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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여행/옥천여행)조헌과 칠백의총 이야기. 조헌선생 이지당을 만나다. 옥천 이지당.

조헌(1544~1592)과 칠백의사, 국사시간에 교과서에서 배웠습니다. 그 당시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조헌과 칠백의총 이야기. 그분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는 옥천 이지당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조헌선생이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라 합니다. 그럼 조헌선생은 어떤 분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됩니다. 자는 여식이며 호는 중봉, 본관은 배천, 시호는 문열공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명나라를 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조정에 길을 내어 달라며 사신을 보내옵니다. 조헌은 사신을 죽이고 전쟁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낙향하여 왜란에 대비합니다.



1592년(선조25년) 조헌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 정인홍과 함께 호서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키게 됩니다. 계룡산 갑사에서 승군을 일으킨 영규대사와 합심하여 청주성을 함락하고 많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을 겪으며 700명의 흩어진 의병을 다시 규합하여 금산으로 향합니다. 호남 순찰사 권율과 영규대사와 함께 금산을 함락하기 위해 배수의 진을 쳤지만 권율장군에게서 출병 날짜를 미루자는 연락을 받습니다.



왜군은 조헌과 영규대사가 이끌고 있는 의병의 약점을 간파하고 역습을 시도하여 조헌과 영규대사와 승병, 700명의 의병은 모두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합니다.



조헌 선생 사후인 1604년 선조는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1609년 광해군때 ‘표충’의 사액을 내렸으며. 1754년에 다시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문묘에 종사되었습니다.

 


이지당(二止堂)은 선생이 지방의 영재들과 학문을 논하던 사당으로 각신마을 앞에 있어 각신서당으로도 불렀습니다. 뒤에 송시열(1607~1689)의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는 고산항지경행행지(高山仰止景行行止)에서 따와 이지당이라 하였습니다.





1901년인 광무 5년에 인근의 4대 문중(금, 이, 조, 안)에서 정면 7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새로 세웠으며 현재 대청에는 이지당기와 이지당 강학조약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이지당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이며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이백6길 126에 위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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