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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서구여행)동아대학교부민캠퍼스 석당박물관. 등록문화재 제41호 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 건물인 동아대학교 박물관 여행하기....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건물은 등록문화재 제41호로 2011년 포스팅을 했습니다. 그때는 동아대학교 부민 캠퍼스 박물관이 있는 뒤 신축 건물 공사 때문에 앞부분만 둘러보았습니다. 이번 동아대학교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앞부분이 아닌 건물 뒷면이 궁금했고 박물관 내부도 궁금해 다시 찾았습니다.






◆동아대학교석당박물관과 주위 가볼만한 곳


☞2008/09/23 - 6.25전쟁 때 옮겨온부산의 임시수도기념관 함보세요


2011/10/25 - 여러분은 전차의 모습을 아세요. 미국산전차로 부산에서 운행했던 것입니다.


2011/11/25 - 등록문화재인 옛 경남도청 건물이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2016/04/20 - (부산여행/서구여행)동아대학교박물관 부산 전차 구경. 우리나라에 한량 남아 있는 미국제 전차를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박물관에 전시중입니다.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은 1925년에 건립하면서 처음에는 경남도청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건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많은 건물이 서양의 고전주의 양식과 일본 특유의 목조 양식을 결합하여 붉은 벽돌로 지었는데 그 당시 경남도청(현 동아대학교박물관)건물도 그중 한곳입니다.

 

 

격동의 세월인 한국전쟁 당시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부산으로 옮겨오면서 임시 정부청사 건물로 사용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임시정부청사 건물은 다시 경남도청이 들어왔고 1983년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옮겨가면서 부산지방법원과 지방검찰청으로 사용하여 우리에게는 법원으로 더 익숙했습니다.


 

 

부산지방검찰청과 부산지방법원은 부산시청과 함께 연산동 시대를 열면서 다시 옮겨갔으며 2002년 동아대학교에서 인수하여 현재에는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동아대학교에서 인수와 함께 건물은 한국 근대사의 유물로 인정되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그에 걸맞게 동아대학교에서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대대적인 복원공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건물은 외관 모양만 남기고 뼈대부터 모두 새로 세웠을 정도로 전면적인 복원 수리 공사였습니다. 외벽은 붉은 벽돌과 돌 그리고 콘크리트 블록을 벽체로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내부 바닥과 지붕을 받치는 뼈대 등은 모두 나무를 사용했던 것을 박물관으로 사용 시에 안정성을 고려하여 바닥은 콘크리트를 깔고 지붕을 받치는 기둥 등은 모두 철골로 교체했습니다.


 

 

지금도 3층에는 그때 당시 사용했던 지붕을 받쳤던 목재를 전시 중이며 그 위로 지붕을 받치는 철골을 보면서 복원공사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동아대학교박물관 1층 로비로 들어갔습니다.


 

 

관리하시는 분께 혹시나 싶어 사진촬영을 문의하였더니 2층 전시실부터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국립박물관에서도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는데 왜 사진 촬영이 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플래시를 터트리면 전시물인 문화재에 혹시 모를 변형을 줄까 싶어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이라면 전시물에 쏘는 전등 빛이 더 심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요즘 누가 박물관에서 플래시를 쏘고 사진을 찍는지 참. 사진 촬영이 안된다 하여 정말 아쉬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로마에 왔다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동아대학교 박물관 법을 따라야겠지요.


 

 

그러나 1층 로비는 사진 촬영이 된다 하여 광개토대왕릉비 탁본과 철제용기 그리고 복원공사를 하면서 당시 사용된 붉은 벽돌을 그대로 남겨 놓은 벽체 등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장수왕 2년인 414년에 장수왕은 부왕인 광개토대왕을 기리는 비석을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중국 지린 성 집안) 동쪽에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웠습니다.


 

현재 광개토대왕비는 높이가 6.39m이며 비석 사면에 총 44행 1,755자를 새겼는데 마모되어 완전한 판독은 불가하다 합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주몽, 유리왕, 대무신왕의 약력과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전반에 관한 내용이라 합니다.


