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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고성여행)철새와 갈대밭 전망대 속싯개 당항만역사생태공원 여행. 고성 당항만역사생태공원


고성 간사지둘레길이 있는 속싯개의 갈대밭에 당항만역사생태공원을 조성했습니다.  

고성에서 겨울을 보내러 오는 철새를 관찰하는 전망대이지만 

지금은 속싯개의  갈대밭이 장관입니다. 

완전 갈대숲 전망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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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지란 바다나 호수에서 간조시 물바닥이 들어나 보이는 땅을 말합니다. 

당항만은 경남 최대의 갈대군락과 간사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항만 갈대밭의 면적이 10만평에 둘레만 7㎞라 합니다. 

진짜 갈대숲 규모가 억소리 납니다. ㅎㅎ




그러나 당항만역사생태공원만은 7㎞ 거리가 아니고 

그냥 왕복 200m쯤 되니까 너무 놀라실것 까지 없습니다. ㅎㅎ



간사지 둘레길 전체 거리가 7㎞이며 

그중에 갈대밭의 핵심이 당항만역사생태공원입니다.




당항만역사생태공원에서 관찰하는 철새종류가 한해 100여종이라고 합니다. 

관찰되는 철새와 텃새를 보면 아주 덩치가 큰 왜가리부터 참새 만한 작은 새까지 관찰됩니다, 



간사지인 속싯개에 찾아오는 새를 보겠습니다. 

백할미새, 알락할미새, 큰밭종다리, 직박구리, 때까치, 딱새, 개개비, 붉은머리오목눈이, 오목눈이, 곤줄박이, 박새, 멧새, 황로, 중대백로,대백로, 중백로,쇠백로, 왜가리 등 이외에도 너무 많아 다 열거할수 없습니다. ㅎㅎ



이번 겨울에 직접 찾아와서 눈으로 확인해보세요 ㅎㅎ

속싯개는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지역입니다.



 이로인해 다양한 생물이 많아 철새에게는 충분한 

먹을거리를 제공하여 많은 철새가 찾아오나 봅니다.




당항만역사생태공원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생태공원이야 철새와 갈대밭을 뜻합니다. 



그런데 역사란 타이틀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당항만은 이순신장군의 당항포해전을 빼놓고 이야기할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항포해전을 승리하게 된데는 기생월이의 대담한 행동 때문입니다. 

1592년 4월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그해 6월5일과 6일에 이순신장군은 가등청정(가토기요마사)이 이끄는 

일본함대를 맞아 당항포에서  대승한 해전입니다.



 속싯개로 들어오는 고성천을 임진왜란당시에는 소소강이라 불렀습니다. 

소소강에 26척의 일본군함선이 닻을 내리고 있었으며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에 격퇴당했습니다.  



고성에 전해오는 전설 한토막 ㅎㅎ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군 간자는 조선의 여러 지역을 염탐하여 지도를 그렸습니다. 

간자는 피로도 풀 겸해서 고성에서 기생을 불러 술판을 벌렸습니다. 




기생 월이는 우연찮게 간자의 지도를 보고 고성의 지도임을 알았습니다. 

고성땅에다 지도의 바다색과 똑 같은 색칠을 해버렸습니다.   

그후 아무것도 모르는 일본함대는 당항만으로 들어왔습니다.



깊숙히 당항만에 들어왔던 일본함대는 뱃길이 막혀있어 속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본함대는 속았다하여 속싯개란 지명이 되었으며 이순신장군이 배를 숨겼던 곳이라하여 배둔이란 지명이 생겼습니다. 





두호리의 머릿개는 물에빠져 죽은 일본군의 머리가 수도 없이 많았다는 데서 나왔습니다. 

일본군이 36개 줄행랑을 쳤다는 도망개 등 많은 지명이 이순신장군의 당항포해전에서 유래합니다. 



당항만역사생태공원에서 임진왜란 불멸의 장군 이순신의 23전승 중 한곳인 당항포해전과 

당항포해전에 승리의 원동력이 된 기생월이의 전설을 생각하며 

그리고 속싯개 갈대밭에서 겨울을 나려고 찾아오는 철새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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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진도여행)이충무공 벽파진전첩비와 벽파정. 진도 이충무공전첩비


이순신장군의 3대첩 중 한곳인 명량대첩이 일어난 곳이 진도와 해남 사이의 명량인 울돌목입니다. 

이곳은 육지와 섬 사이의 좁은 수로로 바닷물이 빠르게 빠져나가면서 와랑와랑 우는 소리를 낸다 하여 울돌목이라 부릅니다.




진도 이충무공 벽파진전첩비 주소: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길 74

진도 이충무공 벽파진전첩비 전화:061-540-3427


진도 이충무공 벽파진전첩비 2001년 10월 30일 향토문화유산 유형유산 제5호에지정




2014/03/03 - (전남여행/진도여행)모세의 기적 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가 곧 열린다하여 미리 체험하고 왔습니다. 제36회진도신비의 바닷길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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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은 알다시피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옥에 갇혔고 원균은 패전으로 조선수군은 전멸하다시피 해서 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합니다. 

이에 류성룡 등의 탄원으로 선조도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방면하여 백의종군토록 하였습니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이순신은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한 뒤 배설이 퇴각하면서 남은 12척의 배와 한 척을 보태어 총 13척으로 133척(기록에 따라 333척이라 하기도 함)의 왜선을 상대하여 울돌목에서 전투를 벌여 해전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승전보를 울렸습니다.

 


무능한 선조는 이순신에게 육군에 참여하라는 교지를 내렸지만, 이순신은 “신에게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하며 준비했던 명량해전. 

그 명량대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벽파진입니다. 

벽파진은 전라남도 고군면 벽파리에 있으며 진도대교가 생기기 이전까지는 해남군 황산면에서 진도를 드나드는 관문역할을 벽파진이 담당했습니다.

 




벽파진은 그만큼 전략적 요충지로 중요한 곳이며 명량(울돌목)의 길목이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명량해전을 준비하면서 열엿새 동안 벽파진에 머물러 작전을 짜는 등 일전을 준비했습니다. 

명량해전의 승리를 있게 한 벽파진에 1956년 11월 29일 노산 이은상선생이 글을 짓고 글씨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쓴 이충무공 벽파진전첩비를 세웠습니다.

 




명량대첩의 승전을 기리며 이곳 벽파진이 내려다보이는 바위에 세워진 벽파진 전첩비를 보기 위해 찾았습니다. 

이충무공 벽파진전첩비의 비신은 높이가 3.8m, 폭이 1.2m, 두께 0.58m이며 거대한 거북좌대위에 세웠으며 비신 위에 머릿돌인 이수를 올려놓았습니다. 

웅장한 이 전첩비는 동양최대의 높이라 합니다.



비신에 새긴 글자는 비명이 9자이며 본문이 749자, 말문 85자, 찬시 134자로 전체 888자의 예서체로 특이한 점은 글씨 형태가 똑 같은 게 없이 비신의 네 면에다 모두 다르게 썼다고 합니다.

 






이충무공 벽파진전첩비의 비문을 일부 보면 

“벽파진 푸른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고작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옥(獄)에서 풀려나와 삼도수군통제사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군수로 임명되었던 진도땅 벽파진에 이르니 공이 53세 되던 정유년 8월 29일 이때 조정에서는 공에게 육전을 명령했으나 공은 이에 대답하되 신에게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삽고 또 신이 죽지 않았으며 적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리이다. 하고 그대로 여기 이 바닷목을 지키셨나니 예서 머무신 16일동안 사흘은 비 내리고 나흘은 바람불고 맏아들 회와 함께 배 위에 앉아 눈물도 지으셨고 9월 초7일 적선 13척이 들어옴을 물리쳤으며 초9일에도 적선 2척이 감포도까지 들어와 우리를 엿살피다 쫓겨 갔는데 공이 생각한 바 있어 15일에 우수영으로 진을 옮기자 바로 그 다음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적은 배로서 330척의 적선을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 사 만고에 길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이 고장 민속 강강술래 구슬픈 춤과 노래는 의병전술을 일러주는 양 가슴마다 눈물어리고 녹진 명량 두 언덕 철쇄 걸었던 깊은 자욱엔 옛 어른들의 전설이 고였거니와 이제 다시 이곳 동포들이 은공과 정기를 영세에 드높이고자 벽파진에 한 덩이 돌을 세움에 및여 나는 삼가 끓어 엎디어 대강 그때 사적을 적고 이어 노래를 붙이노니 열두척 남은 배를 거두어 거느리고 벽파진 찾아들어 바닷목을 지키실 제 그 심정 아는 이 없어 눈물 혼자 지우시다 삼백척 적의 배들 산같이 깔렸더니 울돌목 센 물결에 거품같이 다 꺼지고 북소리 울리는 속에 저님 우뚝 서 계시다 거룩한 님의 은공 어디다 비기오리 피흘린 의사 혼백 어느 적에 살아지리 이 바다 지나는 이들 이마 숙이옵소서.” (이 내용은 안내판의 이충무공벽파진 전첩비 내용을 일부 발췌했습니다)





이충무공 벽파진전첩비 비문을 일부 옮겨 놓은 안내판을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 왔습니다. 

거친 파고와 싸우셨고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수백 척의 적선을 보면서 장군과 순절하신 병사와 백성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그 일념 하나로 똘똘 뭉쳐 승리했던 명량대첩이 있었기에 지금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하겠습니다. 

이충무공 벽파진전첩비를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벽파정을 올라보았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명량해협은 사람의 죽음으로 피바다였겠지만 현재 벽파정에서 바라보는 벽파진의 풍경은 당시의 참혹함은 모두 가슴속에 삭히고 지금은 그림 같은 아름다움이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벽파정은 1207년(고려 희종3년)에 진도의 관문인 벽파나루 언덕에 세워졌으며 1465년(조선 세조11년)에 중건했으나 허물어져 그 자취만 남아 있었습니다.








2016년 9월에 벽파정은 창건 당시인 고려시대 양식으로 앞면 5칸에 옆면 3칸인 팔작기와지붕으로 벽파정의 역사를 고려해 복원했습니다. 

벽파진은 고려 후기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본거지를 옮겨오면서 대몽항쟁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이순신 장군이 열엿새 동안 머물면서 전략을 세우고 준비하여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곳입니다. 

벽파진에 복원된 벽파정을 보면서 이곳에 올라 호령하시는 이순신 장군을 뵈옵는 듯 늠름한 기상이 서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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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남해여행)남해 임진성. 아난타남해 골프장 입구 임진왜란에 재축성 했다는 임진성 여행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해안가를 따라 많은 석성과 토성을 쌓았습니다. 

이는 바다 건너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이번에 남해 여행을 하면서 남해군 남면 상가리의 임진성을 보고 왔습니다. 

임진성은 임진왜란 때에 쌓았던 산성이라 지금까지 알려졌었습니다.




남해 임진성 주소: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임가리 291

남해 임진성 연락처:055-860-8631

남해 임진성 경상남도 기념물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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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새로운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쌍았던 산성임이 출토된 유물로 확인되었습니다. 

임진성의 규모는 높이가 1~6m이며 내성의 둘레는 약 246m이고 면적은 약 1만 6,000㎡입니다.


임진성 서문





2013년에 임진성 발굴조사에서 성 바깥벽의 최하단인 기초석에서 2m 높이까지는 통일신라 산성 축성법인 바른층쌓기법이 보였고 성 안에는 수혈건물지 터도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성벽의 방향과 평행하게 축조된 석축과 성 내부에서 어골문 기와 등이 출토되어 고려 시대에도 성벽을 고쳐 쌓았다고 보입니다.





특이 북쪽의 성벽에서 둥근 돌이 3000여 개나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이 둥근 돌은 투석전에 사용했던 돌로 보이며 거제도 둔기성과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에서 이런 종류의 투석환이 나왔는데 두 산성의 축성이 임진성과 같은 시기라 합니다.





저도 여러 여행지를 다녔고 많은 산성을 찾아다녔습니다. 

온달산성도 벌써 가보았으나 이번 남해 여행에서 온달산성에서 투석전에 사용된 둥근 돌이 나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런 유물을 보면서 우리 선조의 당시 처절했던 상황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임진성은 축성에 관한 구전이 내려옵니다. 

임진성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임진왜란에 쌓았다는 산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임진성 앞 포구를 옥포라고 부릅니다.

이순신 장군이 1차 해전에서 옥포대첩을 승리하자 거제도의 옥포와 동명인 남해의 옥포에 왜적이 복수하려고 재침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소문을 듣고 민·관·군이 힘을 합해 단시일 내에 쌓았다 하여 임진산성을 민보성이라고도 부릅니다. 

임진성의 내부를 보면 축대를 쌓고 그 안쪽에다 흙으로 보루를 만들어 통로를 내었습니다. 

