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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산청여행)남명선생 사적지 남명기념관. 남명 조식선생에 대해...


남명선생 기념관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덕산마을로 말년에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제자들에게 물려준곳으로 산천재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다. 이는 남명선생 탄생 500주년에 그의 학덕을 기리고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2004년에 건물을 완공하였다. 남명조식 선생은 1501년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의 외가에서 승문원 판교를 지낸 부친 조언형과 모친  인천이씨의  3남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이며 남명은 호다. 19세때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처형되고 숙부도 이에 연루된 것을 보며  잘못된 정치의 모습을 아쉬워 하였다.

 그는 30세때 부터 그의 처가인 김해시 대동면 신어산 아래 산해정을 짓고 이곳에서 벼슬길에 오르지 않을 것을 작심하며 학문에 매진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를 산림처사라한다. 다시 48세에 삼가의 외토리 고향으로 돌아와 뇌룡정과 계부당을 짓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는 55세때 이곳에서 을묘사직소(단성소)를 조정에 올리게 된다.




61세에 그는 현재의 위치인 산청 덕산으로 와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산천재를 짓고 후진 양성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명선생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 두글자로 함축되는데 이는 주역의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직內, 義以方外)'에 따온 것으로 경은 내적수양을 통해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이고 의는 경을 근본으로 하여 제반사를 대처함에 있어 과단성 있게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선생은 학문과 삶이 일치하는  생활을 강조하며 백성을 위하는 위민정치를 역설하였다. 


그의 사후 많은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에 따라 임진왜란에 국난극복의 의병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는데 홍의장군 곽재우, 정인홍, 김면, 조종도, 전치원등 50여명에 이르고 오건, 김우웅, 최영경, 하항, 정구, 정탁등  많은 석학들이 선생의 학덕을 계승하였다.(남명학연구원의 남명선생 사적지 팜프렛 발췌)






남명기념관

 

 

 

 

 




☞(경남여행/산청여행)남명선생 사적지 남명기념관. 남명선생이 뇌룡정에서 올린 단성소...


단성소 국역비는 남명선생 동상 오른쪽에 위치를 항다. 2009년 10월10일  남명학연구원에서 선생의 사상과 학문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세웠는데 내용을 보면 단성소는 명종 10년인 1555년 선생이 단성현감을 사직하는 이유와 당시의 국정의 문란을 질타하는 상소문으로 '을묘사직소'라 한다. 임금의 권력이 절대 지존이었던 조선시대에 왕을 '고아'라하고 왕의 어머니 문정왕후를 '과부'라 칭하여 조정과 사림을 놀라게하였다. 이것만 봐도 남명선생의 곧은 성품이 잘 드러난다하겠다.

 

 

 

 

신명사도

 

 

 

☞(경남여행/산청여행)남명선생 사적지 남명기념관. 남명 조식선생의 신명사도와 같은 생활....


신명사도는 마음의  작용을 마치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이치에 비유하여 도식화 한 것으로  그림에서 보는 둥근 성곽안은 사람의 마음이고 그 성곽의 바깥은 외부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신체의 내외부로 부터 일어나는 모든일을 나타낸다 하겠다. 남명선생은 인간의 마음을 성곽에 비유한 것은 외부로 부터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을 반드시 막아야한다는 선생의 의지를 표현한 그림이다. 선생은 합천삼가의 뇌룡정을 신명사도에 따라 지었고 그의 삶은 신명사도의 내용을 실천하려고하였다.

 

 

남명조식선생 영정

 

 

 

 

덕천서원

 

 

 

 

 

 

 

 

 

 

 

 

 

 

 

 

 

 

 

 

 

 

교지광해군 10년(1618년)내암 정인홍에게 내린 영의정 교지

 

 

유서광해군 1년(1609년)광해군이 내암장인홍에게 내린 유서

 

 

 

 

 

 

 

 

 

 

 

 

 

 

왕실하사 오경백편왕실에서 하사한 책

 

 

 

 

덕천서원사우록남명 선생 스승과 친구 그리고 봉인의 행적을 기록한 책

 

 

 

 

 

 

남명집

 

 

학기유편

 

 

사성현유상병풍남명선생이 직접 그린 공자, 주렴계,정명더, 주자의 유상병풍

 

 

 

 

 

 

 

삼가토리의 뇌룡정

 

 


뇌룡정은 선생이 처가가 있는 김해 대동면에서 48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뇌룡정을 짓고 산천재로 옮겨가기전까지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단성소를 지어 올렸다.


 

경의검

 

 

 

경의검(敬義劍으로 남명선생은 '내명자경 외단자의"라 새겨진 장도를 가슴에 항상 품고 다녔다.

 

성성자

 

 

성성자(惺惺子)라 부르며 남명선생은 평소에도 작은 두개의 방울을 옷고름에 달고 다녔다. 성은 께닮음을 뜻하며 성성자는 남명선생이 스스로 자신을 경계하며 방울소리를 들을때 마다 자신을 일깨우고자하였다.

 

 

 

 

 

 

 

 

 

 

 

여재실

 

 

☞(경남여행/산청여행)남명선생 사적지 남명기념관. 위패를 모신 여재실.


여재실은 문중에서 남명선생에게 제사를 드리는 가묘이다. 여재실에는 남명 선생과 정경부인 숙부인의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불천위로 지정되어 매년 2월8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남명선생 동상 왼쪽에 있는 비로 신도비다. 이비는 남명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잘 표현한 글로 우암송시열이 지었다 한다.

 

 

남명선생묘지

 

 

남명기념관 뒷산 임좌원에 자리잡고 있는 남명선생의 묘소. 생전에 선생이 직접 묫자리를 정하였다한다.  대곡성운 선생이 지은 묘갈명이 서 있다.

  


산해정과 신산서원




☞(경남여행/산청여행)남명선생 사적지 남명기념관. 김해 대동면 주동리 산해정과 신산서원.


신산서원과 산해정은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신어산 아래에 위치를 하고 있다. 산해정은 선생이 30세때 처가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와 학문에 정진하며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신산서원은 그 후 신산서원을 세워 선생을 추모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1999년 김해시에서 산해정 뒤에 사당을 건립하여 서원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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