 

 

철제용기는 철제 주조물로 몸통에는 두 군데 사자가 시문 된 손잡이가 달려 있고 용기를 받치는 세 발이 아랫부분에 달려 있습니다. 용기 외부에는 문양을 새겼는데 초화문과 파어문을 양각 주조로 배치하였으며 사찰의 금당 앞에 연지와 같은 용기로 사용하였거나 물을 담는 용기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동아대학교 박물관 여행을 위해 2층 전시실로 향했습니다. 1959년 11월에 동아대학교 설립자이신 석당 정재환박사에 의해 부산에서 최초로 개관한 박물관이라 이곳을 둘러보는 저로서도 더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전시실은 고고실과 도자실, 와전실, 불교미술실, 서화실, 민속실, 3층에는 부산 임시수도정부청사 기록실로 꾸며져 있으며 약 30,000점의 문화재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눈여겨볼 것은 ‘동궐도(국보 249호)’와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국보 69호)’인 국보 두 점입니다.

 



동궐도는 경복궁 동쪽의 궁궐인 동궐, 창경궁과 창덕궁을 그렸는데 아주 상세하게 표현하여 건물을 지을 때 그려 놓은 궁궐도감 같았습니다. 또한, 불교미술실의 ‘의령보리사지금동여래입상(보물 731호)’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3(보물 269-3호’ 등 많은 보물과 문화재가 전시 중입니다. 이곳 박물관에서 만나는 문화재는 또 다른 맛을 보여줬습니다.




 

 

 

3층 정부청사 기록실은 복원 수리를 하면서 기존 벽체를 그대로 사용하며 최소한의 구조 변경을 하였습니다. 또한, 지하 수장고와 전시실 곳곳에 당시의 흔적인 벽체를 그대로 보존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의 설음과 아픔을, 전쟁을 겪으면서 임시정부청사로 사용했던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고스란히 기록한 건물인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임시정부청사 기록실을 만나보세요. 참 가슴이 먹먹해 왔습니다. 그리고 야외 전시한 문화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야외전시실

 

 

 

 

 ◆동아대학교석당박물관 관람안내◆

 ◆동아대학교석당박물관 오시는 길 안내◆

 ◆동아대학교석당박물관 도록◆

(일부사진 팸플릿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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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서구여행)임시수도기념관 부산밀면이야기, 부산에서 밀면이 유명한 이유를 아세요.

 

부산에서 자생한 음식은 어떤 종류가 있을까. 그리고 보면 근대 이전의 부산 음식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적 특성 탓인지 알 수 없지만 부산의 음식은 한국동란 이후로 모아진다. 한국동란때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밀려들듯이 몰려들어 국제시장과 40계단 그리고 영도다리에는 이북이 고향인 피난민들의 주 활동무대가 되었다. 자연적으로 북한의 음식이 그 당시 상황과 맞물려 탄생했는데 냉면이 친자라면 밀면은 서자로 태어난 음식이다. 밀면과 함께 태어난 음식이 부산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돼지국밥이며 그 당시 서민들의 영양보충을 책임졌던 부산의 대표 음식이다.




☞(부산여행/서구여행)임시수도기념관 부산밀면이야기,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은  밀면과 돼지국밥 숨은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부산에는 현재 부산 밀면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전시해 놓은 곳이 있다. 부산시 서구 임시 수도 기념관에서 2013년 10월15일~12월15일까지 두달간 전시를 하며 이곳에가면 그동안 궁금하였던 부산 밀면의 역사와 밀면의 애환을 밀면원조집과 함께 만날 수 있다.



 

밀면의 역사는 함경도 흥남의 피난민 역사와 같이 한다. 6,25 한국동란때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막혀 한미연합군은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전세는 역전된다. 그와 함께 아군의 퇴로가 차단되면서 한미 연합군은 맥아더 장군의 후퇴명령에 따라 흥남항에서 배를 이용한 철수 작전을 감행하게 된다.

 


 



몰려드는 피난민과 연합군은 배에 함께타고 부산을 향해 내려오는데 그때 10만여명이 배를 타고 탈출하였다며 이를 두고 흥남 철수 작전이라 한다. 작전으로 불려진 것을 보면 그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포항에서 내린 피난민은 거제도로 이송되어 부산에서 정착을 하며 그 당시 상황을 노래말로 불려진 유행가가 1953년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로 시작되는 이 노래, 뜬금없이 흥남철수니 굳세어라 금순아니 하는 이야기는 밀면 원조인 양대산맥의 고향이 흥남이고 이분들이 노랫말속의 '굳세어라 금순이' 처럼 흥남철수작전에 의해 배를 타고 부산에 정착을 하며 오뚝이 인생을 살아 오셨기 때문이다.




