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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봉화여행)봉화만산고택, 봉화만산고택 고택체험을 하다.


봉화여행을 하면서 둘째 날은 봉화군 춘양면의 만산고택에서 고택 체험을 했습니다. 

마지막 날 일정이 춘양면에 모두 잡혀 있어 부산에서 출발 전에 미리 만산고택에다 예약했습니다. 

먼저 봉화 만산고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선 후기인 대한제국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을 지낸 만산 강용(1846~1934)이 1878년(고종15) 건립한 가옥입니다.




봉화만산고택 주소: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288

봉화만산고택 전화:054-672-3206




2018/10/13 - (경북여행/봉화여행)봉화여행에서 소강고택 한옥체험. 소강고택

2018/03/07 - (경북여행/봉화여행)봉화 한수정. 충재 권벌을 추모하는 봉화 춘양 한수정 여행.

2018/03/06 - (경북여행/봉화여행)해저 만회고택. 봉화 독립운동의 산실 해저 만회고택 여행. 만회고택

2018/02/26 - (경북여행/봉화여행)봉화 계서당. 춘향전에 이몽룡의 실존인물인 성이성 생가 봉화 계서당 여행

2018/02/16 - (경북여행/봉화여행)봉화서동리삼층석탑. 산림고교 교정에 봉화 서동리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2018/02/14 - (경북여행/봉화여행)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 감실부처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

2017/11/15 - (경북여행/봉화여행)봉화 도암정. 정자의 고장 봉화에서 만난 도암정 도암정


봉화 만산고택도 소나무 중 최고라는 춘양목으로 지어졌습니다. 

만산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한을 달래려고 자택 뒷산에다 망미대(望美臺)를 쌓고 울분을 토했습니다. 

봉화 만산고택의 대문채는 11칸의 솟을대문인데 대단한 규모였습니다.



마당으로 들어서면 마주하는 게 사랑채입니다. 

앞면 5칸 옆면 8칸 규모의 ‘ㅁ’자 형태의 건물로 사랑채와 안채가 붙은 형식입니다. 

사랑채는 사랑방과 대청, 조상의 신위를 모신 감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안채는 사랑채와 별당 사이의 중문으로 들어섭니다.



사랑채 


서실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대청, 안방과 상방, 부엌, 중방과 고방이 연결된 구조이며 토속 민간신앙인 성주단지와 용단지를 모셨는데 처음 수확한 쌀을 독에 담아 1년간 보관했으며 음력 5월 보름날 정오에는 성주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안채









대문채




안채 출입 중문




오른쪽에는 따로 담장을 두른 ‘칠류헌(七柳軒)이 있으며 팔작기와집인 5칸의 별당 건물로 귀한 손님을 모셨던 곳입니다. 

만산이 이곳에서 영친왕 등 여러 문인과 학문을 교류하였다 합니다. 

본채와 서실, 별채, 대문채 등의 가옥 배치는 사대부가 상류 주택의 형태로 안채의 출입은 사랑채의 감실 뒤인 측면 출입형의 중문으로 합니다. 

 







 


이는 19세기 봉화 등 경상북도 북동부 반가의 지역적인 건축 특성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특히 만산고택에는 여러 친필 편액이 전해 옵니다. 

‘만산(晩山)’편액은 강용이 태어났을 때 흥선대원군이 “대기만성형의 큰 인물이 되어라”는 뜻으로 호를 지어 직접 쓴 글씨이며 박물관에 보관 중인데 현재 모사본이 걸려 있습니다.




정와



존양재



서실에 걸린 “문필과의 밝고 깨끗한 인연”을 뜻하는 ‘한묵청연(翰墨淸緣)’편액은 영친왕의 친필로 8세 때 쓴 글씨입니다. 

서실은 사랑마당 왼쪽에 있으며 우진각지붕의 2칸 규모로 이 집 안 아이들이 모여 공부하던 방입니다.