산성에 사용된 돌은 사람 머리만 한 크기의 편편한 돌로 쌓았으며 내성과 외성으로 나누어져 있고 내성은 돌로 쌓았다면 외성은 흙으로 쌓았습니다.





임진성 동문

현재 외성은 무너져 그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축성 당시에는 성루와 망대, 서당(書堂) 등 건물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동문과 서문터 일부와 우물터만 남아 있습니다.

 








임진성 동문 앞에는 고려말 정지장군사적비가 있습니다. 

정지장군(1347~1391)은 최영, 이성계와 함께 고려말 3대 무신 중 한 분입니다. 

1380년(우왕6년) 진포해전 최무선의 화포를 처음 배에 장착하여 승리하였고 1383년(우왕9년) 남해 관음포 해전에서도 화포로 왜구를 대파하며 승리를 이끌었던 분입니다.

 





잔땡이고개 임진성 안내판, 이 길을 따라 오르면 임진성 동문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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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여행/사천가볼만한곳)창선·삼천포대교 입구 삼천포대교공원. 임진왜란 사천해전에 승리했던 거북선 실제 모형을 만날 수 있는 삼천포대교공원


경남 사천에는 남해군의 창선과 사천의 삼천포를 잇는 다리가 있습니다. 창선·삼천포대교로 불리는데 요즘 부산이나 경남 쪽에서 남해군 여행에는 대부분 창선·삼천포대교를 거칩니다. 이곳 창선·삼천포대교 사천 쪽 입구에 2003년 4월 25일에 삼천포대교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규모가 25,808㎡에 승용차와 대형버스 등을 합해 144대를 동시 수용하는 주차장을 갖춘 삼천포대교 공원은 저같이 걷기 좋아하는 여행객에게는 정말 좋은 최고의 여행 코스입니다. 특히 창선·삼천포대교와 실안동 해안 길은 2006년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대상을 차지할 정도로 아름다우며 황홀한 길로 특히 바다 저편으로 떨어지는 붉은 노을은 보는 사람 모두 감탄사를 연발하게 합니다.


 

삼천포대교 공원에는 이순신 장군이 건조한 거북선의 실모형을 복원하여 전시 중입니다. 세계최초로 만든 우리의 거북선을 사천해전에 출동시켜 왜선 13척을 격침하고 왜군 2,600명을 수장시켜 승리한 해전입니다.

 

 

 


삼천포대교 공원에 전시 중인 거북선 모형은 1592년 선조 25년에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을 고증하여 만들었는데 3층 구조에다 전체 길이가 25.6m, 높이 6.06m이며 승선 인원은 대략 125명입니다. 거북선의 전면은 목재로 2011년 12월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바다 위에서 수많은 왜선을 격침한 거북선의 실제 모형이 조금이라도 비가 오면 거북선 보호 차원에서 내부를 볼 수 없다는 게 참 아쉬웠습니다. 그리 해전에서 연승 무패를 자랑하는 거북선이 조금의 비에는 왜 속수무책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주 오전에 삼천포대교 공원을 찾았습니다. 때마침 부슬부슬 비가 내렸는데 실안 노을 길을 걷기 전에 삼천포 대교 공원의 거북선을 보기 위해 먼저 들렀습니다. 그런데 거북선 내부를 들어가는 입구에 “우천에는 거북선 보호로 개방하지 않는다”는 작은 팻말이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휴~~ 참. 멀리서 찾아간 보람도 없이 약간의 비에도 문을 열지 않는 거북선 같으면 그게 어찌 거북선이냐며 확! 짜증이 밀려왔습니다. 그래도 법이 그런께 하며 다른 곳을 여행하다가 오후에 삼천포대교 공원에 주차한 차를 회수하기 위해 다시 들렀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 거북선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막상 내부로 들어갔는데 온 사방에 ‘머리 조심’ 안내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무심코 가다가 기둥이나 천정에 박치기는 기본입니다. 저도 한번 아주 크게 박치기를 했더니 마른하늘에 별이 보일 정도였습니다. 티브이나 영화에서 본 이순신의 거북선 내부와는 완전 다른 모습입니다.


 

 

 

 


모두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로 좁은 공간인데 이게 진짜 거북선 내부구나 하며 임진왜란 때 그 힘들었던 바다 전투였음을 조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부강한 대한민국이 된 것도 어려웠지만, 임진왜란을 이겨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삼천포대교 공원은 매년 1월 1일 이곳에서 삼천포대교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사천세계타악축제와 각종 축제 및 공연으로 전국 예술인들의 공연장소로 유명합니다. 또한, 부대시설로는 특산물 판매장과 야외무대, 관광안내소와 초대형 유람선 한려수도호 선착장도 있으며 연 10만 명이 찾는 관광지입니다.


 

삼천포대교공원 거북선 개관시간 안내


남해안의 경치 1번지 창선·삼천포대교와 삼천포대교 공원을 둘러보면서 사천시 삼천포 여행 즐겁게 하세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1592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상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삼천포대교공원 주소:경남사천시 대방동 681-9(도로명 주소:경남사천시 사천대로 17)

삼천포대교 공원 전화:055-831-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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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달성여행)최정산 남지장사·청련암·백련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의 승병훈련소였던 천년고찰 남지장사·청련암·백련암 여행.


대구와 경상북도 청도를 경계하는 곳에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가 있습니다. 우록동으로 불리는 우록리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이었던 사야가 김충선(1571~1642)장군의 녹동서원이 있습니다. 일본인 장수로서 조선에 귀화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사성 김해김씨 성과 이름 ‘충선’을 하사받았으며, 임진왜란·병자호란·이괄의 난에 전공을 세운 삼란공신으로 말년을 이곳에 낙향하여 안빈낙도의 삶을 살며 후학을 지도하고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곳 우록리는 사방팔방 산으로 둘린 꼭 호박 속 같은 모습이며 하늘만 열리는 별천지였습니다. 이런 골짜기에 이런 넓은 지대가 있는 게 신기할 정도며. 그래서 사슴이 뛰어노는 평화스러운 마을인가 봅니다. 산세 빼어난 곳에 대찰이 없을 리 없습니다. 이곳에도 오래전부터 천년고찰이 있었습니다.

최정산 아래 남지장사는 신라 신문왕 4년인 684년에 왕명을 받고 양한대사가 창건을 했습니다. 당시 신라 조정에서도 일찍이 이곳이 명당자리임을 간파했는가 봅니다. 지세에 문외한인 필자가 봐도 남지장사가 위치한 우록리가 명당임을 단박에 느끼겠습니다. 저도 나중에 늙어 노후를 이곳에 보내고 싶은 곳 중 한 곳으로 추가합니다.

 세상과 단절된 듯한 우록리 남지장사는 지장보살을 모신 사찰로 창건당시에는 8암자에 3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들었을 정도로 번창했습니다. 그러나 신라와 궁예간의 전쟁에서 절은 폐사하고 1263년인 고려 원종4년에 일연선사가 중창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을 개국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고려말~조선 초의 고승 무학대사도 이곳에서 수도했다합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당 유정이 이곳에서 승병훈련을 진두지휘했던 호국사찰이었습니다. 나라가 왜군의 침입으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자 승려들이 분연히 털고 일어나 승병 훈련을 받았으며 의병 우배순의 휘하 의병과 함께 그 수가 무려 3천여 명이나 되었을 정도로 승병훈련의 본거지였습니다.

 한양도성을 향하던 왜군은 청도로 들어왔으며 대적사를 불 지르고 남성현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왜장은 이곳 남지장사에 사명대사와 함께 승병들의 훈련 본거지라는 첩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대구 경상감영 공격을 잠시 미루고 남지장사를 공격하여 사찰은 불바다가 되었고 남은 전각이 하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되며 폐사되었습니다.

 남지장사

 사찰은 황폐해졌으며 1653년인 효종 4년에 인혜가 중건하여 다시금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1769년인 영조 45년에 모계, 풍흡이 다시 중수하였습니다. 모계가 중수하면서 팔공산 동화사의 북지장사와 대칭된다는 뜻으로 남지장사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현재 남지장사 당우는 1940년대 신원이 중수하였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인 대웅전과 설현당, 삼성각, 광명루, 요사와 부속암자인 청련암과 백련암 등 12동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남지장사를 들어서는 입구에 종각이 있는 빛바랜 출입문이 남지장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여겨질 정도로 퇴색되었으며 종각 옆에는 1653년과 1769년 중건과 중수를 했던 모계, 운계, 경운의 송덕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남지장사를 가운데 두고 좌청룡 우백호인양 부속암자로 청련암과 백련암이 자리합니다. 좌청룡은 백련암, 우백호에는 청련암이라 불러도 괜찮아 보입니다. 

 

청련암 오솔길

 

 눈여겨볼 건물이 청련암입니다. 청련암도 신라 신문왕 때 남지장사를 창건하면서 양한조사가 함께 세웠는데 사명당 유정이 승병훈련을 지휘하면서 이곳에서 지냈습니다. 임진왜란 때 남지장사와 함께 소실되었으며 1653년과 1714년에 중건과 중수를 하였습니다.

 또 다시 1806년 뜻하지 않은 화재로 청련암은 소실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2년 뒤인 1808년에 중건한 건물로 건물 가운데에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법당을 두고 앞뒤로 툇마루를 달았는데 이는 특이한 경우입니다. 건물의 왼쪽 앞과 오른쪽 뒤를 돌출시킨 ‘乙’자 형태의 평면배치에 많은 방이 딸린 것을 보면 아마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요사와 법당을 함께 접목한 '인법당'의 법식을 갖춘 건물이라 하겠습니다.

 청련암(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제34호)

 

 

 

 

 

 

 

 

 

 

 

 

 

 청련암 건물은 1990년 보수하면서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백련암은 비구니 수행처라 그런지 단아한 모습을 한 암자였습니다. 남지장사를 찾는다면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길에 백련암과 청련암을 함께 찾아보세요. 사명당 유정과 승병들의 함성이 우록동을 잠에서 깨어나게 합니다.

 백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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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의령여행)홍의장군 곽재우와 의령관문 의병광장. 곽재우의 정암전투 의병 승전지에 세워진 의병광장과 의령관문을 여행하고 왔습니다. 


의령을 우리는 의병의 고장이라 부릅니다. 이는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출생지가 이곳 의령이기 때문인데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그의 의병 정신을 기리는 상징물인 의병광장은 의령의 관문에 마련되어 웅장한 모습입니다. 이곳 의병광장이 조성된 곳은 함안에서 의령으로 가기 위해 남강을 건너는 정암나루가 있던 곳입니다. 이곳이 뚫리면 전라도의 곡창지대도 모두 왜적의 발아래 들어가는 중요 길목으로 곽재우 장군은 의병들과 함께 이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혜경이 이끄는 왜적을 맞아 크게 이겼던 의병 승전지입니다.

 









의병광장에는 늠름한 모습의 호령하는 기상이 하늘을 찌르는 홍의장군 곽재우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붉은 옷만 봐도 왜적들이 오줌을 찔 금 샀다는 그 모습 그대로 적진을 바라보며 남강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홍의 장군 동상은 기단을 합쳐 그 높이가 17m 크기 입니다. 양 벽면에는 정암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는 홍의장군과 17장령의 비장한 모습을 담아 부주로 새겨 놓았습니다.












곽재우와 17장령의 부조를 보고 있노라면 그 당시 전투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절로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의병광장과 함께 또한 볼거리가 있습니다. 여기부터 의령 땅에 들어 왔다는 것을 알리는 의령 관문입니다. 서부 경남과 전라도를 연결하는 의령관문은 남강천변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어울려 더욱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밤의 의령관문은 남강의 물빛과 함께 선녀가 하강하는 듯 한 날렵한 모습으로 화려한 조명불빛을 받아 낮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더한 고귀함이 넘쳐 나는 건물입니다. 의령관문의 길이는 45.17m, 높이는 12.87m 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대한민국 국보1호인 숭례문과 똑 같은 양식으로 설계를 하여 명실 공히 의령의 대표 드렌드 마크입니다.








또한 관문 건물 내부에는 곽재우장군과 17장령들의 정암전투를 묘사한 ‘정암진 승전도’와 ‘의병 창의도’ 등 그 당시 치열했던 전투를 현실감 있게 묘사를 하였고 의령을 대표하는 관광지 또한 벽화로 만날 수 있습니다. 충의와 호국정신의 발로인 의병광장을 아이들과 함께 찾아보세요. 임진년에 일어난 왜란에 나라의 운명은 경각에 달했지만 우리 민초들은 의병으로 분연히 일어나 참혹한 전장 터에서 이 나라를 지켜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하였습니다. 









