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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여행/옥천여행)옥천성당.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갈해지는 옥천 성당의 모습. 


지난 옥천 여행에서 언덕 빼기에 하얀색의 정갈한 모습으로 보였던 옥천 성당입니다. 그때는 시간도 부족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지나쳤던 옥천 성당. 이번에 다시 옥천을 방문하면서 “꼭 찾아가봐야지”하며 시간을 내어 다시 방문을 하였습니다.



안내판을 보면은 옥천지역의 천주교 전래는 1880년 경 파리외방 선교회 소속 로베르 신부로부터 시작되었다 합니다. 김보록 신부의 전교로 옥천에서 천주교가 첫발을 내디뎠다면 1900년경에는 부이용 신부에 의해 본격적인 천주교 전교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옥천천주교회는 홍병철 루가신부가 초대신부로 부임하면서부터 공소와 본당등으로 이전과 승격, 격하를 겪다가 1928년 다시 본당으로 승격을 하게 됩니다.

 


현재의 옥천성당은 제8대 메리놀 외방선교회 소속 미국인 사제들에 의해 페티프렌 신부 재임시인 195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56년 4월에 신축 준공을 하였습니다.

 


시멘트 벽돌을 사용한 단층 건물로 지붕은 변형된 왕대공 형식이며 목재로 삼각형 지붕을 만든 구조로 하고 있습니다. 1966년에는 종탑부에 함석으로 마감한 것이 심하게 부식되어 기와로 바꾸면서 환기창과 십자가형 첨탑이 철거되기도 하였습니다.



옥천 성당은 준공당시에는 장방형의 강단형 평면구성이었으나 1991년에 또 다시 증축공사를 실시하면서 성당 뒤편의 벽을 철거하고 트랜셉트와 제단앱스부를 달아내어 현재의 십자가 형태를 갖춘 평면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부식된 함석을 들어내고 기와지붕으로 교체한 것을 다시 보수공사를 하여 그 당시 함석으로 원형을 복원하였습니다. 성당의 입구인 정면은 2층 높이의 박공형 매스에 현관홀을 두었으며 박공지붕으로 처리한 중앙 현관과 좌우양쪽 현관에 반원형의 아치를 돌였고 중앙아치의 폭이 양쪽 현관 아치의 폭 보다 두 배 더 넓게 건축되었습니다.

 


옥천 성당은 지방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근대 성당이며 한국전쟁 이후 국내의 종교건축변화를 알 수 있는 건축사적 의의와 희소적 가치를 인정받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7호가 되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웠던 것은 옥천 성당을 찾았던 시간이 조금 늦어 신도님들의 예배를 보는 시간과 겹쳐 성당의 내부를 볼 수 가 없었습니다. 성당 내부는 어떠한 모습인지 궁금하였지만 발걸음을 돌리 수 밖에 없었고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방문을 하여 내부를 둘러보고 싶습니다. (참고:문화재 안내판)








1991년 성당 증축공사때 달아낸 트랜셉트와 제단앱스부 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십자형을 이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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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204호 밀양상동터널. 1905년 경부선  개통때 뚫은 밀양 상동터널 벛꽃이 한창.


밀양시 상동면 경부선의 상동역 건너편에는 지금도 밀양상동터널이란 이름으로 터널이 남아 있습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된 철도 시설 문화재입니다.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옥산리 887번지로 옥산리와 안인리의 경계를 이루는 곳입니다. 이곳은 옥교봉의 산세가 단애를 이루는 곳으로 사람도 겨우 다닐 정도로 층암절벽이었습니다.



 

 

 


 1905년 1월1일 왜인들은 한반도를 수탈할 목적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철도를 깔았습니다. 그해 5월28일에 개통식을 열었는데 밀양 상동 터널은 그 당시에 빈지소를 감싸고 있는 바위를 뚫고 건설된 그야말로 획기적이라 할 만큼 대단한 기술이었다 합니다. 두 개의 터널로 이루어진 상동터널은 40m와 60m로 아래편에는 사각의 견치돌을 붙이고 위쪽인 천장은 붉은 벽돌을 쌓는 건축기술로서 당시에서는 아주 수준 높은 건축방식이었습니다.



 

 

1960년 초에와 경부선 철도의 노선이 변경되어 밀양강 건너편의 금산리로 옮겨 가고 기존 철로는 레일을 걷어내고 콘크리트 포장을 하여 차량과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곳은 유천 강변이라 하여 80~90년대 여름철에는 많은 휴가객이 몰려들었던 곳입니다.



