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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부북면 김종직 생가 추원재. 성리학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 생가인 밀양 추원재를 여행하다. 


세조가 그의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 찬탈로 정권을 잡았습니다. 이를 무오년에 일어났다하여 무오사화라 합니다. 당시 점필재 김종직이 이끄는 사림파와 한명회의 훈구파가 정치권을 양분하며 정권을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잡기위해 물밑노력을 기울이는데 사람파는 정도가 아니라며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합니다.






◆강호산인 김숙자 김종직 다른 여행지


2008/07/13 - (경남여행/밀양여행)부북면 예림서원.점필재김종직과 예림서원


2014/09/03 - (경남여행/거창여행)김숙자사당. 영남사림파의 발흥이 된 거창 남상면 강호 김숙자 사당을 보고오다.


2014/08/26 - (경남여행/거창여행)점필재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의 일원정을 만나고 왔습니다. 거창 남상 일원정


2016/04/16 - (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우령산~종남산 산행. 부산 근교산 진달래 산행지 밀양 우령산~종남산 산행. 흐트러지게 핀 진분홍색 진달래가 온산을 태우다.


2014/11/14 - (경북여행/구미여행)채미정. 구미 금오산에 있는 채미정.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야은 길재를 추모 하는 정자.



 

훈구파는 세조가 정권을 잡은 것을 찬성하며 세조 또한 이들 한명회와 신숙주 등 훈구파를 중심으로 정치를 이끌어 갑니다. 자연적으로 사림파는 정치권에서 멀찍이 물러나 성리학인 유학에 몰두하였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사람파들도 다시 벼슬길에 진출하여 사람파와 훈구파는 또다시 당쟁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일손이 스승인 김종직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꼬는 내용‘인 ‘조의제문’을 사초인 성종실록에 올린 것을 두고 훈구파의 이극돈과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고하자 연산군은 김일손 외 수많은 사림파를 처형하였으며 죽은 김종직은 관을 파헤쳐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형을 당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그의 많은 문집은 소각되었습니다.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에는 점필재 김종직 생가인 추원재가 있으며 그의 묘소인 봉분은 최근에 새롭게 단장하였습니다. 이곳은 그의 부친인 강호산인 김숙자가 결혼과 함께 처가 입향하여 처음 거처를 잡았던 곳입니다. 점필재 김종직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성장했으며 낙향하여 돌아가신 곳입니다. 현재 추원재 뒤편에는 그의 무덤이 있습니다.


 

 

 

김종직은 고려 말 삼은 중 한분인 야은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성리학의 종조로서 조선시대 사림파의 유학자는 정신적인 지주이자 뿌리 같은 곳으로 여겨 김종직 생가를 많이 찾았다합니다. 김종직 생가는 전란과 세월 속에 파괴와 허물어져 훼손이 심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림과 후손들에 의해 1810년에 중건하여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건물은 6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며 가운데 추원재(追遠齋) 현판이, 대청에는 전심당(傳心堂) 당호가 걸려 있습니다. 전심(傳心)이 가진 뜻은 ‘도학의 의리정신을 전하였음“을 기리는 뜻이라 합니다. 점필재 김종직은 절의와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며 실천하는 도학사상으로 그를 따르는 제자가 많았습니다.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유호인, 남효은, 조위, 이맹전, 이종준 등과 그의 정신을 계승한 조광조등 걸출한 제자를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또한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저서로는 ’점필재집‘ ’유두류록‘ ’청구풍아‘ 당후일기’ 등이며 ‘일선지’ ‘이준록’ ‘동국여지승람’ 등을 편저하였습니다.


 

 

 

 

 

김종직은 1506년 중종반정으로 신원이 회복되어 밀양의 예림서원, 선산 금오서원, 이외 여러 곳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충’공입니다. 밀양여행길에 꼭 들러보세요. 빠듯한 시간과 다른 일정으로 김종직 묘와 김종직이 부관참시로 밀양으로 묘를 이장하자 호랑이가 나타나 슬퍼하며 무덤을 지키다 죽었다합니다. 그 호랑이 무덤을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으로 다음기회에 다시 한 번 찾고 싶습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9호


 

 김종직 신도비


 김종직 신도비각

 

 

☞(경남여행/밀양여행)부북면 김종직 생가 추원재 대중교통편.


부산에서 밀양 가는 방법은 열차와 시외버스가 있습니다. 먼저 부산역에서 밀양역으로 출발하는 무궁화 열차는 오전5시13분, 5시40분, 6시35분, 7시05분, 7시50분,9시20분,10시18분, 10시50분 등. 밀양역 앞 시내버스정류장에서 버스로 밀양버스터미널로 이동합니다. 부산서부터미널에서 밀양터미널행 버스는 오전 7시, 8시, 9시, 10시, 11시 등에 출발하며 밀양터미널에서 김종직생가인 추원재로 가는 버스는 구기행 버스를 갈아타고 한골정류장에 내립니다. 오전6시40분, 6시50분, 7시50분, 8시20분, 9시20분, 10시10분, 11시30분 등내비게이션에는 추원재, 또는 김종직 생가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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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거창여행)김숙자사당. 영남사림파의 발흥이 된 거창 남상면 강호 김숙자 사당을 보고오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은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왔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영남사림파의 근간이 된 강호 김숙자로부터 시작되었다 합니다. 김숙자는 점필재 김종직의 아버지로 더욱 유명합니다. 또한 그의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성리학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의 태두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김숙자는 1389년에 출생하여 1456년 처가인 밀양에서 사망을 합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본관은 선산이며 호는 강호. 강호산인으로 블리어 졌습니다. 김숙자는 어릴때부터 총명하여 부친 김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숙자 나이 12세가 되면서 그 당시 고려 말의 충신 야은 길재가 공민왕을 폐위하고 왕의 자리에 오른 태조를 향해 고려의 신하로 있던 사람이 어찌 두 임금을 섬기겠는가 하며 고향 구미의 금오산 아래에서 은둔하며 망한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킵니다.

