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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대구중구근대골목투어) 이상화·서상돈 고택 찾아가기. 대구 중구 근대 골목 이상화 서상돈 고택을 만나고 왔습니다.


대구 중구 근대 골목 투어를 해보셨나요?  대구에서 가장 인기가 있다는 대구중구근대골목길을 걷다보면 두 분의 고택을 만납니다. 저항시인이자 민족시인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이상화님과 국채보상운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민족운동가 상돈님 고택입니다 



이상화님과 서상돈님이 거한 고택은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참 그것도 우연한 인연인가요?. 먼저 이상화님을 만나보겠습니다. 이상화 하니까 먼저 생각나는게 스케이트 선수 이상화가 생각납니다. 그러나 그 이상화선수가 아닌 일제강점기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민족 정신을 일깨운 저항시인 이상화님 이야기입니다. 



대구중구근대골목 투어에서 동산·청라언덕을 내려와  3.1운동 거리와 계산 성당을 보고 나오면 도로 옆 인도에 이상화 서상돈님 고택을 알리는안내판이 있습니다. 왼쪽이 저항시인 이상화님, 오른쪽은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님, 두분의 모자이크 인물화가 벽면을 장식합니다. 



이상화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에서  '지금은 남의 땅'으로 시작되는 첫소절이 보도블럭으로 깔려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이상화 서상돈 고택을 걸어 갑니다. 자연스럽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를 읊어봅니다. 


계산 성당의 모습도 모자이크로 만날 수 있습니다. 

대구 근대 역사를 한눈에 만날 수 있는 '대구 근대로의 여행' 안내판도 있습니다.



계산성당을 배경으로 한 이상화님의 멋진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제부터 이상화, 서상돈님 고택이 있는 골목이 시작됩니다. 


안내판도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 그리고 근대문화 체험관 '계산예가'를 안내하고 있습니다.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배웠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님의 고택을 찾아  가는 길은 수업시간 처음 시로 접할 때 그 감정이 되살아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골목길을 따라 60m 을 들어서면 만년에 그가 병마와 싸우며 마지막 여생을 보낸 아담한 고택이 나옵니다.  

 

이상화님의 간단한 프로필입니다. 


근대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계산예가의 모습입니다.

이상화님의 고택입니다. 대구 중구 근대로의 여행 중심에 자리잡은 이상화 고택을 관람합니다. 




시인 이상화님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1926년 '개벽'에 처음 발표가 됩니다. 작품의 배경지로 알려진 대구시 수성들은 시의 배경처럼 허허벌판이었습니다. 지금 수성들은  당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하여 아파트가 밀집한 주택지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수성못에 가면 그 당시의 흔적인 이상화님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배경지임을 보여주는 선생님의 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대구고보 학생시절 부터 이상화님은 항일 운동을 시작합니다. 1918년에는 일제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은 '신라제의 노래'를 발표하고 1919년 3월8일에는 '대구 3.1운동'의 연락책을 맡아 만세시위를 주도합니다. 



 선생은 '금강송가' '역천' '이별'과 같은 일제에 저항하는 많은 시를 발표하여 우리의 민족혼을 살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 뒤 일본 도쿄로 유학길에 오르고 일본에서 그의 생활 또한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선생 독립운동을 하는 친형 이상정을 중국에서 만나고 귀국하여 대구로 들어와 곧 공안에 체포가 됩니다. 그의 형 이상정을 만났다는 이유로 갖은 고문과 함께 옥고를 치르다 풀려납니다. 1937년 조선일보사 경북총국을 맡아서하다 그만두고 교남학교(대륜중·고교)에서 교편을 잡아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광복 2년 남겨 둔 1943년 3월 선생은 위암 선고를 받고 한달만인 4월25일 눈을 감습니다. 선생이 그렇게 소원하던 빼앗긴 들에 봄이 온것을 보지 못한채 말입니다. 대구 계산동 이상화 고택은 선생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머물렀던 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집의 구조를 보면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마당의 장독대, 선생이 울적할때면 항상 찾아 마음을 달래곤 하던 마당의 감나무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한때 이상화 고택은 헐릴 위기에 처했습니다. 2001년 11월 도로계획으로 곧 뜯기는 것을 알게된 대구시민은 '이상화 고택 보존' 서명 운동을 실시하고 고택을 보존하자는 염원이 일어 50만명이 서명운동에 동참 하였고 성금도 모금 되었습니다. 

 


이상화 고택 보존은 대구 시민 모두의 염원이라 하늘도 감동을 하였는지 군인공제회에서 아파트를 짓기위해 부지를 매입하면서 고택도 함께 매입하여 대구시에 기부체납을 하여 오늘의 이상화 고택이 남게 되었습니다. 고택은 고증을 거쳐 복원이 이루어 졌고 2008년에 대구시민의 품으로 돌아 왔습니다.



