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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봉화여행)해저 만회고택. 봉화 독립운동의 산실 해저 만회고택 여행


봉화여행을 하면서 1박을 청했던 곳이 아름다운 지명인 바래미마을의 소강고택입니다. ‘바래미’는 바다였다는 뜻이며 아주 오래전에 이 일대가 바다였는지 알 수 없지만 최근까지도 마을 안의 논과 웅덩이에서 조개들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마을이 포근하고 아늑한 게 정말로 아름다웠습니다.





봉화 해저 만회고택 주소: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485

중요민속자료 제169호





한옥스테이를 했던 소강고택 포스팅은 다음에 하고 우선 바래미마을 인근에 있는 해저만회고택을 포스팅하겠습니다. 소강고택에서 새벽 일찍 일어나 계속 누워 있기도 뭐하고 해서 카메라를 들고 마을 구경삼아 동네 한 바퀴 했습니다. 소강고택 이외에도 많은 고택이 즐비했는데 그중에서도 소강고택의 건너편 마을에 있는 해저 만회고택을 이정표만 보고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해가 떠오르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찾아가기가 부담스러웠지만, 외관만이라도 만나볼 욕심에 찾았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지 대문이 없는 개방식 비슷한 고택이었습니다. 주위 고택은 솟을 대문에 높은 담장이 둘러싸여 바깥에서는 전혀 내부를 볼 수 없었는데 만회고택은 대문이 없어서 바깥에서도 훤하게 사랑채가 잘 보였습니다.

 


특히 새벽바람을 가르며 시골 마을을 걸을 때는 개 짖는 소리에 동네가 떠나갈 듯 시끄러워 마을을 둘러보기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그래도 행운인지 모르겠지만 만회고택은 집을 지키는 강아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만회고택의 자랑인 사랑채를 가까이서 보게 되었으며 집주인이 잠에서 깰까 싶어 조용하게 사진을 찍고 소리소문없이 나왔습니다.



만회고택은 봉화군에서 애국심으로 큰 자랑인 고택건물입니다. 건물의 웅장함도 있지만 만회고택의 사랑채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산실이라 더욱 눈길이 갔습니다. 봉화 해저 만회고택이 자리한 해저리에는 조선 숙종 때 관찰사를 지냈던 팔오헌 김성구 선생이 처음 자리를 잡아 의성김씨가 세 가를 이루었습니다.





지금의 만회고택인 안채는 김건수씨 6대조께서 마을에 들어와 여씨(余氏) 성을 가진 분이 살던 집을 사들여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안채는 1690년대에 지어졌다 합니다. 이 집을 만회 고택이라 부르는 것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건수(1790~1854)선생의 호인 만회헌(晩悔軒)에서 따왔습니다.



만회고택의 사랑채인 명월루(明月樓)는 만회선생이 건립했으며 1850년에 전체적인 수리를 했다고 합니다. 백두대간의 흥 걸 찬 기원이 감도는 명월루의 지세는 예로부터 명산 대천을 찾는 많은 시인 묵객들이 시를 읊고 학문을 닦던 곳으로 이곳에서 약 1,000여 편의 시가 쓰였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명월루는 봉화 해저리에서 독립운동의 산실역을 담당했다 합니다. 특히 해저마을 주민 전체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14명의 독립운동가를 마을에서 배출한 독립유공자 마을입니다. 그 이유를 보면 성주 대가면 출신인 심산 김창숙 선생이 명월루에 거처하면서 해저마을의 많은 사람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독립 자금도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랄 일은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열렸던 제2회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비밀리에 파견하면서 독립청원서를 보냈는데 독립청원서의 초안을 명월루에서 작성하였다고 하며 독립유공자 마을인 해저 마을의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 외 많은 독립운동의 지원 등을 의논했던 장소에 명월루가 이용되었다 하니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사실 만회고택의 안채는 이른 아침이라 내부를 볼 수 없어 많이 아쉬웠지만, 사랑채인 명월루를 보는 것만으로도 큰 만족을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만회고택 명월루를 알아보겠습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먼저 만나는 게 사랑채인 누각형태의 명월루입니다.