 

 

 

 

그 당시는 유천역이었는데 현재에는 상동역으로 이름을 바꾸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 찾았던 밀양 상동터널은 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벚꽃이 절정이었습니다. 숫제 꽃비가 내릴 정도로 벚꽃이 날렸는데 비오는 중에도 차량을 몰고 온 연인들을 많이 볼 수 있을 정도로 한적한 데이트 장소입니다.



빈지소

 

 

청도천과 동천에서 흘러내린 강물이 서로 만나 이때부터 밀양강이 됩니다. 밀양강은 상동역 앞을 흘러 밀양의 영남루 앞을 지나 자연스럽게 낙동강에 흡수되는데 상동역 앞의 휘어진 곳을 빈지소라 부릅니다. 밀양강(응천강) 상류 북천수는 잔잔하게 흐르던 물의 흐름이 이곳에 와 급해지면서 암반에 부딪혀 꺾여 돌아가게 됩니다.





 

 

물이 부딪힌 부분은 자연스럽게 패여져 깊은 수심을 이루지만 그 반대편에는 삼각주가 형성되어 넓은 공터로 바뀌어 밤벌로 현재 부릅니다. 이곳 물가에 개구리 먹이인 밥풀 즉 부평초, 빈초가 많이 자생하여 빈주가 되었다가 빈지로 변음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빈지소

 


 이곳 빈지소에는 자라전설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 하씨 성을 가진 분이 이곳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고기장수로부터 등에 왕(王)자가 선명한 큰 자라를 한 마리 사 이곳 빈지소에다 살려주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어느 해 대홍수가 발생하여 마을이 물바다가 되어 꼼짝 없이 모두 죽을 지경이 되었다합니다.



 

 

 

 

그 때 큰 자라가 나타나 마을 앞 건너편의 제방을 무너뜨렸는데 물이 그 무너진 제방으로 흘러가면서 마을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합니다. 하씨로부터 목숨을 구한 자라가 은혜를 갚았다며 미물도 이리 은혜를 갚는다며 이 마을의 하씨들은 그 이후부터 자라를 잡거나 먹지 않는다 합니다.



 

 

근대문화유산인 밀양상동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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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부북면 퇴로리 '오구' 촬영지 여주이씨 고가를 보고 왔습니다.

 

경북에는 안동이 있다면 경남에는 밀양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하나요. 조선시대때 경북에는 안동이 양반들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면 경남에는 밀양이라는 이야기입니다. ㅎㅎ 밀양에도 많은 양반촌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밀양 교동이고 또한 손숙장관이 나왔던 산외면 다죽리 그리고 부북면의 퇴로리등 손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양반의 득세가 얼마나 센지 박정희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대구에서 밀양으로 통과하게 하였는데 밀양의 양반님들이 시끄럽다고 우리 동네로는 통과 할 수 없다며 강력 반대 하여 경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할 정도입니다.

 

 






지금이야 신대구고속도로가 생겼지만 밀양의 발전이 그 덕택으로 더 늦어졌다네요. 이야기가 옆길로 빠진 것 같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밀양 부북면 퇴로리의 여주이씨 고택입니다.

 




 

퇴로마을에도 유독 고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황토 담장을 돌려놓은 기와집의 모습은 그 당시 세도가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특히 퇴로리의 중심에는 여주이씨 고가가 마을을 대표할 정도로 큰 규모입니다.

 









퇴로마을 버스 정류장에 내려 오른쪽 개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돌면 큰 고택의 담장이 연결 됩니다. 그 왼쪽으로 따라 갑니다. 마을 길 끝에 ‘오구’ 촬영지라며 안내판이 붙어 있습니다. 먼저 만나는 이병수 고가로 근대문화유산이며 등록문화재 제15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에도 그의 후손이 살고 있고 담장이 높아 발끝을 들어도 집안 내부는 볼 수가 없습니다. 오른쪽으로 흙 담장을 따라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주이씨 고가의 규모가 엄청 큰 데요. 필자는 이병수 고가에서 왼쪽 골목으로 돌면 좌우로 아름다운 흙 담장과 연결되고 오른쪽으로 한바퀴를 돌면 이익구 고가 앞에 닿습니다.

 




이곳에는 문이 열려 있으며 최근에 대문이 수리가 된 것 같습니다. 여주이씨 자유헌공파의 종갓집으로 1890년 이만백의 7대손인 항재 이익구(1838~1912)가 마을에 입주하면서 세웠다합니다. 조선시대 후기 지방 선비의 집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합니다.




