송사지 부도탑은 지금 많이 볼 수 있는 석종형태의 부도탑이다.
현재 청송사지의 부도는 모두 3기로 두기는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한기는 돌종형태의 모습만을 하고 있다.
좌측의 부도탑은 높이가 3M로 꽤 큰편이며 4단의 형태로 지대석 기대석 연꽃좌대, 탑신으로 짜여져 있다.
맨 밑단인 지대석위에다 기대석을 쌓았는데 남북 양면에다가 인왕상을 동서 양면에는 연꽃 문양을 돋을 새김하였다.
문양이 매우 아름답게 세겨져 있어며 독특하다. 그리고 연꽃좌대 위에다 석종형태의 탑신을 놓아 균형을 맞추었어며 탑신아래에다 산스크리스터 글자가 새겨져 있고 윗부분에는 연꽃 봉우리가 크게 새겨져 있다.
가운데 부도는 기대석 네면에 연꽃문양을 돌여 돋을 새김 해 놓았어며 탑신에는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서응당 진흡대사”란 글자가 아래부분에는 구름무늬(고사리무늬)를 새겨 놓았다.
우측의 부도는 높이 1.2M로 1982년에 복원을 하여 기단도 없이 놓여져 있으며 문양도 없는 깨끗한 모양을 하고 있다.



서응당 진흡대사란 글이 새겨져 있다.

기대석에는 연꽃문양과  탑신의 아래부분에는 구름문양을 그려 놓았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문화재청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21,00030000,26&queryText=V_KDCD=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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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깨가 들어가서 그런지 국물이 뻑뻑하며 들깨가루가 실제로 보인다. 그리고 호박과 감자 홍당무가 있어 입맛을 당기게 한다.




가까이 본 칼국수 모습입니다.


따라 나오는 밑 반찬은 간단하며 기본 찬으로 배추김치와 깍두기 그리고 고추 양파와 된장과 양념장이 같이 나온다. 

관광지나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가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많이 찾는다.

그런 음식 중에 하나가 칼국수이다. 가을철이라 그런지 모든 산에서는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붐빈다. 문수산 밑 언저리에서 점심을 먹을까 싶어 찾아 들어 간 곳이 매우 바쁜 집으로 자리 잡기가 수월하지 않은 집이였다. 마당에 들어선 차하며...

필자도 간단하게 먹을 요량으로 남이 앉아 먹다 간 자리에 않으며 그릇을 치우는 아주머니가 나왔기에 주문을 하니 칼국수가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현수막에 걸린 내용을 보니 눈길이 간다.
수입밀은 봄에 파종을 하여 가을에 수확을 하지만 우리밀은 가을에 파종을 하여 추운 겨울을 나고 늦은 봄에 수확을 하기 때문에 병충해가 강하고 농약을 치지 않아 웰빙 음식이고 복합다당류, 단백질이 다량 함유하고 있어 면역기능을 높여 주며 노화를 억제하고 청심환 처럼 마음을 시원하게하고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뇌기능 활성화 성분이 들어 있으며 동의보감을 빌리면 장과 위를 튼튼하게하고 기력을 세게하여 오장을 도운다고 되어 있어 이정도면 만병에 좋은 음식일 것 같아 역시 주문을 잘 했다 싶었다.
오늘 여행도 즐기고 이런 천하의 음식인 우리밀 칼국수를 먹어 보는데...그
런데 내 보다 뒤에 온 사람들의 음식은 먼저 나오는데 말이다. 한참을 기다리도 안나오기에 아주머니한테 왜 칼국수 안나오느냐 하니 주문을 했느냐 반문한다.
아니 아주머니 그릇치울 때 칼국수 주문 안 했느냐 하니까, 그때야 빨리 해가지고 온다고 이야기를 한다.
가져온 칼국수는 우리밀로 만들어서 그런지 색상은 깨끗하지 않았다.
국물 또한 뻑뻑하여 무엇인가 넣은 것 같아 맑지가 않았다.
홍당무 호박등이 들어가 있는 우리밀 칼국수, 음식은 먹을 만 했는지 배가 고파 맛있는지 잘먹었다.
그 때 까지는 진시황제도 부럽지 않은 불노초 칽국수를 먹었다.
칼국수집은 점심시간 때라 그런지 매우 바빠 보였다.
나도 칼국수를 다 비우고 그 아주머니께 국물에 들께 가루를 넣었느냐하고 물어 보니 바쁜데 뭘 그런 것 물어 보느냐하며 눈총을 준다.
계산을 하고 돌아 나와 그집 간판을 보니 옳은 간판도 없고 현수막에 그냥 상호가 걸여 있어 전화번호라도 물어 볼 욕심에 다시 들어가 말도 못 붙여 보고 핀잔만 들었다.
불친절 한 것인지 바쁜데 물어 볼여고 했는 내가 잘 못인지...
스트레스가 더 쌓였다.
다음에 다시 우리밀로 스트레스를 확 날리게 가야하나여...

