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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행/중구여행)남대문시장 숭례문. 국보1호 숭례문 화재후 부실 논란에 큰 상처


연일 매스컴에서 터져 나오는 문화재에 관한 뉴스는 숭례문이야기입니다. 2008년 2월10일은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린 날입니다. 누군가의 방화로 인해 대한민국의 상징인 국보1호 숭례문(남대문)이 불타고 온 국민은 분노하며 울었습니다.





그 후 숭례문 복원공사에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국보 1호의 명예회복을 위해 발 벗고 나서 숭례문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국보 1호를 바라보는 국민의 하나같은 염원을 짓밟아 버린 사건이 터졌습니다.





숭례문 부실 논란과 우리 소나무 금강송이 빼 돌려졌다는 의혹이었습니다. 드디어 어제(26일) 숭례문 수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금강송 4주와 국민 기증목 154본을 빼돌렸다는 사실에 지금 숭례문을 바라보는 대한민국 국민은 2008년 숭례문이 쓰러질 때 보다도 더 참담함을 느낌입니다.





온 국민의 하나같은 염원을 외면해 버린 신○○대목장, 우리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그릇된 판단으로 수천년을 후손들에게 이어가야 할 우리 문화재가 그것도 국보1호인 숭례문에 또 한번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제 만신창이 국보1호 숭례문은 어찌해야하나요? 참 황당할 따름입니다.











언론의 중심에 하루도 비껴갈 날이 없었던 숭례문을 지난 3월7일 이른 아침 서울역에 도착하여 시간의 여유가 생겨 구경을 갔습니다. 국보 1호인 숭례문을 몇 번 본 게 고작이고 더군다나 화재로 소실 된 뒤는 처음이라 찾아가는 발걸음은 숭례문을 본다는 기쁨에 가벼웠습니다.





숭례문 앞에 가니 경비를 하시는 분이 9시부터 관람이 된다 하였습니다.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좀 일찍 보면 안됩니까 하니 ‘절대 안된다’며 화재 이후 엄청 경비가 강화 된 것 같습니다.








경비실 입구에서 쳐다보고 사진도 찍고 하며 남대문 시장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서울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 숭례문 앞을 지나는데 그때가 9시였습니다. 그래서 얼렁 구경 할 욕심으로 뛰어 다니며 보았는데 숭례문 포스팅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에야 하게 되었습니다. 안성마춤이라 해야 하나요. 때마침 숭례문 부실 중간발표를 보게 되어 참담한 기분으로 숭례문 포스팅을 합니다.




  







한국전쟁때 총탄 흔적



서울에는 4대문이 있습니다.돈의문, 숙정문, 흥인지문 그리고 남대문으로 불리는 숭례문입니다. 숭례문은 1962년 12월20일 대한민국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한양도성의 남문으로 세워졌고 그 후 세종 30년(1448년), 성종 10년(1479년)과 조선 말기인 고종에 와서 대대적인 수리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한양도성 성문은 매일 밤 인정인 10시 무렵에 성문을 닫아 걸고 다음날 아침 파루인 4시에 굳게 닫았던 성문을 열었습니다. 1980년 초까지 있던 통행금지와 같은 것으로 이때는 성문의 출입을 막았고 문루에 종을 달아 시간을 알렸다 합니다.








숭례문의 건축기법을 보면 석축위에 중층누각을 세웠는데 장식이 간결하고 내부구조가 견실하며 조선 초기의 건축 특징과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다하겠습니다. 한일 늑약이후 1907~1908년 일본의 황태자가 방한하여 "대일본 제국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여 문루를 통과할 수 없다"하여 왜인의 자행으로 숭례문 좌우의 성곽이 철거 되어 도로가 생겼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금도 성곽의 석축을 보면 그 당시 총에 맞았던 탄흔의 흔적이 여럿 남아 있습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숭례문을 해체보수하며 전쟁의 상처를 씻겨 오늘에 이르다가 2008년에 얼빠진 사람의 방화로 인해 소실된 것을 2013년 5월에 좌우 성곽과 함께 복원을 완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는 화재로 국보1호를 잃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지봉유설에 따르면 숭례문 현액은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글씨고 성곽사이에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정면5칸 측면2칸의 중층건물로 다포형식의 건물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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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행/구서울역사)인사성 바른 청년이 수문장인 구 서울역사 구경하고 왔습니다.


지방에서 서울을 오기위해서는 반드시 거치는 곳 중 한 곳이 서울역입니다. 지금이야 새로 신축한 서울역 건물이 승객을 맞고 있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서울역사는 중후한 멋을 지닌 건물이었습니다.   


 



처음 우리나라에 철로가 깔린 것은 경인선이지만 부산에서 서울을 지나 신의주를 거쳐 중국까지 이어진 철길은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를 수탈할 목적으로 선로를 깔았습니다. 엄청 난 우리 농광산물을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그 당시 세웠던 서울역사 건물로 우리 민족이 당한 수난을 고스란히 지켜본 건물입니다. 구 서울역사를 보존함으로 우리의 뼈아픈 역사를 후세에도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주말에 부산에서 밤열차를 타고 서울로 갔습니다. 서울에 자주 올라 갈 일은 없지만 갈 때마다 그래도 비행기 보다는 꼭 기차를 이용하고 싶었습니다. 기차는 마음속에서부터 무엇인가 추억을 느끼게 합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칙~폭 칙~폭 칙칙폭포 칙칙폭포” 하며 달려가는 기차의 모습이 아련한 나의 추억 같아 그런 가 봅니다. 예전에는 저녁에 출발하는 비둘기열차를 타고 올라가면 아침에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요즘은 세월이 좋아 3시간이면 고속철도(KTX)를 타고 서울에서 누구를 만나 볼 수 있는 그런 세상입니다. 옛 추억을 생각하며 밤 11시에 출발하는 무궁화를 타고 올라갑니다. 새벽에 도착하여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아침에 부러 찾아가 구경을 한 구 서울역사, 근대물인 영화나 드라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서울역사의 모습을 정말로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철도의 역사는 대한제국때인 1900년 서대문과 인천의 재물포를 운행하는 경인철도가 우리나라 철도의 효시입니다. 그 당시는 남대문역사로 출발을 하여 구 서울역사는 1925년 르네상스풍의 절충식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서울역사를 보면 중앙돔과 소첨탑 좌우로 양날개의 모습이 특징인 건축물로 스위스의 루체른역사를 본떠 만들었다합니다. 역 내부를 보면 1층에는 중앙홀 좌우로 대합실이 있었다합니다. 





그 당시 분주함의 서울역사가 그려집니다. 2층에는 서양식 레스토랑이 있었다하니 요즘의 서울역과 별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무원의 사무실도 함께 있었다합니다.





지금 구 서울역사는 역동의 세월을 달려온 만큼 2004년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안식을 위해 1925년 건설당시의 모습으로 복원을 하였습니다. 현재는 전시와 공연,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시민과 함께 달려온 서울역사의 기능을 충실하고자 소통의 공간 되고 있습니다. 구 서울역사는 사적제 284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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