 


한묵청연





만산고택은 건물마다 다양한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각각의 현판에는 각 건물에 담겨 있는 의미를 뜻한다고 합니다.

사랑채에는 대원군이 쓴 ‘만산’과 강벽원 선생의 정와(靖窩)’와 3·1 만세운동에서 33인 중 한 분인 오세창이 쓴 ‘존양재(存養齎)’와 별당건물의 칠류헌 현판입니다.

 





정와는 “편안한 집”이란 뜻이며 존양재는 “타고난 심성을 온전하게 지켜서 훌륭한 심성을 기르는 곳”을 뜻하며 맹자의 ‘존심양생(存心養生)’에서 따왔습니다. 

'칠류헌'은 “요일이 순환하듯 언젠가는 국운이 회복될 것을 염원”한다는 만산 강용의 뜻이 담겨 있으며 기둥의 주련은 영친왕의 스승인 해강 김규진(1868~1933)선생의 글씨입니다.





이외에도 백석산방, 사물재 등의 현판이 있습니다. 

봉화 만산고택은 고택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한때 빈집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많은 편액도 도둑맞고 해서 만산의 5대손인 강백기 선생이 부인과 함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낙향하여 관리하면서 따뜻한 고택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만산고택에서 가장 저렴한 대문채에 붙은 방 2 두 개 였습니다. 

행랑방으로 옛날로 말하면 머슴이 거처하던 방입니다. 

묵었던 방은 따뜻했습니다. 그러나 목욕과 화장실인 편의 시설은 따로 독립되어 있는데 조금 불편했습니다. 



이것 말고는 대문채의 방도 깔끔하고 정말 좋아 편안하게 하루 쉴 수 있었습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21호 만산고택 체험 문의는 054-672-3206 “예약은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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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봉화여행)해저 만회고택. 봉화 독립운동의 산실 해저 만회고택 여행


봉화여행을 하면서 1박을 청했던 곳이 아름다운 지명인 바래미마을의 소강고택입니다. ‘바래미’는 바다였다는 뜻이며 아주 오래전에 이 일대가 바다였는지 알 수 없지만 최근까지도 마을 안의 논과 웅덩이에서 조개들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마을이 포근하고 아늑한 게 정말로 아름다웠습니다.





봉화 해저 만회고택 주소: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485

중요민속자료 제169호





한옥스테이를 했던 소강고택 포스팅은 다음에 하고 우선 바래미마을 인근에 있는 해저만회고택을 포스팅하겠습니다. 소강고택에서 새벽 일찍 일어나 계속 누워 있기도 뭐하고 해서 카메라를 들고 마을 구경삼아 동네 한 바퀴 했습니다. 소강고택 이외에도 많은 고택이 즐비했는데 그중에서도 소강고택의 건너편 마을에 있는 해저 만회고택을 이정표만 보고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해가 떠오르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찾아가기가 부담스러웠지만, 외관만이라도 만나볼 욕심에 찾았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지 대문이 없는 개방식 비슷한 고택이었습니다. 주위 고택은 솟을 대문에 높은 담장이 둘러싸여 바깥에서는 전혀 내부를 볼 수 없었는데 만회고택은 대문이 없어서 바깥에서도 훤하게 사랑채가 잘 보였습니다.

 


특히 새벽바람을 가르며 시골 마을을 걸을 때는 개 짖는 소리에 동네가 떠나갈 듯 시끄러워 마을을 둘러보기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그래도 행운인지 모르겠지만 만회고택은 집을 지키는 강아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만회고택의 자랑인 사랑채를 가까이서 보게 되었으며 집주인이 잠에서 깰까 싶어 조용하게 사진을 찍고 소리소문없이 나왔습니다.