피난 1세대인 내호냉면의 정한금님과 서호냉면의 임윤숙님은 흥남에서 냉면장사를 하였던 분들로 흥남의 내호리와 이웃한 서호리가 고향이다. 피난민인 정한금님은 1952년 남구 우암동 시장안에 흥남 고향의 이름을 따 내호냉면을 열었고 그 뒤를 이어 자갈치 농협뒤에서 임윤숙님이 흥남면옥으로 냉면집 간판을 달았다. 이 두 분이 부산 밀면의 1세대다.

 




밀면이란 이름 두 글자가 이곳 내호냉면에서 처음 시작된 사실을 부인 할 수가 없다. 여기서부터 부산 밀면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함경도 흥남 내호에서 흥남철수작전때 정한금씨는 친정어머니와 함께 피난을 오게 되었다. 친정어머니는 피난 오기 전 내호리에서 냉면집을 하였고 피난을 온 후 고향의 시원한 냉면 맛을 잊을 수 없었다. 흥남 고향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서는 냉면을 꼭 먹어야 되겠다 싶어 시작하였지만 냉면은 메밀로 만들어 전쟁통에 메밀을 구할수가 힘이 들었다.




때 마침 거제도에 미군 구호품인 밀가루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걸 부산에서 나누어 주었는데 그 밀가루로 만들어 본 게 부산 밀면의 시초이다. 밀면은 ‘밀가루로 만든 면’이란 뜻이다.



 

 

밀가루만 반죽을 하면 찰지지 않아 고구마 전분이나 감자가루를 섞어 면을 뽑아 내었다.여기다가 사골로 육수를 만들어 말아 먹으며 고향에서 말아 먹었던 냉면을 생각하며  두고온 고향의 향수를 달랬다. 내호냉면은 현재도 이북의 고향 맛을 느끼기 위해 고령의 실향민들이 많이 찾는다.


 




피난 1세대때는 양쪽 집안이 서로 왕래가 잦았다는데 2~3세대로 내려가면서 왕래가 뜸해지다가 지금은 아예 단절된 상태라 이야기를 하시는 피난2세대 흥남서호냉면 최동훈사장님의 우수에 찬 눈빛이 지금도 선하다.

 



 

최사장님 모친이신 임윤숙님이 피난을 와 처음 문을 열었다는 흥남면옥은 그 후 함흥냉면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현재 충무동 자갈치역 인근에 ‘55년 된 함흥냉면’집은 이집에서 직원으로 있던 최씨 분이 장사를 하고 있다.

 




자갈치 함흥 냉면집은 부평동 족발골목으로 옮겼고 고향마을의 서호리 이름을 따 ‘흥남서호냉면’으로 사용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3대 70년 세월이란 이름이 간판에 새겨져 있어 그 세월을 짐작하고도 남았는데 그러나 아쉽게도 서호냉면은 얼마전에 70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영업을 마감하였다. 현재 부산밀면 1세대는 우암동의 ‘흥남내호냉면’ 한곳만 남아 있는 상태다. 



 

 

오늘의 부산 밀면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그 유명세가 서울로까지 진입을 할 정도라니 부산 밀면의 기세는 이제 지역의 한계를 벗어나 전국적인 음식으로 발돋한 상태다. 부산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밀면에 ‘부산 밀면 이야기’를 관람하여 그 역사를 알면 서민의 음식 밀면의 맛은 더욱 맛있게 느껴진다. 부산밀면 이야기를 보기 위해 찾아가는 '임시수도기념관'은 한국동란때 이승만대통령이 머물렀던 관저로 이곳에서 대통령의 집무를 보았다. 대통령의 관저와 그때의 모습도 둘러보고  도시철도 1호선 토성역에서 임시수도기념관을 찾아 올라가는 도로에는 그당시의 생활상을 나타낸 벽화와 조형물을 볼 수 있어 아이와 찾는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임시수도기념관
























◆앞으로의 부산 밀면 이야기는  이분들에 의해 쓰여질 것 같다.

내가 찾아가본 밀면 냉면집으로 '부산밀면이야기'에서 만나볼 수 있는 집들도 있다.


 


우암동 흥남내호냉면



지금은 문을 닫은 흥남서호냉면




개금동 개금밀면




남포동 원산면옥




남포동 할매가야밀면




남부민동 함흥냉면




암남동 송도제일밀면




수안동 동래밀면




수정동 장수밀면




영주동 황산밀면





초량동 초량밀면




초량동 초량영동밀면




충무동 함흥냉면




교대앞 국제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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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동 동아대학 부민갬퍼스 좌측으로 들어서면 만나는 임시수도기념관입니다.