의령군 의령읍 정암리 정암루로 가는 버스는 부산에서 시외버스를 이용하여 한 번에 갈 수 있어 대중교통편도 편리하다. 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합천행 직행 버스를 이용하여 의령 터미널 직전인 정암검문소에서 내리면 바로 의병광장이다. 부산 출발 오전 7시, 7시40분, 8시30분, 9시20분, 10시20분 등. 의령터미널에서 부산행 직행버스 시간은 오후 3시55분, 4시45분, 5시25분, 6시05분, 6시55분, 7시50분(막차)에 있다. 이 시간에 5분 쯤 더하면 정암검문소가 있는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의령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의병광장을 찾아가는 방법은 수시로 있는 부산 진주 마산행 시외버스를 이용하여 정암검문소에서 하차 한다. 5~10분 소요. 자가 운전시에는 남해고속도로를 이용하여 군북, 의령IC에서 내린다. 오른쪽 의령방면으로 꺾어 20번 국도를 4.4km 이동하면 남강의 정암교를 건너면 멋들어진 의령관문을 지나자마자 오른쪽 정암 방면으로 내려선다. 내비게이션 의령 정암루 입력.



2014/08/09 - (경남맛집/의령맛집)의령전통시장맛집 수정식당. 의령의 3미중 으뜸인 소고기국밥 맛있게 끓여 내는 수정식당. 여름철 보양식....... 넘맛있어요.


2014/05/22 - (경남맛집/의령맛집)충익사, 자굴산 맛집 종로식당. 대통령 맛집으로 유명한 종로식당의 소고기국밥이 진국.


2015/02/26 - (경남여행/의령여행) 부귀명당 솥바위와 정암루.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의 승전지를 기념하여 세운 정암루와 솥바위.


2014/03/13 - (경남맛집/함안맛집)군북,의령 톨게이트 맛집 전원휴게소. 고속도로 인근에서 먹는 맛있는 생선구이 전원휴게소


2013/06/29 - (경남맛집/의령맛집)의령소바. 숙취해소에 좋은 메밀로 만든 의령소바에 혼을 뺏기다.


2008/10/09 -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선생님을 만나보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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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여행/옥천여행)조헌과 칠백의총 이야기. 조헌선생 이지당을 만나다. 옥천 이지당.

조헌(1544~1592)과 칠백의사, 국사시간에 교과서에서 배웠습니다. 그 당시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조헌과 칠백의총 이야기. 그분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는 옥천 이지당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조헌선생이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라 합니다. 그럼 조헌선생은 어떤 분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됩니다. 자는 여식이며 호는 중봉, 본관은 배천, 시호는 문열공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명나라를 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조정에 길을 내어 달라며 사신을 보내옵니다. 조헌은 사신을 죽이고 전쟁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낙향하여 왜란에 대비합니다.



1592년(선조25년) 조헌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 정인홍과 함께 호서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키게 됩니다. 계룡산 갑사에서 승군을 일으킨 영규대사와 합심하여 청주성을 함락하고 많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을 겪으며 700명의 흩어진 의병을 다시 규합하여 금산으로 향합니다. 호남 순찰사 권율과 영규대사와 함께 금산을 함락하기 위해 배수의 진을 쳤지만 권율장군에게서 출병 날짜를 미루자는 연락을 받습니다.



왜군은 조헌과 영규대사가 이끌고 있는 의병의 약점을 간파하고 역습을 시도하여 조헌과 영규대사와 승병, 700명의 의병은 모두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합니다.



조헌 선생 사후인 1604년 선조는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1609년 광해군때 ‘표충’의 사액을 내렸으며. 1754년에 다시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문묘에 종사되었습니다.

 


이지당(二止堂)은 선생이 지방의 영재들과 학문을 논하던 사당으로 각신마을 앞에 있어 각신서당으로도 불렀습니다. 뒤에 송시열(1607~1689)의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는 고산항지경행행지(高山仰止景行行止)에서 따와 이지당이라 하였습니다.





1901년인 광무 5년에 인근의 4대 문중(금, 이, 조, 안)에서 정면 7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새로 세웠으며 현재 대청에는 이지당기와 이지당 강학조약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이지당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이며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이백6길 126에 위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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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삼랑진여행)삼랑진 작원관, 임진왜란때의 항전지 작원관을 여행하다.

 

부산에서 한양으로 오르는 길을 영남대로라 부릅니다. 한양에 이르는 영남대로에는 두개의 관문이 있으니 밀양의 작원관과 문경의 유명한 주흘관으로 문경새재길을 말합니다. 오늘 포스팅은 밀양의 작원관으로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 101번지에 낙동강을 끼고 양산과 밀양의 경계지점에 있습니다.

 

 

 

작원관의 역할은 관원의 숙소이며 출입자와 화물 등을 검문하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남해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는 기능을 하였고 작원진에서 낙동강을 통해 오르내리는 화물과 사람을 검문하던 곳입니다.

 



 

 

물금에서 낙동강을 끼고 굽이굽이 돌아 삼랑진에 내려서기 전에 안태마을에서 왼쪽으로 낙동강을 바라보며 현재의 복원된 작원관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작원관은 현재의 자리보다 조금 더 양산쪽으로 내려가 있었다합니다.

 

 

 

 

밀양의 작원관에 대해 알아보면 밀양시가 3억원 이상을 들여 한남문과 누각인 공운루를 1년7개월만에 현재의 모습으로 1995년 완공하였다합니다. 작원관 옆 산비탈의 양지 바른 곳에 임진왜란때 장렬히 산화한 호국영령의 위령탑도 함께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은 원동에서 삼랑진으로 신불암고개를 넘어가는 험준한 산세로 차량들도 숨이 차는지 갤 갤 그리며 힘들어 합니다. 그 당시에는 날짐승도 겨우 넘는다 할 정도로 바위도 많고 험한 곳으로 영남대로길은 낙동강을 따라 이곳 작원관지를 지나갑니다. 이 길을 험하다는 뜻인 작원잔도라 불렀습니다. 길이 너무 험하다 보니 한양으로 가던 관원들이 쉬어가던 원이 생기며 작원이라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때인 1592년 임진년 4월 왜인들이 동래성을 함락하고 물밀듯이 영남대로를 따라 작원관으로 향했다합니다. 소서행장의 휘하 마쯔우리가 지휘하는 왜군은 작원관을 공격하였고 이에 우리 조선군은 수 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밀양부사였던 박진과 그의 부하 이대수, 김효우 그리고 민관이 힘을 합해 최후까지 분전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300여명이 목숨을 잃고 패한 곳입니다.

 

 

 

 

지금도 묵묵히 낙동강이 흐르는 것 처럼 역사도 따라 흘러 갑니다. 400년전의 임진왜란이 요즘 일본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다시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후손에게는 그런 참담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작원관의  위령탑을 보며 마음을 새기는 계기가 되어서면 합니다. 자녀와 함께 봄에 이 길을 찾아가 보길 권합니다. 안태호와 천태호를 잇는 벚꽃길과 천태사등 너무 좋은 야외 나들이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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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막 칠천의 메아리로 아이라이너 영상관에서 상영하는 칠천량 해전을 영상화한 모습. 수군이 몰숨을 걸고 싸웠던 그당시를 영상으로 꾸며  전쟁의 참상를 생각해 보는 공간이다.
 

 

 

 

☞(경남여행/거제도칠천도여행)임진왜란 패전지  칠천도. 패전도 우리의 역사 원균의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을 만나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란 없다" 지금의 화두에 가슴이 와 닿는말이다. 거제도 칠천도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 칠천량 해전으로 불리며  칠천도와 거제도 사이에 흐르는 지금의 칠천교가 놓여져 있는 부근이다. 이곳 일때가 정유재란때 원균이 이끌던 조선수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어이없게 참패를 당한 현장이다.  칠천량 해전은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에게는  유일하게 패배하였던 해전으로 그로인해 우리의 수군이나 조선백성은 많은 어려움과 핍박을 받았다.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군선을 버리고 뭍으로 후퇴하다. 쫒아 온  왜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 칠천도 해전으로 우리 조선 수군은 군선이 160척, 1만여명의 조선수군이 칠천량에서 장렬하게 전사를 하였다. 통제사 원균이 선조의 명으로 전세의 불리함을알면서 출전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과 조선수군의 허망한 죽음이 헛되지 않아 통제사로 다시 복귀한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에서 남은 군선 12척을 가지고 왜군의 군선 133척을 통쾌하게 섬멸시키며 수장시키는 쾌거를 이룬다. 이는 칠천도 해전의 패배로 땅에 떨어졌던 사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거제도 칠천도에 무슨일이 일이.... 칠천량 해전의 쓰라린 기억을 다시한번 생각하고  칠천량 해전으로 숨져간 우리 조선수군의 혼백을 위로하는 추모공원이 올해 조성되었다. "칠천량 해전 공원"이며 거제시 하청면 연구리 산 85-4번지 일원에 1만 2519㎡ 면적에 칠천량 해전에서 전몰한 조선수군의 추모와 해전의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칠천량 해전 전기관은 모두 8개의 테마로 꾸며져 있다. 역사적 배경과 그 과정 그리고 결과등을 지금 부터 소상하게 알아보자.

 

 

옥게마을에 먼저 주차를 하여야 한다. 칠천도에는 캠핑장등 많은 시설이 만들어져 있다.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좌우로 바다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임진왜란때 조선수군의 군선인 판옥선을 본따 만들었다는 칠천도 해전 전시관 건물. 선미와 후미를 알 수 있다.




칠천량의 전망대로 거제도 본섬의 모습이 조망된다. 1597년 7월 16일 새벽 이곳에서 칠천량 전투가 벌어진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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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막은 희망의 메아리로 작품명은 "평화의 바다" 조형물이 광장에 만들어져 있다. 칠천량 해전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조상의 인내와 끈기,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담고 있다.


 








 

 

7막 치유의 메아리 추모의 바다에서는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조선수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의 벽과 제단을 만들어 그 당시 순국한 1만여명의 우리 수군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1막은 역사의 메아리란 주제로 7년간의 임진왜란 역사와 칠천량 해전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다.  

 












 

2막은 기억의 메아리로 "조선수군을 보다"로 꾸며져 있다. 조선수군의 중추적인 군선이었던 판옥선의 단면과 구조를 연출하였고 함선 안의 생활을 옅볼 수 있다.



























 

3막은 회한의 메아리 "칠천량 해전의 배경"으로 꾸며져 있다.그당시 승전을 거듭하던 이순신장군을 몰아내기 위해 요시라의 반간계 장면을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볼 수 있고 선조가 이순신을 파면과 하옥을 하고 원균을 삼군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가덕도와 부산포의 패전도 알아 볼 수 있도록하였다.
























 

4막 아픔의 메아리 "칠천량에서의 패배"를 테마로 꾸며져 있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파괴된 함선의 잔해와 바다로 내몰린 조선수군의 끔직한 모습을 모형과 영상으로 접할 수 있다.

 


 












5막은 부활의 메아리 "칠천량 해전의 결과"로 꾸며졌는데 전쟁으로인해 우리 백성들이 처한 처참한 상황을 볼 수 있다.


















앵산 정상에서 본 칠천도




칠천도에 연결된 다리 부근이 칠천량이다.



 

이곳 칠천량 해전 전시관을 방문하면 임진왜란때 우리 수군의 상황과 칠천도 해전 그리고 명랑대첩의 역사적인 의미와 배경을 소상히 알 수 있다. 역사의 교육장으로 임진왜란의 상황을 자라나는 아이에게 들려 준다면 그 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겠다. 거제도 방문시 자녀와 함께 방문하여 임진왜란과 칠천도해전을 다시한번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보자.

