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신문왕릉.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라 31대 신문왕릉을 여행하다. 


신문왕은 신라 31대 왕으로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한 부왕 문무왕의 장자로 성은 김 씨, 이름은 정명 자는 일초입니다. 664년 문무왕 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681년에 왕위에 올라 10년 남짓 통일신라를 이끌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의왕후이며 왕비는 소판 김흠돌의 딸인 김 씨였지만 아버지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켜 출궁 당하자 다시 일길찬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았습니다.





경주 신문왕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453-1

신문왕릉 문의 전화:054-779-6396



2014/05/21 - (경주여행/감은사지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여행) 호국용 문무대왕의 혼이 깃든 경주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 이른 봄여행

2016/04/29 - (경북여행/경주여행)능지탑지. 문무대왕 화장터로 알려진 경주 능지탑지 여행. 능지탑지

2014/05/27 - (경북여행/경주여행)동해의 신비 경주주상절리 파도소리길 걷기, 읍천항벽화마을,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감은사지 해파랑길 걷기




신문왕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많은 일을 한 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감은사와 만파식적등 신문왕과 문무왕에 얽힌 흥미로운 전설로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신문왕이 즉위하던 그해에 장인인 김흠돌이 모반을 꾀했습니다. 모반의 사유가 궁색하지만 왕비인 딸이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일과 진복의 상대등 임명 건에 반기를 들었던 곳으로 유추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난을 평정하고 그에 연루된 모든 사람을 처형시켰는데 심지어 반란모의를 사전에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이찬 군관과 그의 아들까지 죽게 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기화로 신문왕은 귀족세력의 권력을 제어함과 동시에 전제왕권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신문왕 하면 퍼뜩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이견대에서 해룡으로부터 받았다는 피리 만파식적과 선왕인 문무왕이 왜군을 진압하기 위해 세웠던 감은사입니다. 지금은 절터의 흔적인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만 국보로 지정되어 그 터가 일부 남아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감은사는 문무왕이 착공을 했지만, 완공을 못 보고 신문왕이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682년인 신문왕 2년에 완공했습니다.





처음에는 나라를 지킨다는 뜻인 진국사였습니다. 그러다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호국 충정에 감읍하여 감은사로 고쳐 불렀습니다. 문무왕은 죽으면서 용이되어 신라를 왜적으로부터 시키겠다며 동해에다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습니다. 신문왕은 그 유지를 받들어 경주 낭산의 능지탑에서 문무왕을 화장하여 그 뼈를 감포 동해구의 물속 바위에 안장했는데 후세에 와 이 바위를 대왕암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감은사 금당은 일반사찰의 금당과는 다른 모습인데 꼭 돌다리 형태입니다. 이는 신문왕이 바다의 용으로 변한 부왕을 이곳에서 쉴 수 있게 금당 아래에다 바다로 연결된 통로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는 만파식적입니다. 만파식적은 만능 피리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피리를 불면 파도가 일렁이면서 강한 태풍으로 변해 왜군의 배를 모두 물속에 가라앉게 했다는 전설의 피리입니다.





신문왕은 부왕을 위해 감은사를 완공하자 다음 해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 앞바다에 떠 있다는 전갈에 “이는 호국용으로 변한 문무왕과 천신으로 변한 김유신이 보배를 주려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신문왕은 이견대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는 대나무 한줄기가 있었으며 낮에는 대나무가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대나무가 하나가 되자 왕은 산에 들어갔습니다.





어디선가 용이 나타나 그에게 검은 옥대를 주면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상스러운 피리라며 대나무가 하나가 되었을 때 베어 피리를 만들라 하였습니다. 신문왕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천존사에 보관하였으며 만파식적이라 하고 국보로 삼았습니다. 이번 신문왕 포스팅은 신문왕이 이룬 업적도 중요하지만, 만파식적과 감은사의 전설이 더욱 흥미로워 옮겨보았습니다.

