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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여행/달성여행)비슬산은 신선이 거문고를 타고 있다는 뜻, 비슬산 대견사 새롭게 달성의 관광 명소가 될 듯. 


 달성군의 진산인 비슬산은 봄의 산으로 많은 상춘객이 진달래를 쫒아 산상의 화원을 찾는다. 비슬산 정상인 대견봉을 지나 월광봉을 거쳐 만나는 곳이 대견사지터다. 이곳 대견사지는 비슬산의 1,000m 능선에 위치를 하고 있어 인근에 이 정도의 높이에 절터를 간직한 곳이 드물 것 같다. 해발 1035m봉 아래 자리 잡은 대견사지는 삼층석탑과 마애불, 우물터가 남아 있다.



 

 

 ☞(대구여행/달성여행)드라마 추노 촬영지 비슬산 대견사지 중창 불사, 비슬산 대견사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될 듯. 


대견이란 뜻을 직역하면 “크게 본다”는 뜻으로 이곳 비슬산 대견사는 이름과 어울리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비슬산은 산의 모습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고 있다는 뜻의 ‘비파 비(琵)', '거문고 슬(瑟)’자를 쓰고있다. 비슬산의 산세가 신선이 거문고를 탈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산세가 얼마나 빼어난 모습이었을까.  그런 비슬산의 아름다움이 중국 당나라까지 소문이 난 것일까. 



 


  ☞(대구여행/달성여행)대국에서 보았다는 대견사지 중창 불사, 비슬산 대견사 새롭게 달성의 관광 명소가 될 듯. 


중국 당나라 황제가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할려고 대야에 물을 담았는데 잠시 뒤 대야 안의 물을 쳐다보고 물안에 비치는 빼어난 산세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아름다운 산세와 옹립한 천길 바위 위에 지어진 사찰을 보고 황제는 신하에게 이르기를 중국의 구석구석을 다 뒤져 세숫대야안에서 본 그 사찰을 찾아 오라고 어명을 내린다. 신하는 중국의 구석구석을 다 뒤지지만 찾을 수 없어 급기야 신라에 까지 사람을 보내어 찾게하니 그 신하가 신라 땅을 샅샅히 뒤져 비슬산에 올라 이곳을 발견하고 이곳의 지형과 산세를 그려가 황제에게 보여주니 세숫대야에서 본 모습과 똑 같아 황제가 그곳에 절을 짓게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중국 당의 황제가 보았다는 뜻인 “대국에서 보았다”하여 대견사로 이름 지어 졌다.  대견사는 창건에 관한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9세기 신라 헌덕왕때 지어졌다고 전할분 정확한 연대등 모든 것이 알 수 없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임진왜란 이루로 이곳 대견사에 빈대가 들끓어 빈대를 견디다 못해 자연적으로 폐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1900년도에 영친왕의 즉위를 축하하여 이재인이란 분이 대견사를 중건하였지만 1908년에 어떤이유인지 알수 없지만 페사를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우리 속담에 “빈대 잡다가 초가 삼간 태운다”는 속담이 생각이 난다.





 

 

현재 대견사지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대구 팔공산의 동화사에서 이곳 비슬산 대견사를 창건에 가까운 중창 공사를 진행중이다. 그리고 동화사 통일약사여래대불의 불교문화관에 임시로 모셔둔 부처님 진신사리를 이곳으로 모신다고 하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대견사의 모습에 기대가 엄청 크다.


 

 

 

2002년 대견사에 문화재 발굴 공사가 진행 되었다. 발굴에서 추정건물지 6동, 초석, 암.수막세편이 확인되었고 암막새에 대견사의 명문이 확인되어 구전으로 전해오던 대견사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와편에 만력39년(1611년), 숭정6년(1633년)등의 연호가 출토되어 그 당시까지 사찰이 남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대견사의 기록이 남아 있다. “대견사의 장육관음석상이 땀을 흘렸다"며 조정에 1416년과 1423년에 보고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견사를 떠 받쳤던 거대한 석축은 개창 당시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그 길이가 37.5m, 높이 6.56m이다. 축조방법은 막돌을 그대로 쌓은 허튼층 쌓기 수법을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인기 드라마 추노가 촬영되었다한다. 



