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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금정여행)가을철 가장 걷기 좋은 문화재 길, 금정산성 동문 북문 문화재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은 부산시민과 양산 김해 등지에서는 모르는 분이 없을 정도로 알려진 명산이며 산림청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금정산과 함께 더욱 유명한 것은 금정산성입니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금정산성보다는 동래 산성으로 더 많이 불렸습니다.





부산 금정산성 동문 주소: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산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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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동문


그 이후 차츰 금정산성으로 바뀌어 불렸습니다. 

금정산성은 금정산의 능선을 잇는 약 18㎞의 산성입니다. 

국내 산성중에서 가장 성곽의 규모가 크다고 합니다. 

성벽의 높이는 1.4m~2.6m 정도로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을 보면 그 규모를 대강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금정산성은 동해와 남해, 낙동강 하구가 내려다보이는 요충지에 자리했습니다. 

왜구의 잦은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능선을 따라 쌓은 석성으로 자연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였습니다. 

금정산성의 존재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다고 합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금정산성이 존재했다는 설과 조선 후기에 쌓았다는 설이 있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은 삼국시대 이전부터에 힘을 실어주고 싶습니다. 

그 이유를 보면 일본과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워 왜의 노략질이 동해와 남해에 심했습니다.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문무왕이 죽으면서 유언으로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동해의 수호신이 되겠다며 수중릉을 유언했습니다. 

지금도 경주 동해구에 대왕암으로 불리는 바위가 있습니다. 

또한. 금정산 범어사와 미륵암의 설화입니다.



고당봉 밑 미륵암의 설화를 보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금정산 범어사는 의상이 창건했다 하며 미륵암은 원효가 비슷한 시기에 창건했습니다. 

이때가 통일신라 문무왕 때입니다. 

원효가 미륵암에 머물면서 왜적 5만 병선이 동래 앞바다에 정박하여 첩자를 보내 정세 파악하는 것을 혜안으로 보고는 사미승에게 호리병 5개를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원효는 호리병을 나란히 세우게 하고는 큰 바위에다 장군기를 꽂았습니다. 

장군기를 보고 왜군의 첩자는 미륵암으로 올라왔고 원효는 호리병으로 신통력을 부려 두 첩자의 목을 조르니 첩자는 살려달라 애원하였습니다. 

원효는 호리병 3개를 너의 대장에게 갖다 주라 하면서 이들을 풀어주었습니다.




첩자는 진영으로 돌아가 자초지종 이야기를 하였고 왜장은 화가 나 단칼에 3개의 호리병 목을 쳤습니다. 

그러자 적장이 피를 토하며 꼬꾸라져 죽고 말았습니다. 

첩자가 보았든 장군기를 꽂았든 구멍이 미륵암 독성각 옆 바위에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범어사에도 이와 유사한 10만 병선 설화가 있는 것을 보면 당시에도 왜의 침입이 수시로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조선 세종 때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정벌을 하였으나 쓸모없는 땅이라 하여 버려둔 게 나중에 임진왜란의 화근으로 돌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ㅎㅎ



금정산성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 나갔나 봅니다. 

다시 금정산성으로 돌아와서 지금의 금정산성은 언제부터 쌓았는지 보겠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여러 번의 외침을 겪었던 조선은 국가안위를 위해서 1701년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를 받아 1703년 숙종 때에 쌓았습니다.


금정산성 4망루


이번에 찾았던 동문은 1807년 순조 때 동래부사 오한원이 동문을 준공했으며 그 이듬해에 서문과 남북 북문에 차례로 문루를 올렸습니다. 

그 이후 일제강점기에 금정산성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금정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추게 된 것은 1972년에 동·서·남문의 문루를 복원하면서부터입니다.

 


이들 문루는 3년만인 1974년에 완공되었고 북문은 1989년에 복원해 금정산성 4대 문중에서 마지막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기존의 부재와 새로 석재를 끼워 맞추다 보니 부재의 바위면 색이 서로 달라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금정산성 동문은 산성 고개 옆 450m 주능선에 세워졌으며 동래에서 금정산성 산성마을로 넘어가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장전동에 세워진 금정산성 부설비에 “1807년 늦가을에 공사하여 한 달 만에 완공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민관군의 노력으로 완공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지개 형태인 홍예문은 3m의 폭에 높이는 3.4m이며 금정산의 화강암으로 깎아 맞추어 쌓았습니다. 

웅장한 규모에 예술성까지 갖추었습니다. 

동문과 서문에 얽힌 설화가 있습니다. 

동래부사 오한원은 성문을 쌓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찾았습니다. 