 




신문왕은 옛 백제와 고구려 백성들을 융합하여 하나의 통일신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통일신라의 기틀을 다지는 등 국학 설립으로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녹읍 폐지와 관료전 지급 및 지방 통치를 위한 9주 5소경 제도를 완성하고 여러 국가제도를 정비하여 전제 왕권의 기틀도 마련했던 국왕입니다.







신문왕의 장지는 현재 경주 남산 아래에 있습니다.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이며 봉분 아래에는 둘레석을 돌렸는데 자연석을 블록 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았습니다. 이는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호석이라합니다. 호석 맨 위에는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습니다. 또한, 호석 주위로 44개의 삼각형 받침돌로 호석을 받치게 했습니다. 남쪽으로 향하는 받침돌 한곳에는 출입구를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문(門)자가 새겨져 있다는데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신문왕릉은 둥근 모양으로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입니다. 능의 밑 둘레는 약 92m에 높이는 8m고 봉분 앞에는 크고 긴 사각의 돌기둥을 여러 개 눕혀 쌓아 상석을 만들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문왕릉은 낭산 동쪽에다 장사 지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현재의 왕릉으로 비정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100% 맞는다고는 할 수 없는 일부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황복사지 인근에 있는 보문들에 십이지상 등이 남아 있는 능을 신문왕릉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왕릉은 논 가운데 폐허가 되어 있으며 지금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현재 공식적인 신문왕릉은 배반동에 있으며 이번에 포스팅한 곳입니다. 참고하세요. 경주에 엄습한 강력한 지진으로 신문왕릉의 출입문인 솟을 대문의 벽체가 떨어져 나간곳이 여러곳 있었습니다. 어서 빨리 보수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경주 신문왕릉 사적 제181호

728x90

728x90



 



☞(경북여행/경주여행)동해의 신비 경주주상절리 파도소리길 걷기, 읍천항벽화마을,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감은사지 여행


경주시내에서 벗어나 동해안쪽으로 조금만 벗어나면 경주 양남면의 경주주상절리를 만난다. 주상 절리는 2천만년전인 신생대 말기에 현무질의 용암이 분출하면서 공기와 만나 빠르게 식어 굳어지고 또는 흐르고 하여 다양한 모양과 형태로 생겨난 것을 말한다. 경주의 주상절리는 일반적인 수직주상절리와 함께 솟아오른 주상절리, 경사지거나 누워 있는 주상절리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어 국내외적으로 희귀하다. 특히 부채꼴 주상절리와 같은 독특한 모양은 동해의 푸른 바다에서 밀물과 썰물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여 바닷가에 피는 해국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었다하여 ‘동해의 꽃’으로 부른다.


 

 



이곳 읍천리의 주상절리 조망공원에서 바라보는 부채골 주상절리를 보고나면 읍천항을 끼고 조성된 벽화마을을 만난다. 한수원(주)월성원자력본부에서 아름다운 지역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그림이 있는 어촌마을 읍천항 갤러리와 원자력홍보관, 그리고 후반부 경주 동해안 둘레길 막바지에 만나는 감은사지와 이견대, 문무대왕 수중릉에서 신라시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대왕이 죽어 호국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이곳에서는 옷깃을 여미게 한다.


 

 




 




 




 




 




 




 




 




 




 




경주 양남면과 양북면을 잇는 동해안 둘레길은 주상절리가 있는 파도소리길과 해파랑 길을 걷는 구간이다. 둘레길 경로를 보면 하서항 파도소리길 입구~주상절리길~기울어진 주상절리~누워있는 주상절리~위로 솟은 주상절리~부채꼴 주상절리(주상절리 조망공원)~읍천항 ~읍천항 벽화마을~나아해변~월성원자력본부 홍보관~나산교차로~상라마을 정자쉼터~상라마을회관~범방재~솔밭골~구명사~구길마을회관~구길버스정류장~감은사지~해파랑길~이견대~대본삼거리~봉길리 문무대왕수증릉을 도는 둘레길로 GPS상 전체 거리는 17.5㎞. 휴식등 전체 소요시간은 약 6시간 이면 충분하다.