 

 

야은 길재가 고향으로 낙향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김숙자는 그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됩니다. 스승으로부터 소학과 경서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의 학문의 갈증은 해가 갈수록 더 하였는데 그 때 역학에 밝은 윤상이 황간 현감으로 내려 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배우겠다는 일념하나로 단숨에 김천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그의 가르침을 청하니 그의 열의에 감복하여 주역의 이치를 세세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는 약관 25세 때인 1414년 생원시에 합격을 하고 5년 뒤인 1419년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합니다.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1436년에 추천으로 ‘세자우정자’가 되었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성균관 사예를 끝으로 1456년 그는 벼슬을 사직하고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옵니다.


 

김숙자는 그를 따르는 제자나 아들인 김종직에게 스승이었던 야은의 가르침을 빠짐없이 실천하도록 하였고 또한 김종직은 일생을 스승이자 아버지인 김숙자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도록 행동을 하였습니다.





 

남을 가르키기를 좋아하여 남다른 열정을 학문에 쏟았고 또한 길재로부터 이어온 학풍에 따라 공부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라며 ‘동몽수지’의 유학자설정속편을 알고 난 뒤 소학으로 넘어가는 순서를 두고 그것을 차례차례 따르게 하였습니다.

 

 

김숙자의 고향은 선산입니다. 선산의 낙봉서원에 제향되어 있는데 이곳 거창군 남상면 대산리에도 김숙자 사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6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으며 8월에 찾아간 김숙자사당은 관리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김숙자의 후손들이 1706년에 세운 김숙자사당은 정문인 명성문을 통과하여 본체인 추원당 뒤편에 높은 단을 쌓아 만들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3량 구조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며 명성문은 정면5칸, 측면1칸에 한일자 형태입니다. 중간에 솟을 대문인 출입문을 넣고 양쪽 2칸은 방과 광 등을 넣어 사용 하였습니다.


 

 본체인 추원당은 정면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정면에 툇마루를 넣고 계자 난간을 둘렀고 건물 왼쪽에 방1칸과 대청은 2칸을 넣었고 오른쪽에도 온돌을 넣은 방 2칸으로 되어 있습니다.


 

필자가 찾아간 추원당의 명성문 문짝은 파손이 되었는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추원당을 두르고 있는 담장도 허물어져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루 빨리 관리가 된 김숙자사당을 기대해 봅니다.

 

 

 

 

 

 

 

 

 

 

 

 

 

김숙자 사당을 찾아가는 마을 입구에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이 있습니다. 한국화의 소재로도 너무 잘 어울리는 소나무는 수령이 300년이나 된 보호수로 1982년에 지정되었습니다. 둘레는 6.7m며 높이는 27m 대산리 한산마을 입구에 있어 김숙자 사당을 찾아가는 길에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웃 동네인 남상면 전척리에는 일원정이 있습니다.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의 칠현을 제향하는 곳으로 1905년 김숙자 후손들과 유림들이 건립하였답니다. 꼭 같이 둘러보면 좋습니다. 내비에 '김숙자사당'으로 입력하면 됩니다.



2014/09/02 - (경남여행/거창여행)거창 감악산 산행. 감악산 산행에서 만나는 뼈속까지 시린 물맞는 약수탕에서 물맞이를 하다.


2014/08/27 - (경남여행/거창여행)감악산 연수사. 물맞는 약수탕이 유명한 감악산 연수사에서 얼음물을 맞다.


2014/08/26 - (경남여행/거창여행)점필재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의 일원정을 만나고 왔습니다. 거창 남상 일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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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거청여행)점필재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의 일원정을 만나고 왔습니다.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에는 일원정 누각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황강이 흐르고 뒤로는 거창의 진산인 감악산이 우뚝 솟아 있는 배산임수의 자리에 자리한 일원정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선산 김씨 강호 김숙자()1389~1456)의 후손들과 지역의 유림들이 건립을 하였던 정자입니다.



이곳은 김숙자와 함께 정몽주, 길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등 칠현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이분들 모두 조선시대 성리학의 계승을 받들며 이어왔던 분들입니다.

 




그럼 김숙자선생은 어떤 분인지 궁금합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김종직 선생은 모두 다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부친으로 스승이었던 야은 길재로 부터 성리학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시 많은 제자와 그의 아들인 김종직에게 실천 중시 학풍을 물려주게 되고 김종직은 평생을 두고 아버님의 가르침을 따랐다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선산 출신인 김숙자를 배향하는 일원정이 왜 있는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종직은 밀양에서 출생을 하였고 그의 무덤도 현재 밀양에 남아 있는데 그의 부친 김숙자에 관한 유물이 이곳 거창에 남아 있다하니 말입니다. 한 가지 의문이 풀리는 것은 김숙자의 처갓집이 밀양이며 김숙자 또한 관직을 사직한 후 밀양으로 내려와 그해 사망하는데 조선시대 처가에 들어가 사는 풍속을 보면 김종직선생의 밀양이 고향인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현재 거창 남상에는 김숙자 유물이 두 점 있습니다. 1706년에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남상 대산리의 김숙자 사당이며 1905년 선산김씨 후손들과 지역 유림들이 건립한 남상 전척리 일원정입니다.



본채와 객사로 이루어진 두 채의 건물 일원정은 어떤 연유로 이곳까지 내려와 지어졌는지 관리하는 후손 분에게 물어보았지만 시원한 답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 문화재 청을 인용하여 보면 본채인 일원정은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지붕이며 2칸은 넓은 마루를 깔았고 온돌을 깔아 넣은 2칸의 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었고 계자난간을 설치하였습니다.




오른쪽의 객사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방과 마루를 넣었습니다. 일원정은 서원 역할도 한 것으로 보이며 일원정을 마주하고 김숙자 신도비가 황강 언덕에 세워져 있습니다. 신도비는 일정에 쫒기다 보니 사진으로 담아오지를 못했네요.



