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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능지탑지. 문무대왕 화장터로 알려진 경주 능지탑지 여행.


경주 능지탑지는 낭산 기슭에 있으며 통일신라 시대에 쌓은 건축물로 능지탑, 능시탑, 연화탑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능지탑지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죽어 감포 앞바다 대왕암에 모시기 위해 시신을 화장했던 곳으로 추정하는 장소입니다. 그 이유를 보면 발굴조사를 하면서 소조불상 조각이 출토되어 탑묘로 보는 이도 있지만, 내부의 그을린 흔적과 주위에 사천왕사 선덕여왕과 신문왕릉 등 당시 유적을 함께 보면 문무왕의 화장터로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합니다.





◆통일신라 문무대왕과 관계된 여행지를 모았습니다.


2014/05/27 - (경북여행/경주여행)동해의 신비 경주주상절리 파도소리길 걷기, 읍천항벽화마을,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감은사지 해파랑길 걷기


2014/05/25 - (경북여행/경주여행)동해의 꽃으로 부르는 경주 양남 부채꼴 주상절리.독특한 경주주상절리를 보면서 누구나 감탄하게 됩니다.주상절리


2014/05/21 - (경주여행/감은사지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여행) 호국용 문무대왕의 혼이 깃든 경주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 이른 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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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0 - (경북여행/경주여행)왕의길-신문왕 호국행차길. 신문왕이 되어 왕의 길인 추원마을~기림사 둘레길을 걸어보세요.


2015/01/06 - (경북여행/경주여행) 양북면 함월산 기림사 여행. 경주의 천년사찰 왕의 길 기림사를 만나다.


2015/06/06 - (경북여행/경주여행)선무도 본산 골굴사. 아름다운 석불인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골굴사에서 힘자랑하지 말라" 선문도 골굴사 여행하기


2011/11/06 - 호국용 문무왕의 전설인 용문바위와 공양왕릉의 슬픈이야기


 


 

백제·고구려·신라의 삼국은 신라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의 뒤를 이은 문무대왕에 의해 삼국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문무대왕을 알기 위해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백제를 치기 위한 원병을 청하지만 고구려는 신라 진흥왕이 차지한 고구려의 옛 땅인 한강유역 반환을 조건으로 내걸어 동맹은 파기되었고 어쩔 수 없이 당나라와 동맹을 맺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당 연합군입니다. 일부는 나당과 연합하여 통일을 이루었다 하여 진정한 삼국 통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먼저 백제를 치고 나면 고구려까지 칠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나라 고종은 소정방에게 13만의 병력을 출병시켜 지금의 백마강 기벌포에 상륙하여 사비성을 공격하였고 태종무열왕의 명을 받고 출병한 김유신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 장군이 이끈 5천의 결사대와 싸웠지만 죽기를 각오로 싸우는 백제에 4번이나 패했습니다.


 

 

그러나 화랑 출신인 관창에 의해 신라군은 전열을 제정비하여 백제군과 일전을 벌여 계백과 백제군은 전멸했습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도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의자왕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나·당 연합군에 항복 하고 멸망하였습니다. 이게 660년입니다.


 

 

그리고 667년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 공격에 나서게 되는데 그 당시 고구려는 중원을 호령하던 호랑이었지만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치면서 숱한 전쟁을 치러 그 후유증으로 종이호랑이로 전락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력한 통치권력을 가진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세 아들과 동생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힘겨루기를 하였는데 입지가 좁아진 장남 연남생은 당나라에 백기 투항하고 연개소문의 아우인 연정토도 신라에 12개의 고구려성을 받치고 항복해버렸습니다. 나당연합군은 이런 기회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당나라는 연남생을 길잡이로 하여 5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신라도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와 합세하여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1여 년 동안 끈질기게 버티는 고구려군의 저항에 고전하다 668년 9월 마침내 평양성을 탈환하고 보장왕은 항복하였습니다.


 

 

 

신라와 당나라는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탈환했지만, 이들의 동맹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삼국이 통일되면 당나라는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 주기로 하였는데 그 약속을 먼저 파기하면서 신라를 공격하여 속국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군을 지원하며 당나라의 힘을 서로 분산시키게 만들었고 마침내 백제땅에서 웅진도독부를 없애고 완전히 당나라군을 몰아내었습니다. 그다음 675년 신라는 매소성 전투에서 당나라 20만 대군을 맞아 승리하였고 승기의 주도권을 잡은 신라는 평양의 안동도호부까지 요동성으로 몰아내고 667년 마침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당나라까지 물리친 문무왕은 668년 56세로 죽으면서 시신을 화장해 동해에 장사지내게 유언을 남깁니다.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까지 몰아냈지만 정작 마음 한구석에는 노략질을 일삼는 바다 건너 왜구가 걱정이었습니다. 문무왕은 불력으로 서라벌을 왜구로부터 막고자 왜구의 주 침입통로인 동해구에 감은사를 짓게 했습니다. 그러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자 신문왕은 그의 유조대로 낭산의 능지탑에서 화장하여 감은사 앞 바위에다 해중릉을 만들었습니다.


 

그에 관한 <삼국사기 권7 문무왕 21년조>에는 “내가 죽거든 열흘 후 창고 문 밖 뜰에서 인도 불교의식에 따라 검소하게 화장하라”하였는데 ‘창고 문 밖’이 지금의 낭산 능지탑지 일대라 합니다. 이전에는 문무왕의 화장터를 원성왕릉인 괘릉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조사과정에서 지금은 능지탑지로 완전히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문무왕의 세자 신문왕은 부왕 문무왕을 동해에 장사지내고 감은사를 완공하였습니다. 감은사는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동해구로 따라 올라와 감은사 금당지 아래 석굴에서 휴식을 하였다 하며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하늘로 승천하는 용에게 받은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는데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만파식적’입니다. 문무왕은 죽어서까지도 신라를 시키고자 했나 봅니다.


 

 

그러나 현재 허물어져 있던 탑의 부재를 짜 맞추어 2층의 능지탑으로 복원했지만, 원래는 5층으로 된 능지탑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주변에 많이 남아 있는 탑의 부재를 보고 문화재에 문외한인 저도 복원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하루빨리 원래 모습을 되찾았으면 합니다.


 

 남아 있는 능지탑지 부재들...

연화탑으로 부르는 능지탑은 연화문이 새겨진 석재가 기단과 탑신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단의 사방에는 12지신상을 배치했는데 현재 뱀상 호랑이상 용상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입니다. 경주 동남산을 보고 나오면서 들렀던 능지탑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던 문무대왕의 호국용에 관한 전설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하니 옛 문화재를 여행하는 저로서도 능지탑지는 더욱 의미 있는 여행이었습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34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이제 또 다른 경주 여행지를 돌아보기 위해 출발합니다.



경주능지탑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6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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