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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신문왕릉.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라 31대 신문왕릉을 여행하다. 


신문왕은 신라 31대 왕으로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한 부왕 문무왕의 장자로 성은 김 씨, 이름은 정명 자는 일초입니다. 664년 문무왕 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681년에 왕위에 올라 10년 남짓 통일신라를 이끌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의왕후이며 왕비는 소판 김흠돌의 딸인 김 씨였지만 아버지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켜 출궁 당하자 다시 일길찬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았습니다.





경주 신문왕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453-1

신문왕릉 문의 전화:054-779-6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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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많은 일을 한 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감은사와 만파식적등 신문왕과 문무왕에 얽힌 흥미로운 전설로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신문왕이 즉위하던 그해에 장인인 김흠돌이 모반을 꾀했습니다. 모반의 사유가 궁색하지만 왕비인 딸이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일과 진복의 상대등 임명 건에 반기를 들었던 곳으로 유추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난을 평정하고 그에 연루된 모든 사람을 처형시켰는데 심지어 반란모의를 사전에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이찬 군관과 그의 아들까지 죽게 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기화로 신문왕은 귀족세력의 권력을 제어함과 동시에 전제왕권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신문왕 하면 퍼뜩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이견대에서 해룡으로부터 받았다는 피리 만파식적과 선왕인 문무왕이 왜군을 진압하기 위해 세웠던 감은사입니다. 지금은 절터의 흔적인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만 국보로 지정되어 그 터가 일부 남아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감은사는 문무왕이 착공을 했지만, 완공을 못 보고 신문왕이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682년인 신문왕 2년에 완공했습니다.





처음에는 나라를 지킨다는 뜻인 진국사였습니다. 그러다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호국 충정에 감읍하여 감은사로 고쳐 불렀습니다. 문무왕은 죽으면서 용이되어 신라를 왜적으로부터 시키겠다며 동해에다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습니다. 신문왕은 그 유지를 받들어 경주 낭산의 능지탑에서 문무왕을 화장하여 그 뼈를 감포 동해구의 물속 바위에 안장했는데 후세에 와 이 바위를 대왕암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감은사 금당은 일반사찰의 금당과는 다른 모습인데 꼭 돌다리 형태입니다. 이는 신문왕이 바다의 용으로 변한 부왕을 이곳에서 쉴 수 있게 금당 아래에다 바다로 연결된 통로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는 만파식적입니다. 만파식적은 만능 피리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피리를 불면 파도가 일렁이면서 강한 태풍으로 변해 왜군의 배를 모두 물속에 가라앉게 했다는 전설의 피리입니다.





신문왕은 부왕을 위해 감은사를 완공하자 다음 해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 앞바다에 떠 있다는 전갈에 “이는 호국용으로 변한 문무왕과 천신으로 변한 김유신이 보배를 주려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신문왕은 이견대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는 대나무 한줄기가 있었으며 낮에는 대나무가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대나무가 하나가 되자 왕은 산에 들어갔습니다.





어디선가 용이 나타나 그에게 검은 옥대를 주면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상스러운 피리라며 대나무가 하나가 되었을 때 베어 피리를 만들라 하였습니다. 신문왕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천존사에 보관하였으며 만파식적이라 하고 국보로 삼았습니다. 이번 신문왕 포스팅은 신문왕이 이룬 업적도 중요하지만, 만파식적과 감은사의 전설이 더욱 흥미로워 옮겨보았습니다.

 




신문왕은 옛 백제와 고구려 백성들을 융합하여 하나의 통일신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통일신라의 기틀을 다지는 등 국학 설립으로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녹읍 폐지와 관료전 지급 및 지방 통치를 위한 9주 5소경 제도를 완성하고 여러 국가제도를 정비하여 전제 왕권의 기틀도 마련했던 국왕입니다.







신문왕의 장지는 현재 경주 남산 아래에 있습니다.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이며 봉분 아래에는 둘레석을 돌렸는데 자연석을 블록 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았습니다. 이는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호석이라합니다. 호석 맨 위에는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습니다. 또한, 호석 주위로 44개의 삼각형 받침돌로 호석을 받치게 했습니다. 남쪽으로 향하는 받침돌 한곳에는 출입구를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문(門)자가 새겨져 있다는데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신문왕릉은 둥근 모양으로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입니다. 능의 밑 둘레는 약 92m에 높이는 8m고 봉분 앞에는 크고 긴 사각의 돌기둥을 여러 개 눕혀 쌓아 상석을 만들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문왕릉은 낭산 동쪽에다 장사 지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현재의 왕릉으로 비정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100% 맞는다고는 할 수 없는 일부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황복사지 인근에 있는 보문들에 십이지상 등이 남아 있는 능을 신문왕릉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왕릉은 논 가운데 폐허가 되어 있으며 지금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현재 공식적인 신문왕릉은 배반동에 있으며 이번에 포스팅한 곳입니다. 참고하세요. 경주에 엄습한 강력한 지진으로 신문왕릉의 출입문인 솟을 대문의 벽체가 떨어져 나간곳이 여러곳 있었습니다. 어서 빨리 보수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경주 신문왕릉 사적 제1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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