거창의 일원정은 경상남도 남상면 전척리 530번지에 선산김씨 문중의 소유로 1983년 8월에 문화재자료 제7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교통편은 내비에 일원정을 입력하면 위치가 바로 나옵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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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마을에서 언곡마을로 내려오는 중간쯤인 다람쥐골에서 민가를 한채 만난다. 예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문이 잠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경남여행/밀양여행/영남알프스둘레길)한국전쟁에  빨치산 피해  내려 왔던 길이 아름다운 영남알프스 둘레길 17코스가 되었네

   


◇ 풍류동 가산마을 다람쥐골 이어 가는 13㎞

   
경남 밀양시와 양산시의 경계를 이루는 까치목에서 산중 오지인 가산마을로 향하는 오솔길은 영남알프스 둘레길 전체 코스에서 최고 구간 중 하나라해도 이상할 것 없을 만큼 순하며 아름다운 길이다. 본지 개척단의 발걸음이 가볍다.

이번 주 답사한 제17코스인 밀양시 단장면 고례리 고례마을~양산시 원동면 선리 구간에서는 한 마디로 "무릇 둘레길이라고 하면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는 길이다. 그만큼 곱고 순하면서도 가장 자연을 닮은 아름다운 숲길을 만난다. 특히 까치목에서 가산마을까지 가는 오솔길, 가산마을에서 선리까지 내려서는 '다람쥐골' 계곡길은 한동안 잊기 힘든 걷기의 추억을 선사해 주는 구간이라 할 수 있다.

출발지는 밀양댐 아래에 위치한 단장면 고례리 고례마을이다. 마을의 볼거리 몇 곳을 들른 후 제16코스의 종착점이었던 고례리 평리마을을 거쳐 백마산(774m) 중턱의 산골마을인 풍류동, 배꼽목, 까치목, 가산마을을 거쳐 다람쥐골을 따라 배내골의 중심 마을 격인 원동면 선리마을회관(정보화센터)에서 끝난다. 총거리 13㎞에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4시간, 휴식시간까지 포함해도 5시간 정도 걸리니 한나절 걷기에는 적당하다.




다람쥐골에서 만나는 작은 폭포로 이런 폭포가 수 없이 많아 둘레길꾼들의 탄성을 자아 내게 한다.

2001년 밀양댐이 완공되기 이전까지 고례 평리 덕달 사희동 죽촌 등 5개 행정마을을 아울렀던 고례리는 비록 오지였지만 밀양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마을로 통했다. 백마산과 향로봉(726.8m) 뇌암산 등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구곡천(九曲川)이라고도 불리는 고사천(姑射川)이 관통하며 수많은 기암절벽과 깊은 소, 바위들을 만들어냈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 '산명수려(山明水麗)하고 계류와 전답이 아름다우며 기암절벽이 마치 옥(玉)기둥을 세워 놓은 듯 깨끗한, 인세(人世)의 진경(眞境)'이라고 기록했을 정도다. 고사천(姑射川) 상류에 있는 농암대(籠岩臺)는 그 대표적인 명승지 였다. 조선 초기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이 곳을 자주 찾아 노닐었고 그 승경(勝景)을 읊은 시(詩)도 남겼다. 신선이 살았던 곳이라는 뜻에서 고사리(姑射里), 고사산(姑射山), 고사천(姑射川) 등의 이름도 생겨났다. 하지만 밀양댐의 건설로 사희동과 덕달 죽촌 등의 3개 마을과 김종직 선생이 주유했던 농암대를 비롯한 절경이 모두 수몰되는 아픔을 겪었다. 밀양댐 순환도로 중간 전망대 쉼터공원의 망향정만이 실향민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있을 뿐이다.

수몰민의 애환이 서린 밀양댐으로 점필제 김종직 선생의 유적지인 농암대도 저기 물 속에 잠들어 있다. 밀양과 양산의 경계에 있는 '밀양바위 양산바위'등 숱한 애환이 이 물속에 잠겨져 있다.



☞(경남여행/밀양여행/영남알프스둘레길)한국전쟁에  빨치산 피해  내려 왔던 길이 아름다운 영남알프스 둘레길 17코스가 되었네

   
밀양 단장면 풍류동 앞 공터는 쉴 만한 그늘이라 좋다.

고례리의 본동마을인 고례마을은 밀양발 새마을버스의 종점이자 1592년 이후 내려온 인동 장씨 문중의 세거지다. 본격적인 답사에 앞서 재실과 고택들을 둘러볼 수 있다. 일단 버스 종점에서 양지교라는 작은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틀면 댐 앞쪽에 인동 장씨의 재실인 옥봉정이 있다. 단촐하면서도 절제된 균형미를 갖춘 재실인데 한국전쟁 직후에 건립됐다고 한다. 다시 양지교를 건너 하천을 따라 우측으로 가면 1051번 지방도로와 만나는데, 길 건너 맞은편 산 밑에 운치 그윽한 작은 정자가 보인다. 조선 숙종 때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던 낙주(洛洲) 장선흥(張善興)과 그 후손인 농산(聾山) 장영석(張永錫)을 추모하기 위해 1918년 인동 장씨 가문에서 건립한 재실인 낙주정(洛洲亭)이다. '임경대'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누마루에 올라 낮은 담장 너머로 고사천을 바라보면 일상의 시름이 일순간 사라지는 느낌이다. 낙주정에서 돌아나와 고례교를 지나면 우측에 효자각이 보인다. 이 역시 장씨 문중의 것이다.


인동장씨 세거지인 낙주정과 효자각

고례마을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10분쯤 가면 평리마을이다. 최근 팜스테이체험마을로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원래 평리마을은 '고례산대추' 산지로 더 유명하다. 농촌가꾸기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탔을 정도로 잘 가꿔진 동네이기도 하다. 넓은 들판과 아름다운 하천을 갖춘 평리마을은 강변의 벼락덤이와 진지소, 동북쪽의 백마산 등이 어우러져 풍광이 빼어나다. 또 밀양의 삼대 오지마을 중 두번째로 손꼽히는 바드리(일명 소월리)와 산중 마을인 풍류동(風流洞)까지 포함하고 있어 그 품이 넓고 깊다.


풍류동마을길이며 현재는 전원주택지로 각광을 받고 있어 주말마다 사람들이 찾고 있다 한다.

◇ 밀양 양산 경계 까치목 이후 구간 환상적

   
가산마을과 향로산이 보이는 전망대에 선 개척단.

마을회관 앞 운동시설을 지나 마을 안 길로 진행한다. 풍류동 가는 길이다. 3분 후 구씨 재실 앞 갈림길에서 '은하수펜션' 방향 왼쪽 길로 오른다. 완만한 오르막 길. 주변 산자락의 대추밭은 초록빛 일색이다.

