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금정산 무명암의 모습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역사 문화 축제 2015” 조선시대 금정산성 병영 체험과 역사 여행을 하세요. 금정산 금정산성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입니다. 그와 함께 한해를 시작하는 계절이라 많은 축제가 열립니다. 올해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에도 “금정산성 역사 문화 축제 2015” 행사가 금정산성 동문인 금정산성 국방 촌에서 2015년 5월 22일(금)~5월 24일(일) 3일간 열리고 있습니다.

 


옛 흔적의 금정산성

금정산에는 동래 산성으로 불리는 국내에서 가장 긴 18km의 산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왜군의 잦은 침입 때문에 남해안은 항상 조용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 중심에 동래 부가 있었고 그중에서도 금정산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금정산성과 무명암

금정산성에서 내려다 본 두실의 모습


동래 산성으로 불렸던 금정산성은 임진왜란 이전인 삼국시대부터 산성의 흔적은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언제 축성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금정산성에 관한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임진왜란으로 인해 동래 부는 동래읍성과 좌수영, 자성대, 증산 산성, 다대포 진성 등 모든 읍성과 산성이 왜적의 침탈로 무너져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금정산 부채바위


금정산성 동문

바다 건너 왜군에게는 부산을 지리적인 조건에서 첫 교두보로 가장 먼저 큰 피해를 봤습니다. 그에 대비를 위해 쌓은 산성입니다. 또한, 금정산성은 다른 산성과 달리 국청사, 해월사, 범어사의 스님이 승병을 조직하여 함께 주둔했던 곳입니다.




금정산성은 동래독진의 수성장을 겸하고 있던 동래부사가 맡았으며 그중 승병은 1713년인 숙종 39년에 판결사 이 정신의 건의 때문에 사찰에 승군을 조직하였습니다. 이들은 금정산성 내의 사찰인 국청사와 해월사의 승려 100여 명과 범어사 승려 300명으로 금정산성의 승군이 조직되었다는 기록입니다.



금정산성의 사대문 중 현재 대표적인 성문이 동문입니다. 가장 많은 관광객이 붐비며 서문과 함께 금정산성에서는 아주 웅장한 모습입니다. 이곳에서 올해 금정산성 역사문화 축제의 하나로 금정산성 병영 체험 행사가 열렸습니다.



체험 행사를 보면 “좌기청 군관집무체험” “병영 무기 타각체험” “병영 음식체험” “병영 훈련 체험” “호패 제작” “옥사 형틀 체험” “금정산성 지도 제작 체험” “전통 생활도구 체험” “금정산성 투석기 체험” “검문소 체험”과 마당극 “도적을 물리친 누룩” 공연 등이 열렸습니다.


금정구청장 좌기청 군관 집무 체험


필자는 우연히 금정산 산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산성마을에서 동문을 향해 오르는데 동문입구의 국방 촌에 다다랐을 때 병졸이 지키는 검문소가 나타났습니다. 호패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호패가 없다면 이곳 동문을 오를 수 없다 하여 옆 호패 제작소에서 호패를 만들어 착용해 검문소를 통과했고 국방 촌에는 그 당시 산성 안에서 일어났던 모든 상황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따뜻한 날씨라 어린이와 함께 많은 가족이 이곳 동문 국방 촌에서 병영 체험 놀이를 했으며 어린이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특히 동문에는 그 당시 금정산성을 관할한 좌기청 군관의 복장을 하고 군관 체험을 하는 부스는 금정구청장도 동참하여 복장 체험 행사를 하였습니다.





금정산성 역사 문화 축제가 주말인 오늘까지 열립니다. 우리 부산의 진산 금정산에서 열리는 금정산 역사문화 축제에 참가하여 조선 시대 병영도 체험을 해보세요.
















호패





2015/04/30 -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서문. 금정산성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성문 서문 여행.


2015/01/28 - (부산여행/금정구여행)금정산 미륵사. 마음이 맑은 사람만 보인다는 코끼리를 닮은 바위를 찾아 보세요. 금정산 미륵사.


