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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함안여행)단종의 의리를 끝까지 지켜 충절의 상징이 된 생육신 어계조려선생의 채미정 여행. 


함안군북면 원북리와 하림리에는 어계조려선생의 유적지가 여러곳 있습니다. 

어계고택과 어계조려선생 묘, 채미정, 서산서원, 고마암 등이 있습니다. 





단종의 의리를 끝까지 지킨 생육신 어계조려선생 채미정 주소: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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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군북면의 어계 조려 선생 유적지 여행에서 채미정을 여행했습니다. 

채미정의 '채미'는 은나라 백이와 숙제 형제가 

 주나라에 나는 모든 것은 먹지 않는다고 수양산에서 고사리만 꺾어 먹으며 지냈습니다. 

누군가에게 고사리도 주나라꺼라는 말을 듣고는 굶어 죽어 충절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채미정의 유래를 알려면 먼저 어계조려선생을 알아야합니다.

어계조려선생은 1453년인 단종원년에 진사시에 합격해 조정에 나아갔으나 

1455년에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권을 찬탈하는 계유정난을 이르켰습니다. 



 

이에 반기를 들고 단종에 대한 의리를 지켰던 분들이 있습니다.

어계 조려선생도 ‘불사이군’ 두임금을 섬길수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원북에 낙향하여 

낚시로 소일하며 더 이상 출사하지 않은 생육신중 한분입니다.

 


1456년에 단종이 영월에 유배된 것을 알고는 

왕복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영월을 찾아 수시로 문후를 드렸습니다.

1457년 금성대군의 잇단 단종 복위거사가 이루어졌으나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책임을 물어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단종이 승하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길로 말을 달렸습니다. 



영월의 청령포에 닿았으나 불어난 물로 

강을 건널수 없어 통곡하니 어디서 호랑이가 나타나 

계선생을 등에 태우고 강을 무사히 건너게 했습니다.




무사히 단종의 장례를 마치고 다시 호랑이 등을 타고 

강을 건너왔다는 '호배도강전설'이 영월의 청령포에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서산 아래에 기거하면서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고 신하의 예를 다하였습니다. 



숙종은 단종의 왕위를 복위하면서 어계 조려선생을 

이조참판에 증직하고 충절이 백이와 숙제 못지않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쌍안산과 쌍봉산으로 불리던 

두 봉우리를 백이산과 숙제봉이라 바꿔 불렀고

두 봉우리 사이의 해가 떠 오른다하여  

월출봉이라 부르고도 있습니다.


 


어계선생의 '구일등고시(九日登高詩)'가 백이의 '서산채미가(西山采薇歌)'에 

비견된다하여 정자는 채미정이 되었습니다. 

'채미'란 '고사리를 캔다' '고사리를 뜯다'의 뜻을 가졌습니다.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는 누각형태의 건물입니다. 

원래는 서산서원의 부속건물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서산서원은 훼철했으나 다행히 살아남아 

채미정이라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서산서원에서 생육신인 어계조려, 매월당 김시습, 관란 원호, 

경은 이맹전, 문두 성담수, 추강 남효를 배향하였으나 훼철되자 채미정에서 향사를 지냈습니다. 

 


 1983년 서산서원이 지금의 자리에 복원되어 

다시 서산서원에서 생육신의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채미정은 어계조려선생이 여생을 보낸 정자입니다. 1693년에 중건하였다가   

1954년에 재건한 앞면 4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그런데 건물 부재의 상태로 보아 서산서원이 복원될때 다시 지어졌는것으로 보입니다



어계 조려선생의 백이의 '서산채미가'와 비견된다는 

'구일등고시'를 함안조씨대종회홈페이지에서 

원문과 뜻풀이를 발취했습니다. 참고하세요


http://www.hamanjo.co.kr/common/sub04_c_02.html


"구일등고시(九日登高詩)  


구월구일시중구(九月九日是重九·구월 구일은 중양절)

욕수가절등고강(欲酬佳節登高崗·좋은 계절 즐기고자 산등성이 올랐네)