상호: 문수산자락 우리밀칼국수

전화:바쁘다해서 물어보지도 못함

주메뉴:우리밀 손칼국수 5000원 문수파전 7000원 가마솥손두부 5000원등등...

위치 :경남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 문수산 입구마을인 영해마을

젓가락으로 휘 저어 먹기전의 우리밀 칼국수입니다.

문수산자락 칼국수집 입니다. 가시는 것은 여러분 자유입니다. 그런데 다른 집 보다는 바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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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 문수초등학교 뒤편 남암산 아래에는 청송사지터가 있다 대여섯채가 옹기종기 모여 생활하는 이곳 일대가 신라시대 청송사지터이다. 지금은 옛 절터가 미나리깡이나 논 밭으로 변해 있지만 절의 규모가 엄청 커 부도탑의 거리와 삼층석탑 그리고 부추밭의 바위에 일부 남아있는 예술조각의 흔적들이 그 당시의 청송사 규모를 말해준다. 청송사지로 갈려면 영해마을 문수암 올라가는 길로 가야한다. 영축사지터를 지나 문수암 갈림길에서 좌로 틀어 일방통행로 길을 따라가면 철탑의 성불암 갈림길에서 다시 좌측 문수분교방향으로 내려선다. 호젓한 대나무 숲길이다. 대나무 숲길을 나오면 청송사지 삼층석탑과 만난다. 눈에 펼쳐지는 관경은 호리병속의 입구를 지나면 눈앞의 삼층석탑과 한가로운 농촌의 들녁 풍경이 펼쳐진다. 외부와 단절된 느낌이다. 신선이 산다는 청학동이 따라 있을까? 여기가 청학동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 본다. 청송사지 삼층석탑은 보물 제38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전체적인 느낌은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느낌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은 각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기고, 마감돌 위에 다른 돌로 2단의 모난 괴임돌을 끼워서 각각 윗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이 특히 길고 크며, 2층 몸돌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각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가 두꺼워 지붕 네 귀퉁이의 치켜올림이 약하며 처마는 수평으로 길이가 짧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이 탑은 기단의 짜임새가 정연하지 못하고, 1층 몸돌이 지나치게 큰 반면 지붕돌이 작아서 좋은 비례로 보기 어려우나, 지방에 분포된 신라 석탑의 한 예로 주목할 만하다. 또한 1층 몸돌의 괴임돌이 다른 돌로 되어 있는 점은 탑의 특이한 조형과 아울러 9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을 짐작하게 한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위층 기단에서 동제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 청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유리구슬 16점, 수정으로 만든 곱은옥 1점, 관옥 1점 등 30여 점이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의 자료를 인용함>


우바이 백화당 낭옥님의 부도로 청송사지 부도중에 유일하게 청신녀의 부도이다. 울주군 청량면 율리 산1183번지 부도골 논둑에 묻혀 있던것을 1990년 수집상에 의해 전라도까지 유출된 것을 지안스님외 마을주민이 함께 되찾아 왔다한다. 현재 삼층탑 앞에 송덕비와 함께 있다.