 

 

◆칠천량 해전 전시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09:00~18:00

휴관일: 매년 1월1일, 매주 월요일 ,설날및 추석당일

(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휴관)

관람료: 어른:2천원. 청소년,군인1천5백원. 어린이 1천원

주차장: 무료

 

칠천량해전공원홈페이지 발췌




칠천량해전홈페이지 발췌




칠천량해전홈페이지 발췌




네모안이 칠천량으로 추정 되는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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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 금정산성을 만리장성에 비유, 금정산 남문

 

금정산에는 부산의 만리장성인 금정산성이 있다. 산성의 총 길이만도 장장 18km로 동래산성으로 불렸던 금정산성은 동서남북으로 사대 성문을 두고 있는데 오늘 포스팅한 남문은 고당봉에서 직선거리로 가장 먼곳에 위치를 하지만 고당봉을 가장 잘 바라 볼 수 있는 곳이다. 남쪽으로 만덕과 백양산을 연결할 수 있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다. “금정산성부설비”의 기록을 보면은 “1808년 초봄에 기둥과 들보를 100리 밖에서 옮겨오고 벼랑 끝에서 험준한 바위를 깎아내어 메고 끌어당기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 들어서 만사람이 일제히 힘을 쓰니 149일 만에 남문의 초루가 완성되었다”고 되어 있다. 금정산성 남문은 제2망루와 망미봉 사이의 움푹하게 꺼진 곳에 절묘하게 자리를 잡았다. 복쪽인 금성동 마을과 만덕마을 방향에만 완만한 경사를 이루지만 동서는 깎아놓은 듯 바위들이 옹립하여 사실 험준한 산세를 이룬다. 금정산의 그많은 바위를 마다하고 그것도 100리 밖에서 이 무거운 바위들을 밀고 당기고 하였을 것을 생각하니 옛 선조들이 만든 금정산성을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꼭 물려 주어야 할 것 같다. 남문은 평거식문으로 문의 상부에 세운 누각은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꽤 규모가 큰 누각이었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 금정산성 남문은 1808년에 완공, 금정산 남문

 

금정산의 산성중에 가장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 남문으로 만덕동과 연결된다. 서문은 금정산성중에 유일하게 계곡을 끼고 솟아 있는 성문으로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다. 그리고 멋스럽게 만들어졌다.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 숱한 외침으로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1703년(숙종23년)에 축성되었다. 그러나 금정산성은 신라시대때 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1701년(숙종27년)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로 착공이 되었다하며 1807년(순조7년)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동문을 준공하였고 그 이듬에 서문, 남문, 북문에 문루를 세웠다. 세월이 흘러가며 일제강점기때 일인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2년 부터 동, 서, 남문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에 일부 마무리가 되었다. 1989년에 북문을 복원 준공하여 4대문중 가장 마지막에 복원이 된 상태로 지금은 산성에 대한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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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


 예로 부터 우리나라에는 외세로 부터 많은 침입을 당하였다 .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참담함을 안겨준 전쟁이 임진년에 일어난 임진왜란(1592~1598)이다. 이이의 10만 양병설의상소도 무시하지만 않았서도 우리나라는 이런 참혹한 수모를 당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 당시 왜놈과 가까운 동래(지금의 부산)는 왜적의 침입을 막는다고 막아보지만 종과부적으로 왜적에게 짓밟혀 버리게 된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1592년 임진왜란 왜적에 놀라 박홍과 원균 성을 버리고 도망.



도요토미히데요시의 명령으로 4월13일 대장  '고니시 유키나와가'와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가 병력 1만8700명과 병선 700척을 이끌고 영도에 상륙을 하였다. 그 광경을 보고 놀래 자빠진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투한번 치르지 않고 보유하고 있던 배를 수장시키고 식량창고에다 불을 지르고 도망을 치고 그와 덩달아 거제도 경상우수사 '원균'도 우수영을 부하장수에게 맏겨둔 후  혼자 살기위해 도망을 쳐 버리니 왜적은 손쉽게 부산진성으로 진격한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 부산진성 정발장군 모숨을 버리다.



그때 부산진성을 지키고 있던 장수는 지금 초량로타리에 동상으로 모셔져 있는 부산진 첨사 '정발'장군이었다. 왜적이 정발장군에게 '명나라를 칠려고 하니 길을 내어 달라'는 말을 하였다. 정발은 단칼에 '내어줄 길이없다'며 일축하고  목숨을 걸고 군관민과 합세하여 끝까지 싸웠지만 정발장군은 적의 조총에 절명하시고 부산진성의 군관민 3000여명은 몰살하였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 송상현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며 순국.


그 후 4월15일 동래성으로 진격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문루에 올라 있었다. 이를 본 소서행장은 송상현에게  '싸울테면 나와서 싸우고  그렇치 않으면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다. 이에 장군은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 하며 군관민 모두 합세하여 장렬히 전사하게 된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지하철 공사중에 발견된 동래읍성 해자.



현재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지하에는 지하철 공사도중에 우연히 발견된 동래읍성 해자의 흔적을 전시하고 있다.  지하에서 발견된 동래읍성 해자의 흔적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 당시 동래읍성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알 수 있다. 한국판 킬링필드의 모습을 연상하게하는 동래읍성의 해자, 본성에서 약 30m 떨어져 땅을 1.7m~2.5m 파고 그 폭을 5m 정도로 돌을 쌓아 축조하였다. 지금 해자 내부에는 그 당시 참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칼에 베이거나 두개골에 구멍이 슝슝 뚫어진 인골과 칼, 화살촉, 목궁등 무기류가 해자에 그대로 묻혀 있는 모습으로 전시를 되고 있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



안내도의 기록을 보면 "그당시 일본의 기록인 '길야일기(吉野日記)'에는 여자던 아이들과 개, 고양이 할것없이 움직이며 피를 흘릴수 있는 모든 것들은 살해하였다고 되어 있다. 우리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송상현 부사를 쫒아 성가운데로 모여든 백성들이 같은 시간에 피바다로 화하고 쌓인 시체 밑에 몸을 던져 천백명중에 한 두명이 삶을 보존할 정도였다하니 우리의 희생이 얼마나 많았는지,전쟁이 끝나고 생존자는 4월15일 이날에 친족의 제사를 지내고 통곡을 했다고 되어 있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동래읍성해자 자녀와 함께 역사 교육 장소.


그 분들의 원한이 뼈에 사무쳐 영혼이 구천에 떠도는 것일까. "임진왜란 후 17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은 '동래맹하유감'이라는 글에서 4월15일 새벽에 집집마다 곡 소리가 일어나 천지가 소슬하고 처참한 바람이 숲을 진동하기에 놀라서 나이 많은 아전에게 물으니 이날이 임진년 성이 함락된 날이라 하였다". 수안역 지하에 전시된 '동래읍성해자' 자녀와 함께 찾아 보세요. 역사교육과 함께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던져 지켜온 현장을 보여주어 자녀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가르쳐 주세요. 입장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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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배내골은 물맛이 시원한 배맛이라하여 배내골로 불리는 설과 옛날에 이곳에 돌배나무가 많았다하여 배내골로 불리는 두가지 설이 있다. 그만큼 배내골은 영남알프스에서 밀양의 쇠점골과 함께 최고의 계곡을 형성하고 있다. 배내골 상류에는 백련계곡과 주암마을이 있는 철구소로 나누어진다. 백련계곡은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 시살등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으로 천혜의 심산유곡을 빚고 있다. 이를 두고 청수골과 백련골로 불리는 청석골그리고 간월재로 이어지는 왕봉골로 영남알프스 계곡을 대표한다고 해도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산이 높고 깊으면 그 품안은 얼마나 넓은지 이곳 백련이 그러하다. 그러나 최근에 이 아름다운 계곡을 신이 시샘을 하는 것일까?. 등산로를 통제한다하여 청수골계곡이 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산세에 비해 영축산을 끼고 흐르는 계곡이 그리 발달된 편이 아니지만 금강골은 포 사격장이 있는 부대에 포함되어 민간인은 출입이 통제되어 계곡의 구실을 못하고 있고 반대쪽의 청수좌, 우골이 영축산의 유일한 계곡이다. 이곳마저 청수골산장에서 사유지란 명분으로 출입을 막고 있어 영축산 계곡을 찾는 등산 동호인들에게 하루빨리 돌려주길 바래본다. 이번 영남알프스 코스는 시살등에서 흘러 내린 능선으로 최근에 와서 각광을 받고 있는 능선이다. 이 능선을 올라 자장암으로 하산을 하는 코스를 잡았다. 태봉과 죽전마을의 중간에 있는 배내골 버스 종점을 출발해 태봉교를 건너 청수골 산장 입구에 걸쳐있는 파래소2~경주이씨묘~장선리 삼거리~전망대~헬기장~통도골 갈림길~신동대굴(~다시 통도골 갈림길)~시살등(981m) 정상~바위전망대~안부 이정표(통도사 임도) 삼거리~임도~자장동천~자장암~통도사를 거쳐 통도사 입구 매표소에서 마무리한다. 전체 산행거리는 15.5정도로 순수 산행시간은 4시간30~5시간 걸린다. 휴식시간을 뺀 시간으로 산행시간은 개인의 체력 등에 의하여 가감된다.




신동대동굴













산행은 배내골 버스 종점에서 차를 내리면서 시작한다. 원동 쪽으로 100m쯤 가서 왼쪽 태봉교를 건넌다. 울산과 경남양산의 경계지점으로 상수원보호구역이라는 안내판이 무색하게 이 일대에는 펜션과 같은 숙박시설, 음식점이 많이 설치되어 있다








태봉교를 건너면 왼쪽으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파래소유스호스텔의 배모양 건물이 배내골에 정박(?)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넓은 길은 신불산자연휴양림 하단지구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가계 된다. 갈림길에는 울주군이 조성한 하늘억새길 이정표가 서 있다. 1쯤 올라가면 청수골에 설치된 파레소2교로 최근에 세워진 다리와 만난다. 최근 등산로 통제로 논란의 중심이 된 곳이다. 여기서 파래소2교를 건너지 말고 다리 직전에 오른쪽 쇠사슬 차단 줄을 지나 축대가 쌓인 길로 올라간다. 100m 정도 올라가면 너른 공터 끝지점에서 위쪽으로 능선을 따라 산길이 열린다.능선에 가르마를 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처음부터 길은 가파르다. 15분 정도 올라가면 경주이씨 묘를 지나며 길이 잠시 완만해진다. 이곳부터 큰 소나무인 홍송이 놀랠 정도로 굵고 튼실하다. 양팔을 벌린 장정 둘이서도 모자랄 굵기에 혀를 내두른다. 무덤에서 10여 분 가면 산죽밭을 지난다. 왼쪽 멀리 나무 사이로 신불산과 영축산이 언뜻 보인다. 다시 10여 분 더 걸으면 이정표가 선 삼거리다. 오른쪽 길은 장선리(1.5)로 가는 길로 얼음골 능선이다. 시살등(1.9)은 능선 따라 직진이다. 능선 오르쪽으로는 배내골 건너 재약산과 향로산 등이 보인다. .










상수리나무등 하늘을 가리는 숲을 뚫고 올라서면 블록으로 만든 헬기장이 나온다. 길은 직진해서 봉우리를 왼쪽으로 에돌아간다. 5분가량 더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시살등 방향은 왼쪽으로 50m 가면 다시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다. 이정표에는 올라온 방향으로 '장선팜스테이마을', 시살등 방향으로는 '양산 통도사'만 표시돼 있다. 오른쪽은 장선리로 가는 하산길이다. 이 계곡을 통도골이라 부른다. 장선에서 통도사로 넘어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의미이다. 이곳 통도골 초입 큰 암벽 밑에 신동대굴이 있다. 누군가가 이정표 위에 화살표와 함께 신동대동굴을 표시해 두었다. 5분 정도 가면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나타난다. 그 아래 제법 너른 동굴이 신동대굴이다. 옛날에 신동대란 사람이 이 동굴에서 살았다. 그는 신통력으로 도술을 부렸는데 임진왜란등 전란에 참가를 하여 신통력으로 많은 왜군을 무찌르다 전사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신동대가 살았다하여 신동대굴이라 부른다.














동굴에서 삼거리로 돌아온 뒤 다시 능선을 따라 직진한다. 10분 정도 오르면 숲 그늘을 벗어나고 시살등 정상이다. 정상의 조망은 거칠 것이 없다. 가까이 있는 영축산은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고 그 외에는 향로산~재약산~천황산~운문산~가지산~간월산~신불산으로 이어지는 영남알프스의 주요 봉우리들을 모두 볼 수 있다. 시살등의 유래는 임진왜란때 단조성에 있던 아군과 왜구가 이곳에서 비오듯 서로 화살을 쏘았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하며 신평에서 보면 이 능선이 활 등처럼 보인다하여 그리 부른다한다. 올라온 방향에서 오른쪽으로는 오룡산이 보이고 경부고속도로 건너 천성산 능선이 길게 누워 있다. 오른쪽 오룡산 방향으로 능선을 따라간다. 이번 산행에서 최고로 뛰어난 조망을 보여 주는 구간이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한여름의 더위를 날려버리고도 남음이 있다. 곧 숲으로 들어선 뒤 10여 분 완만한 길을 가면 오룡산 쪽으로 탁 트인 바위전망대가 나온다. 기막힌 조망을 마지막으로 안겨준다. 이곳을 내려서면 곧 이정표가 서 있는 안부 삼거리다. 직진하면 오룡산으로 가고 하산로는 이정표의 '통도사 임도(1.3)' 방향 왼쪽 내리막이다.




자장암의 모습으로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하기 전에 이곳에서 움막을 짓고 수도를 하였던 곳으로 자장율사의 신통력을 옅볼수 있다. 암벽 바위에 검지손가락을 눌러 구멍을 뚫어 개구리를 살게하였는데 금와공으로 금와보살이라 부른다. 


숲이 짙어 흙길이 습기 찬데다가 돌이 많아 미끄러지기 쉬운 내리막은 초반부터 가파르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마른 계곡을 건너는 등 산길 찾기에 유의를 한다 마지막에 계곡을 왼쪽으로 두고 가면 임도로 내려선다. 왼쪽 임도 길은 금수암을 거쳐 통도사로 가지만 답사로는 자장암 통도사로 오른쪽이다.