주변에 아파트로 둘러 싸여 이제는 도심 한복판의 정원구실을 하는 것 같습니다.

들어서면 만나는 임시수도기념관 입구입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우측으로 응접실 내부입니다.

서재에 걸린 사진과 텅빈 방입니다.

이승만대통령이 집무실에서 타자치는 모습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또 한방에는 대통령의 영정이 걸려져 있습니다.











내고장 부산에는 특이한 이력의 기념관이 있다. 이름하여 임시수도 기념관, 수도란 서울을 의미하지만 부산에 수도기념관이 있다니 그것도 앞에 임시란 수식어를 붙여가지고...1950년 6월25일 역사의 소용돌이는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바늘 마냥 거꾸로 거꾸로 돌아 가고 있었다. 그 산물의 하나인 임시수도기념관, 부산 서구 부민동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뒤에 위치하고 있다, 그이전에는 경남 도지사 관사로 사용하기위해 1926년에 준공되었지만 6.25의 발발로 전세가 불리하여 서울에서 수도를 대전으로 옮기고 종과부적으로 다시 대구로 물밀듯이 내려오는 괴뢰군으로 대구까지 내주고 수도는 다시 부산으로 옮긴다.


그때 이승만대통령의 관사로 사용을 하게 되었다. 낙동강에서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는양 다시 서울을 수복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하고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대통령관사로 사용을 하게 된다. 건물의 양식은 2층으로된 목조건물로 일제치하라서 그런지 일본풍을 많이 느끼는 건물이다. 특이한 점은 1.2층 모두 바닥은 마루를 깔아 놓았다. 밟고 걸어가니 꼭 일본의 왕궁 마루바닥을 걷는 것 처럼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입구에 들어서면 좌우로 갈린다. 좌측은 2층으로 오르는 집무실, 우측은 응접실로 들어선다. 외국에서는 볼 수 있었던 것처럼 한쪽벽에 벽난로가 있고 그 당시의 대형사진이 걸려 있다. 옆으로 서재 내실 를 지나면 이승만 대통령의 편지, 자수로된 우리나라지도.이승만휘호 호집, 대통령 이승만박사유교 담화집,이승만대통령훈시집등이 전시되어 있고 우측으로는 이승만대통령의 군용방한복, 프란체스카여사의 의류가 전시되어 있다.

식당등 1층은 대통령의 거쳐를 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어며 경비실 옆으로 오르는 2층계단길이 집무실로 오를 수 있다. 2층 집무실은 현관쪽과 경비실에서 연결된 계단이 이어진다. 정면으로 집무실이며 미닫이 문 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대통령이 밀랍인형으로 않아 있다. 무심결에 들어선 나는 감짝 놀랐다. 책상에는 오래된 타자기와 책 그리고 시계가 땅바닥에는 앉은뱅이 선풍기가 자리하고 있다. 2층집무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운치가 대단하다. 멀리 천마산을 볼 수 있어며 주위로 도심 속에 둘러싸여 있지만 녹색의 수림으로 덮혀있어 재잘 되는 새소리가 요란하게 크게 들린다. 한켠에는 “어느듯 가을빛도 짙어저서”로 시작되는 이기붕의 편지로 끝부분에 국방부장관 이기붕으로 되어 있다. 사진첩, 사진화보, 부산시보, 헌법개정공포문, 대통령 담화문등이 전시되어 있고 역시 벽면은 흑백사진으로 둘러져 있어 그때의 생활상을 옅볼 수 있다.



밖으로 나와서 정원을 둘러보니 그 당시 이승만대통령도 관사를 돌아보았을 것을 생각하니 역사는 돌고도는 것 같다. 뒤쪽에는 키큰나무와 특이한 대숲 그리고 울창한 숲속 벤치에 앉아 마을 할머니여러분이 마실을 나와 막바지 더위를 식히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모습을 보니 프란체스카여사와 이승만대통령께서도 저런 한가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암울한 전쟁으로 전세는 밀리고...피말리는 하루하루를 생각하니 지금 저분들의 여유가 행복해 보인다.


2층 집무실의 모습입니다. 처음2층에 올라 깜짝 놀랐습니다. 왠사람. 자세히 보니 밀립인형입니다. 오래된 타자기하며 고서 시계 앉은벵이 선풍기의 모습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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