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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상주여행)서애 류성룡의 후손 수암종택 여행. 상주 수암종택 


방가방가

이번에는 경북 상주군의 

수암종택을 찾았습니다.




카카오지도 캡쳐


 상주 수암종택 주소:경북 상주시 중동면 중동단밀로 15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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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에서 산행을 하고는 

해질녘에 부리나케 찾았던 

수암종택.



출입문이 잠겼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을 했는데 ㅎㅎ

마침 밭일을 끝내고 수돗가에서 

농작물 정리를 하시던 수암종택 후손이며 

종택 관리를 하시는 분이 계셔 

종택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 계시는 지 

일주일에 한번 종택에 내려온다고 합니다. 

필자가 그러면 

그 외에는 개방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후손분이 가지고 갈 것도 없고 해서 

출입문은 열어두고 간다고 했습니다.

  


요즘 코로나19로 시국도 시국이라 

조심스럽게 종택 구경을 해도 되겠습니까? 하니 

흔쾌히 구경하시라며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수암종택은 풍산 류씨 우천파의 종택이며 

안동 하회마을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柳袗) 선생이 

하회마을에서 옮겨와 세거를 이루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수암종택은 낙동강과 지류인 위천

팔공산, 속리산, 일월산이 만나 

‘삼산이수(三山二水)·매화락지(梅花落地)’의 명당이라고 하는데 

제가 봐도 주위 조망과 함께

낙동강을 굽어보는 최고 명당으로 보였습니다.

 


수암종택은 워낙 청빈하여 

원래는 담장과 대문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996년 종택으로 들어가는 

삼문인 솟을 대문을 세웠다고 합니다.

 


수암종택은 1700년대에 중기 건물로 추정하며 

출입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녹사청이 있습니다.

 


그 안쪽으로 정면에 안채와 붙은 사랑채 건물이며 

사랑채 오른쪽에 불천위를 모신 사당이 있습니다.

 


녹사청은 다른 곳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건물입니다.





이는 집주인인 

낙동대감 낙파 류후조(柳厚祚·1798~1875)가 

좌의정을 끝으로 낙향하며 

봉조하(종2품 이상의 관리가 관직을 그만 두면 

종신토록 그 품계에 맞는 녹봉을 주는 제도)에 재수 됩니다.





그의 비서격인 녹사가 기거하며 

봉조하의 녹봉을 지고 오는 

지방 관리을 영접하던 숙소가 녹사청입니다.

우진각 지붕의 ‘ㄴ’자 건물입니다. 

  




녹사청을 마주하고는 

사랑채와 붙은 안채이며 

가운데 사랑마당을 두었습니다.






‘ㅁ’자형 건물로 

경북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형태로 

이는 추위를 막기위한 구조입니다.





먼저 사랑채를 보겠습니다.

3칸이며 2카의 사랑방과 

1칸의 마루방으로 꾸며졌습니다. 





사랑방 방문 위에는 

‘우천세가(愚川世家)’ 현판이 걸렸습니다.

 





사랑채 왼쪽에 

안채로 들어서는 

중문이 있습니다. 


 


안채는 

안방이 2칸이며 

건너방과 사이에 

2칸의 대청이 있습니다.

 


그 앞으로 

사랑채까지 연결하는 

툇마루를 달았습니다.



대청 오른쪽에는 

건너방과 마루, 날개채를 달아 

사랑채와 연결했습니다.



초가 지붕인 

고방건물입니다.





수암종택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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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하회마을 서애 류성룡의 병산서원 여행. 병산서원


안동 풍천면 하회마을 뒷산인 화산과 서애 류성룡의 본가가 있는 하회마을에서 서애 류성룡선생이 병산서원을 오가며 낙동강을 끼고 걸었을 선비길을 다녀왔습니다. 

