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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여행/안동가볼만한곳)안동법흥사지칠층전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칠층전탑 여행.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면서 오래되었다는 전탑 중 하나인 안동 법흥사 칠층 전탑을 보고 왔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모전 석탑으로는 신라 시대의 유일한 석탑인 국보 30호 분황사 구층 석탑이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3층으로 남아 있지만, 이 분황사 모전 석탑이 9층의 모습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아마 최고의 높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 7-9


2016/06/18 - (경북여행/안동여행)의성김씨 학봉종택. 안동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 종택을가다. 의성김씨 학봉종택

2016/06/17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고건축물인 극락전, 대웅전이 있는 안동 천등산 봉정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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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7 - (경북여행/안동여행)천등산 봉정사 극락전,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맛이나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 오래된 목조건물 안동 봉정사 극락전 여행. 봉정사 극락전

2016/05/24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천등산 개목사 원통전. 천등산의 지세로 안동에 소경이 많아 비보사찰이 된 개목사, 그후로 소경이 없어졌다는 개목사 원통전 여행,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은 그 높이가 16.8m이며 탑을 받치는 기단의 폭은 7, 75m로 현재 남아 있는 전탑의 규모로서는 우리나라 최고를 자랑합니다. 단층의 기단 위에 7층으로 몸돌을 조금씩 줄여가며 쌓았는데 모전 석탑 주위의 지명이 법흥동인 점을 보면 법흥사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석탑 이외에 어떠한 법흥사에 관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지금 전탑 주위로 고성이씨 탑동파 고택이 자리하고 있는 게 그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기단부에는 희미하게나마 판석에다 돋을새김으로 팔부신중과 사천왕상을 새겨놓았습니다.



 












이들 부조의 조각수법은 시대가 다르게 서로 차이가 나며 탑신부는 아무 무늬가 없는 회색 벽돌을 쌓았습니다. 전탑의 각층 옥개석의 윗면에 기왓장을 올렸던 것이 보기 드물게 남아 있습니다. 이를 보면 전탑 이전에는 목탑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으며 법흥사지 칠층 전탑은 목탑을 모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탑 이후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와서 화강암을 깎아쌓은 석탑으로 그 양식이 바뀌었는데 목탑-전탑-석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변천이 바뀌었습니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화강암 석탑의 많은 부분이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석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법흥사지 칠층 전탑의 상륜부는 금동제로 만든 상륜이 올려져 있었다지만 지금은 안타깝게 노반만 남아 있습니다. 법흥사지 칠층 전탑의 축조방식을 보면 기단은 방형이며 동·남·북 3면에 6장씩 팔부신중과 사천왕상을 판석에 세기고 맨 아래층의 탑신 밑면은 원분 모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면의 계단은 단층기단 형식이며 8개의 계단 끝에는 높이 90cm, 너비 54cm인 부처님을 모신 감실을 두었습니다. 안동의 역사서인 ‘영가지’에 법흥사지 칠층 전탑을 1487년 성종 18년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때까지도 3칸 정도의 법흥사 건물이 남아 있었다합니다. 필자는 법흥사지 칠층모전석탑을 만나기 위해 2014년에도 찾았습니다.



당시 법흥사지 칠층모전석탑은 해체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전탑 외부를 가린 가림막만 보고 안타까워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안동여행 때 그때 보지 못했던 칠층 전탑을 만나기 위해 안동의 여행지를 바꿔가며 다시 찾았습니다. 석탑을 마주 보고 섰는데 그 웅장함은 보는 이를 압도하고도 남았습니다.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으며 코스를 바꿔 왔던 보람이 있을 정도로 저에게는 감명을 주었습니다. 당시 해체복원 하는 과정에서 탑 내부에 나무 기둥을 세웠던 ‘심주’구멍이 확인되어 또 한 번 이목을 끌었습니다.

 


칠층 전탑이 워낙 높아서 가로 사진으로 다 담을 수 없었으며 전탑 바로 옆에는 철길까지 있어 어수선하고 협소해 보여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의 건립은 8세기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하며 국보 제1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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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최초의 석탑이자 유일한 경주 분황사 9층석탑을 여행하다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은 무조건 경주였습니다. 국사 시간에 많이 접했던 신라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본다는 즐거움으로 가슴 설레었던 경주 여행은 그중에서도 필수 코스가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쌩쌩 달려 도착하지만, 당시에는 고사리 같은 손을 맞잡고 걸어서 석굴암을 올랐습니다.





분황사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구황동)분황사



또한, 불국사도 여행하였고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분황사였습니다. 이를 두고 흔히 경주 3대 여행지라 했습니다. 경주여행에서 꼭 빠지지 않고 본다는 분황사 9층 석탑은 불국사와 석굴암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어린 시절 저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초등학생의 어린 마음에 아무리 봐도 3층뿐인데 왜 9층 석탑이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과 같은 석탑이라 하는데도 전혀 모양이 달라 이상하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그저 아주 특별하구나 하며 뇌리에 강하게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게 벌써 40년도 훨씬 전 일입니다.