청송사지의 규모는 얼마나 큰지 부추밭의 담벽 바위에도 무엇인가 둘러 산 문양이 새겨져 있고  뜯겨나간 바위면에도 문양이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할 수 있다.

현 청송사는 최근에 다시 불사를 일으켜 세중건한 절로서 삼층석탑 우측 청송마을에 위치를 하고 있는 조용한 사찰이다




처마 끝의 단청이 우아하게 색칠이 되어 있어며 대웅전 주변에도 깨끗하개 주변을 정리하였다.
대웅전 기둥의 부처님과 옛 청송사지터의 규모를 보여 주고 있다.

걸어서 청송사지 가기위해....
문수산  남암산 아래 청량면 율리 마을에는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이번 답사에서는 문수암은 빼고 하였다. 그래서 먼저 답사한 곳이 망해사지, 망해사지 보도탑을 보고 걸어 문수산 등산로를 넘어 내려서면 영해마을, 그기서 길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오르면 문수암으로 가는 도로를 따르지 않고 굿당이란 안내판을 보고 올라간다.청송사지를 만나기 위함인데 문수암도로를 따라가면 지겹고 안그래도 안좋은 무릅도 아플 것 같고 우회하고 해서 위치를 가늠해 대충 산길을 잡아 올라가며 농사 일을 하는 몇분에게 청송사지 삼층탑을 물어니 거의 돌아오는 답이 모른다. 가보지 않았다. 탑이 있나요하는 대답뿐이다. 부산에 있는 나도 그것쯤은 아는데 혹 이마을 쪽에서 청송사지로 넘어가는 반듯한 길을 물어볼여고 했더니 대 실망이다. 요즘은 복잡한 도시를 떠나 노후를 농촌에서 보내는 분이 많은 것 같아 그런분들인가 생각을 한다. 이제 농촌의 어른신들은 다 어디갔는가요? 그것이 궁금합니다.
굿당 밑에서 농사일을 하는 분에게도 길을 물어보니 시원한 답이 없다. 굿당을 통과할여고 하니 그놈의 똥개(?)가 자꾸 짓는다.내가 ?라 해서 그런지 엄청 짓어 할 수 없이 돌아나와 능선을 돌아 굿당을 우회하여 산길을 잡고 치고 오른다. ?야 메롱하며 능선에 오르니 희미한 갈림길.좌측의 중간길로 길을 잡아 내려갈려고 보니 능선의 형태가 너무 밑으로 떨어 질 것 같아 우측으로 능선을 따라 오른다. 길의 흔적도 나타나고 끊어지고, 우회하고하여 문수가든 뒤 족구장으로 떨어졌다 문수가든을 나와 우측으로 틀면 바로 청송사지터였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문화재청 청송사지 삼층석탑을 보세요.
http://www.cha.go.kr/unisearch/Uniresult_Db_View.jsp?VdkVgwKey=12,03820000,26&queryText=청송사지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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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 마을에서 내려 걸어 들가면 별장같은 집 뒤로 문수산이 솟아 있다. 옛 영축산으로 청량산으로도 불려 청량면의 기원이 되었다.





망해사 가는 길. 망해사 안내문을 보고 넓은 길을 따라 올라간다. 대형버스는 여기가 끝으로 마을 입구에 차단봉이 설치 되어 있다. 



망해사 입구로 영축산망해사란 표지석이 있으며 등산로와 망해사지석조부도는 우측으로 오른다고 안내판이 설치 되어 있다. 



망해사로 들어서면 먼저 정면으로 대웅전이 반긴다. 어느절 처럼 정 중앙에 대웅전이 자리하고 좌우로 요사체와 산신각등이 위치를 하고 있다. 석조부도는 대웅전 우측뒤에 있다. 1957년 전 주지인 김영암화상이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법당안에 모서져 있는 불상


법당 천장을 올려다 보니 동해용왕을 위해 지은 사찰이라 네귀퉁이에 용을 만들어 놓았다. 