선비길 입구에 병산서원이 있습니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1542~1607)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며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안동 병산서원 주소:경산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

안동 병산서원 전화:054-858-5929

사적 제2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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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하면 가장 대표적인 게 징비록입니다. 

징비록은 영의정과 도체찰사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하여 임진왜란이 끝나자 임란(1592~1598) 당시의 기록을 남겼는데 이게 ‘징비록’입니다. 

징비록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 등 임진란의 전반을 수기한 사료로 현재 국보 제132호에 지정했습니다.

 

복례문


서애선생을 배향한 병산서원의 방문은 더욱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병산서원은 도동서원·도산서원·소수서원·옥산서원과 함께 조선시대 5대 서원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 역사성 때문인지 병산서원을 보는 내내 외적인 화려함 보다는 고고한 소나무처럼 선생의 우국충정을 서원의 분위기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병산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이며 고려 때부터 존재했던 사립기관입니다. 

류성룡선생이 1572년(선조5년)에 현재의 장소로 옮겨 왔으며 그 뒤 1607년 선생이 타계하자 지역유림들에 의해 1613년 존덕사를 세우고 위패를 모시면서 이듬해 병산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 병산서원에는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선생의 위패도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병산서원은 1863년인 철종 14년에 ‘병산’이란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868년(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한곳입니다. 

병산서원도 일반 서원과 마찬가지로 강학공간을 앞에 두고 배향공간인 사당을 뒤에 배치하는 전학후묘의 양식을 따랐습니다.

 

광영지


이와 함께 서원은 강학과 제향 공간, 그리고 부속건물의 세 영역으로 나누어집니다. 

유생의 강학 건물은 복례문, 만대루, 동·서재, 입교당, 장판각이라면 제향건물은 내삼문, 존덕사, 전사청이 있으며 병산서원을 관리하는 부속건물로는 고직사, 뒷간, 광영지 등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병산서원의 주 출입구는 솟을 대문인 북례문입니다. 

‘복례’는 논어의 『극기복례위인』에서 따왔으며 “자기를 낮추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다”라는 공자의 가르침인 자기절제의 정신을 함축해 놓았습니다. 

최초의 복례문은 만대루 동편에 있었다고 하며 낙동강 건너 험준한 산세인 병산의 지세를 피하려는 풍수지리에 따라 지금의 장소로 옮겨 세웠습니다. 

솟을 삼문인데 특이하게 좌우는 벽체로 막았으며 가운데 칸만 판문을 달았습니다.



복례문을 들어서면 만대루와 사이에 작은 연못인 광영지가 왼쪽에 자리했습니다. 

조선시대 양반가 정원에서 꼭 빠지지 않는 게 연못인데 서원에서는 처음 보는 듯했습니다. 

병산서원에는 작은 규모지만 연못이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연못이라 부르기에도 너무 작아보였으며 그 규모는 많이 축소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작은 연못이지만 많은 뜻이 있습니다. 

연못은 사각모양인데 이는 땅을 의미하며 연못 가운데 섬은 둥글며 이는 하늘을 상징합니다. 

글 읽던 유생들이 이곳에 나와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바람 소리,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 머리를 식히고 마음을 닦아 학문에 정진하였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게 만대루입니다. 

강당인 입교당과 마주한 건물로 2층의 누각형태로 병산서원에서 가장 웅장하며 분위기 있는 건축물로 서원의 대표건물입니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앞면 7칸, 옆면 2칸의 건물이며 병산서원에서 가장 빼어난 조형미를 가진 건축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인지 만대루를 보면 무채색의 웅장함이 가슴을 팍팍하게 만듭니다.

 


‘만대’는 당나라 시인인 두보의 시 ‘백제성루’인 ‘취병의만대 백곡회심유(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에서 따왔습니다. 

그 뜻을 보면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만하고, 흰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이 즐기기 좋구나”를 뜻합니다. 