 

 

비슬산 강우레이더 관측소

 

 

톱바위와 비슬산 강우레이더 관측소

 

   애추는 풍화된 암석조각들이 급사면으로 떨어져 내려가 절벽밑에 부채꼴 모양으로  쌓인 각진돌의 집단으로 흔히 칼바위를 말한다. 비슬산의 톱바위가 애추.



 

 

 

 

 

 

 

 

 

 

 

 

 

 

 

 

 

 


 ☞(대구여행/달성여행)드라마 추노 촬영지 비슬산 대견사지 중창 불사, 대견사지 마애불


대견사지 마애불은 대견사 터 암굴의 남쪽 입구 오른쪽 바위에 음각되어 있다. 하부에는 연꽃대좌를 새겨 놓고 대좌의 상면으로 아래가 넓은 5개의 원형을 중복되게 새겨 놓고 원형의 아래로는 고사리 문양을 대칭되게 새겨놓아 화염문에 휩싸인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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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여행/달성여행)드라마 추노 촬영지 비슬산 대견사지 중창 불사, 대견사지 삼층석탑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2호

대견사지 삼층석탑은 창건당시에는 9층탑(6층탑)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의 탑은 경주 남산 용장사의 삼층석탑과 비슷하게 암반을 기단석으로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절벽의 바위를 바닥돌로하고 그 위에 2층 기단의 3층탑을 세워 올렸다. 하층 기단에도 양쪽 모서리 부분과 가운데 기둥무늬를 돋을 새김했고 윗층 기둥돌과 몸돌의 양쪽 모서리에만 기둥무늬를 돋을 새김했을뿐 꾸밈없이 단순하며 소박하다. 지붕돌에는 4단의 지붕돌 받침과 2단의 괴임을 조각하였다. 통일신라 후기 또는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사찰의 창건연대와 같이 보고 있다. 1988년도에 높이 3.67m의 삼층탑으로 복원을 한 상태다.   

 

 

 

 

 

 

 

 

 

 

 

 

 

 

 

 

 

 

거북바위,

 

 

토르는 화강암의 기반이 지하에서 심층풍화로 인하여 부서진 세립물질이 제거되고 남은 화강암체를 말한다. 거북바위, 코끼리바위등을 말한다.



 

 

 

 

 

 

코끼리바위

 

 

 

 

 

 

 

 

 

 

 




 ☞(대구여행/달성여행)달성 비슬산 암괴류와 함께 비슬산 대견사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될 듯. 

천연기념물 제435호

암괴류란 큰 자갈내지 바위크기의 암석덩어리들이 산사면의 골짜리를 타고 집단적으로 흘러내리면서 쌓인 것을 말한다. 비슬산 암괴류는 약 1만년전~10만년전인 빙하기 후대에 형성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생대 백악기 화강암의 거석들로 길이가 2km, 최대 폭이 80m, 두께 5m의 암괴로 그 규모가 대단히 큰 것으로 화강암지형에서는 보기가 힘들고 가치가 매우 높은 지형이다. 국내 암괴류중 가장 규모가 크다.

 

 ◆중창 불사 이전의 대견사지 보관사진 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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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달성여행)비슬산 대견사지. 중국 당태종이 세숫대야에서 본 비슬산 대견사지와 삼층석탑

 

국립지리원의 지형도를 펼쳐보면 낙동정맥의 마루금이 사룡산에서 곁가지를 치니 이름하여 비슬기맥으로 부른다. 비슬기맥의 최고봉인 비슬산 정상을 비껴 남으로 내려간다. 대견사지는 비슬산 정상에서 남동쪽인 비슬기맥을 타고 내려서면 능선이 갈래를 진다.
좌측은 조화봉을 거쳐 화악산 또는 열왕산으로 이어지고 우측은 유가사 방향으로 대견사지를 거처 내려가는 원점 회귀 능선이다.