백운비혜안남빈(白雲飛兮雁南賓·흰 구름 뭉게뭉게 기러기 떼 날라 오고)

난유수혜국유방(蘭有秀兮菊有芳·난초 잎 빼어나고 국화꽃 향기롭네)

산명수벽연참담(山明水碧煙慘惔·산 밝고 물 푸른데 연기 가듯 참담하고)

풍고일정기처량(風高日晶氣凄凉·바람 불고 햇살 맑은데 가을 기운 처량하네)

적화토설강지호(荻花吐雪江之滸·갈대꽃은 강가에 눈발처럼 휘날리고)

풍장홍금산지양(楓粧紅錦山之陽·단풍잎은 양지쪽을 비단같이 물 들였네)

두목기상취미수(杜牧旣上翠微峀·두목(당나라 시인)은 호방하게 취미산에 올랐고)

도잠창망백의랑(陶潛悵望白衣郞·두연명은 술 심부름꾼 오기만 기다렸네)

천재풍류여작일(千載風流如昨日·천년 전 풍류 세월 어제 일 같았는)

지금호기늠추상(至今豪氣凜秋霜·지금도 그 기상 서리 발처럼 엄숙하네)

회두거목강산모(回頭擧目江山暮·머리 돌려 해 저문 강산을 바라보니)

지활천고사묘망(地濶天高思渺茫·땅 넓고 하늘 높아 사념이 아득하네)

희헌원의비하극(羲軒遠矣悲何極·희헌(복희와 헌원)의 세상 멀어져 슬프기 한이 없고)

화훈불견심자상(華勛不見心自傷·요, 순 시절 못 만나니 마음 절로 상하구나)

심음필하건곤활(沉吟筆下乾坤濶·침통히 읊조리는 붓끝에는 천지가 망막하)

난취준전일월장(爛醉樽前日月長·흠뻑 취한 술잔 앞에 세월은 유유 하네)

차재료도생고만(嗟哉潦倒生苦晩·가엷어라 이 늙은이 오래 삶이 괴롭구나)

회가인혜불능망(懷佳人兮不能忘·마음속 그리운 님 잊을 수가 없다네)"



채미정 앞에서 먼저 채미정과 절벽위의 청풍대, 

청송을 두른 문풍루의 조화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채미정의 정문 격인 일각문을 들어서면 먼저 정자가 반깁니다. 

그런데 채미정의 정자가 보통 규모가 아니며 엄청나게 화려합니다.




정면 4칸에 옆면 3칸의 건물은 가운데다 2칸*1칸의 온돌방을 넣고 사방은 모두 마루를 돌렸습니다. 

남부지방에서 뜬마루 형태는 많이 보았는데 채미정 식의 온돌방은 잘 보지 못했습니다. 



채미정 앞쪽에는 장방형의 연못이 있으며 

그 위로 무지개 다리를 건너게 했습니다. 

ㅎㅎ

콘크리트 다리라 분위기에서는 좀 떨어지지만 

글을 읽는 선비의 유유자적 하는 정자의 모양세는 모두 갖추었습니다.



연못을 끼고 치솟은 절벽은 청풍대입니다. 

청풍대 빗돌이 세워져 있으며 어계선생이 이곳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 했을 듯 합니다. 


돌계단을 올랐습니다. 

꼭대기에 붉은 채색을 한 문풍루가 있습니다. 

그 아래 청풍대에서 바라본 채미정 입니다.

경전선 철길이 채미정을 돌아 진주역로 나아 갔다는데 

지금은 고속철로 바뀌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 채미정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문풍루 오른쪽에는 불사이군 충절의 상징인 

백이산과 숙제봉이 두귀를 쫑긋하며 솟았습니다. 



어계 선생이 매일 청풍대에 올라 두 봉우리를 보면서  

단종을 그리워 하는마음을 달래었을 것 같습니다.



채미정 좌우에는 '백세청풍(白世淸風)' 현판이 걸렸습니다. 

'백세청풍'은 주자가 백이와 숙제 형제의 충절을 칭송하면서 쓴 글이며 

"백세대에 부는 바람"을 뜻합니다. 



