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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단장면 보문사의 대웅전과 선바위모습

밀양 단장면 보문사

밀양시 단장면 무릉리 노곡마을 뒤산을 수리덤산이라 부른다.

산 정상일대에 바위 층덤이 절벽을 이루고 있어 이곳에 수리매가 서식을 하였다 한다.
이곳 아래에 보문사란 작은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절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앉은 폼새 만은 천년고찰의 고승대덕이 수도하였을 법한 그런 위치이다.
발아래로는 이상향인 꿈속에라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도연명의 ‘무릉원기’인 무릉도원에서 따 왔다는 무릉리 마을이 펼쳐지고
 흡사 산 아래로 구름 바다가 펼쳐지면 신선이 되어 다닐 것 같은 그런 곳이다.
필자가 걸음을 옮겨 걸어 올라가니 꽤나 다리품을 팔아야 하며 경사도 또한 만만치 않아 힘이 들었다.




그래서 올라가는 중간중간 고급 전원주택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옛집들을 몰아내고
텃줏 대감인양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모습이 여기의 풍경과 어울리지가 않은 것 같았다.
이곳 보문사는 올해 나이로 68세이다.
창건연대는 어느 천년고찰에 비유할때가 되지 못하지만
노스님 한분과 기거하는 보살님의 자비로움이 관광지의 고찰에서 볼 수 없는
그런 사찰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노스님은 올해 나이로 79세이며 법랍은 56세인 주지 신행스님으로
아직고 텃밭을 일구시며 할 일을 찾아 호미를 덜고 나가신다.
잘 쉬시다가 가’란 말씀과 함께,

이곳 보문사에는 신기한 바위가 3개 있다.
대웅전과 붙어 있는 선바위로 마을에서는 입암으로도 부른다.
이 바위의 모습에 보문사를 창건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모습이 신기하다.
이리보면 사람의 얼굴이요. 저리보면 부처님의 모습이라.
그래서 사람이 곧 부처란 그 말이 실감나는 곳이다.

그 밑으로 자리 잡은 작은 바위는 흔들바위로 멀리서 보아도 흔들리는 그 모습이 확인된다.
또 하나는 요사채 좌측의 마당바위로 옛 밀양땅에서 관직을 버리고
국전리에서 여생을 보내며 이곳에 올라 시 한수 읊조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늑한 공간으로 소나무가 둘러져 있다.

그래서 인지 보문사는 더욱 정갈하며 정감이 가는 작은 암자이다.




 











흔들바위

마당바위


찾아가는 길

부산에서 밀양행 열차를 이용한다. 오전 5시10분,50분 6시35분, 55분, 7시45분, 8시35분,9시25분, 10시20분등 다양하게 있다.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하며 밀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는 국전행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하루 5회로 6시20분 8시40분, 12시50분, 17시, 19시이며 무릉에서 하차를 한다.

 

부산에서 신대구부산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밀양요금소를 빠져 나오면 24번 국도와 만난다. 울산 얼음골 표충사 방향으로 우회전을 하여 금곡인터체인지에서 우측 표충사로 내려선다. 금곡교를 건너면 단장면으로 1077번 지방도인 표충사 방향으로 직진한다. 단장면 소재지의 면사무소 앞에서 1077번 지방도인 무릉리 국전리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된다. 곧 무릉버스 정류장과 만나고 정류장 직전 노곡교를 건너면 자암서당을 지나 보문사 주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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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암

(여느 절집과 달리 두개의 큰 바위가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다. 오봉산 정 상 바로 옆에 위치를 하고 있어 식수가 사실은 귀할 것 같다. 그래서 식수는 현재 아래로 관로를 뚫어 지하수를 올려 사용을 하고 있다 한다. )  


 



신라시대 문무왕때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낙동정맥이 오봉산을 살짝 비껴가는 형상으로 신라시대 때에는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어 산성을 쌓았다.
 이름하여 부산성, 또는 주사산성으로 창건당시부터 이절에서 죽어 나간 사람이 없다하여 불사처라 하였다 한다. 그런데 지금 주사암을 방문을 해 보니 천촌리로 내려서는 등산로 입구에 근래에 세운 부도탑 한기를 볼 수 있는데 이제 불사처라는 기록은 깨어 졌는지 궁금하다.
걸어서 주사암에 가 보면 오봉산 정상에 위치를 하고 있다. 즉 다섯봉우리인 주봉과 2봉 사이에 주사암이 위치를 하고 있는데 신평리에서 보면은 오봉산 정상에서 아화리로 내려서는 능선을 만삭의 여인내가 한손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한다.
그리고 부산성과 함께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부산성 축성 당시 의상대사는 예언을 하기를 부산성 안에다 이 주사암을 두면 신라는 언제까지라도 망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는데...산성은 주사암을 비껴가 축성을 하였다 한다.
그 예언 후 몇백년 뒤에 신라는 백제에 의해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배풀다 죽음을 당하고 의상대사의 예언대로 신라는 망하는데 예언을 어찌 받아 들여야 할지.

