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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산 미타암(彌陀唵)
소재지:양산시 웅상읍 소주리 171
천성산의 동쪽편에는 원효대사사 창건한 미타암이 있다. 큰 바위 아래 석굴을 파고 자리잡은 보물 제998호가 안치된 미타암은 험한 산사면을 깍아 절터로 만들다 보니 좌우로 길게 건물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에 많은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등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옛절의 멋은 사라지고 없지만 절의 앉은 폼새는 원효대사가 당나라 천명대중을 구한 후 당나라 승려를 천성산으로 인도하여 모두 성불시켰다는  전설과 맞물려 더욱 각광을 받고 있는 사찰이다.
미타암의 미타는 아미타불에서 따온 말로서 서방정토에서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여
죽어서도 극락세계로 인도하여 중생을 구한다는 아미타불. 신라 선덕여왕때 창건 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타암은 현재 암자 뒷편의 큰 바위 아래 굴인 미타굴에서 사찰명이 나왔다 한다.


양산 미타암 석아미타불입상
보물제998호
소재지;경상남도 양산시 웅상읍 소주리
감산사 아미타불입상과 미륵보살입상이 미타암의 아미타불과 함께 한장의 돌로 불상을 깍아만든점과 불상의 양식과 수법이 서로 비슷한 것으로 보아 통일 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보고 있어며.  삼국유사에는 서방극락세계로 날아간 다섯비구가 수도하던 석굴에 봉안 된 것으로 유명한 아미타불로 양산의 석굴암으로도 부르는 아미타불.

미타암 미타굴에 안치 되어 있는 아미타불상은 불신과 광배가 한장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나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큼직하며 두 귀는 어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둥굴며 양감이 있어 자비로운 상호를 나타내고 신체역시 양감이 풍부하며 건강하고 둥글게 처리된 어께는 부드러우면서도 탄력 있는 체구를 만들고 있다.
봉견의 법의는 전신에 걸쳐 유려한 옷주름을 이루며  가슴앞에 군의를 묶은 띠매듭이 표현되었다.
U자형의 옷주름이 길게 흘러 내리며 광배는 주형거신광으로 안에 2줄의 굵은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고 그 사이에 좌우대칭으로 꽃무늬를 넣어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돌렸다. 연화좌의 대좌에는 안상을 조각하였다.




미타암으로 오르는 계단길
주차장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서면 만나는 절입구. 일주문은 따로 없고 기암의 형상이 사찬왕상을 대신하고 있다.


미타굴의 아미타불

찾아가는 길:
미타암 들머리인 주진교까지는 부산 노포동 종합터미널(전철 1호선 종점)에서 수시 운행하는 웅상행1002번 좌석버스 , 301번, 또는 울산행1127·1137·2100·2300번  노선버스 이용 주진마을 하차를 한후 미타암 아래 주차장까지는 걸어가는 방법과 미타암 서틀버스를 이용하면 된다.7번 국도상 웅상읍 주진리 웅상도서관 맞은편 동해주유소 부근의 미타암 버스정류장에서 1일 8회(07:10, 08:10, 09:10, 10:10, 12:10, 13:10, 15:10, 15:10). 미타암 전화 055-365-4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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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곡동 왕산마을에서 무장골을 따라 40여분 올라가면 왼쪽 담벼락에 걸려 있는 무장산사지 안내판. 여기서 우측으로 무장골을 건너간다. 




무장사지터로 우측은 무장사지 삼층석탑가는 길 좌측은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성사적지 가는길이다.

무장사지아미타불 조성 사적비 이수및 귀부로 보물 제125호, 계화부인이 소성왕의 극락왕생을 빌며 조성한 아미타불의 기록을 적은비문으로 현재 비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빗돌을 받치고 있는 거북이를 귀부라한다. 두마리의 거북이가 빗돌을 받치고 있다. 장수를 의미하는 거북이로 알려져 있는데 계화부인이 부왕 소성왕이 일찍 승하하여 아마 귀부를 깔고 명복을 비는 것은 아닌지....

귀부위에 빗돌을  받치는 테두리에 12지신을 돌여 놓았다. 앞뒤로 4개씩. 좌우로 2개씩으로 마모가 심하여 확인이 힘들다.