콘크리트 임도길을 걷다 다리를 건너 이어진다. 흙길 임도를 7~8분 걷다가 길이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지점에 너른 터가 있다. 답사로는 여기서 왼쪽 내리막 산길로 들어선다. 이정표가 없는 지점이라 유의해서 한다. 일단 내려서면 20여분 동안 길은 완만하게 이어진다. 갑자기 산길은 급하게 내려서며 오른쪽 아래로 자장동천 계곡이 보인다. 계곡에 내려서면 왼쪽으로 너른 길이 연결된다. 오룡산에서 자장암으로 내려서는 하산 길도 이곳에서 만나는 지점으로 맑은 계류가 암반을 타고 흘러간다. 계곡을 건너 15분 정도 넓고 편안한 길을 걸어 내려가면 자장암 입구다. 여기서부터는 도로를 따라간다. 서축암 갈림길 지나 600m가량 더 가면 표전교를 건너기 전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차단봉이 서 있는 길로 들어선다. 계속 내려가면 통도사가 나오고 여기서 20분을 더 걸어가면 통도사 입구에 도착한다.





들머리인 배내골 백련마을로 가려면 부산에서 일단 언양으로 가야 한다. 노포동 터미널에서 오전 630분부터 20~30분 간격으로 운행. 50분 소요. 배내골로 들어가는 버스는 KTX 울산역, 언양, 석남사 등 출발지가 제각각이다. 석남사에서 출발하는 버스 편이 오전 645, 815, 1020(10시경 언양시외터미널 후문 옆에서 버스를 탈 수 있다) , 11, 오후 210, 330분 등에 있다. 20분 소요.


산행을 마치는 통도사에서는 정면으로 200m 정도만 걸어가면 신평 버스정류장이 있다. 여기서는 언양에서 출발하는 시외버스를 타고 노포동 터미널로 가거나 정류장 인근에서 명륜동까지 운행하는 양산 12번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먹을만한 집

영남알프스 산행을 끝내고 하산을 한 터라 뱀 나올 것 같은 풀만 먹기에는 원기 보충이 안 될 것 같아 신평시장으로 찾아간 다슬기 전문점 옥석(055-382-8882)”이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찾아간 옥석은 관광지이지만 평일이고 시골로 늦은 오후라 그런지 조용하다.






안하나 하면서 문 앞에 서성이니 문이 열린다. 영업합니까 하고 물어 보니 들어오란다. 시원한 국물이 일품인 다슬기탕을 주문하는데 두종류라 맑은 국물과 다슬기찜, 주저없 다슬기 찜을 시키고 지인은 맑은국물을 주문한다.

다슬기찜 이름이 생소하다. 아마 다슬기도 지방에 따라 먹는 방법이 다른 것 같은데 다슬기 찜이 아마 들게 가루를 넣어 묽은 흰죽처럼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구수한 것이 예전에 함 먹어 본 기억이 있다맑은 국물은 충북의 영동, 황간에 가면 항상 먹는 그런 국물이 아닐까 싶다. 잠시 뒤 나오는 다슬기국과 찜을 보니 예상은 적중. 그런데 이곳의 국은 정구지가 들어가 재첩국처럼 느껴진다.

 다슬기찌무 7천원, 다슬기 맑은국물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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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읍성지(東萊 邑城址)

동래읍성은 현재의 동래 일원 즉 복천동, 안락동, 명륜동, 칠산동, 명장동 일대에 걸쳐져 있는 성으로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안락로타리의 충렬사 뒤산인 동장대에서 인생문를 거쳐 북장대의 마안산으로 연결되고 동래향교 뒷산의 낮은 산등성이를 전부 포함하며 현재 동래시장이 있는 평탄한 곳까지도 여기에 포함된다.


 




산성과 평지성의 형식을 접목하여 장점을 이용한 평산성의 형식으로 쌓았다. 삼한시대에부터 부분적으로 성의 형태를 갖추어진 것으로 보지만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보이는 현종12년인 1021년에 동래성을 수리한 것으로 나와 있다.
1387년 고려 우왕13년에 박위가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동래부는 대일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관아의 규모도 키우고 격식 또한 높혔다. 그래서 정3품의 부사를 두어 관할하게 하였는데 이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함이였다.

 



1592년인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부산진성과 함께 제1공격목표를 정했다한다. 이에 동래부사 송상현은 동래성을 사수하기 위해 민관군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를 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성은 허물어진채로 방치되어 오다가 1731년 영조7년에 와서 정언섭에 의해 기존의 성보다도 규모가 큰 성을 다시 쌓았다한다.
이때 쌓았던 성의 흔적을 토대로 지금 동래읍성을 새로 복원하게 된 것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이 3.8km, 읍성에는 사대문인 동,서,남,북문과 인생문, 암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한다. 





동문을 지회루, 서문을 심성루, 남문을 무우루, 암문을 은일루라고 하였다. 동래읍성중 평지에 있었던 남문은 위치로 보아 중요하게 여겨 익성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과 뒤쪽의 주조문의 이중구조로 되어있었다. 일제강점기때 시가지정비계획에 의해 평지에 있던 성벽은 철거되고 마안산등 일부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가 북문, 북장대, 동장대. 서장대, 인생문이 복원되었고 치성과 여장등이 보수 또는 수리중이다.



동래읍성의 장대중 하나인 북장대는 1737년 영조13년에 좌천동 동구 도서관 옆 증산 위에 세워졌다가 20년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그때의 장대는 없어지고 1999년 현재의 북장대는 복원이 되었다. 1870년 고정7년에 동래부사 정현덕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벽과 문루등을 고쳐 쌓았는데 서장대를 세워 장수의 지휘와 주변 경계를 강화하도록 하였다한다.



북장대는 읍성중에 가장 높은 위치에 있어 성내외에 있는 군대를 쉽게 지휘할수 있었으며 6개의 문중 하나인 인생문은 임진왜란때 이곳 인생문으로 피난을 위해 성을 빠져나간 사람은 모두 목숨을 건졌다하여 사람을 살린 문이라하여 인생문으로 부르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이 성문을 굳게 닫고 문루에있는 송상현을 보고 소서행장이 길을 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왜구는 명나라를 칠려고 하니 조선은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하였는데 정발장군이 길을 빌려 줄 수 없다하며 반대하여 종과부적과 조총으로 인해 부산진성은 함락되고 그 길로 동래성으로 쳐들어 왔다고 합니다. 



소서행장이 송상현에게 "싸울테면 나와서 싸우고 그렇치않으면 길을 빌려달라"고 하니 송상현이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는 답글로 결연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송상현의 그 결연한 의지도 군사의 열세와  조총으로 중무장한 왜적을 이길수는 없었습니다. 동래성은 함락 되었고 송상현은 동래성과 끝까지 함께 하다가 순절하였습니다. 그 역사의 성인 동래읍성 주위로는 볼거리도 많이 있습니다. 송상현과 정발장군등 숱한 선열들을 모신 곳인 충렬사가 있으며, 복천동고분군, 동래향교등 문화유적과 함께 역사성도 많은 곳으로 자녀분과 주말에 방문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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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기장여행)기장 죽성 해송 국수당과 왜성. 멋스러운 소나무가 어울리는 바닷가 기장 해송 국수당과 왜군이 쌓았다는 죽성왜성.

부산시 기장군 기장군청에서 죽성리로 나가는 도로가 있다.
이곳을 따라가면 처음으로 바다와 만나는 곳이 죽성리로 이곳은 조선조 고산 윤선도가 해남으로 떠나기전 7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였던 곳으로 황학대라 불린다.
황학대 언덕빼기에 특이한 소나무를 찾을 수 있다.
이곳 마을에서는 국수당으로 할배신당을 모신 곳이며 흔히 당산으로 부른다.
여섯그루(필자의 확인으로는 다섯그루)의 소나무가 마치 한그루로 보이는 특이한 소나무로 수령은 300년쯤 보고 있다.
높이는 15m정도이며 소나무의 둘레 직경인 수관은 30m로 가지가 아래로 쳐져 있어 하나의 꽃봉우리처럼 보인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이곳이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국수대가 있던 곳으로 국수당이라 한다.
국수대는 국내에 두군데 서해안과 이곳의 죽성리 국수당으로 국가의 위급시 국가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였던 제를 올리던 장소라 한다.
해방이 되면서 국수당인 이곳에 죽성리 마을 어부의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제와 당제를 지내게 되면서 국수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곳과 서로 마주보고 있는 죽성리 왜성은 죽성리 마을 뒷산에 남산봉수대가 있어 봉대산이라 부른다. 동쪽의 죽성리로 내려오는 능선에 임진왜란때 왜장인 구로다 나가마사가 1594년 5월 왜장 모리 데루모토 이하 20여명의 장수에게 명하여 쌓았다는 성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막고 남해안에 장기간 주둔하기 위한 포석으로 쌓은 왜성중의 하나이다.
둘레가 약960m이며 높이는 4m, 3단으로 축성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이성을 기장성으로 부르는데 일본에서도 죽성리 왜성처럼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산성이 없다하여 일본의 고고학자와 학생들이 자기네 산성의 축성법을 연구하기 위해 많이 찾는 곳이다.
































































찾아가기

부산시청앞에서 출발하면 왼쪽으로 꺽어 동래방면인 연산교차로 방향으로 4.8km 내려가면
연산교차로와 만나고 충렬사 방향으로 직진한다. 충렬사앞의 금사교차로와 만나고 여기서 반송로 반송 도는 기장방면 우측도로로 11.5km 이동한다. 도시철도 안평역을 지나고 고개를 넘어면 기장읍, 직진하면 65번 고속도로를 지나고 차성로와 만난다. 기장군청앞의 차성로를 따라가면 신천마을, 신앙촌 후문을 지나고 죽성리 성당 드림셋트장이다. 시내로 돌아오는 길은 기장의 해변길을 따라 돌아 올것을 권한다. 부산 최고의 드라이브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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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남기리 정려각과 가곡리 민씨 정려각. 정절과 정려각, 옛길을 가다 만난 슬픈 이야기


시골의 옛마을을 찾다보면은 마을 어귀에 효자각 또는 열녀각을 가끔 만난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비각은 그 마을의 자랑이며
그 마을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 같아 마을 주민들의 자긍심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인지 시골 농촌을 찾아가는 길손 또한 그곳을 지날 때 면
옷깃을 여미고 마음가짐을 자연히 새롭게 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밀양에는 충과 효를 숭상하는 양반골로 마을 마을마다 자긍심이 하늘을 찌른다.
그래서인지 경부고속도로도 마을을 통과하면 시끄럽다고
밀양박씨와 손씨 문중등 밀양을 대표하는 문중들이 반대를 하여 경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와
한일합섬등 공장들이 들어올려고 해도 조용히 살고 싶다고 반대를 하여 마산으로 갔다는 이야기등
밀양은 그만큼 자존심을 가지고 사는 도시이다.



 

 그래서인지 효자와 열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분들의 이야기 또한 많이 전해온다.
상동면과 산외면은 능선을 하나 두고 각각 열녀각이 하나씩 서 있다.
모두 임진왜란때 정절을 지키기 위해 투신한 분들이다.
산외면 남기리 입구에는 정문마을이 있다.
이마을 이름도 정려각에서 따왔다.
밀양손씨 손기후의 처인 창원장씨로 친정인 창원에 있을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변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월영대에서 뛰어내려 정절을 지켰다한다.




창원장씨 열녀각은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어
안을 보니 좌우 앞면에 사군자인 매화, 난초,국화, 대나무
그리고 소나무가 그려져 있어 더욱 숙연한 마음이다






가곡리의 민씨 정려각 또한 박희량의 부인이자
삼매당 밀양박씨인 민구서의 딸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마을로 왜구들이 들이닥치자 뒷산 바위굴로 피신을 하였다 한다.
왜구들이 그곳까지 따라오자
민씨 부인은 화를 피하기 위해 바위에서 몸을 던지니
마을에서는 한송이의 꽃잎이 떨어졌다하여
낙화암이라 부르며 그 봉우리를 낙화듬으로 현재 부르고 있다.



내가곡마을의 전경과 마을 뒤의 낙화듬돠 정상아래 바위가 민씨부인이 투신 하였다는 낙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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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진산은 망운산이다. 그 산자락안에는 망운사과 화방사 두 사찰이 있다, 모두 쌍계사의 말사이며 망운산화방사는 신라 신문왕때 원효대사에 의해 보리암, 용문사와 함께 창건하였다 한다. 그후 폐사되었다가 고려시대에 들어와 진각국사 혜심스님이 순천 조계산 수선사(현송광사)에서 남해를 바라보니 항상 남해 바닷에 떠 있는 섬에서 영기가 서려 있어 이곳 망운산 연죽사의 옛 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연죽사가 있던 위치에서 조금 이동하여 영장사로 지었다. 임진란때는 왜구와 맞서 싸우는 승병들의 은거지 였고 그래서 인지 임진왜란으로 영장사는 화재로 인해 전소되고 만다. 그 후 전란이 끝나고 서산대사의 제자인 계원과 영철 두 스님이 와 마을 신도들의 도움으로 중건을 하였다. 절 이름을 풍수지리로 연꽃의 중심에 앉아 있는 자리라하여 화방사로 바꾸었다. 화방사는 여러번의 화재와 전란으로 문화재등 모든 사료들이 사라지고 없다. 1981년에 화방사는 대 화재로 인해 사찰이 전소되었지만 현재의 절 규모는 그때 전소되었던 보광전 자리에 1984년 대웅전을 중건하면서부터 사찰의 규모를 갖추었다. 그러다 보니 옛 사찰의 분위기는 반감되고 현대미와 인공미가 너무 드러나 천년고찰의 분위기는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란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승병들의 근거지로 호국사찰이었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겠다.

