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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봉화여행)봉화 옥류암, 남양 홍씨 두곡종택인 봉화 옥류암 정자 여행 


봉화여행을 하면서 점심을 먹으려고 들렀던 '산수유길 사이로' 인근에 태백오현의 한 분인 두곡 홍우정(1595~1656)선생이 은거했다는 옥류암(玉溜庵)을 찾았습니다. 산수유길 사이로의 참살이 음식과 함께 잘 어울렸던 옥류암. 옥류암은 경북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 산수유길 202-80번지인 뒤뜨물마을 뒷산 자락에 남향을 보고 있었습니다.




봉화 옥류암 주소: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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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칸의 두곡종택과 나란히 자리했으며 옥류암은 절의의 상징인 홍우정의 은거지답게 키가 크고 우람한 소나무가 빼곡하게 정자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다 이마를 찍어 이마가 깨져 피가 철철 흘렀다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수모를 당하자 전쟁이 벌어졌을 때 명분과 의를 지키려면 운명을 걸고 결전을 해서야 옳았다는 척화를 주장하며 낙향하여 봉화의 문수산 아래에다 은거하면서 세운 정자입니다.









옥류암의 유래는 정자와 종택 사이의 옥구슬 같은 물이 솟는 샘에서 나왔으며 이 물줄기는 문수산에서 흘러내린다 합니다. 옥류암은 1637년 처음 지어졌으며 1756년에 중건 하면서 기와를 얹었습니다. 그리고 미수 허목선생의 옥류암 현판과 대산 이상정선생의 기문이 걸렸다 합니다. 가로 120cm, 세로 60cm였던 옥류암 현판은 도난당했다가 되찾아 안동에 있는 국학진흥원에 현재 보관하고 있습니다.







정자는 다시 1876년에 중수하였으며 앞면 3칸에 옆면 1칸 반 크기에다 팔작기와집에 정자주위에 토석담장을 둘렀습니다. 정자 앞 왼쪽으로 사주문을 세워 출입하게 했습니다. 정자 바깥으로는 3개의 연못을 만들었는데 시문에 연과 구기자, 국화, 소나무, 매화, 대나무를 심었다는 기록 등에 조선시대 민간 정원의 건축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연구자료라 합니다.






두곡 홍우정은 옥류암에 기거하면서 학문 증진과 후학을 양성했으며 태백오현과 교류하며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 내 차라리 죽을지언정 불의와 타협해 살고 싶지 않다”며 끝까지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사재감직장을 잠깐 지냈을 뿐입니다.

 





사후에 영조는 두곡선생의 절의를 칭송하며 이조참의에 추증하였고 영조가 직접 ‘숭정처사’라는 칭호를 내렸습니다. 산림처사는 들어보았지만 숭정처사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1816년에 순조(16년)는 이조판서로 추증하고 이듬해에 ‘개절공’의 시호를 내렸으며 선생의 위폐는 구봉사와 문산사에 봉안했습니다.


옥류샘


봉화 옥류암



본관은 남양이며 자는 정이, 호는 두곡이며 형조판서를 지낸 조부 만전당 홍가신(1541~1615)과 부친은 한성서윤 홍영이며 다섯 형제 중 맏이로 대사헌과 대사성, 이조판서를 지낸 홍우원과 무과에 급제해서 제주목사와 수사를 지냈던 청백리 홍우량이 선생의 아우였습니다. 봉화 옥류암은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31호에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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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월정교. 신라 최고의 다리였던 경주 월정교 복원 공사가 끝나갑니다.  


신라의 고도는 서라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경주가 옛날 신라의 수도입니다. 그런 경주에 현재 신라의 전성기를 방불케 하는 대역사가 진행 중입니다. 그 대역사가 월정교 복원공사입니다. 월정교는 경주를 관통하는 하천인 남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천에는 신라 천 년을 상징했던 다리가 하나가 아니고 두 곳이 있었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주 월정교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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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 곳의 다리가 월정교와 춘양교입니다. 두 곳 모두 지금까지 무너진 교각 잔해만 하천바닥에 널부러저 있었습니다. 그 두 교각 중 한 곳인 월정교가 현재 새로운 대역사를 쓰고 복원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월정교 여행을 하고 왔습니다. 여행이라 했지만,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멀찍이서 주변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궁금해서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에게 물었습니다. 언제쯤이면 공사가 끝나는냐고예 ㅎ ㅎ 그 관계자의 말로는 월정교 공사는 거의 끝났으며 주변 조경공사만 마무리하면 된다 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내년 봄에는 모든 공사가 끝나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내년 봄을 손꼽아 기다려봅니다.