2015/01/21 - (부산여행/금정구여행)금정산 국청사. 국난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승장병이 머물렀던 호국사찰 국청사.


2015/01/17 - (부산여행/금정구 여행) 근교산 금정산 산행. 올해 첫 산행 부산의 진산 금정산을 오르다.


2013/12/23 - (부산여행/금정구여행)부산대학교 후문에도 미완성의 벽화거리가 있어요.부산대학후문벽화


2012/12/27 - (부산여행/금정구여행)금정산 범어사 보제루. 일제의 잔재로 헐렸던 범어사 보제루가 다시 복원 되었다.


2014/02/15 - (부산맛집/금정구맛집)부산대학교맛집 진주비봉식당. 변호인 돼지국밥 맛집 4천원으로 고시생의 주린 배를 채워 주었던 진주비봉식당


2013/09/08 - (부산맛집/금정구맛집/침례병원 맛집)남산동 초량갈비. 추억의 돼지갈비 맛이 살아 있네 초량갈비.





 

 

 




728x90

728x90



☞(부산여행/금정구여행)부산대학교 후문에도 벽화거리가 있어요.


지난 목욜 우연찮게 부산대학교 후문쪽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부산대학교에는 부산의 국립대학으로 3곳의 출입문이 있습니다. 초창기 시계탑이 있던 정문이 현재는 구정문이라 부르며 도시철도 부산대학역에서 올라는 오는 출입구를 정문이라 부릅니다. 또 한곳은 후문으로 장전1동과 부산대학교 캠퍼스와 경계를 이루는 곳입니다. 이곳 후문쪽은 대학가에서 당연히 있는 화려한 상가로 꾸며진 그런곳이 아니라 학생들의 자취방과 원룸, 고시텔등 기거하는 곳으로 미리내마을로 불리고 있습니다. 





마을 전체가 무거운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을 내려오는데 부산대학교 축대와 담벼락에 벽화그림이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벽화의 상태나 주변의 상황으로 보면 작업을 하고 있는 그런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아직 미완성 상태라할까요. 어떤 연유로 여기 이런곳에 벽화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요즘 많은 도시의 마을에서 벽화그림으로 지역과 연계를 하여 활성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이곳 장전1동의 미리내마을도 외관으로 보면 마을이 많이 침체하여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마을의 분위기도 쇄신을 꾀하는 일환으로 벽화작업을 시작한 것은 아닌지...사실 필자도 여러곳의 벽화 마을을 댕기고 그림을 보았습니다. 여수 전주 수원 대구 이광석거리등 수없이 벽화의그림을 많이 보았지만 부산대학교 후문의 벽화 그림은 더욱 인상깊게 다가왔습니다.


 





무엇인가 이끌리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곳의 벽화를 좀더 정리하고 보충을 하여  부산대학교 정문 앞의 화려한 상가 조명등과 연계를 하면 좋은 관광지가 될 것 같습니다. 특히 부산대학교의 특수성을 살린다면 타 지역에서도 많은 여행객들이 올것으로 생각되는데 벽화가 완성이 되어 좋은 벽화거리가 될 것을 바래 봅니다. 


◆부산대학교 벽화거리 구경하기◆























































728x90

728x90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 금정산성을 만리장성에 비유, 금정산 남문

 