저녁무렵 팔작기와지붕에 홑처마 건물로 된 누마루에 올라서면 낙동강에 비친 병산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 폭의 수채와 같은 선경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입교당은 병산서원의 중심건물인 강당이며 숭교당 또는 명륜당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가르침을 바로세운다”는 뜻인 입교당은 앞면 5칸에 옆면 2칸인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의 5량가건물로 유생들의 강학장소였습니다. 

가운데 3칸은 마루를 두고 왼쪽에는 경의재, 오른쪽은 명성재인 1칸 온돌방을 각각 넣었습니다.

 



명성재는 서원의 원장이 머물렀으며 경의재는 교무실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에 마당을 두고 좌우에 건물은 동·서재이며 유생들이 머물던 기숙사로 사용한 공간입니다.

 











장판각

입교당 뒤 존덕사 왼쪽에 책을 찍을 때 사용했던 목판 유물을 보관하던 장판각 건물이 있습니다. 

서원에서 강당건물과 함께 가장 중요한 건물이 추모공간인 존덕사입니다. 

존덕사는 내삼문을 들어서면 만나지만,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아 내부를 볼 수 없도록 잠금 된 상태입니다.



존덕사 내삼문

서애 류성룡선생과 수암 류진선생의 위패를 모셨으며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인 익공양식의 겹처마로 옆면에 풍판을 달았습니다.


전사청





병산서원에서 가장 특별하게 보인 곳이 뒷간입니다. 

뒷간이라 하면은 화장실을 말하는데 흙담장을 마치 달팽이형태로 말 듯이 쌓아 여러 서원을 여행했지만 이런 형태의 화장실은 처음 보았습니다. 

이 화장실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머슴)이 사용했다고 하며 하늘을 지붕 삼았으며 400여 년 전에 서원건물과 함께 지어졌다고 합니다. 

초창기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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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여행/안동가볼만한곳)안동 하회마을 여행. 풍산류씨 집성촌인 서애류성룡의 하회마을 여행


고장마다 같은 성씨가 모여 집성촌을 이루는 곳이 우리나라에 여러 곳 있습니다. 경주 양동마을과 영양의 두들 마을이 그러하고 또한, 안동의 풍천면 하회마을 등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나 안동의 풍천면 하회마을은 600여 년 동안 풍산류씨가 세거를 이루었던 곳이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동성마을 집성촌입니다.







안동 하회마을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1176-1

안동 하회마을 전화:054-85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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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지붕과 초가를 인 지붕이 조화롭게 마을을 이루는 안동 하회마을은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유교문화와, 풍속을 가장 잘 이어오고 있는 곳 중 한 곳입니다. 정부에서도 이를 인정하여 안동 하회마을을 중요민속자료 제122호에 지정하였으며 2010년 7월에는 지구촌 사람들이 모인 유네스코에서도 지구촌이 보호할 유산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우리나라의 풍속과 문화가 마을주민에 의해 긴 세월 동안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것을 이제는 우리나라를 넘어서 세계인이 지키고 이어갈 유산이라 평가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그이름을 올렸습니다.





하회마을의 지명도를 더욱 높인 것은 조선 시대의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형제가 이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겸암 류운룡선생은 퇴계 이황의 문하로 과거에는 별뜻을 두지 않았으며 임금의 명으로 벼슬길에 나가 여러 직책과 인동 현감, 풍기군수, 원주목사 등에 재임하여 목민관의 본보기가 될 정도로 법을 공평하게 다스려 백성의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이조판서 추증과 문경공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또한,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불멸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을 선조에게 천거하여 두 전란을 승리로 이끌었고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징비록을 남겨 후세에 전란의 참상을 겪었던 후회와 교훈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우리는 이 두 분을 낙양의 정호와 정이 형제의 우애와 견주어 ‘하남백숙(河南伯叔)’이라 칭송합니다.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굽이쳐 'S'자로 크게 휘돌아 마을을 감싸며 강물이 흐르는 곳의 마을로 흔히 물돌이 마을이라 합니다.