 

그리고 주사암의 창건설화에 대해서는 현 주사암이 있는 위치 뒷면인 북쪽으로는 바위굴이 있었는 것 같다.
그 굴속에 난승이 수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여인네 알기를 돌 같이 아는지라, 아무리 빼어난 미녀가 와도 자신의 마음을 빼앗지 못할 것이며 수도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 호언장담을 하였다한다.
그의 말을 들은 귀신은 노승의 마음을 시험해 볼 욕심으로 반월성의 궁궐에서 궁녀를 잡아다가 노승 옆에 두기를 반복하게 되었다. 밤마다 궁녀들이 나갔다 들어오니 반월성의 왕에게 까지 이야기가 귀에 들어가고 임금은 괘씸하게 여겨 궁녀에게 붉은 모래 즉 주사를 주며 오늘밤에도 그런일이 생기면 동굴 주위에 붉은 모래를 뿌려라는 명을 내렸다.

(바위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주사암의  모습입니다. 산사면에 계단을 내어 건물을 배치하였습니다.)

궁녀가 없어진 것을 안 임금은 모든 병력을 풀어 찾아보니 오봉산 정상 부근에서 붉은 모래를 찾게 되어 뒤에 큰 동굴이 있는지라 병력을 동원하여 노승을 잡을려 하니 그 노승의 주변에는 신병들이 보호를 하고 있었다.
왕은 부처님이 보호를 하는 분으로 여겨 궁궐로 모셔 나라의 스승으로 삼았다 한다.
노승이 수도를 하였던 그 굴을 밀어 내고 그 자리에 주사암 사찰을 창건하였다 하며 1400년을 이어온 주사암은 가람의 배치 또한 다른 절과 달리 좁은 면적으로 인해 한일(一)자 가람을 하고 있다.
보통 사찰은 대웅전을 중심에 모시고 좌우로 가람을 배치하는 아(亞)자 형태이지만 주사암은 영산전을 제일 앞에 두고 가람을 배치하여 지형을 적절히 이용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도 주사암을 찾아 들어 가는 길은 여느 절집과 달리 일주문이 없다. 일주문은 두 개의 큰 바위가 일주문을 대신하고 그 사이로 들어서면 주사암 절집과 만날 수 있다.

 

주사암 옆에는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을 빼 놓을 수 없다. 수백명이 거뜬이 쉴 수 있는 마당바위가 있어 지맥석이라 불리는 이 바위는 보리를 늘어 술을 빚어 부하들과 나누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지금도 천촌리 쪽으로 바라보는 바위의 끝에 나가보면 간담이 서늘할 정도이다.

 

입구에서 본 주사암입니다. 화장실은 아주 멀리 두고 있습니다. 좌측의 건물이 정낭입니다.

건물이 3동 길게 배치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안쪽의 석등이 보이는 곳이 영산전입니다.




영산전 위의 삼성각으로 주사암에서 가장 위쪽으로 배치를 하였습니다.

삼성각을 내려 오면서 본 주사암입니다. 앞에 영산정을 볼 수 있습니다. 

천촌리 방향으로 내려 보고 있는 범종각입니다.




주사암 영산전입니다. 주사암의 대웅전으로 이절의 중심건물 입니다. 좁은 지역의 층계식 터에더 조성을 하여 규모면에서는 아주 적은 것 같이 소박합니다. 창건연대는 조선시대 후기로 보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양식을 하고 있습니다. 

부속건물들

밑에 보이는 건물이 공양간입니다.

바위아래 자리 잡은 공양간입니다. 천촌리에 내려가는 길은 공양간 아래로 나 있습니다.

아래에서 본 주사암 모습입니다. 바위를 축대로 쌓은 것으로 봐서 아주 급한 산사면에 조성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사암 창건 이래 죽어 나간 사람이 없어 불사처라 하는데 근래에 조성 된 것으로 보이는 부도탑입니다.

주사암 옆의 마당 바위로 김유신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옵니다. 일명 지맥석으로 김유신이 마당바위에 보리를 늘어 술을 빚어 부하들과 나누어 마셨다합니다. 수백명은 거뜬히 앉을 수 있는 넓이 입니다.

만삭의 여인이 배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의 오봉산입니다. 신평리에서 찍은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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