금정산에는 부산의 만리장성인 금정산성이 있다. 산성의 총 길이만도 장장 18km로 동래산성으로 불렸던 금정산성은 동서남북으로 사대 성문을 두고 있는데 오늘 포스팅한 남문은 고당봉에서 직선거리로 가장 먼곳에 위치를 하지만 고당봉을 가장 잘 바라 볼 수 있는 곳이다. 남쪽으로 만덕과 백양산을 연결할 수 있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다. “금정산성부설비”의 기록을 보면은 “1808년 초봄에 기둥과 들보를 100리 밖에서 옮겨오고 벼랑 끝에서 험준한 바위를 깎아내어 메고 끌어당기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 들어서 만사람이 일제히 힘을 쓰니 149일 만에 남문의 초루가 완성되었다”고 되어 있다. 금정산성 남문은 제2망루와 망미봉 사이의 움푹하게 꺼진 곳에 절묘하게 자리를 잡았다. 복쪽인 금성동 마을과 만덕마을 방향에만 완만한 경사를 이루지만 동서는 깎아놓은 듯 바위들이 옹립하여 사실 험준한 산세를 이룬다. 금정산의 그많은 바위를 마다하고 그것도 100리 밖에서 이 무거운 바위들을 밀고 당기고 하였을 것을 생각하니 옛 선조들이 만든 금정산성을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꼭 물려 주어야 할 것 같다. 남문은 평거식문으로 문의 상부에 세운 누각은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꽤 규모가 큰 누각이었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 금정산성 남문은 1808년에 완공, 금정산 남문

 

금정산의 산성중에 가장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 남문으로 만덕동과 연결된다. 서문은 금정산성중에 유일하게 계곡을 끼고 솟아 있는 성문으로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다. 그리고 멋스럽게 만들어졌다.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 숱한 외침으로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1703년(숙종23년)에 축성되었다. 그러나 금정산성은 신라시대때 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1701년(숙종27년)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로 착공이 되었다하며 1807년(순조7년)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동문을 준공하였고 그 이듬에 서문, 남문, 북문에 문루를 세웠다. 세월이 흘러가며 일제강점기때 일인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2년 부터 동, 서, 남문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에 일부 마무리가 되었다. 1989년에 북문을 복원 준공하여 4대문중 가장 마지막에 복원이 된 상태로 지금은 산성에 대한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728x90

728x90




금정산성 동문.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동래산성으로도 불렸던 금정산성 총길이는 18km,

 

금정산에는 필자가 어릴때 동래산성으로 불렸던 긴 산성이 남아 있다. 지금은 일부분이 복원이 되어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지만 서문의 좌우로는 아직도 허물어져 있고 개인사유지로 인해 황폐화가 되어 있다. 금정산성의 전체 길이는 18km로 흡사 고구마를 닮아 있는 모양세로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뽁쪽에는 금정산의 주봉인 고당봉이 솟아 있고 남쪽으로는 파리봉이 솟아 있어 서로 대치를 이룬다. 금정산성에도 동서남북으로 4대문을 두고 있다. 북문은 금정상 정상 아래의 편편한 평지에 자리를 잡았고 동문은 금정산의 입구답게 항상 많은 인파로 쌓여 금정산성을 대표하는 성문이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동래읍성에서 접근성이 가장 좋은 동문,

 

금정산의 산성중에 가장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 남문으로 만덕동과 연결된다. 서문은 금정산성중에 유일하게 계곡을 끼고 솟아 있는 성문으로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다. 그리고 멋스럽게 만들어졌다.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 숱한 외침으로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1703년(숙종23년)에 축성되었다. 그러나 금정산성은 신라시대때 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1701년(숙종27년)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로 착공이 되었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1807년 오인환이 동문 준공,

 

1807년(순조7년)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동문을 준공하였고 그 이듬에 서문, 남문, 북문에 문루를 세웠다. 세월이 흘러가며 일제강점기때 일인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2년 부터 동, 서, 남문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에 일부 마무리가 되었다. 1989년에 북문을 복원 준공하여 4대문중 가장 마지막에 복원이 된 상태로 지금은 산성에 대한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동래산성으로도 불렸던 금정산성 총길이는 18km

 

동문은 금정산의 주능선인 해발 415m 고갯마루에 세워져 있다. 이곳을 넘어서면 금성동 산성마을로 바로 넘어 갈 수 있는 주 통행길에 위치를 한다. 금정산성 4대문중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곳으로 이곳에 올라 바라보는 경관도 매우 뛰어나다. “금정산성 부설비”에 보면은 “1807년 늦가을에 공사를 시작하여 한달만에 완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만큼 민,군,관이 힘을 보태어 완공을 한 것으로 보인다.

 

 

홍예문식의 동문.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스승과 재자의 전설이 있는 동문과 서문 완공이야기.