12지신상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보통 비석을 받치고 있는데 귀부라한다. 목이 달아나고 없습니다.

거북이와 거북이 사이에 역삼각형으로 있는 조각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여성 또는 여성의 성기를 의미한다함

빗돌위에 얹혀 있는 머리로 용이여의주를 받치고 있는 형상같이 보인다.


이수에 새겨진 용

이수의 측면 조각입니다.

측면의 전체적인 모습입니다.


무장사지

이절터는 경주시 암곡동 산1번지에 위치한다. 보문단지 뒤 덕동호 인근에 위치한 암곡동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옛 서라벌)에서 아주 멀고도 험한 골짜리임을 알수있다.
그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무장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능선 끝에 자리를 잡은 절터이다. 무장사란 절이름에서 보면 아주 강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사연을 간직한 절터로 짐작을 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절 이름부터 뜻이 있었다. 문무왕때 이르러 삼국을 통일하였지만 태종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지긋지긋한  전쟁은 끝났다 하며 이제는 피폐한 백성을 생각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병기와 투구를 감추어 나라의 평화를 기원했다는 뜻에서 무장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신라38대 원성왕의 부친인 효왕이 그의 숙부 파진찬을 위하여 세운 절이라 한다.
삼국유사에도 무장사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소성왕의 왕비인 계화부인이 소성왕이 임금의 자리에서 일찍 승하하자 무장사에 그의 극락왕생을 빌기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하게 되었다한다.
무장사지에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는 계화부인이 소성왕의 명복을 빌면서 조성한 아미타불상을 만들면서 그에 관한 내용을 기록해 놓은 기록비문이라한다.
1915년 귀부와 이수만 덩그런히 남아 있었는데 주변에서 비석조각을 발견하였다한다. 그 조각에 새겨진 내용을 보고 무장사지임을 알게 되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그 비문이 보관되어 있다한다.
비문에는 금석학의 대가 추사김정희가 32세 때인 순조17년에 무장사지를 두 번이나 방문한 기록을 써 놓았고 당나라 왕희지의 글을 모아 집자해서 써 놓았다고 되어 있다.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이수및 귀부(보물제125호)와 무장사지 삼층석탑(보물제126호)만 현재 남아 있다.
먼저 이수및 귀부를 살펴보면 비문은 없어지고 비석을 받쳤던 거북모양의 받침대인 돌을 귀부라 한다.
그 귀부위에 있던 비석은 파손된 조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비석 위에 올려져 있던 용모양을 새긴 비석머리를 이수라 한다.
귀부인 거북이 두 마리 위에 12지신을 모시고 그위에 비문을 세웠서며 이수인 용이 새겨진 비석의 머리돌에는 아미타불ㅇㅇ란 여섯글자가 두줄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무장사지삼층석탑은 기단을 2단으로 만들고 그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려 놓았다. 1층 기단에는 모서리 기둥과 2개의 안기둥을 조각하고 덮개인 돌을 올려 놓았다. 덮개돌 위의 2층 기단은 8개의 돌로 짜 맞추었다. 2단 기단 네면에 두 개의 돌에다 안상을 넣었다. 둥근 창모양 같은 문양을 모서리기둥과 안기둥에 새겨 넣었다. 1층 2층3층 각각 몸돌과 몸돌을 덮은 지붕돌인 덮게 돌은 모두 1개씩의 돌로 만들었고 아랫면은 5단 그리고 모서리 기둥을 조각하였다.
1963년 무너져 있던 것을 일부 다른 돌을 넣어 다시 세웠다한다. 높이는4.95m


무장사지 삼층석탑 보물제126호. 1962년 복원 작업을 할때 일부 자재를 추가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합니다.

증명사진입니다.

2층 기단에는 창모양의 안상을 조각하였습니다

기단위에 하나의 돌로된 지붕돌을 놓았고 그의에 몸돌도 하나의 돌로 만들어 사각 모서리를 안쪽으로 조각을 하여  놓았다, 지붕돌은 덮게돌로 5단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돌이다.

옆에서 본 모습으로 안상하며 지붕돌이 5단으로 역층의 모습을 하며 몸돌의 네면에 안쪽으로 조각을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장사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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