처음 월정교 복원공사를 본 게 아마 2년 전 즘 되는 것 같습니다. 그때도 월정교 외관은 마무리된 것 같았는데 그러다 잊고 지내다, 최근에 블로그에서 월정교 야경 사진을 보고 당장 달려가야겠다 싶었습니다. 월정교 야경사진은 남천에 흐르는 불이 반영되어 정말 내 마음을 홀딱 반하게 만들었습니다. 포스팅 날짜를 보니까 그때가 11월 초순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남산 둘레길을 겸하면 되겠다 싶어 경주를 찾았습니다. 이른 아침인지라 상쾌한 기분을 즐기고 싶어 경주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월정교까지 걷기로 했습니다. 3km 남짓한 거리를 걸으면서 경주의 다른 문화재를 곁눈질로 보는 즐거움도 누렸습니다. 계획은 도착해서 낮의 월정교를 찍고 둘레길을 걸은 다음 야경을 담으면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다는 생각으로 월정교에 도착했지만, 월정교와 맞닥뜨린 나의 두 눈은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실망보다 더한 낙담에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블로그의 반영 야경은 어떻게 찍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월정교는 아직 겉모습만 마무리되었고 주변은 황량함 그대로였으며 특히 반영이 아름다웠던 월정교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물이 담겨 있을 만한 웅덩이도 없을 뿐 아니라 남천의 물도 말라 조금의 반영도 기대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웅장한 월정교의 누정과 교각의 모습에 그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신라 시대의 월정교가 과연 이런 웅장하고 거대한 모습이었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들었습니다. 그래도 섬세한 누각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천년 고도 경주를 상징하는 건물로서는 손색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월정교는 춘양교와 함께 서라벌의 왕궁을 들어서는 다리였습니다. 두다리는 신라 경덕왕 19년인 760년에 궁궐 남쪽을 흐르는 문천에다 놓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1280년인 고려 시대 충렬왕 6년에 중수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500년 이상을 신라와 고려 시대를 넘나들면서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한 것은 틀림이 없나 봅니다.

 





월정교를 들어서면 곧바로 반월성의 끝과 연결되고 요석공주가 머물렀다는 요석궁이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은 자료로만 요석궁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조선 시대에 세워진 경주향교와 최 부자 고택이 있고 경주 교동마을의 고택체험과 상가로 탈바꿈했습니다. 현재 복원된 월정교의 19m 아래에는 요석공주와 원효대사 간의 연결 고리가 된 ‘유교’의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원효는 의상과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닫고 그 길로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와 노래로서 민중 속을 파고드는 포교에 힘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효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느냐.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라며 노래하고 다녔습니다.






태종무열왕은 원효의 노랫말을 알아듣고는 원효대사를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원효는 태종무열왕이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는 바로 그 길로 궁궐로 향했습니다. 원효는 문천(지금의 남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물에 풍덩 하고 빠져 걸쳤던 옷이 모두 젖어버렸습니다. 그 전갈을 태종무열왕이 받고는 당장 급한 거 없다며 먼저 젖은 옷과 몸을 말리라며 요석궁에 머물게 했습니다.

 


요석궁에는 무열왕의 공주인 요석공주가 머물던 궁이며 그날 밤 당장 사달이 났습니다. 그 사이에서 신라의 성현 중 한 분인 설총이 태어났습니다. 그 후 원효는 파계하여 소성거사라 하면서 대중 속을 파고드는 포교를 했습니다.. 원효가 발을 헛디뎌 빠졌던 다리의 흔적이 월정교 바로 아래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원효가 문천의 다리를 건널 때는 복원된 월정교처럼 누각을 올린 다리가 아닌 그저 평범하고 난간 없는 다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월정교 발굴조사에서 배 모양의 교각을 확인했는데 이는 상류에서 내려오는 센 물살을 고려한 듯 보입니다. 다리 길이는 60.57m이며 교각의 폭이 13m 인 것을 보면 오늘날 건설해도 거대한 다리라 생각됩니다. 교각 사이의 발굴조사에서 타다남은 목재와 기와 조각이 나왔던 것을 추정하면 교각 위에다 누각이 연결된 누교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이런 거대한 다리가 완공되었던 것도 놀랐지만 그 위에다 누각을 올린 다리라니 이를 보면 신라의 건축기술도 대단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월정교의 복원은 2008년~2013까지 66.15m의 교각과 누교 복원을 마쳤으며 그리고 총 110억 원을 들여 2017년까지 교량의 양쪽 끝에다 앞면 5칸, 옆면 3칸, 최고 높이 15.67m의 중층 건물인 문루를 각각 완공했습니다. 문루는 옆에서 보면 여덟 팔자 형태인 팔작기와지붕에 주심포양식입니다. 월정교는 2016년 형산강 8경에 선정되었고 국가지정문화재에 춘양교와 함께 사적 제457호에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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