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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여행/경산가볼만한곳)경산 용성 용산산성. 삼국시대 산성인 경산 용산 용산산성 여행.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의 진산인 용산에는 삼국시대에 축성했다는 산성이 남아 있습니다. 때는 신라 시대 태종무열왕 3년인 656년에 쌓았으며 신라의 수도 서라벌로 통하는 대구~경산~청도의 길목을 지키는 국방상의 중요 요새 중 한곳입니다.





용산산성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134호

용산산성 주소: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 산 78번지


☞2016/11/26 - (경산여행)난포고택. 경북 경산시 용성면 여행에서 꼭 가봐야할 곳 난포고택. 난포고택

2016/11/23 - (경산여행)구룡산 반룡사. 원효와 설총, 요석공주의 설화가 살아 숨쉬는 경산 구룡산 반룡사 여행.



 용산은 높이가 겨우 400m대로 산 정상을 중심으로 동면과 남면은 완만한 경사로 석축을 쌓았으며 그와 반대로 북면과 서면은 경사가 급한 일부에는 속에다 돌을 넣고 바깥은 흙을 다진 석심토축(石心土築)을 한 퇴뫼식 산성 형태입니다.




용산 산성의 전체면적은 140,435㎡(42,481평)이며 장방형으로 성의 둘레는 대략 1.5km 크기입니다. 용산 산성의 특징은·동편에는 성을 내성과 외성으로 쌓았는데 이는 삼국시대 산성으로는 보기 드문 경우라 합니다. 현재 용산 산성의 성벽은 복원한 북문을 제외하면 훼손이 심해 원래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용산산성 북문



용산 산성을 조사하면서 밝혀진 결과는 다만 일부지만 안과 바깥의 양쪽 면을 돌로 쌓은 석축인 협축성(夾築城) 구간이 나타나고 또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한 쪽인 바깥에만 돌을 쌓은 석축인 편축성(片築城)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산성의 축조를 보면 이곳의 바위를 다듬어 큰돌로 지대석을 받쳤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위에다 30*25*30cm 크기의 돌을 깨어 한 쪽은 맞추고 허튼층으로 튼튼하게 쌓은 형식입니다. 성문은 동·서·남·북으로 한곳씩 두었으며 주 출입문은 북문으로 여겨집니다.


용산산성 북문의 우물터


이는 성문의 위치나 규모를 보면 폭이 429cm에다 490cm의 통로 길이인 규모에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가 150cm~250cm 정도인데 당시에는 성벽이 더높았을 것으로 보이며 이를 근거로 하여 일부 산성을 정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채성위에는 여장까지 갖추어진 성벽으로 여겨지나 현재 고대성곽의 여장형식을 추정할 수 없어 복원하지 않았다 합니다. 이와 함께 성안에는 여러 시설물이 있지 않았나 보고 있습니다. 성벽을 따라 장대와 망루가 곳곳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臺)의 흔적이 여러개 보이며 평지에는 창고의 흔적 터도 보입니다.



용산 산성의 외성에는 여러 개의 우물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무지개 샘은 지금도 샘물이 땅속에서 솟아오릅니다. 예로부터 이곳을 기우제나 기도처로 사용하였으며 그 흔적인 돌탑과 돌계단 등이 남아 있습니다.



무지개샘

용산산성의 흔적인 외성

용산산성 동문터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군주로 임명되면서 장산성의 축조를 감독했다합니다. 장산성이 오늘날의 용산산성을 뜻하며 이를 토대로 삼국시대 산성으로 추정.

 

용산산성 서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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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여행/경산가볼만한곳)난포고택. 경북 경산시 용성면 여행에서 꼭 가봐야할 곳 난포고택.


난포 고택을 처음 접하고서 생소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난포 고택은 경산하고도 용성면 곡란리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전형적인 조선 시대 상류층 양반가옥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와 건물의 고택을 둘러 산 낮은 담장을 보면서 집주인의 성품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경산 난포고택 주소: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 526-6

난포고택: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0호


☞2016/11/23 - (경산여행)구룡산 반룡사. 원효와 설총, 요석공주의 설화가 살아 숨쉬는 경산 구룡산 반룡사 여행.

2016/02/06 - (경북여행/경산여행)삼성현역사문화공원 삼성현역사문화관. 경산시 남산면 삼성현 역사문화공원의 삼성현역사문화관에서 원효, 설총, 일연을 만나다. 2편

2016/02/03 - (경북여행/경산여행)삼성현역사문화공원과 삼성현역사문화관. 삼성현 역사문화공원 문화관에서 원효, 설총, 일연을 만나다. 1편

2016/01/23 - (경북여행/경산여행)경산 삼성산 산행. 원효, 설총, 일연선사의 고장 삼성현. 경산 삼성산 최고의 수질을 자랑하는 상대온천에서 온천산행 추천.