 

필자가 대문을 통해 들어가 보았습니다. 흙과 돌을 섞어 기와를 올린 담장으로 구분을 하였는데 같은 형태의 고가가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먼저 정침 안채는 정면 7칸, 측면2칸의 규모로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어져 청덕당이라는 당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서익랑과 정면5칸과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에 ‘성헌’의 현판이 걸려 있는 중사랑이 안채와 마주보며 자리하고 출입문 왼쪽에 종가사당 건물이 배치되었습니다. 중사랑 앞의 작은 문이 열려 있는데 그 문으로 나가보니 또 하나의 건물이 비슷한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별채로 청덕당인 안채의 동쪽에 있습니다. 이 건물은 항재 이익구의 손자인 후강 이재형(1891~1970)이 결혼과 함께 분가를 하여 지어진 건물로 안채와, 동서익랑, 사랑채로 지어졌습니다.

 



 

안채는 정면7칸과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어져 '사현합‘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사랑채는 정면5칸에 측면 1칸 반의 크기로 팔작지붕을 이루며 쌍매당의 당호가 걸려 있고 또한 후강유서, 담재, 청덕고가의 현판이 함께 걸려 있어 있습니다.


 





 


 


쌍매당의 남쪽으로 통하는 쪽문이 이병수의 고가로 통하는 문으로 보입니다만 문을 걸어 놓았습니다. 항재 이익구의 차남이 분가하였던 집으로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 ’一‘자형 안채와 서쪽에는 ’ㄱ‘ 사랑채, 안채와 마주보고 곳간채가 자리한 형태입니다.

 







특이한 점은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과 건물의 배치를 따랐지만 전, 후퇴 공간의 확장과 건물의 내부 수납공간을 크게 하는 등 근대 한옥의 특징을 보여 주며 사용된 재료 또한 기존과 다르게 근대 재료를 사용하여 건축하였습니다.

 




퇴로마을에는 앞으로 퇴로 수리못 또는 가산저수지, 용호, 남호로 불리는 큰 저수지가 있습니다. 1931년 일제 강점기때 만들어진 저수지로 둘레가 10리나 됩니다.  퇴로마을은 앞으로는 가산저수지, 뒤로는 돛대산이 둘러 싸여 아늑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돛대산 정상 인근에는 인위적으로 지맥을 끊은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였던 이여송이 조선의 산천지리를 술사와 살피며 큰 인재가 날 만한 곳은 산의 맥을 끊었다합니다. 그 때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퇴로마을에는 명당으로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여주이씨의 청덕당과 쌍매당터가 예로부터 명당터로 마을에서도 명당이라 부릅니다. 따뜻한 봄이 왔습니다. 5월의 꽃 이팝나무가흐트러지게 꽃을 피우는 위양지와 함께 밀양의 고가 여행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2014/04/01 - (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위양못(위량지). 5월이면 사진작가의 단골 출사지인 위양못에 댕겨 왔습니다. 이팝꽃은 없지만 역시 밀양8경의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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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남창역사

등록문화재 제105호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남창리42-1

여행을 다니다 보면 시골의 한적한 역사의 건물에 마음을 빼앗겨 본적이 있을까. 사실 요즘 역사의 건물들을 보 면은 예전의 건물들을 헐고 새로운 역사의 건물로 거듭나고 있다. 마음속 어느 한 켠에 간직하였던 옛 역사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이곳 동해 남부선을 따라 많은 건물들이 역사의 흐름속에 사라지고 이제는 몇 안 되는 건물이 등록문화재란 이름으로 보존이 되고 있어 다행 아닌 다행으로 여겨진다. 울산의 남창역사도 일제 강점기인 1935년에 12월 16일에 보통 역으로 출발을 하였다.

 

 

 

 

 

 1978년에 온산공단으로 온산선을 내면서 역을 확장한 것 말고는 시골 역사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남창역사의 특징은 시골 역사이면서도 건물 후 면부 지붕의 중앙부에 두 개의 박공을 중첩시켜 건물의 무게감을 더 주었고 전체 건물 형태에서 정면임을 나타낸 것으로 보여 진다.

 

 

 

 

 

 

 

 일제 강점기 때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고 한다. 2002년에 남창 역사를 전면 보수를 하였는데 그때도 기본 틀은 유지를 하면서 평 슬레이트 지붕에서 맞배지붕으로 개량을 하고 창호 및 창문틀을 교체하였다 한다.

 

 

 

 

 

 

보수 정비로 인하여 건물 부분 부분의 건축 재료는 바뀌었지만 평면의 형태는 남창역사 준공당시의 모습에서 변형이 거의 없고 지붕을 빼고 벽면의 재료도 바뀌었지만 건립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건축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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