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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상서장과 시대의 풍운아 최치원. 최치원 그는....

최치원은 868년인 문성왕때 약관 12세의 나이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7년만인18세에 귀국하여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를 하였다. 그러나 신라 말기의 조정은 그에게 그 어떤 것도 뜻을 펼칠 수 없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란 상소문을 이곳 상서장에서올렸고 그것이 더욱 조정대신들로 부터 미운털이 되었다. 이에 40세에 그는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여행길을 오르는데 그의 행적을 보면 놀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부산 해운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여진다.  동백섬에 그의 호를 딴 해운대란 각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낙동강 하구였던 물금 임경대에서 그는 낙동강의 저녁노을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지리산 쌍계사 위 불일폭포에서 학을 불러 타고 다녔고 재임시에는 함양의 태수로 있으면서 상림숲을 조성하여 물난리 등 재난을 막기 위해 인공림을 조성하여 현재에도 그 덕을 후대에서 관광지로 덕 보고 있다.

 

 

 

 말년에는 가야산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생활을 하며 짚신 한짝을 남겨두고 홀연히 학을 불러타고 신선이 되었다 한다. 현재 경주최씨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경주최씨는 원조 최소벌도리공의 24대 손이 최치원공이다.

 

 

 이곳 상서장은 진성여왕에세 나랏일을 걱정하며 '시무십여조'를  올린곳으로 조선 순조 이후에 건립한 것이라 한다. 그만큼 최치원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분으로 생각된다. 최치원은 신라말의 정치상황에 높은 학식과 능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산천을 떠돌며 여생을 마감한 최초의 풍운아가 최치운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46호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274번지로 서라벌 대로에 위치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전국의 사찰에는 원효의 전설이 없다면 사찰로서 대접을 못 받고 전국의 명승에는 고운 최치원의 전설이 없는 곳이 없는데 이를 보면 두분은 모두 신출귀물한 분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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