만회고택은 봉화군에서 애국심으로 큰 자랑인 고택건물입니다. 건물의 웅장함도 있지만 만회고택의 사랑채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산실이라 더욱 눈길이 갔습니다. 봉화 해저 만회고택이 자리한 해저리에는 조선 숙종 때 관찰사를 지냈던 팔오헌 김성구 선생이 처음 자리를 잡아 의성김씨가 세 가를 이루었습니다.





지금의 만회고택인 안채는 김건수씨 6대조께서 마을에 들어와 여씨(余氏) 성을 가진 분이 살던 집을 사들여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안채는 1690년대에 지어졌다 합니다. 이 집을 만회 고택이라 부르는 것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건수(1790~1854)선생의 호인 만회헌(晩悔軒)에서 따왔습니다.



만회고택의 사랑채인 명월루(明月樓)는 만회선생이 건립했으며 1850년에 전체적인 수리를 했다고 합니다. 백두대간의 흥 걸 찬 기원이 감도는 명월루의 지세는 예로부터 명산 대천을 찾는 많은 시인 묵객들이 시를 읊고 학문을 닦던 곳으로 이곳에서 약 1,000여 편의 시가 쓰였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명월루는 봉화 해저리에서 독립운동의 산실역을 담당했다 합니다. 특히 해저마을 주민 전체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14명의 독립운동가를 마을에서 배출한 독립유공자 마을입니다. 그 이유를 보면 성주 대가면 출신인 심산 김창숙 선생이 명월루에 거처하면서 해저마을의 많은 사람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독립 자금도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랄 일은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열렸던 제2회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비밀리에 파견하면서 독립청원서를 보냈는데 독립청원서의 초안을 명월루에서 작성하였다고 하며 독립유공자 마을인 해저 마을의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 외 많은 독립운동의 지원 등을 의논했던 장소에 명월루가 이용되었다 하니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사실 만회고택의 안채는 이른 아침이라 내부를 볼 수 없어 많이 아쉬웠지만, 사랑채인 명월루를 보는 것만으로도 큰 만족을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만회고택 명월루를 알아보겠습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먼저 만나는 게 사랑채인 누각형태의 명월루입니다.





사랑채가 명월루임을 알리는 현판이 돌출한 누마루에 달렸어 눈에 확 띄었으며 이외에도 만회고택과 사랑채의 툇마루에 앉으면 시원한 바람을 느낀다는 청풍헌 현판도 따로 걸려 있습니다. 사랑채는 앞면 4칸이며 옆면 1칸 반 규모로 만회고택은 앞쪽에 일자형의 중문간채와 'T'자 형의 사랑채, 안채는 ‘∩’자형이며 전체적으로 튼 ‘ㅁ’자 배치입니다.



안채를 중심으로 좌우로 연결된 건물이 사랑채로 이어지며 안채의 동쪽 날개 끝에서 동쪽으로 치우쳐져 사랑채가 자리했습니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했으며 전면의 툇마루와 누마루에는 둥근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사용하여 건물의 멋과 권위를 한층 더 높였습니다.





사랑채 옆의 안채로 드나들던 출입문인 중문간채는 퇴락하여 1981년에 철거했다가 다시 복원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찬찬히 이곳저곳을 꼼꼼하게 둘러보고 싶었지만 이른 아침 남의 집을 찾아서 내 욕심대로 보는 것도 실례이고 그리고 소강고택에서 다음 일정으로 일행들도 기다릴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돌아 나왔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해저 만회고택에서 한옥체험 민박도 하고 보지 못했던 안채와 수박 겉핥기로 보았던 사랑채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챙겨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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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봉화여행)봉화 계서당. 춘향전에 이몽룡의 실존인물인 성이성 생가 봉화 계서당 여행


청정골 봉화여행을 하면서 소설과 판소리의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생가가 있다 하여 아니 웬 봉화에 이몽룡생가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정보를 알고는 가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허구의 춘향전이 아니라 이몽룡은 실제 인물이라는 점에 더욱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찾아갔던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의 계서당은 그야말로 한적한 산골 오지에 자리했습니다. 