사랑채가 명월루임을 알리는 현판이 돌출한 누마루에 달렸어 눈에 확 띄었으며 이외에도 만회고택과 사랑채의 툇마루에 앉으면 시원한 바람을 느낀다는 청풍헌 현판도 따로 걸려 있습니다. 사랑채는 앞면 4칸이며 옆면 1칸 반 규모로 만회고택은 앞쪽에 일자형의 중문간채와 'T'자 형의 사랑채, 안채는 ‘∩’자형이며 전체적으로 튼 ‘ㅁ’자 배치입니다.



안채를 중심으로 좌우로 연결된 건물이 사랑채로 이어지며 안채의 동쪽 날개 끝에서 동쪽으로 치우쳐져 사랑채가 자리했습니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했으며 전면의 툇마루와 누마루에는 둥근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사용하여 건물의 멋과 권위를 한층 더 높였습니다.





사랑채 옆의 안채로 드나들던 출입문인 중문간채는 퇴락하여 1981년에 철거했다가 다시 복원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찬찬히 이곳저곳을 꼼꼼하게 둘러보고 싶었지만 이른 아침 남의 집을 찾아서 내 욕심대로 보는 것도 실례이고 그리고 소강고택에서 다음 일정으로 일행들도 기다릴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돌아 나왔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해저 만회고택에서 한옥체험 민박도 하고 보지 못했던 안채와 수박 겉핥기로 보았던 사랑채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챙겨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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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 경주최부자 최진립 충의당. 정무공 최진립장군 고택 충의당 찾아가기


경주에는 볼거리가 너무 많은 곳입니다. 신라 천년의 역사가 그대로 숨 쉬고 있는 곳 경주, 남산과 경주를 아우르는 문화재를 모두 만나기 위해서는 몇 달을 둘러보아도 부족합니다. 그 만큼 많은 문화재를 품고 있는 곳이 천년 고도 경주입니다.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재는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 분황사등 경주의 유명관광지라 모두다 한번 씩은 찾아 가본 곳입니다.  또한 초중고 수학여행 단골 코스 이기도합니다.

 

 

. 이외 관광지를 빼면 별로 보고 온 기억이 없습니다. 필자의 고향은 이곳 경주 외곽 남산 밑입니다. 저 또한 너무 알려진 곳만 찾아다녀 경주를 속속들이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친지방문이나 고향을 찾아갈 때 짬을 내어 잘 찾지 않는 경주의 문화재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대구 영남대학교를 설립한 경주최부자의 최진립장군 고택 충의당을 찾았습니다. 경주 근동에서 경주 최부자 하면 모르는 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막상 충의당을 찾아가면 너무 단촐한 풍경이라 처음에는 고택을 찾지 못하고 차로 이리저리 돌았을 정도입니다. 여느 알려진 고택을 생각하며 눈에 확 들어 날 것으로 생각을 하였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 세도가의 양반가옥 처럼 축대를 높혀 건물의 위압감을 주지도 않았고 또한 화려하지 않고 정갈하며 반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저 평범한 가옥 모습이었습니다. 그만큼 수수한 모습으로 과연 이곳이 경주최부자 집으로 연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문 앞에는 최진립 장군 동상과 함께 작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으며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사당이 있습니다. 바로 곁이 사랑채의 앞 마당이며 차를 마시는 공간인 경모각을 지나면 단아한 모습의 충의당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충의당으로 들어서는 대문입니다. 기와는 새로 올렸는지 개끗하며 고풍스러움과 옛 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모습입니다. 


 

충의당을 보면 경주최부자의 정신을 읽을 수 있습니다. 타인능해로 유명한 구례의 운조루와 함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곳이 경주 최부자이며 정무공 최진립장군의 정신이 깃들은 이곳 충의당이 그 시작이라 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내부를 둘러 봅니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위패를 모신 사당 건물로 충열사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경주 최부자는 정무공 최진립장군에서 시작 됩니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경주읍성 전투에 참가를 하였고 1597년 다시 왜군의 재침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권율도원수와 함께 서생포 전투와 도산 전투에 참가하여 선봉에서며  전공을 세워 1600년에 여도만호로 임명되면서 무관의 길로 들어 섭니다. 선무원종 이등공신에 오르고 경원도호부사, 공조참판을 지내다 청나라의 공격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몸을 피해 있던 인조를 구하기 위해 69세의 노구를 이끌고 용인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그를 따르던 두 노비 옥동 기별과 함께 전사합니다. 사후에 인조는 자헌대부 병조판서와 정무라는 시호를 하사하고 청백리에 올렸습니다.


