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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여행/거창가볼만한곳)겹처마인 눈썹지붕의 처마선이 아름다운 사랑채 동계정온고택을 만나다, 거창동계고택


조선 중기의 문신인 동계정온선생이 태어난 곳은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강동마을입니다. 동계선생은 절의를 상징하는 분으로 널리 알려져 거창 여행을 하면서 동계고택을 꼭 찾고 싶었습니다. 이번에 기회가 닿아 거창을 둘러보면서 함께 동계정온고택을 찾아왔습니다.





거창 충신당 동계정온고택 주소: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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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선생이 태어난 집이지만 현재의 고택은 1820년인 순조 20년에 새롭게 지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동계선생이 생활했던 집이 아니라는 말씀. 동계고택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에 처음 지어졌습니다. 나무로 지어진 건물이다 보니 비바람에 노출되어 여러 번의 개보수가 있었는데 현재의 고택은 1820년에 지어졌다고 상량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문채는 일자형이며 가운데 솟을대문입니다. 출입문에 인조가 내린 정려문이 걸려있으며 안쪽으로 웅장한 사랑채 건물이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ㄱ'자의 사랑채에서 눈에 띄게 드러난 부분은 꺾인 부분에 누마루를 넣고 그 위에 올린 겹처마라 불리는 눈썹지붕입니다.

 



약간은 어색해 보이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겹처마는 정온선생의 절의를 상징하는 듯 보였습니다. 겹처마 덕분에 정온 고택의 위상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느낌이었습니다. 눈썹지붕은 사랑채를 처음 지을 때 있었던 게 아니고 지붕의 처마가 건물에 비해서 작아 비가 누마루로 들이치고 하여 뒤에 새로 달아내었다고 합니다.



저는 고건축에 전문가가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대부분의 고건축 전문가분의 공통된 의견인 것 같습니다. 사랑채는 남쪽을 향해 앉았고 앞과 뒤로 모두 툇마루를 달아내었으며 기단은 낮지만, 툇마루는 높게 만들었는데 이는 남부지방의 건물 특징중 하나라 합니다.

 

동계정온고택 사랑채



건물은 왼쪽부터 온돌방, 대청, 온돌방을 넣었으며 그 앞에 누마루를 배열했습니다. 온돌방의 앞쪽은 사랑방 역할을 하며 뒤쪽은 잠을 자는 침방으로 사용했습니다. 대청 또한 중간에 사잇문을 달아 나누어 사용했습니다. 누마루는 사방 문을 달아 개폐하도록 했는데 여닫이문의 문살이 눈이 부실 정도로 우아한 게 한국의 미를 보는 듯 매우 아름답습니다.






매미 소리 요란한 한여름에 누마루의 사방 문을 열고 책이라도 본다면 머리에 쏙쏙 들어올 것 같으며 또한, 드러누워 쿨쿨 낮 잠자기에 딱 그저 그만 일 것 같은 정온고택의 누마루 언제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절의의 상징인 동계정온고택에서 한옥 민박체험을 꼭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사랑채는 앞면 6칸에 옆면 2칸 반이며 앞뒤로 두 줄로 된 겹집이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사실 안채는 살림집으로 현재에도 후손의 생활공간이며 출입할 수 없습니다. 빼꼼히 3칸의 중문을 통해 안채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사랑채와 같은 남향이며 앞면 8칸에 옆면 3칸 반에 앞뒤로 툇마루가 있는 두 줄의 겹집으로 사랑채와 함께 주목받는 건물입니다.

 



건물의 구성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아래채, 곳간채, 사당으로 이루어졌으며 거창의 동계고택은 영남 내륙의 추운 기후에 알맞게 우리나라 북부지방의 일반적인 겹집형태와 남부지방의 높은 툇마루를 잘 조화시킨 건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랑채에 걸린 충신당(忠信堂)과 모와(某窩)의 현판은 제주도에 유배 갔던 추사가 제주도의 대정에 유배왔었던 동계정온선생을 생각하며 훗날 정온의 놓은 절의를 기려 직접 동계고택을 찾아와 충신당을 적고갔다 합니다. 현재 그 현판은 거창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고택에 걸린 현판은 모작입니다.

 


모와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씨조선의 마지막 왕족 의친왕 이강이 남긴 현판이지만 도둑맞아 다시 복원하였으며 모화당 또한 대원군이 자주 찾아왔을 때 그때 쓴 현판이라 합니다.

 




대문채에는 인조가 병자호란의 절의를 기려 내린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문간공동계정온지문’의 정려가 걸려 있습니다. 안채 뒤편에는 신위를 영원히 모실 수 있다는 동계정온선생의 ‘불천위’ 사당이 있으며 이는 나라에 크게 이바지를 한 분에게만 내렸다 합니다. 그만큼 동계선생의 충절이 크다 하겠습니다.

 



동계 정온 선생은 광해군이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사사 하고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거론하자 도의에 어긋난다며 격렬하게 항의하고 반대하다가 광해군의 미움을 받아 제주도 대정에 위리안치의 위배형을 내립니다.

 


안채전경





동계는 인조반정으로 10년 만에 풀려났으며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냈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워 청나라와의 척화를 주장하였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남한산성에서 자결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자 벼슬을 마다하고 낙향하여 덕유산 인근의 모리에서 은거하다 숨을 거두었습니다.

 







돌아가신 다음 숙종은 영의정에 추증하였으며 광주 현절사. 제주 귤림서원, 함양 남계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현재 동계정온고택은 중요민속자료 제205호에 지정되었으며 유품은 중요민속자료 제218호에 각각 지정되었습니다.











인조가 내린 정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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