춘향전에 이몽룡의 실존인물인 성이성 생가 봉화 계서당 주소: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

춘향전에 이몽룡의 실존인물인 성이성 생가 봉화 계서당 전화:054-679-6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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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의 남자주인공인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이분의 성함은 창녕성씨 16대손인 계서 성이성(1595~1664)이며 청백리에 이름을 올린 분으로 한마디로 불의를 보면 참고 넘기지 못하는 똑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소설 속에서 이몽룡 은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 관아를 찾아 갑니다.



변사또는 수청을 거부하는 춘향이를 앉혀 놓고는 주지육림으로 흥청망청하였고 이를 보다 못한 이몽룡은 사또를 칠언절구로서 질타하는 인물로 성이성선생과 너무 닮았다 하겠습니다. 이를 보고 소설 속의 이몽룡은 봉화의 성이성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은 아닌지 싶었습니다.

 













성이성의 4대 후손인 성섭의 교와문고(僑窩文藁)에는 춘향전의 어사 출도 장면과 비슷한 내용이 나오고 걸인 행색을 한 이몽룡이 지필묵을 요청해서 써내려간 한시“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금동이의 좋은 술은 천사람의 피요)/옥반가효만성고(玉盤佳爻萬姓膏:소반위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이 기름이라)/촉루낙시민루낙(燭淚落時民淚落:촛불의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성의 소리 높더라)”가 수록되어 있다 합니다. 그러니까 춘향전 이몽룡 한시가 발견된 것이지요. 







또한, 성이성은 4번의 암행어사 직을 수행하면서 호남에 두 번이나 어사로 활동한 것을 보면 더욱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몽룡과 성이성을 동일인이라 주장한 사람은 연세대학교 설성경교수로 1999년11월 그의 논문 ‘이몽룡의 러브스토리’에서 입니다.

 



성이성의 인물 탐구에 앞서서 춘향전의 대략 줄거리를 보면 남원부사의 아들인 이몽룡과 기생 월매의 딸인 춘향이 광한루에서 정분을 나누다가 남원부사가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이도령과 춘향이는 다음에 만날 것을 언약하며 이별해야 했습니다.

 







그 이후 새로 남원부사로 부임한 신관 사또는 춘향의 미모에 홀라당 반하여 수청들 것을 강요하였고 춘향은 일부종사를 들어 수청들기를 거부하자 열받은 사또는 "니 한번 죽어볼래"하며 춘향이를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이몽룡은 과거에 급제해서 암행어사가 되어 “암행어사 출도야”를 외치며 들이닥쳐 탐관오리인 남원 사또에게 “니 죄를 니가 알렸다”하며 봉고파직하고 감옥에 가두는 서민인 우리로서는 아주 통쾌한 권선징악의 내용입니다.

 




아!! 요즈음에는 이런 서민을 위하는 정치인이 왜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소설 속에 성춘향은 성이성과 같은 성씨 성을 썼다는 점을 보면 더욱 신빙성이 있습니다. 성이성의 아버지인 부용당 성안의(1561~1692)도 소설 속의 내용처럼 남원부사로 재직을 했으며 성이성 또한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 내려와 공부하고 뒤에 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었습니다. 어쩜 내용이 소설 속과 많이 닮았습니다.






성이성은 21세인 1616년에 생원시에 합격해서나 당시 나라 정세가 너무나 어지러워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624년 인조 2년에 이괄의 난으로 인조를 호종하는 아버지를 따랐다가 난이 평정되자 성균관에 들어갔고 인조5년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사간원정언에 임용됩니다.