어계선생의 단종에 대한 불사이군 선비의 절개가 

후대에도 귀감으로 삼아라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와 똑같은 백세청풍 글씨가 군북면 하림리 하천변 

고마암 석벽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단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는 고마암(叩馬岩)을 지나면서 

말에 채찍을 하며 달렸다 합니다.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에서 

단종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죽음으로서 이를 지킨 사육신과 

살아서 죽을때까지 단종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은 생육신을

우리는 불사이군 충절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함안 군북의 원북에서 생육신 중 한분인 어계조려선생의 여러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다시금 어계선생을 생각하며 다음여행지로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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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함안여행)여기는 중국관광지가 아니예요? 함안 군북 하림리 백세청풍 고마암. 어계 조려 고마암


방가방가

함안군 군북면의 어계고가와 채미정을 보고 되돌아 나오면서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바위절벽이 오른쪽에 보였습니다. 

그냥 지나갈까 하는데 일행이 바위가 어마무사 하다며 

저곳은 꼭 보고가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차를 오른쪽으로 틀어 다리옆에 주차 하고 내렸습니다.

 




함안 생육신 어계조려 선생 백세청풍 바위 고마암 주소: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산 47-1 서산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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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중간쯤에 힘이 넘치는 필체인 백세청풍(白世淸風)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백세청풍은 함안 채미정 좌우에 큰 글씨로 

‘백세’,‘청풍’ 현판이 걸렸던 것을 보았던 터라 

그곳과 관계가 있나 생각했습니다.

 


이 백세청풍이 각자된 바위 아래 개울은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을 찬탈하자 이에 격분하여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은거하던 조려선생이 낚시하며 지냈던 곳입니다. 

어계란 호도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어계선생이 낚시를 하며 지냈던 곳인 바위절벽이

 고마암(叩馬岩)이며 고바우로도 불립니다. 

고마암의 고(叩)자는 특이하게도 두드릴 고(叩)자를 쓰고 있습니다. 

왜 두드릴 고자의 고마암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았습니다.

 


어계 조려선생은 단종(노산군)이 영월에 유배되자 

이곳 군북에서 천리길을 마다하고 

1달에 3 번씩이나 찾아가서 문안을 드렸습니다. 

그 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가 탄로 나면서 

함께 사약을 받아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계선생은 그길로 말을 달였는데 마음은 급하고 

말은 굼뜨는 것 같았고 이곳을 지나면서 

더 빨리 달리라면서 말에게 채찍질을 했다합니다. 

그 뒤부터 고마암 고바우라 부르게 되었다합니다. 

어계선생은 밤낮으로 말을 달려 청령포에 도착했습니다.

 



선생은 강을 건널 수 없어 발발 동동 구르다가 

헤엄을 쳐서 건너려고 강물로 무작정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홀연히 호랑이가 나타나 선생을 등에 태우고 무사히 강을 건너게 되었고 

단종에게 사배를 올리며 마지막으로 신하의 예를 갖출수 있었습니다. 

호랑이는 선생을 기다렸다 다시 태우고 강을 건너게 해주었다는 

호배도강전설(虎背渡江傳說)이 영월읍지 등에 실려 있습니다.

 


고마암 바위절벽의 위용은 한마디로 대단했습니다. 

높이는 20~30m, 폭은 100m 쯤 되며 10폭 병풍을 펼쳐 놓은 듯 했습니다. 

지금은 갈수기라 그런지 개울을 흐르는 물은 별로 많지 않지만 

여름철에는 물놀이를 즐기려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합니다.

 


충과 절의의 상징인 생육신 어계 조려 선생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고마암에서 느낄수 있었습니다. 

고마암의 '백세청풍' 뜻을 풀이하면 주자가 백이숙제 형제를 칭송하면서 

쓴 글로 직역하면 “백대에 부는 맑은 바람”을 뜻합니다.



이는 어계 조려 선생의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신은 두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단종에 대한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맑고 높은 선비의 절개가 

후대에도 귀감으로 삼아라는 그런 의미가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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