 

두 건물인 경묘각과 충의당. 


 먼저 경묘각으로 차를 마시는 곳 입니다. 안쪽에서는 유리를 넣어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충의당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9호이며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492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최진립장군이 생활한 곳으로 전해지는 충의당은 흠흠당으로 불렸습니다. 1760년 건물을 중수하면서 후손에 의해 충의당으로 바뀌었고 집의 구조를 보면 조선시대 남부지방 양반집 형태인 ‘ㅁ'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앞쪽 취의당을 중심으로 흠흠당과 고방채 그 뒤로 안채가 있으며 충의당은 앞면이 4칸, 측면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온돌과 마루를 각각 2칸씩 넣었고 흠흠당인 충의당은 사랑채로 사용하였습니다.


 

 

최진립장군의 모습인가요. 큰 칼을 앞에 세우고 두손을 모은 무인상이 사랑채 앞에 떡 버티고 있습니다.


 

 

 충의당 뒤로 돌아가면 만나는 안채의 모습입니다. 주인이 생활을 하고 있어 들어가기에 조심스러운 공간입니다. 

 방을 2칸 넣은 충의당 모습입니다. 앞쪽으로 툇마루가 달려 이곳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충의당과 마주보고 최진립장군의 6대조인 사성공 최예의 사당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며 마당에 잔디가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아녀자들이 출입하였을 것 같은 쪽문입니다. 이곳으로 나가면 밭뙈기와  마을길로 나가게 됩니다.  


 

 

 최진립장군 유물관입니다. 필자가 방문하였을때는 이곳에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전체적인 충의당의 모습입니다. 일반 살림집 같은 아늑함이 느껴지는 최진립 장군 고택 충의당.  

 

 

 흠흠당은 염근서흠 경절예흠에서 나왔습니다. "청렴하여 삼감을 흠모하고 굴하지 않는 곧은 절개를 흠모하다"는 뜻으로 인조임금이 진필를 하사하였는데 충의당을 들어가는 입구에 바위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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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당과 함께 전각인 충노각이 있습니다. 충노 옥동과 기별의 불망비로 이는 최진립장군의 후손인 가암 최채량 선생이 비문을 짓고 세웠습니다. 여기에는 일화가 전래져 오는데 장군은 두 노비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지만 두 종은 돌아갈 것을 마다하고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는데 어찌 우리 종들이 충노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며 끝까지 남아 최진립과 함께 죽었다합니다. 이 후 경주최씨 종가에서는 이들의 갸륵한 마음을 기려 장군의 제사를 받들고 난 뒤 두 충노의 제사를 지금까지 올리고 있다합니다. 


 보호수인 회화나무입니다. 내남면 이조리 최진립 장군 고택과 함께 너무 잘  어울리는 고목입니다.  

 

 


 

잠와 고택은 안채를 말합니다.  일(一)자형 건물로 왼쪽에는 부엌을 넣고 안방과 건너방 사이에 대청을 넣었습니다. 

 

 

 

월래는 초가 지붕이었는데 기와 지붕으로 바뀐 '우산초려'입니다. 안채에서 보면 오른쪽에 위치를 하며 충의당에 비해 소박하며 단독으로 숙박을 할 수 있게 욕실과 화장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안마당에서 바라본 충의당 모습입니다. 사랑채인 충의당은 조선시대 남여의 생활 공간을 완전히 구별하여 충의당에 앉아서는 안채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는 구조입니다. 

 

 

 잠와고택과 현재의 흠흠당

 

 현재의 충의당은 한국관광공사 인증 한옥민박 체험 할 수 있습니다. 400여년 전 경주 고택에서 별헤는 밤을 즐겨보세요. 또한 500m 거리에 최진립장군을 배향하는 용산서원과 신도비각이 있습니다 




2014/09/04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용산서원. 정무공 최진립장군 용산서원, 한옥 고택 숙박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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