그러나 인조는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랐기에 그의 아버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들이려 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신하들의 반발로 논쟁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원종에 추증해 밀어붙였고 성이성은 이의 부당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의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성품으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암행어사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강계부사 재직 때에는 관서지방의 살아있는 부처라는 “관서활불(關西活佛)”로 칭송받는 훌륭한 목민관이었습니다. 그는 죽어서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라는 ‘청백리’에 그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몽룡의 실존인물인 성이성의 생가는 1613년인 광해군 5년에 지어졌으며 사랑채인 계서당은 후대에서 보수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성이성의 후손이 안채에서 생활하고 있어 집안에는 사람의 훈기가 가득했습니다. 6칸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나오고 정면에 사랑채가 자리했습니다.

 




사랑채를 보는 것을 잠시 미루고 사랑채와 붙은 중문을 지나 안채로 갔습니다. 성이성 선생의 후손으로 보이는 분이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를 보고는 “어서오시라”며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저도 그 덕분에 오랫동안 안채를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농촌의 살림살이가 마당과 축대에 그대로 나뒹굴고 너른 대청이 훤하게 뚫려 있는 것을 보면 살아오면서 가옥 구조에 변화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전체적인 건물 형태는 ‘ㅁ'자형 배치입니다. 이런 구조는 추운 지방인 경상북도 북부지방의 건물구조입니다. 밖으로 되돌아 나와 사랑채인 계서당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계서당은 높은 축대 위에 건물을 세워 웅장하며 듬직해 보였습니다. 떡하니 버틴 게 성이성의 강직한 성품을 마주하는 듯했습니다. 봉화여행에서 이몽룡의 실제 인물만이 아니라도 목민관의 본보기가 되는 성이성의 생가 계서당을 꼭 만나고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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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봉화여행)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 감실부처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


봉화여행 중에 봉화군에서 유일한 국보가 있다 하여 다른 일정을 잠시 미루고 북지리에 찾아갔습니다. 위치를 보면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의 호골산 지림사 경내에 있었습니다. 이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7c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1400여 년 전인 신라 시대에 ‘한절’·‘대사’라고 불렸던 큰 규모의 사찰이 있든 자리로 당시에 모셨든 불상으로 보입니다.





북지리마애여래좌상 주소: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657-2

북지리마애여래좌상 전화:054-673-6735




2013/11/13 - (경북여행/봉화여행)봉화 청량산 축융봉.청량산 전망대 청량산 축융봉 산행.청량산

2012/12/17 - (경북여행/봉화영월여행) 단군왕검을 뜻하는 박달나무, 우리나라에 박달령이 많은 이유가 있네. 백두대간 선달산 박달령

2017/10/31 - (경북맛집/봉화맛집)농가맛집 산수유길사이로. 테라푸드인 약선음식을 산수유길사이로에서 맛보다.

2017/11/16 - (경북맛집/봉화맛집)봉화 송이버섯 맛집 인하원. 봉화군청 봉화역 맛집 봉화 인하원 송이버섯

2018/01/24 - (경북맛집/봉화맛집)봉화군청맛집 자갈마당. 아침에 좋았던 봉화 자갈마당 자연산 송이 국밥





한절은 고려 시대까지 명맥을 이어오다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절은 폐사되었다지만 정확한 이유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한국동란 이전인 1947년에 수월암 신축을 하면서 우연하게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70년 들어 조명되어 1980년 9월 국보 201호에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봉화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낮은 언덕 같은 호골산 사면의 5m 암벽에 조각된 마애여래좌상입니다. 낮은 산세에 비해 대단한 힘이 느껴졌으며 주위에 27개의 사찰에다 500여 명의 스님이 수도를 했다고 하니 이곳에 대불인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싶었습니다.