시인 이상화님은 생전에 네개의 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초창기에는 불교 용어인 '무량'으로 '헤아릴수 없을 만큼 많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름과 똑 같은  두개의 발음으로 상화(尙火, 想華)를 사용하였습니다. 시인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 1922~1926년에 사용된 尙火의 호는 '항상 불같이'란 뜻으로 저항시와 항일 운동으로 민족혼을 깨우치려는 선생님의 마음을 그대로 호에 나타내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용한 호는 '백아 (啞)'로 백치와 벙어리를 뜻합니다. 광복을 갈구하던 선생의 참담한 마음이 담겨져 있는 듯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번쯤은 들어 봤던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의 시인 이상화님, 대구 중구 근대 골목 투어에서 꼭 한번 만나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구 용지봉에서 본 수성들입니다. 저기 일제강점기때 만들어진 수성못도 보입니다.




이상화 고택을 나와 맞은 편에 있는 서상돈 고택을 찾아갑니다. 평소에 역사 공부를 소홀이 했는지 필자는 조금은 생소한 분입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 그 중심에서 앞장을 선 분으로 대구 제일의 갑부였다합니다. 먼저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조금은 알아보겠습니다. 대한제국때에 일본은 반강제로 우리 조정에 차관을 제공합니다. 그  속내는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위한 야심으로 차관은 자꾸만 불어나 1907년에는 1,300만원 까지 불어나 우리나라로서 도저히 감당을 할 수 없는 금액이 되었습니다. 요즘 뉴스에 종종나오죠. 그리스 등등 나라가 빛더미에 파산 일보 직전이라고요?. 그 당시 대한제국은 나라가 거들날 판이었습니다. 이를 기회로 일본은 서서히 야심의 발톱을 드러내면서 대한제국의 경제권을 조금씩  빼앗아 갔습니다. 나라는 빚을 갚을 능력이 없고 그것을 빌미로 일본에게 주권까지 빼앗길 판이 된 것입니다. 이에 국채를 보상하여 주권을 되찾자는 운동이 들불처럼 벌어진게 국채보상운동입니다.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 대구 갑부 서상돈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1907년 2월 담배를 끊어 국채 1,300만원을 갚자며 제안을 하였고 본인 또한 담배를 끊고 그 당시 거금 800원을 의연금으로 기탁합니다. 이리하여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를 합니다. 그러나 일제는 국채보상운동 금지령을 발표하고 온 갖 방해 공작을 벌여 국채보상운동은 끝내 좌절을 합니다.

 


대구 최고의 갑부로 알려진 서상돈의 고택은 그저 평범한 모습으로 그 만큼 근검과 절약 정신으로 생활하여 대구 갑부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내만 잘 살고 배부르게 먹는 것은 큰 죄라며  봄, 가을 춘곤에는 그의 곳간을 열어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위에 배 굶는 사람을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선생은 꿈을 채 이루어 보지도 못하고 1913년 6월30일 64세로 타계 하였습니다. 대구중구근대골목 투어에서 위대한 저항시인 이상화님과 민족운동가 서상돈님을 만나는 여행은 무엇보다 나에게는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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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중구여행)근대문화골목 대구제일교회, 대구 경북 최초 개신교 제일교회에 깜짝놀래다.


청라언덕의 대구제일교회는 대구 경북 최초의 개신교회라 합니다. 1893년 부산에 있던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가 대구로 와 약령시장에 처음으로 선교 활동을 한 것이 제일교회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베어드 목사는 교회 부지를 구입하고 그 당시 예배당으로 사용함에 이게 대구경북 최초의 기독교교회인 남성정교회가 되었습니다.

남성정교회와 함께 대구 최초의 의학병원인 동산의료원의 전신인 제중원도 함께 들어와 양 의술을 소개하였습니다. 현재 제일교회 선교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1933년에 교회 건물로 완공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교회명칭도 제일교회로 바뀌었다합니다.

이 선교관은 그 당시 내부와는 약간의 변형이 있으나 외관은 건축당시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현존하는 건물 중 적벽 돌을 이용한 고딕건축물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하여 대구시에는 유형문화재 제30호 지정을 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1

937년 벽돌 조 5층 높이 종탑을 세움으로 현재의 골격을 갖추게 되며 지금은 제일교회 선교관으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선교관인 이곳은 조선시대 경상감영 때에는 옥사가 있었던 자리로 전하며 교회를 지을 때 1907년 헐렸던 대구읍성의 석축 일부를 주춧돌로 사용을 하였다합니다.