화려한 천장의 연꽃무늬에 용의 모습까지 있어 더욱 헌강왕의 전설인 동해용왕을 위해 지은 절이라 실감을 한다.


건물 외벽에 그려진 벽화로 부처님의 설법 모습과  열반에 드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바깥 단청의 화려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


작은 범종각의 종소리가 동해로 퍼질때 용왕은 아직도 망해사가 자신을 위해 지은 절이라 기뻐하겠지요. 


석조부도탑으로 가기위해서 대웅전을 우측으로 돌아 산신각, 범종각을 지나 올라서면 만날 수 있다. 뒤돌아 본 대웅전

영축산 망해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 있다.
부산에서는 노포동 종합터미널(노포역)에서 울산행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영해마을 또는 망해사 입구에 하차를 하면 된다.
망해사 안내판을 따라가는 길은 많은 별장형 집들이 들어서 있다.
최근에 생긴 도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세상사의 실타레를 보는 것 같이 복잡하다.
정면에는 영축산이 우뚝솟아 있고 그 아래 망해사지와 현 망해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
망해산를 안고 있는 산이 영축산으로 불교에서 따온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인도의 천축국왕사성에 있는 영축산으로 부처님이 이곳에서 법화경을 설법하였고 영축산 아래서 열반에 들어 불자들의 성지가 되었다한다.
그후 중국의 당나라로 건너가 당나로로 유학을 온 자장율사에 의해 영축산이 국내에 들어오게 되었다.
양산의 영축산, 창녕의 영축산등 모두 인도의 영축산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지금은 망해사 뒷산이 영축산으로 범위가 많이 축소 되었지만 신라시대에는 지금의 문수산이 영축산으로 불렸다한다. 또 한편으로는 청량산으로 불려 지금의 울주군 청량면의 유래가 여기서 온것일 것이다.
망해사는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이름처럼 현재는 바닷가가 보이지 않는 내륙의 사찰이다
한때는 이부근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는지는 모르지만 망해사의 창건연대는 매우 길다. 
신라 헌강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약1100여년 헌강왕이 창건한 사찰로 되어 있어 그 연유 또한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

신라 49대 헌강왕(875~886)때는 서라벌(현경주)에서 지방에 이르는 모든 마을이 태평성대를 누리며 평안하게 살았다.
이에 헌강왕은 울산의 세죽이란 곳으로 나들이를 나왔다. 물가에서 앉아 쉬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에 구름과 안개가 끼여 천지를 분간할 수 없어 그 연유를 알아보니 동해의 용왕이 한 짓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헌강왕은 그의 신하에게 명령을 하여 부근에 동해용왕을 위한 절을 짓게하니 구름과 안개는 사라졌고 개운포라는 이름으로도 현재 불리고 있다.
이에 동해용왕은 헌강왕이 자신을 위해 절을 짓고 망해사라 하였다는 이야기에 크게 감복을 하여 일곱 왕자들과 함께 헌강왕 앞에 나타나 왕의 성덕을 찬양하였고 용왕의 왕자중 한명은 궁궐에 남아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울산의 바닷가인 처용암은 처용이 나온 바위라 하며 현재도 개운포에는 처용암이 남아 있다.
그후 망해사는 언제 폐사를 하였는지 모르지만 임진왜란으로 추정을 할 뿐이며 옛 터만 있던 자리에 1957년 김영암화상이 중건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망해사 위의 망해사지에는 현재 두기의 부도가 남아 있다.
망해사지 석조부도로 보물 제 17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부도란 유명한 스님들의 사리를 보관하던 곳이며 망해사와 함께 세워 졌다한다.
폐사와 함께 동서 두 탑이던 것이 동쪽에 있던 부도탑은 무너져 방치되어 있다가 1960년 11월에 다시 세웠지만 상륜은 두탑 모두 없어졌다한다.
 