 





워낙 지림사 경내가 넓어 조금은 황량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의 현재 상태를 보면 더욱 강하게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현재 많이 훼손된 상태입니다. 그래도 아쉽지만, 전체적인 불상의 모습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상세하게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자연암벽을 깊게 파내어 넓은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다 높이 4.3m의 마애불을 양각했으며 이를 감실 부처라 합니다. 불상의 얼굴은 넓고 큼지막하며 양감은 풍부합니다. 머리는 앞으로 약간 숙이고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었으며 전체적으로 자비로움이 느껴지는 게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진짜 거대한 불상이지만 위압감은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통견인 양어깨에 걸친 옷은 가슴에서 U자형의 굵은 주름이 양팔을 거쳐 앉아 있는 불상의 대좌까지 흘러내렸습니다. 오른손은 손가락을 펴서 밖으로 향하게 하여 가슴까지 들어 올리고 왼손은 손바닥을 펴 앞으로 보이게 해 무릎에 내린 모습인데 이를 '시무외인(施無畏印)'이라하며 부처가 중생에게 무외를 베푸는 손동작입니다. 마애불 뒤에는 광배를 표현했습니다.








광배는 머리와 몸 광배로 따로 표현했으며 마애불 주위로 작은 불상을 여러구 부조했습니다. 그리고 머리광배는 보주형두광을 말하며 정교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전체적인 불상은 딱딱함보다는 유려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봉화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도롯가에 큼지막하게 문화재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습니다. 혹시 봉화여행에서 이 안내판을 만나면 꼭 찾아보세요. 훼손상태는 심하지만 웅장함과 수려함에 지금까지도 그 여운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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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봉화여행)대한민국 명승 제60호 석천계곡·석천정사,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 석천정사


산 좋고 물 좋고 정자까지 좋은 고장이 봉화입니다. 당파싸움에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칼날 위의 벼슬에 환멸과 염증을 느낀 많은 선비가 산림처사를 자처하며 정자를 짓고 자연을 노래하며 은둔했던 곳이 유독 많았던 봉화. 하나같이 세속을 등지고 안빈낙도의 삶을 즐기면서 벗과 시문을 나누고, 후학을 키우며 말년을 보냈습니다.





봉화 석천정사·석천계곡 주소: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45

봉화 석천정사 연락처:054-679-6375




2018/02/08 - (경북여행/봉화여행)봉화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봉화에서 꼭 가보아야할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여행.

2017/11/04 - (경북여행/봉화여행)산타마을 분천역. 우리나라에도 산타마을이 있어요? 영동선 분천역 산타마을

2017/10/31 - (경북맛집/봉화맛집)농가맛집 산수유길사이로. 테라푸드인 약선음식을 산수유길사이로에서 맛보다.

2017/09/25 - (봉화여행/봉화가볼만한곳)봉화목재문화체험관. 춘양목의 고장 봉화목재문화체험관 여행하기

2017/02/10 - (경북맛집/봉화맛집)봉화송이 용두식당. 춘향목의 솔향이 가득한 봉화 송이돌솥밥 용두산장에서 맛보다.



 


그만큼 봉화의 산세는 남달랐습니다. 봉화에 몸을 숨긴 대표적인 처사로는 태백오현이 그러하고 또한 닭실마을의 청암정과 석천정사를 세운 청암 권동보 등 수많은 선비가 있습니다. 모두 자연 속에서 세상사 시름을 멀리하고 자기 수양을 하며 여생을 마쳤습니다.

 


봉화를 여행하면서 찾았던 석천계곡과 석천정사도 그런 곳 중 한 곳입니다. 봉화는 벌써 여행을 하고 왔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제야 포스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늘과 실이라는 석천정사와 함께 찾는 곳이 닭실마을의 청암정입니다. 청암정 또한 청암선생이 세웠습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삼남의 4대 길지에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내앞마을, 풍산의 하회마을과 함께 봉화 닭실마을을 꼽았습니다. 그만큼 마을의 분위기는 낮은 산에 둘러싸여 포근해 보였습니다. 문수산에서 흘러내린 창평천과 닭실마을 뒤를 돌아 흐르는 동막천은 유곡 앞에서 하나의 물줄기가 되어 기암괴석과 하얀 암반을 끼고 석천계곡을 빚어낸 뒤 내성천에 합류하여 낙동강에서 꼬리를 감춥니다.