지금 현재의 남아 있는 건물은 거의 없고 채진루만 1638년에 계원대사가 지어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일주문을 통해서 대웅전을 올라오는 계단 왼편에 대웅전과 마주 보고 있는 건물로 임진왜란때 왜구에 의해 모두 불타 버린 것을 신도들에 의해 다시 복구되었다. 채진루는 정면 5칸에 측면 3칸으로 人자인 맞배지붕으로 건립되었다.




1638년에 계원대사가 지어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일주문을 통해서 대웅전을 올라오는 계단 왼편에 대웅전과 마주 보고 있는 건물로 임진왜란때 왜구에 의해 모두 불타 버린 것을 신도들에 의해 다시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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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의 대표적인 폭포인 대혜폭포로 명금폭포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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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가 수도하여 득도하였다는 도선굴:천연동굴로 암벽에 큰 구멍을 대혈이라고 한다. 풍수가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득도후 도선굴로 불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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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본 금오산 도립공원, 시원한 물줄기뒤로 왼쪽 금오산 현월봉이 우측으로는 칼다봉능선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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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들머리의 채미정과 금오산성의 대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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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동학 글씨체와 해운사가 도선굴과 일직선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금강동학:조선 중종대 선산 대망동에서 출생한 명필가 덕상인 고산 황기로가 쓴 초서로 금오산은 깊고 그윽한 절경임을 뜻한다한다.

구미 금오산(976m) 산행


“ 쉬자, 쉬자. 안 되겠다.”

 

“쉬었다 가면 더 못 올라간다.”

중년의 부부가 금오산을 오른다. 가장 힘든 구간이라는 할딱고개. 길 가운데 털석 주저앉은 아주머니는 연방 짜증을 낸다.

“못가겠는데 어이하노. (버럭 신경질을 내며) 저 우에 뭐가 있는데.”

“꼭대기 아이가.”

가파른 경사에다 바위면이 미끄러워 조심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들의 발걸음을 더 더디게 한다. 해발 1천m에 가까운 산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한참을 티격태격하다 바짓가랑이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금오산은 도립공원이다. 국립공원보다 볼거리나 풍광이 한 단계 아래라서 도립공원인가 싶지만 그렇지는 않다. 단지 산세가 작을 뿐. 도선굴 대혜폭포 약사암 등은 할딱고개를 오른데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해준다.

산행 전반부는 조금 가파르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오를 수 있고 하산길은 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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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굴 오르는 길은 낭떠러지를 따라 나있다. 어른 팔뚝만한 쇠말뚝을 박은 난간을 잡고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면 아찔하다

내리막이다. 가족산행이라면 정상 약사암에서 마애석불쪽으로 돌아 내려오면 무난하다. 산행코스는 주차장~채미정~매표소~금오동학~해운사~도선굴~대혜폭포~할딱고개~샘터~헬기장~금오산(976.6m)~약사암~전망대~법성사~주차장. 4시간 정도 걸린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시작되는 고려의 충신 야은 길재의 시비 앞에서 산행은 시작된다. 오른쪽에는 길재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 채미정이 있다. 채미(採薇)란 다른 왕조를 섬기지 않으려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았다는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따온 말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55호.

메타쉐쿼이아 가로수 길이 이어진다. 5분 뒤에 매표소. 케이블카 탑승장이 있다. 100m 앞에 등산안내도를 보고 돌탑 사이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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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나무 박달나무 산초나무 느릅나무 등이 등산로 주변으로 무성하게 자란다. 나무에 달린 이름표를 하나씩 확인하다 보면 금방 중턱에 닿는다.

 

금오산성 대혜문에서는 계곡을 건너지 말고 오른쪽으로 직진한다. 곧 샘터가 나온다. 지하 160곒 암반층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이윽고 해운사. 뒤로 병풍처럼 절벽이 버티고 있다. 절벽 중턱에 사람들이 서서 소리지르는 곳이 도선굴 입구이다.

조금만 오르면 도선굴과 폭포가 갈라지는 길. 도선굴에 들렀다 폭포로 간다. 도선굴은 신라말 풍수의 대가 도선국사가 득도했다는 곳이다. 낭떠러지 절벽 가운데 기묘하게 파진 구멍이다. 금오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전망대 구실을 한다. 득도는 몰라도 일주일 정도 머물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눈앞이 캄캄해질 만큼 아찔하다. 굴 입구 왼쪽에는 세류폭포라는 작은 물줄기가 떨어진다.

도선굴에서 내려오면 대혜폭포가 장관을 이룬다. 높이 27m의 수직 벼랑을 떨어지는 물줄기가 세차다. 물소리가 금오산을 울릴 정도로 우렁차다는 뜻으로 명금폭포(鳴金暴布)라 불리기도 한다. ‘자연보호운동 발상지’라는 간판이 하나 섰다. 1977년 9월 이곳을 찾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깨진 병조각과 휴지 등으로 어지러진 것을 보고 “자, 우리 청소부터 하지”하고 말한 데서 자연보호운동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폭포에서 정상까지는 2.1㎞. 먼저 15분 정도 가파른 고개를 지나야 한다. 할딱고개로 불리는 이 길은 이제까지의 산보하듯 걷던 길과는 사뭇 다르다. 금오산 등산로 가운데 가장 숨이 찬 구간이다. 허리 한 번 펼 시간도 없다. 능선 옆 바위에 오르면 기막힌 전망이 펼쳐진다. 해발 460m 지점.

전망대에서 한숨을 돌리고 다시 출발한다. 조난표지판 8번 지점까지는 거친 오르막이다. 이 지점을 지나면 경사는 다소 완만해진다. 산허리를 밟고 나가다 해발 650m 지점에 정상 1.2㎞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10분 뒤 샘 금오정. 바로 위에 마애석불과 정상 갈림길을 만난다. 왼쪽으로 꺾어 보물 제490호 마애석불까지는 10분이면 충분하다. 능선의 돌탑 전망대를 넘으면 바로 나온다. 석불은 바위 모서리에 새긴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산불조심 기간에는 마애불상으로 가는 길이 통제된다.

정상과 마애불상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철탑. 전망대가 있고 5분 뒤에 금오산성에 닿는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계단을 따라 은근한 오르막을 15분 정도 올라야 한다. 널따란 헬기장이 있다.

정상에는 금오산 현월봉 정상석이 놓여있다. 하산은 거대한 바위틈에 지어진 약사암에서 시작한다. 약사암은 가람 자체는 볼품이 없지만 자리잡은 위치가 압권이다. 작은 봉우리에 선 종각은 구름다리로 연결돼 아슬아슬하다.

구름다리 아래로 내려서는 길이 있다. 왼쪽에는 화장실이 보인다. 쭉 나가면 마애석불로 이어진다. 오른쪽에 있는 대문으로 들어간다. 좁은 마당에서 구미시내를 보고 내려간다. 눈을 들어 계곡을 훑어 내려가면 끝에 법성사가 보인다.

내리꽂는 듯한 급한 내리막. 15분 뒤 갈림길에서는 왼쪽으로. 지리산 통천문같은 바위 협곡을 지나면 다시 왼쪽 능선을 넘는다. 중간중간에 전망대가 많다.

이후에는 길이 뚜렷하다. 다시 30분 뒤 갈림길에서도 왼쪽이다. 능선을 거의 빠져나오면 무덤이 보이고 양옆으로 갈라지는 곳에서 왼쪽. 개울을 건너면 ‘등산로’ 이정표가 있고 도로까지는 15분 정도 걸린다. 금오산 입구 주차장까지는 15분 거리이다.

/ 글=김용호기자

/ 산행문의=다시찾는 근교산 취재팀 (051)500-5150, 245-7005

[떠나기 전에]

금오산의 금오(金烏)는 태양 또는 광명을 뜻하는 말이다.

금오산 대혜계곡은 구미시민들에게 태양같은 존재다. 식수를 공급하고 기름진 논과 밭, 서풍을 막아 준다. 대혜비폭이라 불리는 명금폭포는 경북 8경에 속하며 소금강이라고도 불린다.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는데 고려 때에는 남숭산(南嵩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능선은 현월봉(976m), 약사봉(958m), 서봉(851m)으로 이어진다. 정상에 초생달이 걸려 있는 모습을 보고 현월봉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도선굴, 명금폭포, 채미정, 금오산성, 약사암 등은 수학여행 가는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산이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가족과 함께 떠나보자.

도선국사, 임진왜란, 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 등 금오산에 얽힌 역사이야기를 하면서 산행을 꾸며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하산은 약사암을 기점으로 마애석불과 법성사로 두 갈래로 잡았다. 가족과 함께라면 마애석불로의 하산을 권한다.

/사진. 이창우 산행대장 www.yahoe.co.kr

[교통편]

부산역에서 경부선 열차를 탄다. 무궁화호 출발시각은 오전  5:10, 5:40, 6:20, 6:35, 6:45, 7:55, 9:10, 10:30, 철도요금은 요일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구미역에서 금오산까지는 12번과 12-1번 시내버스가 운행한다. 10분 정도 걸리며 30분 간격이지만 오후 4시 이후에는 1시간 간격으로 다닌다. 거리가 가까우므로 택시를 타도  도착할 수 있다.

구미에서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는 구미역에서 부산행 열차는 무궁화호 오후 4시56분, 5시30분, 6시41분, 8시30분, 새마을호 오후 4시59분에 있다.

원점회귀 산행이므로 자가운전을 할 수도 있겠지만 거리가 멀어 부담스럽다. 개인적으로 간다면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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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암의 범종각이 아슬아슬한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보는 맛이 그만이다. 그리고 약사암 일주문으로 들어서는 길이 다른 사찰에 비해 특이하다.  좌우로 옹립한 바위 절벽을 통과해야만 약사암으로 들어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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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딱고개와 할딱고개 전망대에서 본 명금폭포 상류, 도선굴로 돌아가는 철제 안전 시설물이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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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인 마애보살입상으로 바위모서리에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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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산 정상을 현월봉이라 한다, 정상에 초생달이 걸여 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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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선굴 옆의 폭포로 세류폭포라 하며 임진왜란 때에는 난을 피해 올라온 주민들이 칡덩굴을 잡고 바가지에 물을 담아 먹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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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산-악견산

 

  
 
[금성산 정상 아래의 절벽 . 깎아지른 듯한 바위 위에 서면 만수위에 이른 합천호가 그림처럼 쫙 펼쳐진다.]

나무보다 바위가 많은 산이 있다. 예쁜 구석이라곤 별로 없는,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들 같은 바위산이다. 그 바위들은 한가롭게 합천호를 응시한다. 능선을 따라 활엽수 그늘 아래를 걷는 산행이 조금 지겹다면 금성산과 악견산을 이어달리기 해보자. 두개라고 하지만 해발 500~600곒 정도라 크게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금성산과 악견산을 오르다 보면 못해도 세번은 ‘악’ 소리를 지르게 된다. 길지는 않지만 화끈한 오르막에서 저절로 터져나오는 신음이 첫번째이고,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합천호의 아름다움에 반해 내지르는 즐거운 비명이 두번째, 조물주가 빚은 암벽과 바위봉우리에 대한 감탄사가 그 세번째다.

두 산 중간에 30분 정도 아스팔트 길을 걸어야 하는 게 흠이긴 하지만 바위봉우리에 푹 파묻히는 맛이 이를 보상하고도 남는다.

산행코스는 회양교 앞 새터마을~밤나무 과수원~금성산(592.1곒)~대원사~합천댐 휴게소~합천댐 관광농원~악견산 등산안내도~납골묘~악견산(620곒)~492곒봉(삼각점)~광산 김씨묘~평학마을. 약 5시간~5시간30분 소요.

군내버스를 타고 합천댐 수문을 지나면 회양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기 직전 내린다. ‘봉화산 빙어가든’과 ‘금성산 슈퍼’가 있다. 플라타너스나무 앞을 지나 새터마을로 들어선다. 마을 주변은 밤나무 과수원 천지다.

미리 당부할 점은 길 가운데 떨어진 밤이라도 절대 손대지 말 것. 한 톨쯤이야 하겠지만 굳이 ‘농민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정체’란 구태의연한 표현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사방에 감시의 눈길이 많다. 요즘처럼 밤이 익어가는 시절에는 더 그렇다.