이때 두 석공이 나타났고 이들은 스승과 제자 사이로 스승은 동문을 맡고 제자는 서문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제자의 서문이 스승의 동문보다 먼저 완공되었고 모두 서문의 규모가 웅장하며 예술성까지 갖추어 제자의 솜씨를 최고라며 엄지척하며 칭송하였습니다. 

스승은 제자의 솜씨를 질투하였고 시기하였으나 자신의 옹졸함을 깨닫고 동문을 완공하고는 스승과 제자가 힘을 모아 영남루를 완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동문의 예술성 또한 예사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동문에서 성문을 빠져나가 오른쪽 고당봉 방면으로 능선을 따라가면 나비암 앞에 3망루가 있으나 통과하여 용호등 인근의 4망루로 향했습니다. 

4망루는 높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바람의 영향으로 복원 후에도 여러 번 고쳐졌습니다.

 

금정산성 북문


금정산성의 4망루는 1707년 동래부사 한배하가 산성이 너무 넓어 두 구역으로 나누는 중성을 쌓으면서 함께 완공했습니다. 

앞면 2칸 옆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양식입니다. 

이곳에서 보는 조망 또한 압권입니다. 

무명암과 부채바위, 회동수원지, 수영강 하구인 센텀시티, 서쪽으로는 낙동강과 구포 김해까지 시원하게 열립니다.

 


동문·남문·서문은 모두 홍예문이라면 북문은 홍예식이 아닌 평범한 문루로 앞면 1칸, 옆면 1칸의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에 4대문중 가장 작은 규모입니다. 

크기가 금정산에 남아 있는 망루 규모와 비슷합니다.

 


금정산성 부설비에는 북문은 “만 사람이 모두 힘을 합해 149일 만에 북문의 초루가 완성되었다”도 합니다. 

그만큼 북문의 공사가 힘든 난공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성은 용트림하듯 고당봉 정상으로 길게 이어져 갑니다.

금정산성 사적 제2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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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금정구여행)금정산 국청사. 국난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승장병이 머물렀던 호국사찰 국청사.


 우리나라는 전란 때 마다 의병과 승병들이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초계와 같이 버리며 외세와 싸워 이 나라를 지켰습니다. 특히 부산은 지리적인 위치로 일본과 가까이 있다 보니 툭하면 왜적의 약탈과 침입이 잦았습니다. 왜적의 칩입을 막기 위해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에는 18km의 거대한 산성을 축성하였고 금정산성을 방어하기 위해 승군 작대의 승장병이 거주하였던 승장소가 있었습니다. 만호승장, 성관승장이 머물렀던 승장소가 금정산 국청사입니다.



 신라시대 의상대사(625~702)께서 범어사와 함께 창건한 국청사는 1703년인 숙종 29년에 금정산성을 보수 하면서 승당과 선당등 승려가 거쳐하는 곳이 많이 세워 졌는데 그 수가 족히 100칸 규모였습니다. 침입해 오는 왜적을 막고 지키며 보호한다하여 국청사라 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금정산성을 지키든 승장이 국청사에 머물면서 왜적의 침입을 막았습니다.


 

승병을 관할한 승장의 직인인 ‘금정산성승장인’이 부산시 문화재자료 제 44호로 지정되어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보물제 1733호인 청동북이 있습니다. 국청사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난극복에 앞장을 썼던 때문인지 당우는 모두 최근에 지어졌습니다.


 지장보살 본원 삼층석탑

 

일주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연지의 삼층석탑은 전란 중 숨진 의병과 승군의 혼령을 천도하기 위해 1982년 연못가운데 지장보살 본원 삼층석탑을 조성하였습니다. 또한 금정산 국청사는 뚜렷한 볼거리는 사실 없습니다. 그러나 금정산성을 얘기 할 때는 빼 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전통 사찰 제 18호이며 국청사 주소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북문로 42(금성동)


 

 

 

 

 

 

 

 

 

 

 

 

 

 금정산성승장인 모형



금정산성 동문



2008/06/04 - 부산 금정산(802m) 금정산성일주 (上)


2008/06/04 - 부산 금정산(802m) 금정산성일주 (下)


2013/10/02 -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동래산성으로도 불렸던 금정산성 총길이는 18km,


2013/10/29 -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 금정산성을 만리장성에 비유, 금정산성 남문


2013/09/25 -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금정산성 북문."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를 상기 시켜주는 금정산성


2013/01/01 - (부산여행/금정산산행)용과 호랑이의 싸움. 용쟁호투가 벌어지는 용호등의 산길에 경악, 부산의 산 금정산 원효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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