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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함안여헹) 가을과 겨울에 찾았던 함안 무진정 분위기가 달라보였습니다. 함안 무진정 여행


함안 무진정 여행을 하고 왔습니다. 

마침 ㅎㅎ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연못 물을 모두 빼고 준설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무진정 조삼 선생 함안 무진정 주소: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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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무진정은 조삼선생께서 낙향하여 후진양성을 하면서 

지은 정자이며 그의 호인 '무진'을 따서 무진정이라 했습니다.



무진 조삼선생은 1473년(성종4년)에 태어나 

1489년인 성종 20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연산군이 즉위하여 폭정을 하자 

문과를 단념하며 학문에만 힘썼습니다.




그리고 중종이 즉위하여 1507년 성균관에 입학하여 

연산군의 폭정을 도운 유자광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함양 창원 대구 성주 상주에서 부사와 목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습니다.



조삼선생에 관해 함주지를 보면 독서에 전념하였고 

어느날 종이 아침밥을 들여 놓았으나 밥상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글만 읽자 종이 밥상을 들고 나갔습니다.



점심 밥상도 들여 놓았으나 먹지 않아 또 밥상을 내어갔습니다. 

저녁이 되어 허기가 들어 아침밥상을 재촉하자 

종이 사정을 이야기하니 글 읽는데에만 전념하여 몰랐다고 했다합니다.




무진정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정자 바닥은 바닥을 띄워 올린 뜬마루 형식입니다.



뜬마루 가운데에 앞면 1칸 옆면 1칸의 방을 넣었는데 

온돌방이 아니라 마루방으로 꾸며졌습니다.



기둥위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건물입니다. 

무진정은 조선 전기 정자 양식을 잘 보여주며 

1976년 12월 유형문화재 제158호에 지정 보호하고 있습니다.



무진정의 기문은 주세붕 선생이 지었습니다. 

선생이 쓴 무진정 기문의 해설이 명문이라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지리산은 동녘으로 삼백리를 치달아 하늘을 가로질러 지나가면서 말갈기가 떨치듯 물결이 용솟음치듯 함안의 진산을 이룬 것이 여항산이다. 그 한가닥이 가볍게 날아오다가 십리가 채 못 되어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나 자주 빛 봉새가 새끼를 품은 듯 한데 성이 그 위에 자리 잡은 곳이 함안고을이다. 



성산의 왼쪽 갈래가 꿈틀꿈틀 뻗다가, 서북쪽으로 굽어서 성난 말 같은 기세로 고을의 성을 에워싸고는 동쪽으로 청천에 이르러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고 고개를 치켜드는 것 같은 곳의 산마루에 정자를 지은 것이 무진정이다.



이 정자는 읍에서 소의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의 가까운 거리인데, 곧 우리 조목사 선생이 거처하시는 곳의 동쪽 언덕으로 선생이 이 언덕에 처음 집을 지으신 것이다. 큰길가에 버려진 하나의 언덕이었고, 읍에서 사람의 왕래가 아주 잦은 곳이었다. 아라가야의 개국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늘이 숨기지 않았고 땅이 감추지 않았지만은 이곳을 지나가는 이들이 하루에 천사람, 만사람이나 되는데도 이곳에 정자를 지을만한 좋은 자리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음을 듣지 못했다. 



오직 선생은 한번 보고 이곳을 가려 잡목을 베어내고 집을 지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옛 길을 옮기고 아름다운 나무를 심어 중국 한나라의 숨은 선비 장후의 정원과 같은 길을 내어 꽃나무 대나무가 엉켜 하늘을 가리고, 나는 듯한 지붕이 기와가 높이 치솟았으며, 노비의 집들이 언덕 바깥에 늘어섰으니, 길가는 사람들이 신선의 집인 양 바라보았다. 선생이 내게 이르기를 자신이 무진정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그대는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달라”고 했다. 내가 선생을 매양 뵈올 때마다 문득 나를 인도해 올랐기 때문에 그 좋은 경치를 마음껏 구경할수 있었다.