 




 




 




 




 




 




 




 




먼저 파도소리길에 있는 경주 주상절리를 보기위해서 하서항이 있는 하서4리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마을을 찾는 관광객을 위해 마련된 대형 주차장과 주상절리 파도소리길 안내판이 있다.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은 하서항에서 시작하여 읍천항까지 1.5㎞ 구간을 말하며 동해안을 걷는 해파랑길 11구간의 일부분이다.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에는 현재 다양한 모양의 주상절리를 걸어가면서 볼 수 있도록 전망대와 안내판 그리고 데크 등이 조성된 주상절리 조망공원으로 아름다운 해안길이다.



 




 




 




 




 




 




 




 




 




바다를 끼고 걷노라면 만나는 주상절리 마다 감탄을 하게 된다. 특히 주상절리의 핵심인 부채꼴 주상절리를 보면은 자연의 신비함에 저절로 입을 다물지 못 한다. 어떻게 이런 모습의 주상절리가 만들어 질 수 있을까하며 그저 자연의 경이로움에 놀랄 뿐이다. 덱으로 만든 전망대에 올라 좀 더 높은 위치에서 동해의 꽃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게 하였고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이 이곳에 촬영이 되었는지 안내판이 있다. 자연히 이곳에서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부채꼴 주상절리를 지나면 더 이상의 주상절리는 나타나지 않으며 출렁다리를 건너면 읍천항이 바라보이는 방파제다. 지금부터는 주상절리길이 끝나고 어촌마을에 조성된 벽화마을이 시작된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라 여겨질 정도의 다양한 벽화로 가득찬 열린 미술관 '읍천항 갤러리'를 보고 걷노라면 자연스럽게 작품의 세계에 빠져 들며 유명작가의 작품부터 새내기 대학생의 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다. 바다의 풍경과 해녀와 잠수부, 어촌인 읍천항의 생활상을 그대로 그림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있는 어촌마을’ 읍천항 벽화마을을 보면서 월성원자력이 보이는 나아 해변으로 걸어간다.


   

 




 




 





 



 










 

 



 




 




 




 

 





 




 



긴 해수욕장이 연결되는 나아해변에는 해파랑길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고 건너편에 월성원자력발전소가 가까이 보인다. 왼쪽에 방풍림 역할을 한 울울창창한 해송이 공원으로 조성 되어 있고 이 길을 따라 진행하면 월성원자력본부 출입문 앞에 닿는다. 직진하는 길은 옛 31번 국도로 감포, 포항 방면으로 이어지던 길이지만 새로운 도로가 뚫여 일반인의 출입은 통행이 제한된다. 왼쪽으로 유턴하여 90도 꺾으면 원전홍보관이 있는 갈림길이다. 홍보관에서 오른쪽 도로로 꺾어 100m쯤 가면 나아교차로다. 새로 뚫린 31번 국도가 왼쪽으로 흘러가고 '자연보호 표지석' 앞에서 왼쪽의 도로로 직진한다. 10여분 이면 31번 국도의 나산교차로인 사거리와 만난다. 횡단보도를 건너 직진하여 나산천을 끼고 상라리 방향으로 간다.




