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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중구여행)이맘때면 한국인의 감수성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곳 부산 중앙동40계단 문화관광 테마거리. 40계단


1950년 6.25 한국동란이 일어 났습니다. 서울 방어선이 무너지고 밀리고 밀려 

급기야 낙동강 방어선에 부산만은 지켜야 한다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부산 중구 추억의 40계단 주소:부산 중구 동광동 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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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군을 따라 피난대열에 선 국민들은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물려 들었습니다. 

이제 더이상 물러설곳이 없었습니다. 

악전고투 속에 다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는 총공세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끝끝내 부산만은 지켜내었고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발판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중공군이 개입하여 퇴각하는 1.4후퇴가 벌어졌습니다. 

 


이때 저의 아버님도 큰 부상으로 후송되어 끝내 의가사 제대를 하셨습니다. 

전세는 완전 불리해졌고 어쩔수 없이 유엔군과 우리군은 흥남항에서 피난민을 태우고 철수했습니다. 



 빅토리아호는 선적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태웠고 

10만여명의 피난민이 내려올수 있었습니다.  

부산은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 들었고 이들은 피난올 때 헤어진 가족과 친지를 찾을수 있을까 하며 

영도다리와 40계단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습니다.  



부산 영도다리와 40계단은 1980년대 있었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이산가족 찾기의 원조격입니다. 

많은 피난민이 이곳에서 가족을 찾았고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였습니다. 




이때 심금을 울렸도 노래 박재홍의 "경상도 아가씨"와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입니다. 

그중에 40계단이니까 "경상도 아가씨"의 노랫말을 일부 보겠습니다. 



 "사십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말고 속시원히 말좀하세요. 

피난살이 처량스레 동정하는 판자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러워 묻는 구나~~~"로 시작합니다.  



1951년 당시의 피난민의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노래로 

어려운 피난상황속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경상도 아가씨 노랫말에 나오는 40계단은 영주동의 산복도로에서 

옛 부산역과 국제여객부두를 왕래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습니다. 




피난민 대부분은 부두의 노동자로 나갔습니다. 

해뜨기 전에 40계단을 내려갔다가 해가지고 나서야 

컴컴한 40계단을 올라와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피난민들은 하루하루 수없이 40계단을 오르냈고 

어진 가족을 찾는 상봉장소였으며 

10만 피난민의 마음속의 안식처였습니다. 



노래말 속의 40계단은 지금도 40계단의 이름을 달고 남아 있습니다.  

당시 피난민의 애환속에 오르내렸던 40계단에서 영도다리가 뻔히 보였다고 합니다.  




피난민들은 40계단에서 영도다리를 보면서 헤어진 친지와 친구를 생각하였고 

고향을 떠난 서러움을 달래었습니다. 

그런 40계단에 한가지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ㅎㅎ



현재 40계단 기념비가 세워진 계단은 당시 피난민이 눈물을 흘리며 오르내렸던, 

헤어진 친척을 상봉했던 당시의 40계단에서 남쪽으로 25m 쯤 떨어진 또 다른 계단입니다. 



당시의 40계단은 폭이 4m 가량이 될 정도로 넓은 계단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폭이 좁고 옛 모습을 잃어버려 1993년 8월에 이곳에다 40계단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현재 40계단 주위를 40계단 문화관광테마거리로 지정해 

당시를 회상하는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습니다. 

1950~1960년대 어려웠던 시절의 애환과 향수가 짙게 배어 있는 

40계단 주위에 당시를 회상하는 여러 조형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 "아버지의 휴식" "아코디언을 켜는 사람" 등 

조형물 하나하나는 당시의 피난민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0계단 가운데 세워진 "아코디언을 캬는 사람" 조형물 뒤에서는 

항상 박재홍의 "경상도 아가씨" 노래가 흘러 나옵니다. 

노래가사에 당시의 모습을 되새겨 보면 자꾸만 눈물이 흐릅니다.



40계단에 올라섰습니다. 

40계단 문화관광테마거리 전체를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전봇대만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듯 나무 전봇대 모습입니다.

위에 까치집도 지어져 있고요  ㅋㅋ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당시의 그 흔적이 이제 요런 안내문구로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이산가족을 찾는지 아니면 애인을 찾는지 ㅋㅋ누군가를 찾고 있습니다.



동광동 골목을 길의 모습입니다. 

당시 꼬불꼬불 이어지던 골목길은 이제 인문학길로 다시 태어나 골목길 여행으로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필자도 부산 서구 중구 동구의 산복도로 골목길을 많이 누비고 다니고 있습니다.



물동이를 인 어머님입니다. 

아이를 포대기로 고 물동이를 이고서 40계단을 오르내리던 어머님의 모습이 

당시 40계단에 사진에 담겨져 있었고 그 당시의 모습을 조형물로 빚었습니다. 




이름하여 '40계단 여인상'입니다. 

동광동 주민센터인 40계단 기념관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동광동 40계단 주위로는 동광동 인쇄골목이라 불립니다. 

1960~80년대까지 부산 인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부산인쇄골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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