경주는 제가 태어난 고향입니다. 그 때문에 매년 한두 번씩 여행 삼아 찾아갑니다. 그때마다 분황사는 강한 뇌리감 때문인지 가보지 않아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해 항상 빼놓고 여행을 했습니다. 이제 성인이 되어 우리 문화재 찾는 것을 좋아해서 여러 곳의 탑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탑의 특성도 알게 되었고 덩달아 분황사 9층 석탑을 모전 석탑이라 부르는 것과 그 재질과 왜 9층 석탑이라 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경주 분황사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가보지 않아도 가본 곳 같은 분황사라 초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처음 가봤습니다.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모습과 분황사는 그대로 똑같았습니다. 그만큼 나에게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분황사는 신라 시대 634년인 선덕여왕 3년에 창건하였고 분황사 9층 석탑도 세워졌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을 보드라도 이웃한 황룡사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큰 규모로 보이지만 지금 분황사는 9층 석탑을 빼면 너무나 초라한 모습입니다.



분황사는 분황사 9층 석탑인 모전석탑이 분황사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덕여왕 시절인 창건 당시의 분황사는 당대의 선승인 자장율사와 원효대사가 주석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643년 당나라 유학 중 왕명을 받고 자장율사는 대장경 일부와 불전에 필요한 번당, 화개 등을 들고 귀국길에 오릅니다.



이에 선덕여왕은 분황사에 머물게 하면서 대국통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또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원효는 분황사에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원효가 죽자 그의 아들인 설총은 원효의 뼈로 소상을 만들어 이곳 분황사에 모셨으며 소상은 고려 시대까지 남아 있었다 합니다.

 


당시 선덕여왕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조용한날이 없었습니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치열함 속에 선덕여왕은 국교인 불교에 의지하며 부처님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9층 석탑의 거대한 탑을 세웠으며 이로써 신라왕실의 권위를 더욱 굳건히 하고 백제와 고구려에 국력을 과시하는 포석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분황사 9층 석탑은 3층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게 9층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정말 웅장하였을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고려 말 몽골의 침입과 조선 시대 임진왜란으로 분황사 9층 석탑은 파괴되었고 남아있던 전각 대부분도 소실하였다는 기록이 동경잡기에 있습니다. 이번 분황사 포스트는 분황사 모전 석탑입니다.



그 외 분황사에 남아 있는 원효대사 비석 받침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화쟁국사비부와 신라 호국용의 설화가 있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석정, 그리고 보광전의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약사여래입상은 따로 소개하겠습니다.







분황사 9층 석탑은 화강암 재질인 기존 석탑과는 형태가 다르게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쌓아 만들었다 하여 이를 모전 석탑이라 합니다. 모전 석탑은 중국에서 유행했던 양식이 신라의 석탑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통일신라로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인 화강암의 석탑으로 바뀌었습니다.





분황사 모전 석탑을 보면 자연석을 다듬은 막돌을 1.06m의 높이로 쌓아 그 기단 위에 넓은 화강암을 바닥 돌로 삼았습니다. 바닥은 정사각형의 형태로 한 변의 길이가 대략 13m이며 그 위에 벽돌 모양의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전탑입니다. 1915년 일제는 허물어진 분황사 9층 석탑을 수리한다고 해체하여 지금의 상태로 만들어 현재 3층 석탑이 된 연유입니다.

 




당시 2층과 3층 사이에는 돌로 만든 함속에 사리장엄구가 들은 은제 사리함 등이 나왔다 합니다. 1층 탑신의 네 곳에는 불상이 들었던 것으로 보이는 감실을 두었으며 출입구가 있습니다. 출입구 좌·우에는 사천왕인 인왕상을 두었는데 근육의 볼륨감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인왕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출입구에는 여닫는 석문을 달았습니다. 그리고 기단의 네 귀퉁이에는 동물상을 배치했으며 왼쪽은 사자와 흡사하고 오른쪽은 암사자를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추어 눈에는 물개와 흡사한 모습입니다.









이는 불국사의 다보탑에 배치한 사자 석상과 같은 이치로 불교에서 불탑을 수호하는 동물은 사자입니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자상도 그와 같은 의미로 보입니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신라 석탑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자 신라 시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석탑이며 현재 국보 제30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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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여행에서 법흥사 칠층전탑과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동부동 오층 전탑을 보고 왔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번 여행길이 딱 그 짝입니다. 안동 여행길에 꼭 찾아가고 싶었던 게 국보 제16호인 법흥사지 칠층 전탑입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크다는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지금 위장막을 치고 복원공사 중이었습니다.