마을 공터에서는 왼쪽, 마을 끝에서는 오른쪽.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간다. 5분 뒤엔 진주 유씨 묘가 나온다. 갈림길에서 길가에 평평한 바위가 있는 오른쪽으로 간다.
  
 

밤나무 과수원을 벗어나면 소나무 숲이다. 눈 앞에 펼쳐진 바위산이 점차 다가온다. 오르막이 시작되고 도저히 한 번 쉬어야 되겠다고 생각되는 지점에 전망대가 나온다. 길쭉한 바위다. 휴식을 취한 뒤 15분쯤 오르면 너덜겅. 여기서 100곒쯤 가면 갈림길이다. 오른쪽으로 10분이면 지리한 오르막이 끝나고 능선에 붙는다.

왼쪽으로 조금 더 가면 곧 봉우리가 나온다. 바위 봉우리. 크고 험해 타고 넘을 수는 없다. 정상 아래에는 동굴이 만들어져 있다. 산죽군락 사이로 난 길로 빠져나가면 이정표가 섰다. 정상 오르는 길을 가리킨다. 철계단이 끝나면 정상. 황매산과 허굴산이 보인다.

하산은 이정표까지 되밟아 내려가 주차장 방향을 따라간다. 내려서는 길에 악견산이 정면으로 보인다. 철계단이 많다. 전망대에서 왼쪽으로 떨어진다. 15분 정도 내려가면 공터가 나오고 직진하면 불사가 진행중인 대원사다. 100곒앞이 도로.

도로에서 오른쪽 삼거리의 아래로 내려서는 길을 택한다. 여기서 합천댐 휴게소까지는 1.1㎞. 아침에 출발했다면 이쯤에서 점심 때가 된다.

휴게소에서 합천읍 방향의 도로를 따라간다. 합천댐 관광농원 앞에는 무학대사 출생비가 섰다. 150곒 더 가면 악견산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악견산은 갈림길이 몇 곳 없는데다 길이 뚜렷해 헤맬 염려는 없다. 초입에 시작된 임도를 따라간다. 납골묘를 지나면 아기자기한 등산로가 이어진다. 길 바닥에 잔 돌이 많지만 경사는 비교적 완만하다. 완만하던 길이 서서히 급해진다. 25분 정도 오르면 철계단.
   
 


[한껏 달궈진 바위 사이를 비집고 오르는 길. 시원한 참나무 그늘을 걷는 것보다 재미있다.]


뒤로 돌아보면 수문 너머로 합천호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쫙 펼쳐진다. 유람선이 한 척 떠 가자 호수는 그림으로 바뀐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가슴이 탁트인다. 땀을 훔치고 또다시 오른다. 길은 여전히 급경사. 합천호의 물을 배낭에 가득 담아 오르는 형국이다.

약간 평탄한 길이 나오고 소나무 숲이 반갑다. 10분 뒤엔 악견산성터. 다시 10분이면 악견산 정상이다. 정상표시는 바위에 둘러싸여 숨었다. 금성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정상 표지석에서는 491곒로 돼 있는데 잘못된 표기다. 이는 내려서는 길에 있는 삼각점의 높이를 착각한 것 같다.

하산길의 첫 관문은 바위틈새다. 동굴같다. 덩치가 큰 사람은 빠져나가는데 애를 먹을 만큼 좁다. 암릉구간을 지나 갈림길에선 왼쪽. 급히 쏟아지는 길이다. 잡목과 소나무 숲을 지나 잠시 오른쪽으로 빠지는 듯하다 다시 아래로 떨어진다.

정상에서 20분 정도면 벌목지대에 다다른다. 삼각점이 있다. 491.7곒지점이다. 다시 30분 정도 가면 광산 김씨묘를 지나고 곧 만나는 임도를 가로질러 직진한다. 5분이면 밤나무 과수원에 다다른다.

등산코스 마지막 부분은 길이 미끄럽다. 10분이면 도로가 나오고 평학마을 이정표가 보인다.

/ 글·사진=김용호기자

/ 산행문의=다시찾는 근교산 취재팀 051-500-5150, 245-7005.

 

<의룡산에서 바라본 악견산 금성산 그 뒤로 황매산을 확인 할 수 있다>

떠나기전에


금성산과 악견산은 따로 떼어 생각 할 수 없는 산행지이다. 바위에 걸터 앉아 바라보는 합천호의 풍광을 감안하면 초가을 산행으로도 제격이다.

각각 독립된 산으로 산행 시간이 다소 짧아 산악 동호인들에게는 많은 아쉬움이 남았는데 다시찾는 근교산취재팀에서 두 산을 동시에 오르는 코스를 소개한다.

합천읍에서 서쪽으로 15㎞ 지점에 나란히 솟아 있는 금성산은 정상 주위에 펼쳐지는 바위능선과 3개의 암봉이 합천호와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악견산, 허굴산과 더불어 합천의 삼산(三山)으로 불리며 한폭의 산수화같다.

금성산은 악견산과 함께 임진왜란때 곽재우 장군에 얽힌 전설이 있다. 악견산성에서 의병들이 왜적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왜적들이 산성을 포위한 채 장기전을 꾀하자 의병장들이 금성산 정상 큰 바위에 구멍을 뚫어 악견산과 줄을 메어 붉은 옷을 입힌 허수아비를 띄웠다고 한다. 달밤에 줄을 당기니 마치 하늘에서 신상이 내려와 다니는 것 같이 보였다. 이에 왜적들이 겁에 질려 도망쳤다는 것이다.

회양리 일대는 합천호의 수몰민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고 있으며 관광단지로 조성됐다. 들머리 새터도 신기동이라 부르며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이다.

/ 이창우 산행대장 www.yahoe.co.kr

교통편
부산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합천행 버스를 탄다. 오전 7시, 7시40분, 8시20분. 약 2시간 20분 걸린다. 8천5백원. 합천읍에서는 군내버스 평학선 노선을 이용한다. 오전 9시, 9시30분, 10시30분.

평학마을에서 합천읍까지는 오후 4시10분, 5시40분, 6시10분 등이 있다. 지나가는 곳이므로 버스시간은 다소 유동적이다.

자가운전을 한다면 삼가에서 합천읍으로 들어가지 말고 합천댐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 한다. 합천댐 회양유원지에서 합천읍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회양교를 건너고 바로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합천댐


합천댐 건너 등머리와 금성산을 확인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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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동 구봉산(구계산)아래에는 사명대사의 족적이 남아 있는 구계산 금수사란 사찰이 있다. 금수사란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은 사명대사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금수사에서 보면 바로 아래가 바다로 전망과 경치가 매우 뛰어난 사찰이었을 것이다. 6.25가 끝난후 피난민 들이 사찰 아래에 까지 올라와 터전을 잡고 있었지만 그 이전에는 꽤 깊숙한 사찰이었을 것이다.
금수사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 3.1일절에도 민족 대표 3.3인을 모시고 그외 애국독립지사 김좌진 안중근 안창호 윤봉길등 22인의 위폐를 모시고 추모 법회를 모셨다. 임진왜란과 정류재란으로 일본으로 잡혀간 우리 백성을 구하기 위해 선조는 1604년에 사명대사를 일본으로 보내게 되는 데 사명대사는 일본에 가기전에 이곳에 와 머물렀다 한다. 구계산 아래의 물맛과 뛰어난 경치를 보고는 감탄을 하며 감로금정수라 격찬을 하였다 한다. 그 후 대사의 제자가 이곳에 머물며 금수암이란 작은 움막을 짓고 현재의 금수사란 명맥으로 발전 되어 왔다. 이곳에 머물다 일본으로 건너간 사명대사는 우리 백성3500명을 데리고 귀국을 하였고 6.25한국전쟁 때에는 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난민을 모두 받아 경내에 머물게 하였고 피난민들의 수용소를 건립하기도 하여 대중들과 함께한 사찰이다..





현재는 원효대사의 법통을 잇는 원효종의 총본산이며  사명대사와의 깊은 인연으로 대중불교에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버스는 52번 86번 186번 38번 22번 금수사하차
연락처 051~467~3316


금수사 입구 계단으로 일명 108계단이다. 사진 작가들이 일몰을 찍기 위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금수사 뒷산이 구봉산이라 부르는 데 언제부터 구봉산이라 부르게 되었는 지는 모르지만 구계산금수암이란 표지석을 볼 수 있다.


공덕탑과 부도탑

금수사 일주문

일주문 안의 사천왕상

삼성각













법당의 본존불



금수사 입구에서 본 부산항. 멀리 용호동 신선대 부두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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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진지성 자성대

흔히 자성대라 불리는 부산진성은 정발 장군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동래읍성은 송상현장군, 다대포성은 윤홍신이 지켰고 여기 부산진성은 정발장군이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진 앞 바다에서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과 싸우다 종과부적으로 후퇴하여 부산진성에서 성을 사수하기 위해 성문을 걸어 잠거고 일전을 벌리지만  4월14일 전사를 하게 된다. 





그후 1593년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함락을 하여 주둔을 하며 성의 형태가 많아 바뀌었다. 일본장수 모리 테루모토가 주둔을 하며 쌓아 일본식 성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자성대가 부산진성의 외성이었다고 하며 자성대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부산진성을 모성이라 하면 외성인 자성대는
자식의 성 즉 자성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산 정상에 자성을 만들고 장대를 사용하였다는 데서 자성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임진란때는 일본 장수 고니시가 주둔을 하였다 하여 고니시성이라 불렀다하며 그후 명나라의 만세덕이 주둔을 하였고 그후 만공단이 있었는데 이때 만공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 난때는 현재의 자성대가 바로 바다와 연결이 되어 바닷물이 성벽아래까지 들어왔다한다. 그래서 외세의 침입에 가장 민감한 곳으로 추정된다.
 
그후 일제시대때 시가지정비사업으로 성의 일부가 훼손되고 자성대 앞 바다가 매립이 되어 지금은 부산을 대표하는 자성대부두가 설치되어 있다. 지금도 자성대공원에 가보면 그때 석성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높이는 최고 10m에서1.5m까지 쌓은 흔적을 볼 수 있다.1974년 시작한 정화사업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이 되었는데 진동문인 동문, 서문인 금루관,정상에는 장대인 진남루가 복원이 되어 있다. 진남루 옆에는 명나라 이여송과 함께온 천만리장군 기념비와 최영장군의 비각이 보전되어 있다.

진남대로 1974년 복원이 되었고  2층구조로 자성대공원의 정상에 있다. 현재는 출입을 할 수 없도록 쇠창살로 보호각을 설치하였다.


진동문인 동문


서문인 금루관의 모습


이 기념비는 두산위브의 포세이돈아파트 한견에 설치된 기념비로 기념비가 서 있는 이자리는 부산진성의 관문이다. 1592년 4월13일 밤에 왜적은 불시에 이곳을 통하여 부산진성을 침공하니 하룻밤사이에 성주 정발첨사는 이 성을 지키다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원래 자성대는 본성과 지성이 있었는데 이 지성이 오늘날의 자성대이다.

정유재란이 지나 우리나라에서는 자성대를 대대적으로 수축하고 첨사영을 이곳으로 옮겨 왜적의 제침에 대비하였다. 이때 사대문이 동서남북에 설치되고 성안에는 객사 군기소 장대 관청등도 설치 되었다.또 서문 양쪽에는 "남요인후 서문쇄약"이라 새긴 돌기둥이 있었다. 이말은 곧"나라 남쪽문은 들목에 해당하니들어오는 적을 경계하고 서쪽문은 적이 들어 올 수 없도록 단단히 자물쇠를 잠궈놓으라 "는 뜻으로 자성대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진동문





영가대의 모습입니다. 영가대는 1614영 광해군때경상도 순찰사 권반이 부산진지성 서쪽 해안에 선착장을 축조하면서 퍼 올린 토사가 쌓여 작은 언덕이 생겼고 그 언덕위에 8칸의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어 조성한 곳으로 누각을 짓고 1624년 인조때 선위사 이민구가 이곳에 파견되어 와서 권반의 고향인 안동의 옛이름인 영가를 따서 영가대라 하였다. 1617년 광해군 9년 통신사로 파견된 오윤겸이 처음 영가대에서 일본으로 파견 된후 1811년 이루 순조때까지 통신사 일행이출발하여 돌아 오던 장소로 안전 항해를 위한 해신제를 올리는 장소였다.  그러나 1910년 경부선 철도의 부설과 부산 항만의 매립공사로 소실된지 90년만인 2003년 9월25일에 복원하여 준공을 하였다 한다.







영가대 내부의 모습이다.


자성대 컨테이너 부두가 앞을 가로막고 그 뒤로 보이는 산이 영도의 봉래산이다.

현재는 도심으로 둘러 쌓여 아파트와 도로가 밀집되어 있다.