 




 




 




 




 




 




 




 




 




 



30여분 도로를 가면 상라교를 건너고 상라마을 정자나무 쉼터를 지나 3분 후 오른쪽으로 꺾어 상라마을로 들어선다. 마을회관을 지나면 바로 T자 갈림길, 여기서 오른쪽 콘크리트 포장길을 30m쯤 가면 마을길을 만나는 사거리다. 작은 수로를 넘어 직진하면 좁은 흙길의 농로를 따라 정면에 보이는 향나무 숲 방향으로 간다. 무덤을 두른 향나무 숲을 가로질러 다시 산자락에 보이는 무덤 방향으로 길을 올라간다. 만나는 무덤 오른쪽에 산길이 열려 있다. 임도 급의 넓은 길을 따라가면 큰 무덤 앞에서 길은 끝나고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타면 고개를 오르던 옛길로 여러기의 무덤이 있다. 마을에서는 이 고개를 범방재로 부르며 마치 분지를 이루듯 편평한 지형이다.





 




 




 




 



 




 









 



마을 분들의 구전에 의하면 일명 ‘범방우’하 하는데 이곳에 장군이 태어날 지형이라 하여 그것을 막기 위해 산을 깎아내어 평지로 만들어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풍수를 보는 지관과 함께 다니며 우리나라 명당의 혈은 모조리 끊었다하는데 혹시 그가 이따위 짓을 하였는 것이 아닐까 짐작을 해본다. 현재는 사람의 왕래도 없어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주의를 해야하는 구간이다. 왼쪽으로 능선을 타다가 보이는 정면의 봉우리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능선에 산길이 있다. 만나는 쌍무덤에서 오른쪽 능선을 향해 비스듬히 타면 능선에 닿고 오른쪽으로 산길을 따라 서서히 내려간다.





 




 





 




 



정면에 송전철탑이 있고 이곳에서 직진하는 길을 버리고 왼쪽 내리막길을 타야한다. 다시 송전철탑을 만나고 상당히 가파른 내리막이 시작된다. 앞으로 넘어질 정도로 급하지만 길은 뚜렷하다. 10분이면 계곡을 건너 둑을 따라 왼쪽의 묵정밭을 통과한 후 다시 비스듬히 산으로 오른다. 작은 고개를 넘으면 대나무 숲인 삼거리다. 직진하며 이곳 부터는 임도길이 시작된다. 5분이면 솔밭골 마을에 내려선다.




 




 




 




 




 




 




 



솔밭골엔 육신당 현판이 걸린 옛 서원이 있다. 관리가 되지 않아 허물어 지기 일보직전이지만 그 모습만은 선비의 모습이 살아 있는 듯 품위가 있다. 육신(六愼)은 말, 행동, 거처, 재물, 술, 여자인 여섯 가지를 삼간다는 뜻으로 문화 유씨 류태호가 그의 선친 류치능의 유훈을 받들기 위해 조선 고종 15년(1878)에 세운 서당으로 1998년 4월에 서원에서 보관중이던 235점의 서책과 문헌, 현판 등이 모두 도난당했다.


  


 




 




 




 


미니마을인 솔밭골은 동서남북이 모두 낮은 산으로 둘러져 그야말로 세상과 담을 쌓은 듯한 그런 마을같다. 부지런히 마을길을 걸어 20분이면 큰 마을인 구길리의 마을회관 앞을 지나고 다시 10분 이면 구길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대종천을 건너 구길버스정류장이 있는 929번 지방도와 만나고 감은사지는 우측으로 꺾는다. 도로에는 차량행렬리 빈번하고 인도가 따로 없어 주위를 해야 한다. 10여분 후 감은사지 도로 표지판이 나오고 왼쪽으로 꺾으면 국보 제112호인 감은사지 쌍탑이 있는 사적 제31호 감은사지에 닿는다. 동탑과 서탑으로 감은사탑은 제작연도를 알 수 있는 탑 중 가장 큰 규모라 한다. 쌍탑 뒤에 남아 있는 금당 터는 호국용으로 변한 문무대왕이 이곳 금당에서 몸을 쉬게하였다는 전설을 보여주는 듯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다시 이견대로 향하기 위해서는 해파랑길을 따라간다.


