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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읍성지(東萊 邑城址)

동래읍성은 현재의 동래 일원 즉 복천동, 안락동, 명륜동, 칠산동, 명장동 일대에 걸쳐져 있는 성으로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안락로타리의 충렬사 뒤산인 동장대에서 인생문를 거쳐 북장대의 마안산으로 연결되고 동래향교 뒷산의 낮은 산등성이를 전부 포함하며 현재 동래시장이 있는 평탄한 곳까지도 여기에 포함된다.


 




산성과 평지성의 형식을 접목하여 장점을 이용한 평산성의 형식으로 쌓았다. 삼한시대에부터 부분적으로 성의 형태를 갖추어진 것으로 보지만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보이는 현종12년인 1021년에 동래성을 수리한 것으로 나와 있다.
1387년 고려 우왕13년에 박위가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동래부는 대일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관아의 규모도 키우고 격식 또한 높혔다. 그래서 정3품의 부사를 두어 관할하게 하였는데 이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함이였다.

 



1592년인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부산진성과 함께 제1공격목표를 정했다한다. 이에 동래부사 송상현은 동래성을 사수하기 위해 민관군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를 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성은 허물어진채로 방치되어 오다가 1731년 영조7년에 와서 정언섭에 의해 기존의 성보다도 규모가 큰 성을 다시 쌓았다한다.
이때 쌓았던 성의 흔적을 토대로 지금 동래읍성을 새로 복원하게 된 것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이 3.8km, 읍성에는 사대문인 동,서,남,북문과 인생문, 암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한다. 





동문을 지회루, 서문을 심성루, 남문을 무우루, 암문을 은일루라고 하였다. 동래읍성중 평지에 있었던 남문은 위치로 보아 중요하게 여겨 익성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과 뒤쪽의 주조문의 이중구조로 되어있었다. 일제강점기때 시가지정비계획에 의해 평지에 있던 성벽은 철거되고 마안산등 일부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가 북문, 북장대, 동장대. 서장대, 인생문이 복원되었고 치성과 여장등이 보수 또는 수리중이다.



동래읍성의 장대중 하나인 북장대는 1737년 영조13년에 좌천동 동구 도서관 옆 증산 위에 세워졌다가 20년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그때의 장대는 없어지고 1999년 현재의 북장대는 복원이 되었다. 1870년 고정7년에 동래부사 정현덕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벽과 문루등을 고쳐 쌓았는데 서장대를 세워 장수의 지휘와 주변 경계를 강화하도록 하였다한다.



북장대는 읍성중에 가장 높은 위치에 있어 성내외에 있는 군대를 쉽게 지휘할수 있었으며 6개의 문중 하나인 인생문은 임진왜란때 이곳 인생문으로 피난을 위해 성을 빠져나간 사람은 모두 목숨을 건졌다하여 사람을 살린 문이라하여 인생문으로 부르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이 성문을 굳게 닫고 문루에있는 송상현을 보고 소서행장이 길을 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왜구는 명나라를 칠려고 하니 조선은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하였는데 정발장군이 길을 빌려 줄 수 없다하며 반대하여 종과부적과 조총으로 인해 부산진성은 함락되고 그 길로 동래성으로 쳐들어 왔다고 합니다. 



소서행장이 송상현에게 "싸울테면 나와서 싸우고 그렇치않으면 길을 빌려달라"고 하니 송상현이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는 답글로 결연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송상현의 그 결연한 의지도 군사의 열세와  조총으로 중무장한 왜적을 이길수는 없었습니다. 동래성은 함락 되었고 송상현은 동래성과 끝까지 함께 하다가 순절하였습니다. 그 역사의 성인 동래읍성 주위로는 볼거리도 많이 있습니다. 송상현과 정발장군등 숱한 선열들을 모신 곳인 충렬사가 있으며, 복천동고분군, 동래향교등 문화유적과 함께 역사성도 많은 곳으로 자녀분과 주말에 방문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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