망해사지 석조부도로 보물 제173호이며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울리산 16-3 망해사 위에 있는 동서 쌍탑으로 동탑은 폐사와 함께 무너져 있던 것을 1960년 11월에 다시 맞추어 세웠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동탑은 많이 깨져 있다. 형재 탑위 상륜은 남아 있지 않다.
서쪽에서 본 모습


동쪽에서 본 모습으로 그때의 주춧돌과 기단의 모습 등을 볼 수 있으며

그 우측으로 돌종 형태의 깔끔한 조선후기의 부도탑을 볼 수 있다.

쌍탑중 서탑으로 방치된것을 새로 세웠다. 서탑의 높이는 3.3m이며



동부도탑은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높이는 3.4m이며 두 부도탑모두 같은 쌍탑이다.

8각원당형(八角圓堂形) 기본양식을 따라, 지대석(地臺石)은 정4각형으로 마련하고 기단(基壇)을 구성하였다.


8각상대(八角上臺)의 각면 상부에는 얕은 턱을 두고, 그 밑의 각면에 안상(眼象)을 1좌씩 얕게 조각하였다.

이 지대석 위에 복련석(覆蓮石)을 놓았으며, 복판(複瓣) 8엽(八葉)의 연꽃을 둘렀고,

 그 꽃잎 끝에는 귀꽃을 새겼으나 평면적이다.

중앙에 팔각형의 높직한 4단의 굄이 얕은 중대석(中臺石)을 받치고 있고, 중대석에는 각 우각(隅角)에 기둥모양이 모각(模刻)되어 있을 뿐 다른 조식(彫飾)은 없고,

그 위에 앙련석(仰蓮石)이 놓여 있다. 앙련석은 밑에 3단의 각형(角形) 받침이 있는 위에 단판(單瓣) 연꽃이 상하 6잎씩 2중으로 조각되었다. 이와 같이 기단을 구성한 위에 탑신을 받치기 위한 딴 돌이 있다.




이 돌은 갑석형(甲石形)으로 지나치게 내민 턱을 중심으로, 밑에는 8각 각면에 기단에서와 같은 수법으로 된 안상이 있고 위에는 24잎의 연꽃을 돌렸다.



이 돌은 갑석형(甲石形)으로 지나치게 내민 턱을 중심으로, 밑에는 8각 각면에 기단에서와 같은 수법으로 된 안상이 있고 위에는 24잎의 연꽃을 돌렸다.

탑신도 역시 8각으로 각 우각에 기둥모양을 모각하였고, 각면에는 위에 영창 의 형태를 나타냈으며, 밑에는 전후좌우 4면에만 호형(弧形)을 새겼다. 옥개석도 8각으로 각 부재(部材) 중에서 가장 많은 손상을 입었다.

옥리(屋裏)는 반원을 그리며 연목(椽木)을 번안(飜案)하였고, 추녀는 수평으로 넓은 편이다. 옥상에는 높직한 우동(隅棟) 8가닥이 흘렀고 곡선은 매우 완만하다. 상륜(相輪)은 양 부도가 모두 상실하고 있으나 그 일부가 따로 보관되어 있다.

 







현재 서부도탑의 모습으로 훼손이 심하며 이 두 부도는 각부의 구성과 조각수법이 다소 섬약(纖弱)한 편이다. 특히 얕게 새겨진 안상이나 복련석 귀꽃은 입체감을 잃었다. 그러나 8각원당의 기본형을 계승하였고, 석재의 결구(結構)에서 짜임새 있는 비율을 잃지 않아 통일신라 후기의 가작이다.<망해사홈페이지>



부도탑에서 본 망해사이며 현 위치에서는 바다를 볼 수 가 없다.

문수산 등산로 우측으로 터를 잡은 망해사로 등산로에서 본 대웅전 그뒤로 영축산도 보인다

망해사 홈페이지 가시면 더욱 자세한 망해사의 내력과 망해사지 부도탑을 만날 수 있습니다.
http://www.manghaesa.or.kr

그리고 문화재청 망해사지석조부도 : 문화재청
URL : 

http://www.cha.go.kr/newinfo/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2,017300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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