 


 




 




 




 




 



감은사지 관광안내선터가 있는 주차장에서 안내판 오른쪽 길이다. 마지막 민가 직전에 이견대 이정표가 있고 오른쪽 산길을 탄다. 급한 오르막을 5분쯤 타면 능선 갈림길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꺾어 능선길을 따른다. 잠시뒤 무덤에서 전망이 열리며 마지막 종착점인 문무대왕 수중릉이 한점으로 보인다. 도로에 내려 왼쪽 100m에 사적 제159호인 이견대가 동해바다의 대왕암을 바라보고 있다. 신라 31대 신문왕이 전설속의 피리인 만파식적을 부왕인 문무대왕에게 받았다는 이견대에서 왔던 길을 400m쯤 되돌아가면 대본삼거리, 왼쪽 대종천에 걸린 대종교를 건너 5분이면 봉길리 해수욕장에 닿고 사적 제158호 문무대왕 수중릉이 바라보인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바다건너 왜구로 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 이곳 바다 속의 암초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후세에는 이를 대왕바위, 대왕암, 문무대왕수중릉이라 부른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경부고속도로 언양JC에서 울산고속도로로 옮겨 타 울산톨게이트를 통과한다. 신복로터리에서 울산항 유니스트 방향으로 7번 국토를 타고 직진, 울산북구청 앞 교차로까지 간다. 이곳에서 강동 정자해변 방향으로 직진(31번 국도), 무룡터널을 통과한 후 12㎞가량 진행해 양남교차로에서 우측 해변으로 꺾으면 주상절리 입구 주차장에 닿는다. 둘레길 갑사 후 문무대왕릉에서 차량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매시 15분마다 있는 울산행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if !supportEmptyParas]--> 대중 교통을 이용할 경우 경주시외버스주차장 맞은편에서 150번 시내버스를 탄다. 첫차 오전 6시30분부터 7시10분, 8시, 9시10분, 9시50분 등 40~60분 간격 운행. 답사를 마친 후에도 문무대왕릉 앞에서 이 버스를 타고 경주시외버스터미널로 가면 된다. 막차는 양남면 소재지에서 오후 8시50분 출발한다.




 




 







2014/05/21 - (경주여행/감은사지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여행) 호국용 문무대왕의 혼이 깃든 경주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 이른 봄여행


2014/05/24 - (경북여행/경주여행)그림이 있는 어촌마을 읍천항 갤러리. 읍천벽화마을 나드리 너무 좋아요.


2014/05/25 - (경북여행/경주여행)동해의 꽃으로 부르는 경주 양남 부채꼴 주상절리.독특한 경주주상절리를 보면서 누구나 감탄하게 됩니다.주상절리

 


 






728x90

728x90



 

 

 ☞(경주여행/감은사지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여행) 호국용 문무대왕의 혼이 깃든 경주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 여행.


경주는 노천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많은 신라시대의 불교유적이 있습니다. 경주 남산을 위시한 경주 시내에 수 없이 많은 문화재를 보면서 신라인의 예술성과 믿을 수 밖에 없는 전설 등을 듣고 있노라면 그 속으로 자연히 빨려 들어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만큼 흥미 진지한 이야기가 있는 신라의 서라벌  속으로 달려가 봅니다.



 

 

 

이번 경주 여행은 양북면과 감포읍에 있는 문무대왕 전설의 감은사와 이견대, 문무대왕릉의 대왕암을 찾아 갔습니다. 고향이 경주라 자주는 가 보질 못하지만 그래도 여러 번 가보았던 곳이며 학창 시절 때 한번쯤 들었던 호국용 이야기와 만파식적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먼저 토함산의 추령고개(지금은 추령터널을 지나면 금방임)를 넘어 쏜살같이 내려가면 일렁이는 동해 바다가 펼쳐집니다. 바다에 닿기 전 왼쪽으로 웅장한 쌍탑이 있는곳이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의 감은사지입니다.



