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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가면 볼거리가 너무 많은 곳이다. 얼마나 많은 곳이면 경주 남산을 두고 노천박물관이라 하겠는가. 그래서 경주에 가면 이곳 저곳 둘러 보면 사실 시간 가는줄 모르고 보내는 게 허다하다. 그래서 다시 찾아본 작은 금강산, 얼마나 아름다우면 소금강산이라 하였을까. 그래서 이차돈은 이곳에서 순교를 하였을까. 소금강산은 야트막한 야산 수준이다. 







경주ic에서 포항으로 가기위해서는 보문단지로 가는 외곡도로를 타고 가는데 이번 목적지인 소금강산의 굴불사지석불입상을 보기위해서는 직진하여 다리를 건너면 우측으로 굴불사지석불입상의 이정표를 볼 수 있다. 큰 주차장이 있고 오솔길을 따라 2분이면 오늘의 목적지인 굴불사지석조사면불상.




주사위 모양의 3m 바위를 양사방으로 틈도 없이 보살상을 새겨 놓은 사방불 형태의 바위로 이 바위에 얽힌 전설 또한 재미가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때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나 땅을 파 보니 이 바위가 나왔다 한다.


그래서 사방으로 불상을 새기고 굴불사로 불렀다하는데 그 후 어떤 연유로 폐사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발굴조사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건물터가 확인 되었고 발굴된 유물 가운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금고에 굴석사란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한다.



이 석불상은 남산의 칠불사 보살상보다도 더 많은 보살상이 새겨져 있어 장관이다. 바위를 돌아가면서 정성을 들여 기도하는 기도객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그때가 대입 수능을 앞 두고 있어서 더더욱 그러한 것 같았다.


사방석에 새겨진 불상의 모습을 하나하나 보면 서쪽 면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셨고, 그 반대편인 동쪽면에는 약사여래좌상, 남쪽으로는 삼존입상을 새겨 놓았다.
주목할 것은 북쪽으로 두분의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그 중 한분은 관세음보살입상으로 얼굴이 열하나 팔이 여섯달린 보살상을 하고 있어 국내에서는 보기드문 모습을 하고 있다.





세월 앞에는 장사 없다고 그 화려한 신라 불교 예술품의 모습이 그때의 모습을 다 보여 주지는 못하지만 천년 넘게 이어온 이 불상이 깨어나 다시 한번 염불 소리 를 들려 주었서면 하는 게 나의 바램이다.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보물 제121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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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 대웅전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4호
경부고속도로 경주 IC에서 포항으로 가는 외각도로를 따라가면 보문단지 갈림길을 지나면 우측으로 작은 산이 나타난다. 경상북도 경주시 봉천동에 소재를 하고 있는 백률사는 일명 소금강산으로 불리는 동네 뒷산의 나즈막한 산에 터를 잡은 유서 깊은 사찰이다. 지금은 그때의 절규모는 사라지고 암자의 틀을  갗추었지만 한때는 만만찮은 절의 규모를 자랑하였을 것이다. 백률사는 삼국유사등의 기록에 나오는 자추사란 절일 것이라 한다. 만약에 자추사가 맞다면 신라 법흥왕 14년(527)에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삼도록 순교한 이차돈를 기리기 위한 유서 깊은 절이기때문이다. 대웅전은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그후 다시 지어졋는데 단층의 목조건물로 옆에서 보면 사람인(人)자인 맞배지붕이다. 기단부는 신라시대의 양식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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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 아래 굴불사지 석불상은 보물제121호로 백률사 아래에 있다.
주사위 같은사각의 바위면에 불상을 조각하였다. 경주의 북쪽인 소금강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어며 높이 약 3m의 사방불 형태이다. 불상의 서쪽은 아미타 삼존불, 동쪽은 약사여래좌상, 남쪽은 삼존입상, 북쪽으로는 보살상 두분이 새겨져 있다. 북쪽의 보살상 중 한분은 팔이 여섯달린 관세음 보살입상으로 국내에서는 보기드문 예술품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은 신라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때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나 땅을 파보니 사각모양의 바위가 나와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로 불렀다고 한다. 최근 발굴조사에서는 고려시대 건물터가 확인되었서며 출토된 유물중에는 굴석사란 명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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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은 순교로서 불교의 중흥을 꾀하였는데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다

"법흥왕(신라 제23대 왕(재위 514∼540))이 창생(세상의 모든 백성)을 위해..

수복멸죄(복을 닦고 죄를 소멸하는..)의 성스런 곳으로서 사원을 지으려 하였으나..

조신(신하)들이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다만 사인(12-13등급의 낮은 직책, 신라는 16관등제)인 위촉(이차돈)만이..

그 뜻을 알아 자신의 목숨을 바쳐 왕의 뜻을 실행할 것을 서원하고 결국 죽임을 당하였는데..

 베인 목에서 우유가 솟고 천지가 진동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결국 그로 말미암아 불교가 흥하게 되고 사찰이 창성하게 세워지고..

탑이 즐비하게 이어지게 되니 이것은 삼성(아도화상, 법흥왕, 이차돈)의 공이다."

- ≪삼국유사≫ 3권 원종흥법 염촉멸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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