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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함안여행)함안 무진정. 영남을 대표하는 민간정원 함안 무진정의 가을 정취를 만나다.


영양 서석지, 담양 소쇄원, 보길도 세연정은 우리나라 민간정원을 가장 대표하는 곳으로 꼽습니다. 그러나 이외에도 조선의 많은 선비는 연못을 만들고 그 속에 정자를 짓고 하면서 자연을 즐기는 삶을 즐겼습니다. 대부분 정치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산림처사로서 은둔하며 안빈낙도의 삶을 즐기려고 지었던 정자이며 함안 무진정도 그중 하나입니다.






경남 함안 무진정 주소: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547

경남 함안 무진정 연락처:055-580-2301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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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정 조삼선생은 성종 4년인 1473년 태어났습니다. 조선 중기 때 문신이며 자는 노숙(魯叔)이고 호는 무진정(無盡亭)입니다. 어계 조려선생의 손자이며 진산공 동호선생의 셋째였습니다. 17세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그 뒤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면서 함양, 창원, 대구, 성주, 상주 등에서 목사와 부사를 역임했습니다.




그리고 사헌부집의겸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을 때 일화가 지금도 회자하는데 조삼선생은 책 읽기를 즐겼다 합니다. 하루는 계집종이 조반을 들고 왔는데 조삼은 그 사실도 모르고 책 읽기만 열중했습니다. 그리고 계집종은 밥을 다 비웠다고 생각하고 밥상을 내어 나갔고 점심도 마찬가지로 그리했습니다. 해가 지자 조삼선생은 배가 출출해졌는지 그때야 “왜 조반을 들리지 않느냐?”며 계집종을 불렀다 합니다. 



조삼선생은 관직에 있으면서 관리의 편 가르기를 보고 이에 염증을 느끼자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며 무진정을 세우고 기거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함께했던 동료는 모두 대윤과 소윤이 반목하는 과정에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사건인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희생되자 선생의 혜안에 모든 사람이 감탄했다 합니다.







함안의 무진정을 1542년 주세붕선생이 기문을 짓고 무진정 현판도 남겼다 합니다. 기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선생은 다섯 고을의 원님을 역임하시다가 일찌감치 귀거래사를 읊으시고는 이 정자의 높은 곳에 누워 푸른 산, 흰 구름으로 풍류의 병풍을 삼고, 맑은 바람, 밝은 달로 안내자를 삼아 증점(曾點)의 영이귀 같은 풍류를 누리고 도연명의 글과 같은 시흥을 펴시면서 고요한 가운데 그윽하고, 쓸쓸한 가운데 편안하고, 유유한 가운데 스스로 즐기시면서 화락하게 지내셨다”는 글로 조삼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무진정에서의 편안한 삶을 잘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무진정에 대해 언급한 대목도 있습니다.

 “이 정자의 규모는 2동인데 서쪽은 온돌방이요, 동북은 모두 창으로 되어있고 창밖에는 단(壇)이 있어 구슬 문빗장과 같으며 그 아래는 푸른 암벽이다. 큰 냇물이 남쪽에서 흘러오는데 물굽이에는 맑은 거울과 같고, 돌아 흐르는 곳은 구슬 띠와 같아 부딪칠 때는 패옥(佩玉)소리 같으며, 암벽을 둘러 풍탄(楓灘)으로 흘러 들어간다. 시내 밖에는 천 여 그루되는 벽오동이 있고 동으로 바라보이는 모든 산봉우리는 다 노송들이 십리에 뻗어 울창하다”하시며 주세붕 선생은 무진정을 “선생은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죽어 돌아갈 곳이라 하셨다.”라며 기문을 섰습니다.







주세붕의 글씨라는 무진정 현판



그리고 무진정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조물주의 무진장이라고 까지 칭송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들에는 보리가 자라며 푸른 물결 같이 하늘을 흔들고 곡식이 익으면 누른 구름처럼 땅을 덮는다. 겨울에는 문을 닫고 햇볕을 쪼일 수 있고 여름에 창문을 열면 더위가 가까이 하지 못하니 삼도의 자주빛 비취색 같은 좋은 경치와 통하고 십주의 노을빛보다 낫다하였다.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고 밝은 달이 먼저 이르니 반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온갖 경치가 모두 모였으니 진실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라 하겠다.“






그리고 기문에는 조삼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난 것을 두고도 “벼슬이 비록 영화롭기는 하지마는 욕이 따르는 것이므로 군자는 용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라며 모름지기 군자는 자신이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며 선생의 용퇴를 칭송했습니다.

 




무진정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건물입니다. 앞면 3칸 중 가운데 칸은 마루로 방을 꾸몄으며 건물의 바닥을 띄운 누마루 형식입니다. 보통 누마루를 사방에 돌렸어도 가운데 온돌방을 넣었던 정자를 자주 보았으며 마루방형태는 잘 만나지 못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함양·산청·거창 등 한겨울 추운 지방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춥고 따뜻해서 마루방을 넣었는지 그냥 짐작해봅니다. 둥근 기둥 위에는 조각물 등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의 건물로 지어져 조선전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또한, 조삼선생의 청렴하고 강직한 선비 정신과 성품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무진정 아래 연못의 넓이는 약 3,300㎡이지만 원래는 연못이 아니었다 합니다. 이곳은 남에서 북으로 함안천이 흘렀는데 후손들이 물길을 돌려내고 난 뒤 연못을 만들고 연못 안에 세 개의 섬을 만들면서 이를 연결하는 돌다리를 놓아 무진정의 운치를 한결 더했습니다.







그러면서 큰 섬에는 영송루란 정자까지 갖추어져 매년 여기서 함안의 민속놀이인 낙화놀이가 열립니다. 낙화놀이는 매년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액운을 태워 없애고 한해의 풍년 농사를 기원하며 열립니다. 낙화놀이 준비는 참나무로 미리 숯을 만들어 곱게 가루로 만들어서 한지에다 말아 낙화 타래를 완성합니다.





이 타래를 연못에 매달아 불을 붙이면 숯가루가 타면서 연못으로 떨어지는데 반딧불이 같은 영롱한 불빛이 물에 반사되어 황홀한 장관을 연출합니다. 저도 내년에는 사월초파일에 무진정을 한 번 찾아 함안 낙화놀이를 즐겨야겠습니다. 이 함안 낙화놀이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3호입니다.



부자 쌍절각

무진정 입구의 도롯가에 있는 부자 쌍절각입니다. 정유재란으로 조준남은 왜적이 이곳까지 몰려와 조상의 묘를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르자 조상의 욕됨을 보다 못한 나머지 나라를 전복한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꾸짖으며 무진정에 올라가서 북쪽에다 재배하고 자결하였으며 그의 아들 조계선은 1627년 정묘호란에 전사하자 이들 부자의 효와 충을 기린 쌍절각입니다.

 

부자 쌍절각 옆에 노비였던 대갑의 비석 '충노대갑지비'

그리고 쌍절각 옆에는 또 다른 비석이 있습니다. ‘충노대갑지비(忠奴大甲之碑)“를 새겨 놓았습니다. 이 비석은 정묘호란 때 주인 조계선을 따라 전장에 나갔던 노비 대갑이의 충절을 기린 비석입니다. 조계선이 의주 전투에서 전사하자 돌아와 그의 죽음을 전하고 주인을 구하지 못하고 혼자 돌아온 것을 자책하면서 무진정앞 검암천에 투신해 죽었습니다. 주인에 대한 절의를 지켰던 노비 대갑이의 의를 기린 뜻을 비석에 새겼으며 지금도 쌍절각옆에서 주인을 지키고 있습니다.

 









영송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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