 

 

 

감은사지는 문무대왕이 죽어 호국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는 곳입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굴복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은 언제나 바다 건너 왜구가 걱정이었습니다. 왜구와 가까운 위치에 있던 남해안과 동해안의 경주와 울산에는 왜구의 잦은 출몰로 백성들의 핍박이 심해 부처님의 원력으로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문무왕은 감은사를 짓습니다.


 

 

 

 

문무대왕은 절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인 31대 신문왕이 부왕의 유업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며 ‘아버지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인 ‘감은사’로 이름 하였습니다. 현재 감은사지는 동탑과 서탑이 세워져 있으며 옛 절터의 흔적인 금당 터가 남아 있습니다.


 

 

 

 

금당터 아래는 움푹 파여진 모습이며 이곳으로 동해의 용으로 화한 문무대왕이 대종천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서 몸을 쉬게 하였다는 곳입니다. 1959년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는데 금당의 바닥구조는 마치 바위를 깎아 마루를 깔듯이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어 문무왕의 전설이 더욱 신빙성을 갖게 합니다.



 

 

 

금당 앞의 쌍탑을 보겠습니다. 국보 제 112호 지정된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은 682년 신문왕 2년에 창건된 감은사의 부속 석탑입니다.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탑으로 높이는 13.4m에 이중 기단 위에 몸체돌을 세우고 처마 밑은 직각으로 꺾어 5단의 계단식 받침이 층단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지붕돌 위는 곡면을 이루어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은사지 동서 3층 석탑의 특징은 하나의 큰돌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닌 수십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점이며.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서탑을 해체복원하였고 1996년에는 동탑을 해체하여 복원하였습니다. 그 때 동서 탑에서 금동제 사리함과 사리가 들어 있는 수정 사리병이 발견되었습니다.



 

 

 

 

 

 

 

 

 

 

 

 

 

 

 

 

 

 

 

 

 

 

 

 

 

 

 

 

 

 

 

 

 

 

 

 

 

 

 

 

 

 

 

 

 

 

 

 

 

 

 

 

 

 

 

 

 

 

 

 

 

 

 

 

 

 

 

 

 

 

 

 

감포읍 대본리에는 이견대가 있습니다. 신라 문무왕이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다며 수중릉을 만들었던 대왕암을 볼 수 있는 정자입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신문왕은 호국용이 된 부왕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완공하였고 이견대는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큰 이익을 얻었다는 곳으로 신문왕은 이견대에서 문무왕과 김유신이 보냈다는 대나무로 만든 피리인 만파식적를 받았던 곳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이견대는 중국의 주역인 ‘비룡재천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에서 글귀를 빌려 “큰 용이 바다에 있는 것을 보았다”다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문왕이 문무왕을 생각하며 세웠던 이견대는 없어졌지만 현재의 이견대에 세워진 정자는 1970년에 발굴하여 건물지를 확인하고 1979년에 신라의 건축 양식을 추정하여 세웠던 정자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는 해안과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암초가 있습니다. 옛날부터 대왕암, 문무대왕 수중릉이라 불렀습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을 모신 곳으로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군주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왕암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현재도 알 수 있듯이 동서남북으로 네 군대 인공수로가 있습니다. 물은 동쪽으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하여 항상 수면이 잔잔하게 유지가 됩니다. 그 속에 길이 3.7m, 폭 2.06m의 거북모양의 돌로 만든 덮 게가 놓여 있고 그 안에 문무대왕의 유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알기 위해 이곳 대왕암 발굴 계획을 세웠다가 곧 철수를 하였다 합니다. 조사를 하면 대왕암이 문무대왕릉의 전설이 맞다, 아니다는 금방 알 수 있겠지만 모든 진실을 꼭 밝혀내는 것보다도 국민의 가슴속에 각인되어 있는 위대한 문무대왕의 큰 뜻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참고:신라사람들 ‘동해지역 문화유적 답사 자료집’ http://www.isilla.co.kr)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