25분 정도 골짜기를 따라 들어가면 산중 마을인 풍류동에 닿는다. '바드리 아랫마'라고도 불리는 풍류동은 말 그대로 풍류를 즐기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둥둥재, 북바위, 퉁소바위, 칭칭이산 등 마을 주변에 풍류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퉁소를 불고 북을 둥둥 치며 '칭칭나네'를 부르고 춤을 추는 풍류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차량은 풍류동까지만 들어갈 수 있다. 좁은 차로가 끝나는 곳에 마을 공터가 있다. 나무그늘 아래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가산마을과 배내골을 잇는 다람쥐골의 무명폭포.

까치목에서 가산마을로 내려가는 둘레길 탐사팀의 발걸음이 경쾌하다.둘레길 최고의 길이라 할만하다.

3분쯤 오르면 우측으로 '풍류동→배꼽목 1㎞'라는 안내판을 보고 배꼽목 방향 산길로 들어선다. 초반에는 조금 까다롭다. 그러나 작은 개울을 지나 50m 정도만 가면 길은 금새 편안해진다. 갈 지(之)자 모양이 여러개 이어진 형태로 계속되는 산길은 별로 숨 찰 것도 없이 순하다. 10분 후 중간 갈림길을 만나는데 왼쪽으로 오르막을 좀 더 타야한다. 15분 후 작은 고개마루인 '배꼽목'에 닿으면 다시 왼쪽 오르막 능선길을 탄다. 널찍하고 걷기 편한 길이다. 5분 후 갈림길에서도 능선을 따라 직진하면 잠시 후 임도에 닿는다. 표충사 입구 구천삼거리에서 번데기마을과 바드리를 거쳐 까치목까지 연결된 비포장 임도다. 우측으로 가면서 보면 밀양호반이 눈에 들어오고 그 동남쪽에는 향로봉이 우뚝하다.

900m쯤 가면 임도 종착점인 까치목이다. 밀양시와 양산시 경계선 상에 위치한 까치목은 좌측의 백마산과 우측의 향로봉을 연결하는 산줄기의 작은 고개다. 정면 멀리 우뚝한 향로산(975m) 방향의 좁다란 오솔길로 직진한다. 해발 550m 산 중턱에 자리잡아 전기 조차 들어오지 않는 가산마을까지 가는 길은 걷기 좋고 아름다운 자연 숲길이다. 산허리를 돌아가는 이 유순한 길에는 일체의 걸림이 없다. 걷는 이의 발길은 마치 부드러운 계류를 따라 흘러가는 나뭇잎처럼 가볍기만 하다. 이런 길을 언제 또 걸어 봤던가. 언젠가 꿈 속에서나 이런 길을 걸었을까.


밀양댐 전망대에 세워진 농암정과 배꼽목으로 오르는 옛길의 모습이 갈지(之)자로 포개어져 올라 간다

◇ 소박한 다람쥐골 폭포 소 즐비한 숨은 비경

   
백마산 허리춤을 감싸고 도는 호젓한 비포장 임도.

3분 후 작은 갈림길에서 우측 길을 택해 만나는 전망대에 서면 움푹한 곳에 민가 4채가 겨우 보일락말락한 가산마을과 그 뒤에 우뚝 솟은 향로산의 풍광이 마치 선계(仙界)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전쟁기 그 많은 빨치산들이 주민들을 약탈하고 토벌대와 치열한 전투를 치른 비극의 현장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10분쯤 내려서면 어느새 민가에 닿는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외딴집 처마 끝에 도화지 한 장 크기의 작은 태양열 집열판이 보인다. 냉장고가 없다 보니 각종 채소와 과일 김치통 등을 물동이에 담아 놓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띈다. 샘터에서 목을 축이고 계곡을 따라 내려선다. 다람쥐골의 최상류인 이 지점에서부터 선리마을까지는 줄곧 내리막이다. 다람쥐가 많았다고 해서 다람쥐골이라고 명명된 이 계곡은 화려하지 않지만 결코 왜소하지도 않은, 자연스러움이 빛나는 청정 계곡이다. 민가 한 채를 더 지나니 크고 작은 폭포와 아담한 물 웅덩이가 이어진다. 높이 3m가량의 중간급 폭포도 나타난다. 숨은 비경이다. 10분 후 오솔길이 끝나는 곳 개활지부터 임도가 이어진다. 20분가량 내려서면 원동면 선리 언곡마을. 예쁘장하게 지은 전원주택과 '배내골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사과밭이 나그네를 반겨준다. MMF연수원과 선리 당산나무를 지나 양산배내골사과마을로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는 선리 마을정보센터에 도착, 신발끈을 푼다. 배내골의 중심마을인 선리(善里). '착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인가 보다.

풍류동에서 배꼽목으로 향하는 옛길로 한국전쟁때 빨치산을 피해 가산에서 어린애를 등에 엎고 피난을 왔다던 한 많은 엣길이다.

# 떠나기 전에

- 고례리 고사천은 절경 갖춘 일명 '구곡천'

경남 밀양시 단장면 고례리 앞을 흐르는 하천은 고사천이라고도 불리지만 옛날부터 구곡천(九曲川)으로도 불렸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밀양호에 수몰된 고례리 사회동마을에서 제16코스의 출발지였던 단장면 사연리에 이르는 구간의 하천을 일컫는다. 구곡천이란 '아홉 굽이를 돌아 흐른다'고 해서 생긴 이름인데 조선 초기 학자인 채지당(採芝堂) 박구원(朴龜元)이 당시 사희동 마을에 살면서 지은 고사구곡가(姑射九曲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박구원은 하천 유역의 9개 명소를 구곡(九曲)으로 꼽았는데 사연, 정각산(正覺山), 범도리, 승학동(乘鶴洞), 단애(丹崖), 증소(甑沼), 도장연(道藏淵), 농암대(籠岩臺), 선소(船沼)를 가리킨다.