 

 








☞(대구여행/중구여행)근대문화골목 대구제일교회, 근대문화골목 투어에서 최고 볼거리는 청라언덕의 제일교회와 선교사 사택.


현재의 동산에는 새로운 제일교회가 들어서 있습니다. 영남신학교의 터를 구입하여 1989년 10월에 교회건물을 착공하여 1994년 4월에 준공을 하였습니다. 2002년에 57m의 종탑을 완공하여 5만여평의 부지위에 대구의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두 개의 종탑이 자 뭇 웅장합니다.

본 교회는 지하2층 지상 5층의 철근콘크리트 구조 건물로 2,160평에 좌석수만 3,100석이라합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 18면과 용담석의 화강석이 외벽으로 마감을 하였습니다. 화려한 외관에다 웅장하며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건축물로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 건물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필자도 청라언덕에 올라 제일교회를 바라보며 규모와 예술성에 어안이 벙벙하였습니다. 동산으로 불리는 이곳에는 대구에 가장 많은 문화재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근대 건축물이 즐비한곳으로 아름다운 챔니스 주택, 블레어 주택, 스윗즈 주택보다도 더 눈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 것이 이곳 제일교회입니다.

앞으로 대구 골목투어 2코스인 ‘근대문화골목’에서도 한자리를 꿰어 차고 있습니다. 대구 여행을 계획하는 분들은 꼭 대구 동산의 제일교회와 주위의 선교사 건물들을 둘러 볼것을 권합니다. 신 건축물과 구 건축물의 조화가 너무나 아름다운 여행지입니다.











































 

 




1933년에 완공된 제일교회의 모습. 대구 경북 최초의 개신교회였고 현재는 제일교회선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유형문화제 제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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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맛집/중구맛집)근대문화골목 진골목식당, 대구 골목길 투어에서 먹는 진골목식당 육개장 별미.

 

1박2일 대구 여행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청라언덕에서 시작하는 대구 근대로의 여행, 골목투어인 "근대문화골목"길이다. 청라언덕에는 유독 붉은 벽돌의 건물이 많다. 선교사였던 스윗즈, 블레어, 챔니스의 주택을 보며 하늘을 짜를듯이 솟은 제일교회의 모습과 3.1만세 운동길, 계산성당, 그리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저항시인 이상화의 고택등 근대 우리의 고달팠던 생활상을 오롯히 볼 수 있는 그런 골목길이다. 

 

 

 

 

유난히 많은 전통의 기왓집을 보면서 어느듯 우리는 '진골목'에 다다른다. '골목이 좁고 길다'를 경상도 버전으로 '질다'의 뜻이다. 질다가 줄여져 진골목으로 긴골목을 말한다. 골목길 투어를 하다보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린다. 어디선가 구수한 장국밥 냄새가 허기진 뱃속을 두드린다. 밥을 좀 넣어 달라는 신호다.

 

 

 

 



안성맞춤이란 이를두고 한 말일까. 진골목 안에 '진골목식당' 간판에 팍! 팍! 하고 눈에 꽂히는게 아닌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또 다른 진골목이 이어진다. 그 안쪽 끝의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진골목식당의 풍경은 그야말로 고택의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은 1890년 경에 지어졌고 대구 섬유 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한 코오롱그룹의 창업자인 이원만의 집이다.

 

 

 

 

내부 인테리어도 건축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켜켜히 찌든 세월의 흔적에 찾아든 여행객의 마음은 꼭 외갓집에 놀러온 기분이다. 반질반질 윤이 파르르 나는 대청마루에 누구의 흔적인지 모를 발도장이 찍혀 있고 이방 저방에 가득들어찬 누런 호박은 고향의 초가 지붕에 올려진 지난 가을의 모습을 생각나게한다.

 

 

 

골목투어의 최고맛집인 진골목 식당에서는 유독 어르신들의 발걸음이 잦다. 진골목 입구의 미도다방이 있기도하지만 대구음식인 얼큰한 육개장 전문점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진골목식당의 육개장은 고춧가루를 넣은 칼칼하고 얼큰한 고깃국으로 화끈한 경상도식이다. 먹고나면 속이 시원하다는 육개장.

 

 

 

 

진골목식당의 육개장을 보면 사골육수에다 대파, 토란대를 넣고 고기는 사태와 양지머리만으로 국을 끓여내어 국물이 텁텁하지 않고 동짓달에 먹는 동치미 국물처럼 시원하고 맑다는 평이다. 일행은 육개장과 이집에서 개발한 육국수를 함께 주문하였다. 생소한 육국수는 육개장에 국수가 나오며 밥대신 국수를 말아 먹는 것을 말한다. 독특한 별미다. 두가지 맛을 보기 위해서는 두사람이면 육개장 하나와 육국수 하나를 주문하면 된다.