조선 통신사란1607년인 조선 후기에 일본 에도막부의 요청에 의해 1811년 까지 열두차례에 걸쳐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통신이란 신의를 교환한다는 뜻으로 조선국왕이 일본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조선 국왕의 공식적 외교사절이었다.

진남대로 천만리 장군의 기념비와 함께 서 있다.










진남루 아래에서 산책을 즐기는 주민들. 


충장공 천만리 장군 기념비. 임진 왜란의 일등 공신인 천만리 장군은 중국 영양사람으로 자는 원지 호는 사암으로 1592년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원병의 영양사로서 이여송과 함께  출정을 하여  평양 곽산 등시에서 전공을 세웠고 정유재란때에는 마귀 장군과 함께 와 울산 동래등의 전투에 싸웠다. 그 후 명나라로 원군이 철 수를 할때 천만리 장군은 조선에 머물러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충장공이란 시호와  화산군에 봉책하였다.







서문 성곽 우주석으로 부산 광역시 지정기념물 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돌기둥을 세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어나 임진왜란 후 부산진지성을 축성 할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돌기둥에는 "남요인후 서문쇄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국경이라, 서문의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뜻이라한다. 원래 부산진 지성 서문자리였던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것을 1975년 부산진지성 복원공사때 이곳 서문 금루관에 좌우 기둥석으로 사용을 하였다 한다. 좌측272m, 우측277m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듯이 강직하고 총렴한 장군으로 왜적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1316년 고려 충숙왕3년에 출생을 한 최영장군은 공민왕때 대호군이 되어 내란 과 왜란에 참가를 하여 평정을 하고 홍산싸움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러 왜적은 최영장군의 장군기만 보면은 벌벌 떨 정도로 무서워 하였다 하며, 그후 "백수최만호"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해안의 바닷가에가면은 최영장군의 사당을 볼 수 있다. 민간신앙으로 승화되어 그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며 무속인들 사이에서도 최영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사량도, 감만동,수영동 영도 자성대등 여러곳에서 그의 사당을 볼 수 있다. 자성대에서는 음력 5월5일인 단오날에 그의 제사를 지낸다 한다 

그의 영정을 모신 자성대의 사당 내부로 철문으로 닫혀 있다.

서문과 동문은 복원이 되어 있지만 북문은 복원이 되어 있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북문이었다는 흔적만 볼 수 있는 안내석으로 지금 현재는 많은 주민들의 휴식처로 자성대 공원으로 부르고 있다.
  


북문으로 올라 진남대로 올라 갈 수 있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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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기념관)

(사명대사 생가터인 유적지는 4만9146㎡의 부지에 사당인 숙청사,어린 유년기를 보낸곳을 육영당, 그리고 거처를 하던 사랑채를 사명당으로 각각 복원하였다 합니다)

(경남여행/밀양여행)사명대사 생가와 기념관. 사명대사의 고향 마을인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 댕겨 왔습니다.


1992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됨
소재지: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번지
연락처:055-359-5647
사명대사는 조선 중종 39년인 1544년에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풍천임씨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 납니다.
사명당이 태어난 고라리는 풍수지리설에 의 한 명당으로 주변에 하서산에서 이어진 능선이 영취산 종암산으로 흘러내린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고라리에서 그의 조부 때 부터 터를 잡아 살았는데 사명당은 커면서부터 매우 독특하였던 어린이 인 것 같습니다.




“번뇌를 하지 않고 쓴 글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하며. 부모님이 세상을 떠 자 그는 명종14년인 1559년에 김천의 황학산 직지사로 찾아가 신묵대사에 의해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후 그는 또다시 금강산의 보현사에 찾아가 서산대사의 제자가 됩니다. 1592년 사명당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를 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승문을 나와 승려들과 규합하여 평안도 순안으로 가 스승 서산대사가 이끄는 승병과 합세를 합니다. 그는“의승도 대장”이 됩니다.
여러번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또한 1593년 명나라의 구원군과 함께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는 전투에서도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번 왜구의 적진으로 찾아가 왜군의 상황을 염탐하기도 하고 휴전협정의 담판을 벌이기도 합니다.
사명당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선조37년인 160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적장과 담판을 하여 전쟁 중에 잡혀간 백성 3000여명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쾌거도 올립니다.
8개월간 일본에서 머문뒤 돌아와 그는 모든 공직을 버리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수도에 전념하였다 합니다.
그후 그는 해인사에서 입적하게 되는데 광해군이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내렸다 합니다.

지금도 해인사에 가면 홍제암이란 암자가 있습니다. 여기서 입적한 사명당의 시호에서 따 왔다 합니다. 사명대사의 부도탑도 현재 홍제암에 있다합니다

사명대사 유적지인 기념관과 생가지에서는 최근까지 입장료 2000원을 징수하였는데 지난 10월24일 입장료를 폐지하고 무료관람을 실시하고 있다합니다. 우리 부산의 충렬사와 대조가 됩니다.

*생가터 둘러보기









*기념관 둘러보기






 찾아가는 길: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밀양 청도 방향~창녕 밀양 24번~마산 창원 시청 법원 검찰청 방향~창녕 부북 24번 우회전~창녕 청도면 24번~합천 창녕~무안면~무안 부곡 30번 좌회전~창녕 부곡온천~사명대사 유적지(5㎞) 크게 우회전(영산정사)~갈림길에서 왼쪽(영농법인 농정, 갈탄보일러)~영취산 하서산 등산안내도 지나~영산정사 방향~다례 서가정 사명대사 유적지 영산정사 우회전~다례 서가정~사명대사 유적지순입니다.

*사명대사 기념관과 유적지는 밀양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를 클릭하시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http://tour.miryang.go.kr/01/04_01.php?pT_idx=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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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넘은 전통의 동래시장 부근에는 많은 문화 유적이 있다. 동래 읍성을 비롯해 송공단, 동래부 객사터, 동래향교, 복천동 고분군등 하루에 돌아보기 힘이 들 정도로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송공단 입구로 앞으로는 동래시장이며 안내판과 문화재임을 알리는 빗돌이 서 있다.


 




송공단으로 대통령 박정희란 각자가 선명하다.



 들어서면 정 중앙에 송상현 순절비가 서 있고 동단에는 조영규, 노개방등을 서단에는 문덕겸등을 모섰다.

좌측으로 별도의 첨단을 만들어 송상현의 첩 금섬등을 따로 모섰다.


양정로타리에 있는 송상현 동상으로 주변에 빌딩 숲으로 가려 있어 상대적으로 외소한 느낌이다.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11호

동래시장 건물 뒤인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229-78에 송공단의 건물이 있다. 임진왜란때 동래읍성을 지키다 순절한 병사와 그리고 끝까지 싸우다 성은 함락되자 송상현은 정원루에서 순절을 하였는데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을 영조18년(1742)에 동래부사 김석일에 의해 세웠다. 여기에서 송상현이 충절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들이 송상현이 지키고 있는 동래읍성으로 쳐들어와 길을 내주기를 요구한다.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여 달라”는 통첩을 받고 답글을 보낸다.“싸워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여 주기는 어렵다”는 송상현은 군사들의 수도 열세이지만 서울로 올라가는 길을 내 줄수 없다며 결전을 벌리지만 성은 함락되고 죽음으로 결말을 맺지만 그의 충절을 모신 곳이 송공단이다. 송공단 이전에는 현 동래경찰서 자리가 예전에는 농주산이었다. 그 자리에 임진왜란때 순절한 분의 전망제단을 세웠는데 동래부사 송상현과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등 동래읍성 전투에서 순절한 분을 모셨다 한다. 1742년에 송공단이 세워지자 이곳으로 옮겨 왔다. 처음에는 동서남북으로 재단을 만들어 북단에는 송상현 조영규 노개방을, 동단에는 유생 문덕겸등을, 서단에는 송상현의 첩 금섬등을, 남단에는 향리 송백등을 모섰다. 처음에는 다대포에서 전사한 윤홍신과 부산진에서 전사한 정발장군을 모두 함께 모섰지만 그후 윤공단에는 윤홍신, 정공단에는 정발장군의 위패를 따로 모시게 되었다하며 송공단에는 동래읍성 전투에서 전사한분만 모시게 되었다 한다. 일제시대 때부터 동래 기영회에서 매년 음력 4월15일에 향사를 지낸다.

그리고 현재의 송공단 안의 모습은 2005년 11월에 충렬사지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을 하여 정면에는 송상현의 순절비와 동단에는 조영규 노개방을 서단에는 문덕겸등을, 별도로 첨단을 만들어 송상현의 첩 금섬을 모시었고 송공단에는 7단 16기를 현재 모시고 있다.

입구 송공단의 현판을 자세히 보면 대통령 박정희라 되어 있다.

송공단의 가을 모습으로 중문을 통해 들어서야 송상현 순절비를 만날 수 있다.

중문의 모습, 이문을 들어서면 된다.

그중에 동래시장 본 건물 좌측의 골목에 작은표지석이 서 있다.
동래부 객사터로 봉래관으로 불렸다며 지금은 모습을 찾을 수가 없고 위치만 알리고 있다. 객사에는 조선시대때 왕의 초상을 대신하여 목패를 봉안하여 배례를 올리던 곳이며 서울에서 지방으로 관리가 내려 오면 관원들의 유숙장소로 이용을 하였다, 그리고 외부의 손님들이 찾아오면 영접하고 회의실로도 이용을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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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시내 동부동 KT 건물 뒤에 도심지의 있는 고려 시대 돌로 만든 경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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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옛 경주읍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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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경고이 쌓은 석성의 모습이 90m정도 남아 있다.

경주읍성을 보면서...

제 고향은 경주입니다. 경주의 이야기나 남산의 이야기가 나오면 옛 추억들이 나도 모르게 생각이 나곤합니다. 이번에도 벌초를 한다고 고향에 하늘 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벌초후 경주시내의 경주 읍성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산을 다니다 보니 산성의 흔적은 여러번 보았지만 평지인 마을의 성은 보기가 힘든 구경입니다.
금전산 밑의 낙안읍성과 서울 장안의 4대 문등 경우 떠오를 정도입니다. 금전산을 산행하다가 잘 보존되고 있는 낙압읍성의 현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랬는데 도심한복판의 서울 4대분이나 경주의 읍성은 모든 성이 주택가가 들어차서 성의 흔적을 찾아 보기 힘들정도입니다. 그래서 경주에서는 읍성의 존재를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번에 찾아본 경주읍성은 현재 90m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예전에 여기가 성이였다는 흔적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이것도 주택의 담장에 걸쳐져 있어 옛 성터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석성의 위의 큰 고목만 세월의 깊이를 짐작할 뿐입니다. 경주읍성은 사적 제96호이며 경주시 북부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주에는 열매시장인 성동시장과 아랫시장이 있습니다. 그 대로변 중간에 kt 건물이 있어며 그 건물 뒤에 석성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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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무게에 이기지 못하고 남은 석성의 흔적은 담쟁이가 덮혀 있는 어느집 돌담역활도 하고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함께한 성을 의미한다합니다. 경주읍성은 고려시대 현종 3년(1012)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동부동 북부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의 둘레가 4,075자(尺:2400m)이며 높이가 12자(尺:3.6m)인 돌로 만든 석성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도 경주읍성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합니다. 이곳에 조선 태조의 어진을 모신 집경전과 관아, 우물80여개를 있었다하니 많은 주민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서남북으로 사대문을 두어 향일문인 동문, 망미문인 서문, 남문인 징례문, 북문인 공진문을 두었다 하며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해자(垓字)도 갖추었다 한다.
남문인 징례문에는 현제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성덕대왕 신종을 걸어 매일 시각을 알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때는 경주읍성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퇴하였는데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였다한다.
일제강점기때 대부분 헐리고 읍성의 흔적을 알 수 없을 정도인 90m 남아 현재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경주시에서 최근 경주 읍성 복원계획을 실행을 하고 있다 한다. 고려 태종 왕건이래 역대고려왕들은 경주읍성을 중요시하여 940년에 안동대도독부를 설치 994년에동경유수관을 두는 등 지방통치의 중심을 삼은 경주읍성을 복원하기위해 2002년부터 주위의 토지보상과 건물철거등으로 83억원을 투입하였고 2012년 까지 총605억원을 들여 동북성곽 1100m및 동문의 향일문과 북문인 공진문을 복원한다고 한다.

하루빨리 복원이 되어 옛 경주의 모습을 보았서면하고 낙안읍성처럼 하나의 관광상품이 되었서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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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읍성에서 출토된 주춧돌과 경주읍성을 알리는 초라한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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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복원된 모습을 보이는 경주 읍성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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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복원된 성곽의 모습과 그 뒷면으로 돌아가면 보는 모습으로 쓰레기가 나뒹굴고 자라난 나무등으로 곧 허물어질 태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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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현장의 오래된 고목, 밑둥치만 남기고 있지만 고목에 그래도 싹이 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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