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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들은 명당이란 말에 수긍을 할 것이다. 아니면 그런 자리가 어디있서 하며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천한 서민은 살아서도 명당자리를 찾고 죽어서도 명당자리에 안장되길 원하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화장을 원하지만....



현재에도 이런데 예전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명당자릴 찾았을까.
뜬금없이 갑자기 웬 명당자릴 운운하느냐 할 것인데 오늘 포스팅의 주제가 명당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볼까 한다.
법수사 대웅전이 자리잡은 이 자리가 명당의 혈로 고려말 공민왕때인 1371년에 순찰사 이전생이 왕명을 받고 전국을 순찰하면서 양산땅에 도착을 하여 주위의 산세를 보니 뒤로는 영남알프스 영축산이 병풍을 두르고 앞으로는 정족산과 천성산이 솟아 있어 주위의 산세가 빼어나고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이곳이 삼장수가 나올 명당자리임을 발견하고 그는 뛸듯이 기뻐하였다 한다.


왕명의 소임을 마치고 우왕6년인 1380년 그는 이곳에 내려와 밀양박씨와 결혼을 한후 3남2녀를 얻었다.
아들 삼형제는 징석, 징옥, 징규이며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하여 모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무과의 최고 벼슬인 종1품 판중추원사에 모두 올라 마을이름 또한 삼수리가 되었다.
이전생은 조선 태조때 공조판서, 태종때는 예조판서 영중추원사에 올라 1407년인 태종7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니 태종은 그의 공을 치하하고 양산부원군으로 책봉을 하였다 그 후인 1416년에 지명마저 양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진짜 명당자리를 알고 이곳으로 내려와 터를 잡아 아들이 모두 장수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모두 쟁쟁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된 것으로 보아 삼형제의 부단한 노력과 명당이 어울려 모두 장수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 그 자리에는 법수사란 작은 사찰이 자리를 하고 있다. 대웅전의 모습은 군더기 없는 단아한 모습으로 간결하게 지어져 있는데 건너편 천성산(옛 원효산) 아래 홍룡사에서 낡은 대웅전을 새로 건립하면서 나온 대웅전 건축 부재를 이리로 옮겨와 지었다 한다.



어느 사찰과 다른점은 보통 화재로부터 절을 보호하는 물을 다스리는 용을 조각하는데 법수사 대웅전은 봉황을 조각한 것이 여느 사찰과 다르다 하겠다. 현재의 법수사는 누가 봐도 아 이런곳이 하며 명당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
그래서 인지 이곳은 그림 그리는 스님으로 유명한 일당 김태신스님이 기거하며 그림을 그린 사찰이다.
현재 대웅전 앞에는 이름모를 불상이 있다. 국내에서는 보기가 힘든, 의자에 걸터 앉아 있는 모습을 하여 궁금하여 스님에게 여쭈어보았다.

“스님 이 불상 아주 오래된 것 같습니다.”

“예. 몇천년 되었습니다.”

“아. 그러면 보물 같은 문화재인가요.”

“문화재로 지정 된 것은 아니고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불상을 보니 우리나라의 불상 재질과는 다른 사암으로 만든 불상이였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서 모래 알갱이가 떨어져 나가 있어 다시 물어보았다.

“스님. 이불상은 화강암으로 만든 것이 아니네예. 우리나라 불상은 화강암으로 많이 만들던데...”하며 말것을 흐리니.

스님들은예

“중국 부처님이나, 미국 부처님이나 다 똑 같은 부처님 입니다”하면서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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