 


봉화군의 수많은 명소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석천계곡과 비탈에 걸터앉은 석천정사를 만나러 출발했습니다. 석천정사를 가는 길은 위쪽의 유곡리 닭실마을에서 내려가는 길도 있지만 저는 그 반대인 삼계리의 삼계 2교에서 출발했습니다. 이곳에도 석천계곡을 알리는 대형안내판과 주차장이 있었습니다.



석천계곡을 끼고 반들반들 윤이 난 오솔길은 수많은 사람이 닭실마을을 거처 춘향으로 향했던 옛길이라 합니다. 그 때문인지 석천계곡의 운치는 더욱 좋아 보였습니다. 나도 그 뻔찔난 길에 발걸음을 보태었습니다. 계곡을 걷다가 문득 지게를 지며 올랐을 옛사람을 상상해보았습니다.



낙락장송의 거대한 소나무가 뿌리를 내린 석천계곡, 지겟발을 받치며 바위에 걸터앉아 시원한 골바람에 땀을 식혔을 그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으로 붐볐을 석천계곡은 스산한 가을바람에 그 많았다는 인걸은 간데없고 할 일 없는 나그네만 찾아와서 왁자지껄 노닐었는데 진짜 우리 일행 빼고는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석천정사를 가는 소로 길이 바위벼랑을 돌아갔습니다. 그 바위벼랑에 왕희지도 울고 갈 “청하동천(靑霞洞天)”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청하동천’ 그 뜻을 보면 “하늘에 있는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글씨체가 용이 하늘을 마음껏 휘젓듯 힘차게 날아가는 듯했습니다.





글씨는 충재 권벌 선생의 5대손인 대졸자 권두웅(1656~1732)이 섰다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암괴석으로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는 석천계곡에 많은 도깨비가 몰려와서 떠들면서 놀았다 합니다. 석천정사에서 공부하던 서생은 공부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힘을 당하였고 이를 참다못한 권두웅이 ‘청하동천’ 글씨를 바위에 세기고 그 위에다 붉은 칠을 하자 다시는 도깨비가 나타나지 않았다 합니다.









도깨비를 쫓아냈다는 청하동천 바위를 지나면 더욱 수려한 장관이 펼쳐지면서 계곡 건너에 석천정사가 나타났습니다. 바위에 걸린 나무다리를 건너 석천정사에 다다랐습니다. 석천정사를 들어서는 일주문이 꽉 닫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계곡을 내려가서 외곽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석천정사는 34칸의 큰 규모라 합니다. 석천정사는 충재 권벌의 큰아들인 청암 권동보가 1535년에 학문과 수양을 목적으로 세운 건물입니다. 선생은 1542년 중종 37년에 사마시에 합격해서 벼슬길에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1547년 명종2년에 아버지가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삭주에 유배되었다가 1년 만에 숨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했습니다. 조선 선조 때 아버지의 무죄가 밝혀져 복직되었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석천계곡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마음의 수양을 닦으며 여생을 마쳤습니다.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어 많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눈대중으로 대충 보아도 계곡을 비집고 절묘하게 들어선 정자에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자연지형을 최대한 살렸으며 건물은 높은 축대 위에다 길게 늘어선 모습 입니다.







살짝 까치발을 들어 내부를 보았습니다. 한쪽은 개방된 마루라면 한쪽은 판장문을 필요에 따라 여닫을 수 있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하얀 암반에 미끄러지듯 흐르는 계곡의 풍경과 하늘을 찌를 듯 우람한 소나무의 솔향이 모든 건물에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습니다.