배꼽목으로 향하는 옛길의 모습이 아름답다

한편 이번 코스에서는 살짝 비켜 갔지만 백마산 중턱의 바드리마을은 밀양의 3대 오지마을에 꼽히는 곳이다. 밀양에서는 옛날부터 '일오치' '이소월' '삼감물'이라는 말로 오지마을들을 표현했는데 '이소월(二所月)'이 바로 바드리를 가리킨다. 소월리라는 말은 아주 오랜 옛날에 백마산에 사태가 나서 반쪽으로 갈라졌는데 그 모습이 반달을 닮았다고 해서 소월산이라고 불렀고 그 아래 마을을 소월리 또는 반달리라고 했던 것에서 나왔다. 반달리가 세월이 지나면서 바드리로 변형됐다는 것이다.

배꼽목에서 바드리 임도로 향하는 능선길로 옛사람들이 이길을 따라 가산 배내골로 다녔다는 넓은 길이 지금은 둘레길 꾼들의 길이 되었다.


# 교통편

- 밀양터미널서 고례행 버스 하루 4회 운행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 편으로 밀양역까지 간다. 부산역 기준 오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등 여러 편 있다. 해운대역에서 밀양행 무궁화호도 오전 7시45분에 출발한다. 밀양터미널에서 고례리행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린다. 오전 6시40분, 12시 등 하루 4회 운행. 종착지인 배내골 선리에서는 원동역까지 가는 버스가 오후 3시05분, 3시40분, 5시55분, 8시05분(막차)에 있다. 원동역에서 부산역행 열차는 오후 4시03분, 4시25분, 6시36분, 8시48분에 있다.

까치목으로 향하는 임도길로 여타 임도길과 다른 분위기를 보여 준다.

자가용은 차량 회수의 어려움으로 인해 권장할 사항이 아니다. 단 두 대 이상이 함께 출발, 종착지인 선리마을에 한 대를 먼저 세워 놓는 방법을 쓴다면 가능하긴 하다. 부산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이용, 양산IC에서 내린 후 언양 경주 방향으로 우회전 하자마자 다시 어곡공단 에덴밸리리조트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배내골 표지판을 보면서 에덴밸리리조트를 넘어야 한다. 고점사거리에서 우회전, 7분만 가면 선리에 닿는다. 고점사거리로 돌아가 밀양댐 단장 방향으로 우회전, 15분쯤 가면 고례마을에 닿는다.


가산마을로 향하는 최고의 둘레길을 걷고 있는 둘레길 꾼

# 고례리 '터줏마님' 장복술 할머니

- "전쟁때 빨치산 피해 가산에서 내려왔지"

   

"저기 보이는 백마산 너머 가산마을에서 6·25동란 나던 해에 죽을 고생을 하면서 피난 내려왔지. 빨치산들을 피해서 함께 도망치던 사람들 중에 네 명이나 총에 맞아 죽었어. 끔찍했지. 방년 18세때 였어."

영남알프스 둘레길 제17코스 초입인 밀양시 단장면 고례리 평리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장복술(79·사진) 할머니는 인근 지역에서 일어난 현대사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산 증인이다. 인근의 지리 및 인문학적 특성까지 줄줄 꾀고 있다. 본지 개척단에게 60여년 전 기억을 거침없이 풀어낸 장 씨는 "남자들 뿐 아니라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젊은 여자들까지 완장을 차고 빨치산이라면서 밤만 되면 마을로 내려와 설쳐대는 것이 여간 무섭지 않더라"며 머리를 흔들었다. 장 씨는 또 "평리로 내려와서 전쟁이 끝난 후 시집을 가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애를 등에 업고 저기 둥댕이재를 넘어 국전마을로 가기도 하고 다람쥐골을 따라서 배내골까지 오가기도 했지"라며 주변 지형까지 읊어 준다. 잠시 목이라도 축이고 가라며 한사코 집 안으로 단원들의 손을 끈 장 씨는 아껴 뒀던 음료수를 냉장고에서 꺼내 준다. 당시 장 씨의 등에 엎힌 채 산길을 넘나들었던 그 아들은 장성해서 밀양시민을 대표하는 인물이 됐다. 현재 밀양시의회 손진곤 의장이 바로 장 씨의 장남이다. 총명함이 빛나는 장 씨 할머니를 보면서 개척단원들은 하나같이 "아, 이런 어머니가 계셨기에 아들이 커서 시민대표까지 됐구나"라며 입을 모았다. 장 씨는 "둘째 아들이 고례산대추도 키우고 얼음골에서 사과밭도 하니까 많이 선전 해 주게"라며 당부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비록 나이 들었어도 자식 걱정과 사랑 만큼은 한결같은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을 읽을 수 있어서 더 행복한 둘레길이다.



까치목에서 가산마을로 향하는 영남알프스 둘레길 최고의 둘레길

# 원동면 선리 서종수 이장·이월동 총무

- "아삭하고 달콤한 배내골 사과, 최고예요"

   

제17코스 종착지 마을인 양산시 원동면 선리는 배내골의 중간에 위치한 '배내골사과마을'로 유명하다. 사과 특산 정보화마을로 지정돼 있기도 한 선리 주민들이 사과 재배를 시작한 것은 지난 2003년께 부터다. 하류에 밀양댐이 건설되면서 배내골 대부분 유역이 상수원보호구역으로 묶여 버려 살길이 막막해 진 주민들이 높은 일교차 등의 기후조건을 이유로 특산물로 사과를 재배키로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낙동강환경관리청과 수자원공사 등 유관 기관의 지원과 주민들의 합심으로 시작된 선리마을의 배내골사과 농사는 이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이제는 양산의 대표적인 특산물로 자리잡았다. 약 6만㎡(1만8000여 평)의 공동 경작지에서 주민들이 공동으로 경작하는 사과나무는 총 5600여 그루. 나무 1그루 당 평균 두 상자 씩, 일년에 총 1만1000여 상자를 출하한다. 물론 개인이 따로 경작하는 사과밭도 있지만 일단 공동 경작한 사과 출하량의 수익은 공평하게 분배한다.


언곡마을을 지나 선리로 향하는 길에는 무궁화가 마을길에 조성되어 있어 장관을 연출 한다. 둘레길꾼이 폰에 그 모습을 담고 있다.

