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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여행/수원여행)조선 행성의 백미 수원화성 연무대와 동북공심돈, 군사를훈련한 연무대에서 활쏘기 체험도 하였습니다.


수원에는 조선 행성의 백미인 수원화성이 있습니다. 1794년인 정조 18년에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공된 수원화성은 정조의 어버지인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향한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를 해소함과 정조대왕의 강력한 왕도 정치의 실현과 그의 정치적 원대한 꿈을 알 수 있는 수원화성은 정약용이 설계를 하였습니다. 





수원화성 축성에 사용된 거중기, 활차, 녹로등 획기적인 건축기재의 발명과 활용은 수원화성의 축성술을 보여주는 것으로 과학과 건축, 예술이 접목된 우리나라 성곽건축의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방어적인 기능을 갖춘 성입니다. 팔달문과 장안문, 화서문, 창룡문의 4대 성문등  각기 다른 모양을 한 건축물로 건물마다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수원화성은 그 건축물의 가치가 인정되어 199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으뜸 관광명소', 'CNN 선정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곳 50곳', 등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꼭 가봐야 할 곳입니다. 2012년 한국 관광을 빛낸 '한국 관광의 별' 수원화성은 규모가 너무 광범위하여 필자도 한번에 다 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정조대왕의 기분으로 화성열차를 타며 먼저 수원화성을 구경하였습니다. 화성열차는 서장대가 있는 성신사 앞까지 운행이 되었습니다. 서장대와 인근의 서노대, 서암문등 수원화성의 중요관광지와 효원의 종에서 타종 체험을 하였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을 열었던 화성 행궁도 돌아보고 야간에 보는 수원 화성은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였습니다. 불빛을 받은 장안문과 화홍문은 은은한 모습으로 꼭 제가 정조대왕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이번 수원화성 포스팅은 수원화성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연무대입니다. 동장대로도 불리는 연무대는 서장대인 화성장대와 쌍벽을 이룹니다. 특히 이곳에서 활쏘기체험을 하였습니다.   





사대에 올라가 우리 전통활인 국궁도 쏘아보고 조선 군의 무예를 수련하였다는 연무대를 보았습니다. 건물의 규모면에서는 수원화성에서 가장 웅장하며 위용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동북공심돈



연무대는 평상시에는 군사 훈련을 지휘하는 장대로 팔작지붕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들어서면 우리 조선 군의 함성과 독려하는 장수의 고함소리가 쟁쟁하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수원화성의 동장대인 연무대 인근에는 동북공심돈이 자리  하고 있습니다. 수원화성에서는 가장 특이한 모양의 건축물로 타원형으로 지어졌습니다. 전시에는 장거리 관측소로서 사용되었고 동북공심돈의 내부에 설치된 계단은 나선형이라 '소라각'으로도 불립니다. 





서북공심돈과 함께 동북 공심돈도 벽체에 총구멍이 여러개 뚫여 있어 외부로 부터 공격해 오는 적을 막아내도록 건축되었습니다. 연무대와 동북공심돈을 함께 보며 화성열차를 타고 서장대로 찾아갔습니다. 


 

동장대로 불리는 연무대




















































 ★수원화성 홈페이지 수원문화재단: http://www.swc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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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읍성지(東萊 邑城址)

동래읍성은 현재의 동래 일원 즉 복천동, 안락동, 명륜동, 칠산동, 명장동 일대에 걸쳐져 있는 성으로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안락로타리의 충렬사 뒤산인 동장대에서 인생문를 거쳐 북장대의 마안산으로 연결되고 동래향교 뒷산의 낮은 산등성이를 전부 포함하며 현재 동래시장이 있는 평탄한 곳까지도 여기에 포함된다.


 




산성과 평지성의 형식을 접목하여 장점을 이용한 평산성의 형식으로 쌓았다. 삼한시대에부터 부분적으로 성의 형태를 갖추어진 것으로 보지만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보이는 현종12년인 1021년에 동래성을 수리한 것으로 나와 있다.
1387년 고려 우왕13년에 박위가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동래부는 대일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관아의 규모도 키우고 격식 또한 높혔다. 그래서 정3품의 부사를 두어 관할하게 하였는데 이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함이였다.

 



1592년인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부산진성과 함께 제1공격목표를 정했다한다. 이에 동래부사 송상현은 동래성을 사수하기 위해 민관군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를 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성은 허물어진채로 방치되어 오다가 1731년 영조7년에 와서 정언섭에 의해 기존의 성보다도 규모가 큰 성을 다시 쌓았다한다.
이때 쌓았던 성의 흔적을 토대로 지금 동래읍성을 새로 복원하게 된 것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이 3.8km, 읍성에는 사대문인 동,서,남,북문과 인생문, 암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한다. 





동문을 지회루, 서문을 심성루, 남문을 무우루, 암문을 은일루라고 하였다. 동래읍성중 평지에 있었던 남문은 위치로 보아 중요하게 여겨 익성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과 뒤쪽의 주조문의 이중구조로 되어있었다. 일제강점기때 시가지정비계획에 의해 평지에 있던 성벽은 철거되고 마안산등 일부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가 북문, 북장대, 동장대. 서장대, 인생문이 복원되었고 치성과 여장등이 보수 또는 수리중이다.



동래읍성의 장대중 하나인 북장대는 1737년 영조13년에 좌천동 동구 도서관 옆 증산 위에 세워졌다가 20년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그때의 장대는 없어지고 1999년 현재의 북장대는 복원이 되었다. 1870년 고정7년에 동래부사 정현덕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벽과 문루등을 고쳐 쌓았는데 서장대를 세워 장수의 지휘와 주변 경계를 강화하도록 하였다한다.



북장대는 읍성중에 가장 높은 위치에 있어 성내외에 있는 군대를 쉽게 지휘할수 있었으며 6개의 문중 하나인 인생문은 임진왜란때 이곳 인생문으로 피난을 위해 성을 빠져나간 사람은 모두 목숨을 건졌다하여 사람을 살린 문이라하여 인생문으로 부르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이 성문을 굳게 닫고 문루에있는 송상현을 보고 소서행장이 길을 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왜구는 명나라를 칠려고 하니 조선은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하였는데 정발장군이 길을 빌려 줄 수 없다하며 반대하여 종과부적과 조총으로 인해 부산진성은 함락되고 그 길로 동래성으로 쳐들어 왔다고 합니다. 



소서행장이 송상현에게 "싸울테면 나와서 싸우고 그렇치않으면 길을 빌려달라"고 하니 송상현이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는 답글로 결연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송상현의 그 결연한 의지도 군사의 열세와  조총으로 중무장한 왜적을 이길수는 없었습니다. 동래성은 함락 되었고 송상현은 동래성과 끝까지 함께 하다가 순절하였습니다. 그 역사의 성인 동래읍성 주위로는 볼거리도 많이 있습니다. 송상현과 정발장군등 숱한 선열들을 모신 곳인 충렬사가 있으며, 복천동고분군, 동래향교등 문화유적과 함께 역사성도 많은 곳으로 자녀분과 주말에 방문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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