 

금정산성의 동문은 무지개 형태를 갖춘 홍예문식으로 폭은 3m, 홍예문의 높이는 3.4m로 바위를 깎아 끼워 맞추어 돌려놓은 예술성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금정산성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문과 동문에 얽혀 있는 전설도 산성과 함께 전한다. 동래부사 오한원이 성문축조를 위해 요즘 말하면 장인의 석공을 수소문 하였다. 마침 그때 스승과 제자가 동문과 서문을 세우기 위해 나타났는데 스승은 동문을 만들고 제자는 서문을 짓기로 하였다. 제자의 석공 솜씨가 스승보다 더 뛰어나 먼저 서문을 완공을 하였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동문과 서문을 완공한 승과 제자 밀양의 영남루를 공사하다.

 

서문의 규모는 웅장하고 예술성에 모두들 놀라며 제자의 솜씨를 칭송하였다. 스승은 옹졸한 성격에 그의 제자를 질투하며 시기하여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샀는데 그 뒤 동문과 서문을 완공한 스승과 제자는 화해를 하고 둘이 힘을 합쳐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인 밀양의 영남루를 완공하였다는 훈훈한 전설이 전한다. 현재에 서문과 동문은 그 당시 모습을 복원하였다. 남아 있는 주춧돌과 성문으로 복원되었지만 동문보다는 서문이 더 웅장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동문은 시기심 많은 스승이 완공하였다. 

 

 

 

 

 

 

 

 

 

 

 

 

 

 

 

 

 

 

 

 

 

 

 

 

 

 







728x90

728x90


금정산성 북문.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국내에서 만리장성으로 통하는 금정산성.


범어사에서 정상인 고당봉을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거치게 되는 성문이 북문이다. 금정산성의 총길이가 18km로 산성의 모양이 흡사 고구마를 닮아 있는데 동서 남북으로 4대문을 두고 있다. 북문은 금정상 정상 아래의 편편한 평지에 자리를 잡고 있다. 북으로 고당봉이 솟아 있고 남으로는 금정산 주능선인 원효봉을 거쳐가는 최저점에 설치된 성문이다.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 숱한 외침으로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1703년(숙종23년)에 축성되었다. 그러나 금정산성은 신라시대때 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1701년(숙종27년)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로 착공이 되었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국내에서 만리장성으로 통하는 금정산성북문. 원효스님이 화엄경을 강설, 화엄벌로 불려


1807년(순조7년)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동문을 준공하였고 그 이듬에 서문, 남문, 북문에 문루를 세웠다. 세월이 흘러가며 일제강점기때 일인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2년 부터 동, 서, 남문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에 일부 마무리가 되었다. 1989년에 북문을 복원 준공하여 4대문중 가장 마지막에 복원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북문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세심정과 금정산 문화 탐방 지원센타 건물이 있는 일대를 북문광장이라 부른다. 미륵사를 창건한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화엄경을 펼쳐 놓고 설파를 하였다하여 화엄벌로 전해지며 임진왜란때는  범어사,국청사 해월사 미륵암등의 스님이 승병이되어 훈련을 받았던 장소이다.다. 근대에 와서는 일제 강점기때인 1919년 범어사 3월 만세 운동의 거사를 위해 기미독립선언서을 가지고 왜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 경부선 물금역에 내려 금정산 고당봉(801.5m)을 넘어 이곳 북문을 통과하여 청련암으로 향했다한다.

 

 

.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국내에서 만리장성으로 통하는 금정산성북문. 규모가 가장 작은 익공계 팔작지붕.


금정산성 북문은 4대문중 규모가 가장 작다. 그러다 보니 동문 서문 남문은 웅장하며 규모가 큰  문루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북문은 아치형의 장식도 없고 초라한 문루는 정면1칸, 측면 1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의 단층으로 금정산의 망루 규모와 비슷하다. 그러나 '금정산성부설비"의 기록을 보면 "만사람이 모두 힘을 합해 149일만에 북문의 초루가 완성되었다"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완공되었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