'배내골사과마을' 운영위원장 겸 선리 이장인 서종수(69·사진 왼쪽) 씨와 총무 이월동(67) 씨는 "배내골 사과가 비록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주민들의 합심된 노력과 일교차가 큰 기후 조건의 혜택을 받아 당도가 17에 이를 정도로 높고 아삭하게 씹히는 맛이 좋아 '명품 사과'로 거듭났다"며 "11월 첫 토·일요일 열리는 배내골 사과축제때도 방문해 훌륭한 사과도 맛보고 구매도 하기 바란다. 늦게 오면 없다"고 말한다. 마을 사랑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가산마을의 모습.전기도 들어 오지 않는 오지마을로 현재는 4가구이며 남자4명만 생활하고 있다.

문의=주말레저팀 (051)500-5169,

  • 국제신문

이창우 개척단장 010-3563-0254

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선리마을의 500년된 당수나무로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이다.



17코스 출발지인 평리 대추 정보화 마을

평리마을 전경과 벼락바위 칭덤

풍류동으로 향하는 둘레길 탐사팀 그 앞으로 백마산이 솟아 있다.

풍류동으로 향하는 취재팀과 잘룩이 안부인 배꼽목

풍류동마을로 .승용차는 여기까지 올라 올 수 있다.

언곡마을로 향하는 탐사팀, 그 옆으로 모내기한 논의 푸르름이 벌써 여름이 성큼 다가 온 것을 알 수 있다.

다람쥐골의 모습으로 청청의 계곡이다. 짙은 수림으로 쌓여 있어 햇볕 한점 구경하기 힘들다

배내골의 중심마을인 선리마을로 지금은 배내골 사과를 공동재배하여 부농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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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주정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사 장내강이 피난처로 정한 곳으로 그 이후 인동장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1957년 옥봉 아래에다 옥봉정의 재사를 짓고 고례리 양지마을과 음지마을, 구석촌등지에서 세거를 이루고 살았다.
음지마는 현재 밀양댐 아래에 위치를 하며 순조때 진사 장창익이 살았다 한다.
구석촌은 거북모양의 바위가 많이 있다하며 인동장씨의 낙주 장선홍이 조선조 숙종때 처음 자리를 잡았다.
장창익의 아들인 장응구는 효자로 명성을 날려 광무2년인 1898년에 고례마을 입구에 삼성각이란 효자각을 세워 그의 효심을 받들고 있다.
1918년 장씨문중에서 장제산 아래인 시리소 절벽에 낙주정을 짓고 그의 선조인 낙주 장선홍과 농산장영석을 추모하기 위해 낙주정이란 누각(재사)을 지었다.
고사천이 감도는 시리소 절벽에 지은 낙주정은 그 주위의 풍경이 마치 산상의 별구에 감탄을 마다하지 않는다. 지금은 잡목으로 인해 고사천과 주변의 산들이 잘 보이지 않아 답답한 감도 있지만 뛰어난 경치로 점필재 김종직은 말년을 이곳 사회동의 농암대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찾아와 그 뛰어난 승경에 취해 많은 시를 남겼다.
현재의 고례 이름 또한 그의 영향이 크다하겠다.
1051번 지방도에 인접해 있는 낙주정은 임경대, 강정,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고사천의 시리소 모습이다. 좌측 바위 위로 낙주정이 있다.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시릿 절벽과 그 위의 낙주정의 모습



삼성각의 효자각


옥봉정
찾아가는길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 편으로 밀양역까지 간다. 부산역 기준 오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등 여러 편 있다. 해운대역에서 밀양행 무궁화호도 오전 7시45분에 출발한다. 밀양터미널에서 고례리행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린다. 오전 6시40분, 12시 등 하루 4회 운행.

부산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이용, 양산IC에서 내린 후 언양 경주 방향으로 우회전 하자마자 다시 어곡공단 에덴밸리리조트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배내골 표지판을 보면서 에덴밸리리조트를 넘어야 한다. 고점사거리에서 우회전, 7분만 가면 선리에 닿는다. 고점사거리로 돌아가 밀양댐 단장 방향으로 우회전, 15분쯤 가면 고례마을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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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산청여행)산청 지리산 꽃봉산~공개바위 산행. 한국판 피사의 사탑 지리산 공개바위 찾아가기

 

근교산&그너머 <690> 함양 꽃봉산 ~ 산청 공개바위

'한국판 피사의 사탑' 지리산에 우뚝

엄천강변 동강리 기점 5시간 원점회귀 산행

500여년 전 김종직 지리산기행때 걸었던 길 경유

비스듬히 솟은 12m 자연석탑 '공개바위' 신비감

꽃봉산, 어여쁜 이름 발굴은 예상치 못한 성과

주말 산꾼이 산행지를 선택할 때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다. 풍광 암릉 유적 추억 접근성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끔 딱 하나의 볼거리만을 위해 지루하고 힘겨운 코스를 묵묵히 참아내야 하는 산행지를 택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근교산&그 너머' 취재팀 이승렬기자가 경남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지리산 자락 비탈에 비스듬히 서 있는 공개바위 밑을 지나고  받치는 시늉을 하고 있다.

 

'근교산&그 너머' 취재팀도 이번 주 진귀한 '그 무엇인가'를 찾아보기 위해 지리산 자락 북동쪽 끄트머리를 답사했다. 취재팀의 발길을 이끈 것은 다름 아니라 '한국판 피사의 사탑'으로 불리는 경남 산청군 방곡리의 '공개바위'. 자연적 현상인지, 누군가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조차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는 이 신비한 바위는 산청과 함양 등 지리산권 일부 주민들에게만 알려져 있다가 지난 2007년부터 일반인들에게도 소개되기 시작했다.

해발 755m에 위치한 경사 60도 안팎의 산비탈을 딛고 우뚝 솟은 이 바위는 6면체 모양의 둥그스름한 바윗돌 5개가 석탑 모양으로 포개져 있어 전체적으로는 기다란 자연석탑 모양을 하고 있다. 높이 12.7m 둘레 12.4m 크기인데 수직으로 선 것이 아니라 25도가량 비스듬히 서 있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무너질 듯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고 수백 년인지 수천 년인지 아니면 수만 년인지조차 알 수 없는 세월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지난 2007년 9월 경상남도 기념물 제266호로 지정됐다.