이 정자의 규모는 2칸인데 서쪽은 온돌방이요. 동북은 모두 창으로 되어있고 창밖에는 단이 있어 구슬 문빗장과 같으며 그 아래는 푸른 암벽이다. 큰 냇물이 남쪽에서 굽이쳐 흘러오는데 맑은 거울과 같고, 돌아 흐르는 것이 구슬 띠와 같아 부딪칠 때는 패옥소리 같으며, 암벽을 돌아 풍탄으로 흘러간다. 시내 밖에는 천 여 그루되는 벽오동이 있고 동으로 바라보이는 모든 산봉우리는 노송들이 십 리까지 뻗어 울창하다. 선생은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죽어 돌아갈 곳”이라 하셨다. 남쪽을 바라보면 산이 우뚝 솟아 하늘을 떠받치듯 하는데 정자와 마주하는 산이 파산이다.




북쪽으로 바라보면 눈에 천 리나 보이는 들에는 보리가 자라며 푸른 물결같이 하늘을 흔들고 곡식이 익으면 황금 빛 구름처럼 땅을 덮는다. 겨울에는 문을 닫고 햇볕을 쪼일 수 있고 여름에 창문을 열고 더위가 가까이 하지 못하니 신선이 사는 곳의 자주빛 비취색 같은 좋은 경치와 통하고 십주의 노을빛보다 낫다고 했다.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고 밝은 달이 먼저 이르니 반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온갖 경치가 모두 모였으니 진실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라 하겠다.



선생은 다섯 고을의 원님을 역임하시다가 일찍이 귀거래사를 읊으시고는 이 정자의 높은 곳에 누워 푸른 산, 흰 구름으로 풍류의 병풍을 삼고, 맑은 바람, 밝은 달로 안내자를 삼아 중점의 영이귀 같은 풍류를 누리고 도연명의 글과 같은 시흥을 펴시면서 고요한 가운데 그윽하고, 쓸쓸한 가운데 편안하고, 유유한 가운데 스스로 즐기시면서 화락하게 지내셨다. 그 즐거움이야말로 많은 녹봉을 받는 높은 벼슬자리와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대체로 벼슬이 비록 영화롭기는 하지마는 욕됨이 따르는 것이므로 군자는 용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잠시 이 고을 일로서 말한다면 이방실 장군은 세상을 뒤엎을만한 충성으로 서울을 회복하여 우리나라를 참혹한 변란으로부터 구제하여 그 공적이 막대하였지만 살아서 횡액을 면치 못하였고 어세겸 정승 같은 분은 온 나라를 빛내는문장으로 임금의 정사를 도와 많은 선비들의 기둥이 되어 그 명망이 더없이 높았지만 죽은 후에 또한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선생의 낙과 비교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선생은 이런 일들에서 보는 바가 있었음인가? 그리고 선생은 눈앞에 있는 산을 가리켜 죽은 후에 갈 곳으로 삼았으니 이 또한 천명을 아신 것이다. 천명을 알았기 때문에 능히 용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능히 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으니 정자의 경치도 무진하고 선생의 즐거움 또한 무진한 것이다. 무진한 선생의 즐거움과 무진한 정자, 이경치가 모였으니 정자의 이름은 선생의 이름과 더불어 무진할 것이 분명하다.




선생의 휘는 삼(參 )이요 자는 노숙(魯叔)으로 함안이 본관이며 같은 고을사람으로서 진실로 덕이 높은 훌륭한 어른으로 벼슬길에서는 청렴하고 근신한 것으로 명성이 드러났고 형제가 일곱 분인데 세 분은 문과에 급제하고 한분은 진사시에 뽑혔으며 동기간에 우애로 서로 빛났으니 고을과 나라에서 이를 영화로운 명예로 여겼다.



내가 이 정자에 이름을 남기게 됨은 얼마나 다행이랴! 그러나 돌이켜 보건데 오늘날 큰 문장가들이 위 아래로 어깨를 견주고 있으니 반드시 이 무진정의 의의를 남김없이 기록할 사람이 있을 것인데 나의 우매함을 무릅쓰고 기문을 짓는 것이 또한 외람되지 않겠는가? 사양하여도 허락하시지 아니하시니 우선 그 시말을 적어 드리는 바이다.“

 

가정 21년(1548) 6월 지음

경신년(1800) 5월 현 기문 작성

무진성 기문 안내판 참조



함안여행을 할 때마다 무진정은 꼭 찾아 여행했습니다. 

지난 해 가을에도 찾았던 무진정을 이번 겨울에 지인과 동행하여 다시 찾았습니다.ㅎㅎ  




역시 무진정은 변함없이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들창문은 그대로 들렸고 ㅎㅎ

 간결한 모습이지만 전체적으로 무진정을 보면 아주 우아한 학을 닮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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