 




기존의 탑과는 완전 다른 형태의 전탑입니다. 신라시대부터 탑이라면 보통 화강암으로 깎아 쌓아 올린 석탑 등으로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만 . 붉은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전탑은 부산 쪽에서는 그리 흔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벽돌을 쌓아 탑의 형태를 갖춘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그 높이만 해도 16.8m, 기단 폭은 7.75m로 어마어마하여 국내의 석탑중 경주 감은사지의 석탑인 쌍탑보다도 더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탑이 남아 있는 곳이 법흥동으로 이는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의 전탑으로 추정합니다. 전탑의 방식을 보면 단층기단에 칠층인 몸돌은 차츰 크기를 줄여가며 쌓아 올렸고 법흥사터에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과 철도가 놓여 있습니다. 법흥사지 칠층 전탑은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이 되면 그때 다시 찾아보기로 하고 고성이씨 탑동파종택을 담 넘어 보았습니다.


 

 




이곳도 현재는 공사 중이였는데 안동시 법흥동에 있습니다. 고성이씨 후손들이 생활하고 있어 집안으로는 들어 갈 수 없다는 점이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고성이씨 탑동파종택은 중요민속자료 제185호로 고택 뒤로는 야산이 둘러쳐져 있고 집앞으로 법흥사 칠층전탑이 담에 가깝게 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1704년 조선 숙종 30년 좌승지였던 이후식이 법흥사 터였던 이곳에 지었고 북정은 영조 51년(1775년)에 그의 후손 이종주가 지었다합니다. 종택의 규모를 보면 솟을대문채, 사랑채, 안채, 정자와 연못 등을 갖추고 후에 방앗간채, 사랑채, 외양간채가 추가로 지어졌습니다.


 

 




안채는 정면8칸에 측면6칸으로 자연석 축대위에 세웠으며 동쪽에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은 배산임수를 잘 조화시킨 전형적인 사대부 저택으로 현재에도 잘 보존과 관리가 되고 있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국보인 법흥사지 칠층 전탑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 안동역 옆으로 이동을 하여 보물 제56호인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을 보았습니다. 동부동 오층전탑은 안동역과 접하고 주위의 도심화로 인해 더욱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으로 6.25 한국전쟁으로 일부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고 1962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을 하였습니다. 오층전탑이 있는 이곳은 법림사 터로 전하는데 전탑 옆 당간지주가 남아 있어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탑의 높이는 8.35m, 탑신부 길이는 27.5cm, 넓이 12.5cm, 두께 6cm로 무늬가 없는 벽돌로 길고 짧음이 어긋나게 5층으로 쌓았습니다. 오층 전탑은 월래 7층으로 법흥사 칠층전탑과 같이 금동제의 상륜부가 있었다하며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각층에 형식적으로 설치되었고 2층 남쪽면에는 인왕상 2구를 조각한 판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탑이 세워진 뒤 여러번 수리를 하면서 원형이 변형되었고 외관도 많이 손상되었다합니다.


 

 




오층전탑과 함께 남아 있는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0호이며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로 높이가 260cm입니다. 당간지주는 절에서 불기, 괘불을 거는 깃대를 고정시키는 돌기둥이며 보통 대웅전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위부분은 6.25 한국전쟁 때 파손되었고 당간을 받치던 둥근 주좌돌이 당간지주 사이에 남아 있습니다. 무늬등이 없는 것으로 간결하고 소박한 모양이며 동부동의 오층전탑과 함께 법림사와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2014/04/13 - (경북맛집/안동맛집)안동하회마을 맛집 간고등어 일직식당. 한국인의 밥상 최불암도 먹고 갔다는 안동간고등어 일직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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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구미시여행)냉산(태조산)도리사. 신라 최초 사찰 도리사의 특이한 석탑


신라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는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냉산(태조산)에 있습니다 주위에 소나무가 많아 송곡리로 불려질 정도로 소나무의 운치가 천년고찰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도리사의 유래를 보면은 신라 눌지왕때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래한 고구려 아도화상이 이곳에 처음으로 절을 세웠습니다.

 




아도화상이 불교 포교를 위해 경주 땅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냉산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멀리서 바라본 냉산 골짜기에 한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화려한 모습으로 피어 있어 아 곳에다 절을 세우고 도리사라 하였습니다. 신라 최초의 사찰 답게 이곳에는 현재 특이한 모양의 도리사 석탑이 보물 제47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벽돌을 쌓은 듯한 도리사 석탑입니다. 모양부터 아주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탑은 도리사 극락전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 석탑입니다. 높이는 3.3m. 우리가 많이 보아 오던 석탑과는 그 형태를 달리하는 모습으로 모전석탑에 가깝습니다. 땅위에 10매의 길게 다듬은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탑의 기단 부분을 세웠습니다.


 



기단은 사면에 네모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 면에 직사각형의 판석 6~7매를 병풍처럼 둘러 세웠고, 남면 중앙부에는 문짝이 새겨져 있습니다. 탑신 부분은 3중으로 각층마다 작은 석재를 중첩하여 얽거나 짜서 탑신부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벽돌탑인 모전 석탑의 형태입니다.


 



조각 양식과 돌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엽의 석탑으로 추정하며 석탑의 위부분은 노반위에 연꽃이 조각된 보주를 올려 둔 형태입니다. 국내의 모전 석탑은 재가 본것중에서는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과 청도 불령사 모전석탑이 전부인데 그 만큼 귀한 석탑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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