공개바위로 올라가는 입구 우측으로 꽃봉산 능선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바위가 산청군 경계 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취재팀은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평촌마을을 기점으로 하는 원점회귀 산행으로 진행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산청군 방곡리에서 차량으로 공개바위 아래까지 가서 30여 분만 걸으면 쉽게 갈 수 있지만 그럴 경우 아무래도 산행의 묘미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함양 동강리를 들머리 겸 날머리로 삼을 경우 지리산 둘레길 일부 구간도 걸을 수 있고 산행 후에는 지리산 북부권 계곡물을 오롯이 머금은 채 유유히 흐르는 엄천강에서 땀을 씻을 수 있다는 장점도 여름 산행에서는 무시하기 힘들다.

 

이번 답사 산행에서는 그동안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귀한 산 이름 하나도 발굴하는, 뜻하지 않은 성과도 거뒀다. 공개바위를 향해 가는 도중에 거치는 해발 731m의 꽃봉산(그냥 '꽃봉'으로도 불림)이 새롭게 이름을 알게 된 바로 그 산이다. 꽃이 활짝 핀 모양을 한 봉우리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리산 산꾼으로 알려진 성락건 씨는 거창 현성산(거무시) 정상을 일컫는 '하늘바라기'라는 이름을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 명칭이라고 설파한 바 있기도 하지만 취재팀은 감히 이 꽃봉산(또는 꽃봉)을 가장 아름다운 산 이름으로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고 본다.

전체 산행은 동강리 평촌마을 둘레길 이정표~팽나무쉼터~묵은 임도길~개울~능선 밑 이정표~능선 갈림길~꽃봉산 삼각점~전망대~운서리 방향 이정표~771봉 전망대~폐헬기장~공개바위 이정표~공개바위(되돌아 나와서)~이정표~운서리 방향 이정표~천상바위~임도~운서쉼터(지리산 둘레길 구간 합류)~운서리~구슬박재~팽나무쉼터 앞 이정표~동강리 평촌마을 순이다. 총거리 11㎞. 순수하게 걷는 시간만 4시간10분 정도 걸리고 휴식과 공개바위 감상 등을 더해도 5시간30분이면 산행을 마칠 수 있다.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나는 동강마을 쉼터

엄천강을 왼쪽에 끼고 60번 지방도로를 따라 마천 백무동 방향으로 가다가 적조암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 엄천교를 건너면 휴천면 동강리 평촌마을 강동식당 앞 공터에 닿는다. 이곳이 들머리 겸 날머리다. 남쪽에 솟은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는 마치 연꽃이 활짝 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꽃봉산이다.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곧바로 지리산 둘레길 이정표 앞에서 남향 산 쪽으로 난 계곡 옆 임도를 따른다. 이 계곡의 이름은 아애골. 주민들에게 물어도 그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이가 드물다. 그저 선대 어른들 시대부터 구전으로 이어져온 이름이라는 것뿐. 8월의 태양이 길 옆 고추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햇볕을 머금은 풋고추도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붉은 옷으로 갈아입는 중이다.

 

그늘 없는 한여름 산길에서 개울을 만나면 사막의 오아시스보다 반갑다.

 

5분 후 앙증맞은 빨간 우체통이 있는 작은 민가 앞에서 왼쪽 작은 다리를 건너면 팽나무쉼터다. 작은 안내판에는 동강마을의 당산 쉼터 역할을 하고 있는 이곳의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점필재 김종직이 조선 성종 3년(1472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지리산 기행을 한 후 남긴 유두류록(遊頭流錄)에 '화암(花巖)'이라고 기록한 곳이 바로 이 쉼터라는 것이다. 또한 연꽃 모양을 한 봉우리인 뒷산 이름이 옛날부터 꽃봉산이라고 전해오는 것과 화암이라는 쉼터 이름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팽나무쉼터에서 100m쯤 더 가서 왼쪽 비포장 길을 따르다 만난 삼거리에서 우회전, 임도를 따라 오르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오른쪽 고사리밭에는 키 큰 고사리가 무성하다. 이때부터는 1시간30분가량 꼼짝없이 비포장 임도를 따르는 고행길이 이어진다. 말이 임도지 실제로는 사람 다닌 흔적이 거의 없이 잡초가 무성해 웬만한 좁은 산길 못지 않게 험한 길이다. 게다가 햇볕 피할 곳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50분쯤 가다가 만나는 첫 번째 개울에서 잠시 땀을 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직사광선을 그대로 받으며 걷는 산길에서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르는 개울을 만난다는 것은 사막 여행자가 오아시스를 만난 것보다 더 반갑게 느껴진다. 다시 30분가량 임도를 더 타고 오르면 다소 생뚱맞은 느낌의 이정표가 나온다. 임도를 버리고 오른쪽 절개지로 올라 능선까지 난 지름길을 타고 7분쯤 오른다.

능선 갈림길에서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왼쪽 아래에 고사리 및 산약초 재배 농가가 보이고 출입금지 표지판과 철망도 나타난다. 능선길을 타고 오르다 봉우리를 오른쪽으로 살짝 우회하는데 바로 이 봉우리가 강동리 평촌마을에서 보았던 꽃봉산이다. 우회길에서 다시 능선으로 붙으면 꽃봉산 정상에서 30m쯤 더 간 작은 안부다. 일부러 꽃봉산 정상부에 올랐다가 안부로 돌아와 길을 재차 재촉한다. 삼각점을 지나고 3분 후 왼쪽이 탁 트이는 전망대다. 웅석봉과 왕등재 왕산 필봉산, 그리고 멀리 둔철산과 정수산 등 산청의 명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3분 후 운서리 방향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 나중에 하산할 때 이곳에서 운서리 방향으로 내려서게 되는 지점이다. 일단 왼쪽 능선을 탄다. 2분 후 771봉 전망대에 서면 이번에는 함양 독바위와 함양 법화산 등이 조망된다. 곧바로 나오는 폐헬기장을 거쳐 공개바위 이정표가 있는 능선 안부까지는 7분이면 족하다. 능선을 버리고 왼쪽 내리막을 타고 70m만 가면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공개바위다. 비스듬히 우뚝 솟은 모습에 "이야 이렇게 신기한 바위를 보려고 그 땡볕 속을 견디며 걸었나보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위에서 보면 6면체 바위가 5개로 보이는데 반대편에서 보면 4개다. 더욱 신비롭다. 어떻게 보면 거대한 남근석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꽃봉산 정상부 지나서 만나는 전망대에 서면 웅석봉과 왕등재가 보인다.