 

 

 

 

따라나오는 밑반찬은 아주 토속적인 음식이다. 개인적으로는 요요 멸치무침은 집에서도 너무 좋아해서 다 먹고 또 추가해서 먹었다. 방마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누런 호박의 용도는 호박전을 부치기위한것으로 엄청 호박이 많다. 어릴적 엄마가 숟가락으로 끍어서   솥뚜껑에  구워주던 호박전이 생각나 같이 주문을 하였다. 노릇노릇 구워진 호박전 어릴때 먹었던 고소한 그맛 그대로다. 100년된 골목길을 걸어보고 100년이 넘은 고택에서 대구만의 전통음식인 육개장을 먹을 수 있는 '진골목 식당'을 찾는 것도 큰재미이다. 밥을 먹었다면 진골목 입구에서 건강차인 미도다방의 쌍화차로 입을 달래보자.  

 

 

 

 

진골목식당의 육개장 6천원

 

 

진골목의 호박전 5천원

 

 

진골목식당의 육개장과 육국수 그리고 호박전,

 

 

진골목식당의 육국수 6천원.

 

 

 

 

 

 

 

 

 

 

 

 

 

 

 

 

 

 

 

 

 

 

 

 

 

 

 

 

 

 



 

 

 

◆대구 진골목식당 영업정보◆

★상호:진골목 식당

★주소:대구광역시 중구 진골목길 9-1호(종로2가 66-5)

★전화:053-253-3757

★메뉴: 육개장 6천원, 육국수 6천원, 콩국수 6천원, 콩나물밥 5천원, 칼국수4천5백원, 호박전 5천원 빈대떡 5천원

★주차장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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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중구여행)북성로 공구 박물관, 근대 역사의 명품골목 투어중 만나는 북성 공구 박물관.

 

대구 북성로에는 특별한 박물관이 있다. 북성로 공구 박물관으로 이곳에는 “도면만 있으면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곳으로 이곳 북성로 공구 거리는 한때 못구할것도 없고 못만들것도 없는 그런 곳으로 대구 경북에서 기름밥을 먹는 사람들은 북성로 공구거리를 모르면 간첩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명하다.

 

 

 

 

북성로는 조선시대 경상감영이 있던 곳으로 대구의 중심지였다. 1906년 일제강점기때 일인들에 의해 대구 읍성 북쪽의 성벽을 허물고 조성한 거리로 다양한 상점들이 이곳에 생겨났다. 110개의 점포중 107개는 일인이 경영을 하였고 단지 3곳만 조선인이 경영을 하였는데 모두 미곡상을 운영하였다. 이곳 북성로의 공구상을 보자. 해방이전에는 농촌의 도정공장에 사용하는  기계상점 5곳이 처음생겼고 해방이 되면서 북성로는 의류상가로 형성되었다. 6.25를 거치고 나서 하나둘 공구상이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호황덕으로 기계공구상 골목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현재 북성로 공구 박물관은 1층은 44.96㎡, 2층은 31.07㎡의 규모로 1930년인 일제강점기때 미곡상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그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근대건축물로 원형은 보존한채 리몰리딩을 거쳐 공구박물관이 되었다. 1층은 북성로 기술자들의 작업공간과 복층에는 사무원이 몸을 돌리기도 힘들정도로 작은 공간의 사무실을 꾸며 놓았다. 각종서류철하며  나무 책상이 그당시 모습을 잘 보여준다. 다다미방으로 꾸며진 2층에는세미나와 공작 , 체험, 디아이와이(DIY)등을 할수 있는 교육공간으로 사용을 한다.

 

 

 

 

공구박물관의 전시품은 일제강점기때 나무손잡이로 된 드라이버, 렌치, 몽키, 컷트등의 공구류 10여종 50여점을 선별전시하였고 기증을 받은 1,000여점의 공구는 순환을 하면서 전시를 하도록하였다. 전시품중 가장 눈에 띠는 것은 탱크의 포신 같은 특이한 설비로 기술자가 않았던 의자등에 이날 방문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구의 많은 여행지중에서도 시내 중심지에서 근대 역사를 따라 걷는 골목투어 1코스 '경상감영달성길'도 걸어보고 이곳 공구 박물관도 찾아 보면 더 없이 좋은 여행이 될 것 같다. 이색적인 여행지에요.

 

 

 

 

 

 

좁은 공간의 사무실,

 

세미나중인 2층의 다다미방,

 

 

 

 

 

 

 

 

 

 

 

 

 

 

 

 

 

 

 ◆북성로 공구 박물관 정보

★주소: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2가 19번지

★소유자:(사)시간과 공간 연구소

★전화:053-252-8441

★개방시간:오전10시~오후 6시까지(일, 공휴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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