1035봉을 한때는 대견봉으로도 부르고 하였지만 지금은 비슬산 주봉을 대견봉으로 부르고 있다.
1035봉 아래 넓게 조성된 절터의 흔적과 삼층석탑이 자리를 하고 있다. 큰 바위들이 얽혀 있는 이곳에 석굴과 함께 비슬산의 경관을 자랑하는 전설이 중국의 당나라 황제와 함께 소문이 연관되어 있어 비슬산의 풍치가 그만큼 빼어나다는 것을 입증한다.
한때는 이 비슬산을 국립공원 까지 승격을 논의한 모국회의원이 있지만 지금은 유야무야되었다. 규모는 작은 비슬산이지만 당태종에 얽힌 사연을 알아보자.
대국에서 보았다는 뜻의 대견은 비슬산 정상의 대견봉을 두고 하는 말이다.
중국의 당태종이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세숫대야에 물을 떠와 세수를 할여는데 대야속에 산세가 빼어나고 험준한 바위 위에 지어진 사찰이 보였다 한다.
그래서 태종은 중국의 구석구석을 알아보고 수소문을 하였지만 세숫대야에서 본 그 곳을 찾지 못하고 급기야 신라에 까지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라하였는데 지금의 비슬산 대견사지를 찾아내어 지형의 산세를 그려가 당태종에거 보여주니 세숫대야에서 본 모습과 똑 같아 그곳에 절을 짓게 하였다.
이 절이 중국에서 보였던 절이라하여 대견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견사의 축대는 아직도 온전한 모습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데 골짜기를 메운 그때의 토목기술의 우수성을 짐작할 수 있다.

 

 


 

 

 

 

9세기(九世紀) 신라 헌덕왕(新羅 憲德王)때 비슬산에 지어진 대견사와 삼층석탑은 그러나 아쉽게도 임진왜란 앞에 빈대들이 많이 들끓어 폐사가 되고 만다.

속담에 “빈대 잡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것 같다. 빈대 때문에 망한 절이 대견사 말고도 울산 울주의 대원사도 있다하니 말이다.
그후 1900년경에 영친왕의 즉위를 축하 하기위해 이재인이란 사람이 절을 다시 세웠다가 1908년 이후에 다시 폐사되는 불운을 맞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견사지의 절터를 보라. 그리고 대견사지 삼층 석탑의 앉은 품새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대견사지 삼층 석탑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2호

지정일:1995년 5월12일
소재지: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용봉리 산1

(석굴안에서 바라본 삼층 석탑.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연출을 해 준다.)

 


 신라 헌덕왕(新羅 憲德王)때 세워진 대견사지 삼층 석탑은 대견사지 터에 흩어져 있던 것을 달성군에서 1988년에 새로 복원을 한 것이다. 안내판을 보면은 이탑은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식으로 기단부는 2단으로 되어 있다. 탑이 위치하고 있는 큰 암반을 지대석으로 깔고 앉아 그 위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암반위에 바로 하대기단을 그리고 그 위에다 상대면석과 상대 갑석을 다른 돌로 다듬어서 올렸다.

 

하대석에서는 양쪽의 모서리 기둥과 버팀기둥 하나을 돋을 새김 했어나 상대면석에는 양쪽에 모서리 기둥만 돋을 새김을 하였다한다. 옥개와 탑신은 돌 하나로 다듬어 올렸다. 옥개석은 4단의 지붕돌 받침과 2단의 괴임을 탑신은 모서리 기둥만 돋을 새김하였다. 기단부에 퇴화현상이 나타나고 탑모양이 전체적으로 가늘게 높이 올라가 신라시대 석탑을 벗어나 고려초기에 접어들어 조성된 것으로도 보고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바위 틈이 석굴로 앞과 우측으로 서로 통과가 되도록 되어 있어 대견사  창건당시 부터 이용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위위에서 본 대견사 터와 삼층석탑. 그 뒤로 관기봉을 확인할 수 있다.

찾아가는길: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옛 구마고속도로) 현풍IC~대구 현풍 5번 국도~유가 1093번 지방도~유가사 소재사 비슬산자연휴양림 방향 좌회전~유가면사무소 우회전~유가사 소재사 자연휴양림 4번 좌회전~비슬산군립공원 유가사 좌회전~비슬초등~유가사~주차장 순.

<비슬산 대견사지 위치입니다=국제신문>



유가사 홈페이지를 클릭하시면 더욱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http://www.yugasa.net/bbs/bogi-bisulsan-gensel.htm?PHPSESSID=96a44a56370e2b65a460912d8e0992b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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