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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는 560년경 신라 진흥왕21년에 북대암 금수동에서 수도를 하던 신승에 의해 창건 되었다. 그 후 608년 원광법사가 이절에 머물며 신라가 불교로서 중흥기를 맞이한다. 그 뒤 후삼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대작갑사인 운문사는 폐사가 된 것으로 보이며 보양국사가 중국에서 유학한 후 돌아오는 길에 서해용왕의 부탁으로 설법을 전하니 금색비단으로 된 가사 한 벌과 그의 아들인 이목을 딸려 보내 보양을 보필하게 하였다.

용왕이 이르길 ‘지금 삼국이 어지러워 불교를 신봉하는 임금이 없어니 그대가 작갑에 절을 중창하면 도적을 피할 수 있고 불교를 호위할 현명한 임금이 나와 삼국을 통일하게 될것이다“하니 운문사를 중창하게 대는데 보양이 운문사 북쪽 능선마루에 올라가 절터를 찾았는데 광체를 발하는 5층의 누런 전탑이 눈에 들어왔다. 내려와 찾아 보니 그 전탑을 찾을 길이 없어 다시 북대암에 올라가 보니 까치가 그 자리에서 쪼고 있어 이상하게 여겨 그곳을 파 보니 벽돌이 나왔다 한다. 벽돌을 쌓아 올리니 5층의 전탑이 되었는데 보양국사가 능선마루에서 대작갑사의 절터를 찾을 때 본 그 누런 황탑이었다. 보양국사는까치들의 도움으로 대작갑사의 절터를 찾았다하여 중창한 사찰을 작갑사라하였다. 그 후 까치들의 도움을 받은 은혜를 기리고자 작압전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작압사로 불렀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에게 보양국사가 운문사 인근의 왕건을 반대하는 잔당들을 소탕하는데 공헌을 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왕건은 보양국사에게 전지500필과 운문선사란 사액을 하사한 후로 운문사로 바뀌었다한다. 현재의 작압은 1941년에 일제때 종무소 자리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인 관음전 옆으로 옮겨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1941년 이전 모습의 작압전은 전탑 형태를 유지하는 1층의 모습이었다 한다. 운문사 개보수를 할 때 나왔던 63cm 크기의 석불좌상과 전탑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만 할뿐 사용 용도가 불분명한 사천왕상 4기가 작압전에 함께 전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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