난포는 영천최씨 최철견(1525~1594)의 호이며 원래 경북 영천의 금호에서 20대 초반인 1546년 명종 첫해에 지금의 장소로 옮겨와 지었습니다. 이게 난포 고택이라 부르게 된 연유입니다. 난포 고택의 구조를 보면 안채와 사당, 그리고 좌우 행랑채, 안채와 마주 보고는 큰 사랑채와 좌우에 고방채, 중사랑채 또한, 큰사랑과 마주하고는 대문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의 가옥구조에서 많이 축소되었습니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과 수오당 등이 남아 있으며 조금의 변화는 있지만 난포 고택의 안채만은 옛날 모습 그대로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수오재



정침인 안채를 보면 앞면이 7칸에 옆면은 1칸 반인 한일(一)자형 건물입니다. 현재 건물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 5칸은 지붕을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좌우 1칸은 지붕을 덧달아낸 형태로 마치 팔작지붕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건물 형태는 경상북도 영천, 경주, 경산등의 남부지방에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대청인데 특이하게도 문짝을 달았으며 뒷벽 쪽에다 다락을 넣어 대청을 양쪽 방과 연결하도록 했습니다.



남포 고택의 안채는 임진왜란 등 여러 전란에도 소실되지 않았으며 현재 건물의 상량문에는 1816년의 중수기록의 흔적과 지붕에 설치한 막새와편 명문을 보면 1809년인 순조 7년에 보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랑채는 앞면 4칸에 옆면 1칸의 맞배지붕 홑처마 지붕입니다.



현재 큰 사랑채와 대문채는 최근에 복원하였으며 사랑채의 개방된 누마루에서 보는 용성면의 진산인 용산을 바라보는 맛은 최고라 하겠습니다. 대문채 오른쪽에는 오래된 은행나무와 용산에서 옮겨 세운 수오재가 있고 난포 고택의 역사를 보여주는 500년 된 은행나무는 노란 물감을 드린 듯 난포 고택의 역사를 말해주었습니다.

 



난포 최철견은 낙향하여 용성의 곡란에서 지냈습니다. 그때 왜적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자 70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손자 인수와 증손자 준립 등과 함께 창의하여 영천의 권응수와 합세하여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특히 영천의 아화산성 전투에서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합니다




난포 고택은 명당으로도 전국에서 손을 꼽는다 합니다. 이는 1929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민속연구가 무라야마 지준이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면서 우리나라 고택 중에서 36곳을 대표 풍수적 길지로 선정하고 ‘조선의 풍수’란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중에는 난포 고택도 포함했는데 그는 난포 고택을 부용화 지형이라 설명했습니다.

 

난포고택 사랑채


고택 앞의 용산이 부용화라면 난포 고택을 향해 힘차게 내리뻗은 한줄기 굵은 능선은 부용화의 꽃대로 그 끝자락에 모인 혈에 난포 고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인지 17대 400여 년 동안 사람의 향기가 끊이지 않았던 게 명당터로서 살기 좋은 길지 중 한 곳인가 봅니다.



경산 용성면 난포고택 사진으로 즐기기














고향 생각이 절로 나는 손자와 할머니 조각상












난포고택 안채

정침인 안채를 보면 앞면이 7칸에 옆면은 1칸 반인 한일(一)자형 건물입니다. 현재 건물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 5칸은 지붕은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좌우 1칸은 지붕을 덧달아낸 형태로 지붕은 마치 팔작지붕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대청인데 특이하게도 문짝을 달았으며 뒷벽 쪽에다 다락을 넣어 양쪽의 방과 연결되도록 했습니다. 남포 고택의 안채는 임진왜란 등 여러 전란에도 소실되지 않았으며 현재 건물의 상량문에는 중수기록의 흔적과 지붕의 막새와편 명문을 보면 1809년인 순조 7년에 보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랑채는 앞면 4칸에 옆면 1칸의 맞배지붕 홑처마 지붕입니다.


 









난포고택 안채 뒷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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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여행/경산가볼만한곳)구룡산 반룡사. 원효와 설총, 요석공주의 설화가 살아 숨쉬는 경산 구룡산 반룡사 여행.


경상북도 경산의 반룡사를 여행하고 왔습니다. 반룡사는 구룡산과 발백산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 심산유곡에 둘러싸여 하늘만 빼꼼하 게 열려 선계가 따로 없는 곳에 자리했습니다. 반룡사로 이름한 사찰은 우리나라에 3곳 있으며 경북 고령 미숭산의 반룡사보다 더욱 유서 깊은 명찰입니다.