 

옛날 지리산에는 삼베 구만 필로 짠 치마를 두른 거대한 '마고할미'가 살았는데 공기놀이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고할미가 떠나면서 갖고 놀던 공깃돌 5개를 포개 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공개바위'라는 전설이 지역에서 전해오고 있다. '공개'라는 말은 '공기'의 서부경남 사투리다.

다시 운서리 방향 이정표 삼거리까지는 12분가량 걸린다. 삼거리에서 왼쪽 내리막을 타고 하산길에 나선 지 8분 만에 상단부가 갈라진 바위를 만나는데 이 바위가 천상바위다. 위에서 보면 그리 크지 않지만 왼편 수독골 아래에서 보면 50m가 넘는 거대한 크기의 바위다. 이 천상바위에는 천상굴이라고 하는 석굴이 있는데 1970년대 중반까지 호랑이가 살았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가 운서리와 동강리 주민들 사이에 전해오고 있다.

천상바위를 왼쪽으로 우회한 후부터는 별로 어렵지 않게 능선을 타고 하산할 수 있다. 40분가량 평탄한 능선길을 따르다 보면 길이 확연히 넓어지는 갈림길을 만나는데 오른쪽으로 살짝 꺾어진 방향으로 길을 잡고 10분만 더 내려서면 운서리 본동에서 운암마을 적조암까지 이어지는 콘크리트 임도에 닿는다. 이제 길은 더욱 수월하다. 오른쪽 내리막을 따라 10분쯤 가면 물탱크 앞 삼거리에 닿는다. 지리산 둘레길 이정표에는 '운서쉼터'라고 표시된 곳인데 인근에 작은 정자가 있다. 운서마을에서는 엄천강 쪽으로 내려서지 말고 '동강마을 1.7㎞'라고 표시된 지리산 둘레길 이정표를 보고 오른쪽 완만한 임도길을 탄다. 구슬박재를 넘어가는 둘레길 구간을 따르는 것이다. 500여 년 전 김종직 선생이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운서마을에서 구슬박재를 지나 동강리 들머리까지는 20분이면 충분하다. 조금 늦은 여름휴가를 맞아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 위해 서울에서 왔다는 순례객이 어느새 취재팀 뒤에 바짝 접근한 채 걸어오고 있다.

◆ 떠나기 전에

- 산행 후 구형왕릉 용유담 등 인근 명소 들를 만

경남 산청의 공개바위를 보기 위해 함양군 휴천면 강동리 평촌마을을 기점 삼아 산행을 했다면 하산 후 주변에 둘러볼 곳이 많다는 점도 기억하자. 우선 산청군 금서면의 왕산 아래에 있는 전(傳)구형왕릉(사적 제212호)이 눈에 띈다. 금관가야 최후(제10대)의 왕이자 신라 삼국통일을 달성한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이곳은 국내에서는 유일한 피라미드형 석축 무덤이다. 그동안 김해 김씨 문중 측에서 18세기 발견된 '왕산사기' 및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과 왕산사에서 출토된 의복과 장신구 등 유물을 근거로 틀림없는 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좀처럼 공식 명칭의 첫 글자인 '전(傳)'자는 삭제되지 않고 있었다. '전(傳)'이라는 글자는 '~라고 전해 온다'는 뜻으로, 명확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달 초 관할 지자체인 산청군 측이 접두어 '전'자를 제거해 달라며 경남도와 공동으로 문화재청에 사적 명칭 변경 신청을 함으로써 그 결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주변 일대에는 '한국판 피라미드' '한국판 피사의 사탑(공개바위)' 등 '한국판 ~'가 참 많다. 이 모두가 지리산의 넓고 깊은 품 안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함양 강동리에서 엄천강을 따라 마천면 쪽으로 10분만 가면 엄천강 제1의 명소로 알려진 용유담이 있다. 또 오도재 아래 지리산 전망대도 방문해 볼 만하다.


◆ 교통편

 

- 함양터미널서 추성 또는 송전행 버스 30분 간격 운행

산행 기점인 함양군 휴천면 강동리까지 교통편은 의외로 편리하다. 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함양행 버스는 진유 경유 버스가 오전 5시40분부터 오후 7시41분까지 8~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1만3700원. 3시간 소요. 함양 직행 편은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2시간 간격으로 출발하는데 요금 1만500원에 1시간50분밖에 소요되지 않아 유리하다. 함양터미널(055-963-3745)에서 휴천면 강동리 입구인 엄천교까지는 추성 또는 송전행 군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오전 6시20분부터 오후 7시4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 2300원, 35분 소요. 운서리 또는 강동리 입구인 엄천교 앞에서 내려 엄천교를 건너면 산행 들머리인 강동리 평촌마을이다. 산행 후 함양읍행 버스도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막차는 오후 8시15분에 있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대전통영고속도로 생초IC를 빠져나가 첫 번째 삼거리에서 화개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엄천강을 우측에 끼고 5.4㎞가량 가면 만나는 금서면 소재지 삼거리에서 수동 방면으로 우회전, 임천교를 건너자마자 유림삼거리에서 마천 방면 8시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500m쯤 가다가 삼거리에서 마천 방면으로 좌회전, 60번 지방도를 탄다. 6㎞가량 가면 적조암 표지판이 보이고 왼쪽에 엄천교가 있다. 건너서 식당 주변 공터에 주차하면 된다.

문의=국제신문 주말레저팀 (051)500-5169 이창우 산행대장 011-563-0254

글·사진=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건너편 법화산 정상

 

산길 같은 임도를 타고 올라가다 만나는 공개바위 이정표로 여기서 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상내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우측으로 함양 독바위가 우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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