하회는 여기에서 유래했으며 풍수적으로 태극형, 연화부수형, 행주형이라는 명당에 조선 시대부터 가장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이라 알려졌습니다. 태백산의 지맥이 마을의 주산인 화산을 솟구쳤다면 일월산의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를 빚어 그 사이로 낙동강의 물길이 흘러 ‘산태극 물 태극’의 가운데에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물에 떠있는 연꽃 모양’이라는 연화부수형의 풍수지리설에서 마을의 주산은 화산, 마을과 부용대 사이를 흐르는 낙동강을 따로 화천이라 하는데 이는 ‘연화’인 연꽃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마을의 가장자리에는 터줏대감인 최고령 600살의 느티나무가 지키고 노거수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된 독특한 형태의 마을입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집은 정남향 동남향을 보고 있다면 하회마을은 집의 앉은 모습이 일정하지 않습니다.또한, 기와집을 초가들이 빙 둘러싸며 배치된 게 이채롭습니다. 하회마을의 규모는 구한말까지 350여 가구였으나 현재 150여 가구만 남았습니다. 하회마을 내부에는 127가구에 437개 건물이 현재 있습니다.



하회마을에는 풍산류씨 세거 이전에 허씨와 안씨가 먼저 마을을 이루었다 합니다.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란 말이 전해오고 이는 안동 하회마을의 국보 제121호인 하회탈 제작자가 허 도령이란 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풍산 류씨가 하회미을에 자리를 잡게 된 연유를 알아보겠습니다.



풍산류씨 7세인 전서 류종혜공이 가뭄과 홍수는 물론이고 평상시에도 마을 주산인 화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강물의 흐름을 관찰하며 면밀하게 따져 최고의 명당으로 터를 잡았지만 그과정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집을 지으려고 뼈대인 기둥을 세웠지만, 그때마다 넘어져 건물을 지을수 없었습니다. 그때 꿈에 현몽하기를 이곳에다 터를 잡으려면 3년 동안 사람의 목숨을 구하여 살리는 활만인을 베풀라는 계시를 받고 그 길로 마을 입구 고개에다 초막을 짓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배가 고프면 음식을, 노자가 필요하면 노자를, 짚신이 필요한 사람에게 짚신을 나누어주고 베풂으로써 하회마을에서 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베풂의 삶 때문인지 서예선생 등 많은 명신을 배출하여 풍산 류씨는 대 명문가로 오늘날까지 번창하였습니다. 하회마을에는 서민과 선비들을 위한 놀이가 전래하는데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인 ‘하회별신굿탈놀이’로 이는 굿을 겸한 탈놀이를 말합니다. ‘하회선유불놀이’는 부용대 단애에서 열리는데 선유시회를 겸한 불꽃놀이가 밤하늘을 수놓습니다.





이 모든게 하회마을의 전부는 아니지만, 수박 겉핥기식의 작은 지식을 습득했다면 이제 마을 길을 따라 출발합니다. 시간상으로 많은 고가를 전부 둘러보지 못하고 주민이 모두 생활하고 있는 삶의 공간이라 관람할 수 있는 고택은 정해져 있습니다. 저는 마을길을 중심으로 둘러보았습니다.



초가집 지붕을 이엉하는 모습은 실제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어릴 적 고향에서 자주 보았지만, 한동안 보지 못했고 이제 이런 전통마을에 와야만 만나는 하나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먼저 화경당을 찾았습니다. 솟을대문 입구에는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습니다.





최근에 부주의로 작은 화재가 일어나서 부득이 취한 조처라 합니다. 목재건축물은 작은 실수 하나에도 큰불이 납니다. 우리 모두 주의를 해야겠습니다. 출입문에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 유교책판’ 명패가 붙어 있습니다.