경산 반룡사 주소: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용전리 118-2

경산 반룡사 전화:053-852-1919


2016/02/06 - (경북여행/경산여행)삼성현역사문화공원 삼성현역사문화관. 경산시 남산면 삼성현 역사문화공원의 삼성현역사문화관에서 원효, 설총, 일연을 만나다. 2편

2016/02/03 - (경북여행/경산여행)삼성현역사문화공원과 삼성현역사문화관. 삼성현 역사문화공원 문화관에서 원효, 설총, 일연을 만나다. 1편

2016/01/23 - (경북여행/경산여행)경산 삼성산 산행. 원효, 설총, 일연선사의 고장 삼성현. 경산 삼성산 최고의 수질을 자랑하는 상대온천에서 온천산행 추천.

2016/11/10 - (경주여행)경주 분황사 여행. 가보지 않아도 가본것 같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석정, 화쟁국사비부, 보광전의 약사여래입상을 만나다.

2016/11/09 - (경주여행)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최초의 석탑이자 유일한 경주 분황사 9층석탑을 여행하다. 분황사모전석탑




이곳 경산의 반룡사는 신라 문무왕(재위 661~680) 때에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원효대사(617~686)께서 창건한 사찰입니다. 원효는 압량인 이곳 경산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조씨는 '유성이 품속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효를 잉태해 밤나무가 많은 율곡을 지나다 갑자기 산통을 느껴 큰 밤나무 밑에서 원효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15세에 어머니를 갑자기 여의자 충격을 받아 출가 하게 됩니다. 661년 문무왕 1년에 의상과 당나라 유학길에서 무덤 속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모든 일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초의 진리를 깨달아 그길로 유학길을 포기하고 혼자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원효는 선덕여왕이 창건한 경주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많은 책을 저술하였고 백성을 찾아다니는 불교 포교에 힘써 대승불교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원효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느냐,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하며 노래를 하고 다녔지만, 태종무열왕(재위 654~661)만 원효의 뜻을 알고 그를 궁으로 오게 했습니다.

 


원효는 소식을 듣고 태종무열왕을 만나기 위해 궁으로 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입고 있던 옷이 다 젖자 무열왕은 원효를 바로 요석궁에 보내어 젖은 옷을 말리게 했습니다. 이때 요석궁에는 과부가 된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궁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날 원효는 요석공주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고 열 달 뒤 요석공주는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분이 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문장가인 설총입니다. 원효는 그길로 파계하여 소성거사라 자신을 부르며 노래로서 민중 속을 파고들어 불법을 전파합니다.



요석공주는 설총을 원효의 고향인 이곳 경산에서 낳았으며 설총을 데리고 원효가 창건했다는 구룡산 반룡사에 머물렀습니다. 김춘추는 공주와 외손자가 보고 싶으면 수시로 왕후와 함께 구룡산의 고개를 넘어 반룡사를 찾았는데 태종무열왕이 넘었던 고개라 하여 지금까지도 왕재라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어린 설총은 반룡사에서 성장하였으며 후에는 이두법을 집대성합니다.

 


원효가 창건했으며 설총과 요석공주가 머물렀던 반룡사는 태종무열왕의 후원을 등에 업고 대 사찰이 된 것은 자명한데 현재 반룡사는 오래된 문화재는 찾을 수 없고 가루가 될 정도로 처참하게 파괴된 석물의 부재들만 천년 가람 반룡사의 영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는 화엄 천태종의 고승 원응국사가 이곳에 주석하였으며 고려 11대 문종 때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재 반룡사의 당우를 보면 모두 최근에 불사 되었으며 왜 오래된 건물은 하나도 남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요???





반룡사는 고려말에 쳐들어 왔던 몽골과 1592년 조선의 임진왜란으로 한순간에 모두 불타버리자 1641년인 인조 19년에 계운과 명언 두 대사에 의해 다시 한 번 도약을 하며 산내 암자로 내원암, 벽운암, 대적암, 은선암, 안적암 등 다섯 암자가 중창 또는 창건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반룡사와 암자의 그 많은 당우는 모두 소실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 몇 동의 당우로 겨우 명맥만 이어오다 지금으로부터 약 80년 전에 또다시 일어난 화재로 반룡사는 전부 불탔습니다. 현재 반룡사의 당우는 문화관광부와 경상북도, 경산시의 지원과 신도의 불심으로 하나하나 복원 중에 있습니다.

 




반룡사는 화재로 소실될 때 급한 나머지 대웅전의 삼존불중 목조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을 청도의 모 사찰에 옮기게 되었는데 되돌려 받지 못하였고 범종은 포항 보경사의 서운암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1991년에는 반룡사에 남아 있던 아미타불마저 도난당하는 수난을 당하며 아직 찾지못하고 있습니다.





반룡사 앞에는 창건 당시 흔적인 많은 부재가 널브러져 진열되어 있습니다. 부재 하나하나가 당시 반룡사의 규모와 역사를 말해주는 게 지금보면 모두 예사 모습이 아닙니다. 그만큼 반룡사는 신라 왕실의 기원사찰로서 대사찰의 규모였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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