 
















선경이 따로 없는 석천정사를 지나면 닭실마을에서 석천정사로 들어서는 넓은 길이 이어졌습니다. 허리를 숙인 소나무의 사열을 받으며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저 멀리 닭실마을의 청암정이 어서 와라 손짓했습니다. 명승 제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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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봉화여행)봉화 와선정. 태백오현이 대명결의를 다졌던 봉화 춘양면의 와선정 여행


경북의 오지마을인 봉화여행은 벌써 하고 왔는데 차일피일 여행 포스팅을 미루다 보니 이제 포화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봉화여행에서 밀린 숙제 한 곳을 하려 합니다. 봉화에는 100여 개가 넘는 정자가 있어 정자의 고장이라 하는데 그중에서도 번잡하지 않고 한적하여 신선이 내려와 머물렀을 정도로 조용하고 아담한 명소 와선정을 소개합니다.





봉화 춘양 와선정 주소: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 244
봉화 춘양 와선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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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선정은 태백산이 있는 봉화군에서도 춘양목으로 유명한 춘양면 소재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마침 춘양면소재지 고택에서 1박했던 터라 안내판의 와선정을 보고 이른 아침에 운동 삼아 휑하니 차를 몰고 둘러보고 왔습니다. 와선정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 244번지에 속칭 골띠마을에 위치합니다.




작은 주차장에서 나무로 만든 아치형의 오현교를 건너면 바로 토담을 두른 와선정 정자입니다. 그런데 오현교 아래를 보면서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골짜기의 깊이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꼭 편편한 암반을 끌로 깊게 긁어낸 듯 패인 골짜기에는 높이 5m의 폭포가 걸려 있으며 그 옆에 벼랑에다 와선정을 세웠습니다.

 


낭떠러지에서 쏟아내듯 떨어지는 물보라가 은색으로 반짝여 은폭이라 불리며 그 폭포를 안은 바위가 사덕암인데 이는 “덕 있는 사람을 기다리는 바위”로 풀이하자면 태백오현의 뒤를 이어 다시 와선정은 ‘덕 있는 사람’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외에도 폭포 옆 바위에는 와선정과 사덕암의 글씨가 남아 있으며 와선정은 산림 처사의 은둔처로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곳에 다섯 분의 은자가 소요하며 시문을 나누고 후진양성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을 태백오현이라 불렀습니다. 태백오현은 잠은 강협(1602~1671), 포옹 정양(1600~1668), 각금당 심장세(1594~1660), 두곡 홍우정(1595~1654), 손유당 홍석(1604~1680)을 칭하는데 모두 고려와 조선에서 명문가로 이름을 더날였던 후손들입니다.

 











1636년(인조14년)에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태종에 세 번 절하고 9번을 땅에다 이마를 박으며 조아린 ‘삼배구고두례’인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자 이들은 결기의 심정으로 벼슬을 버리고 태백산 기슭으로 내려왔고 모두 와선정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살면서 대명절의를 지키며 서로를 위로하고 우의를 다졌다 합니다.







은폭



그들이 우위를 다졌다는 와선대에다 세운 와선정은 앞면 2칸, 옆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인 마루 형태의 건물입니다. ‘와선정기’를 보면 와선정은 1832년(순조32년) 후손인 강씨와 심씨가 합해 정자를 세우고 난 후 ‘와선지’ ‘사덕암지’의 뜻을 따라 와선정이라 이름 하고 1895년에는 정자를 수리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각문을 들어서자 작은 돌계단을 내려서면 바로 정자의 뒷면입니다. 계곡을 마주하며 세살분합문을 들어 올리는 열개식인 앞면과 달리 뒷면은 판자로 막아 각각 칸에 작은 문을 1개씩 달았고 좌우에는 흙담 1칸에 1칸은 여닫이문을 달아 출입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건물은 통간이며 우물마루에다 정자 바깥의 네면은 쪽마루를 돌렸지만, 뒷면을 제외한 삼면에는 평난간을 설치했습니다.

 









‘태백오현’은 조선 정조 14년에 왕명으로 병자호란 때 재신척화 순절자를 기록한 추념록인「존주록배신열전」에서 이들 다섯 선비를 태백오현이라 기록하고 받들며 경의를 표한대서 유래되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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