화경당은 “화채로 어버이를 섬기고 경으로 임금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1797년인 조선정조 21년에 류사춘이 처음 집을 지었습니다. 사랑채와 대문채, 날개채를 짓고 1862년 철종 13년에 그의 후손인 류도성이 안채와 큰 사랑채. 사당을 지으면서 사대부 가옥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특히 큰 사랑채의 누마루에서 보는 풍광은 매우 아름다우며 큰 사랑채를 두른 300년이 넘은 노송들은 하회마을을 굽어도는 강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합니다. 고가 내부를 못 보는 아쉬움은 크지만, 그래도 대문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골목을 돌아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하회마을의 중앙에 자리한 삼신당의 노거수를 찾았습니다. 처음 입향한 류종혜공이 심었다는 느티나무로 하당이며 화산 중턱의 상당서낭당과 중단국사당을 합해 삼당이라 하며 마을 주민의 소망을 비는 곳입니다. 정월 대보름 밤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를 상당과 중단에서 지내고 하당에서는 다음 날 아침에 제를 올리고 하회별신굿탈놀이도 열립니다.





이번에 찾은 고가는 하회마을 북촌의 대표 기와집인 양진당입니다. 풍산류씨 대종택으로 류종혜가 하회마을에서 최초로 지은 집입니다. 긴 세월동안 여러 번 어려움을 껶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화재로 일부 불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손으로 이어지면서 여러 번 새로 지었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웅장함을 잃지 않은 풍산류씨 대종택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문중의 모임을 이곳 사랑채에서 열리며 ‘양진당’은 풍산류씨 족보를 처음 완성한 류양(1687~1761)의 호에서 따 왔고 사랑채의 입암 고택은 류종영의 호에서 따왔습니다. 





다시 돌아 나와 이제 건너편의 서애 류성룡 종택인 ‘충효당’을 찾았습니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1999년 4월 이곳에서 묵었다는 뉴스를 여러 번 접해 사실 개인적으로 가장 보고 싶었던 고가입니다. 출입문인 솟을대문과 마주하고는 하회마을 방문을 기념하며 심었다는 구상나무가 있습니다.



 이 집은 서애류성룡 종택이지만 그 당시의 건물은 아니며 17세기에 지어졌습니다. 그의 손자와 제자들이 서예선생의 생전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었으며 류성룡이 유난히 제자들에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가르침을 강조해서 충효당이라 부르게되었습니다.

 






들어서는 대문체에 붙은 12칸의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는데 류성룡의 8세손인 유상조가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부하군사를 수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현재 이곳에는 서예선생의 유물전시관도 있습니다. 하회마을을 나와 화천 둑길을 가기 전에 작천 고택이 있습니다.







건물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원래 두 채로 지어졌지으며 1934는 대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문간채가 쓸려나가면서 지금은 안채만 남아 있습니다. 류도관의 호에서 따와 작천 고택이라 부릅니다. 다시 하회마을 입구로 나가기 위해서는 강둑길을 따라갑니다. 천연기념물 제473호인 만송정 숲과 화천 건너 천길 단애를 이룬 부용대의 절경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겸암 류운룡공이 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잡아주고 북서쪽으로 들어오는 허한 기운을 메우려는 비보로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어 만송정이라 하였으며 현재의 소나무는 1906년에 다시 심었다 합니다. 부용대는 하회마을 조망을 한눈에 하는 곳으로 60m의 단애로 이루어졌습니다.

 













만송정


 


부용대



부용대는 중국고사에서 취했으며 부용은 연꽃을 뜻합니다. 하회마을의 풍수가 연화부수형이고 마을이 들어선 모습이 연꽃 같다는데서 유래하고 하회마을 전망대라 하여 부용대라 부릅니다. 하회마을 북쪽의 언덕이라 하여 ‘북애’로도 불렸다는 부용대에는 옥연정사, 겸암정사, 화천서원이 현재 남아 있습니다. 하회마을에서는 나룻배를 타고 건너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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