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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 덕동호로 수몰된 고선사터 삼층석탑과 비석받침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만나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문화재의 보고 경주에서는 현재 많은 절터가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는 문화재발굴조사로 그 빛을 발한 곳도 있지만, 또는 잡목에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곳이 부지기수입니다. 지난봄 경주국립박물관을 보면서 아주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이 고선사터의 비석 받침과 국보 38호인 고선사터 삼층석탑입니다. 

고선사터는 사실 생소합니다. 저도 생소한 절로서 보문호 하면 모두 알 것입니다. 보문호 상부댐을 덕동호라 하는데 원래 고선사가 있던 곳이 지금의 덕동호 물속이라 합니다. 










덕동호를 거쳐 경주 시내를 관통하는 하천을 알천이라 합니다. 그 상류는 경주시 암곡동이며 1975년 덕동호 건설로 암곡동의 고선사터가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선사터에 흩어져 있던 여러 문화재와 삼층석탑, 비석 받침 등 부재를 이곳 국립경주박물관 야외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고선사는 일연의 저서인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시대 신문왕(재위 681~692)때 원효대사(617~686)께서 주석하셨던 곳이라 합니다. 그런데 1914년 5월 이곳에서 원효대사 행적을 기록한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 비문조각을 발견했는데 그 내용에 비추어보면 686년 원효대사가 입적하기 이전에 고선사는 사찰의 규모를 갖춰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사(高麗史)’에도 1021년(현종 12년)에 고선사에 금란가사와 불정골 등을 내전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 당시까지도 법통은 꺼지지 않고 상당한 규모의 사격은 계속 이어져 왔던 것 같습니다. 덕동호 수몰로 고선사터 발굴 조사를 진행하면서 금당터, 강당터, 중문터, 회랑터 등의 건물터와 금동불 등 건물의 부재인 기와, 전돌 등 많은 문화재를 발굴하였습니다.








먼저 원효대사의 손자인 설중업이 할아버지 원효대사를 기리며 고선사에다 세운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의 귀부인 비석 받침입니다. 거북을 닮은 받침돌은 머리 부분이 남아있지 않고 몸통 부분만 현재 남아 있습니다. 통일신라 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전체높이는 약 70cm입니다.

 




귀부인 거북등의 가장자리를 따라 무늬 띠가 일정한 폭을 유지하고 등 부분의 귀갑무늬는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거북등 가운데 비좌인 비석을 꽂은 네모난 홈 주위를 돌아가며 연꽃무늬를 새겼습니다.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의 서당화상은 원효대사를 뜻합니다.





1914년 고선사터에서 비신의 아랫부분을 발견하였으며 1968년 경주시 동천동의 한 민가 우물터에서 빨래판으로 사용하던 것을 우연히 발견하여 현재 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남아있는 비신의 명문을 보면 원효의 사상과 업적에 관한 것으로 비문은 33행에 각행은 61자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있는 고산사터 삼층석탑입니다. 덕동호 수몰로 경주박물관 야외전시실로 옮겨온 고산사터 삼층석탑은 682년(신문왕 2년)에 세운 감은사터의 동·서삼층석탑과 너무나 닮아 보였습니다. 필자는 안내판을 보기 전에는 감은사터 삼층석탑의 짝퉁인 줄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렸는데 노반까지 높이가 10.2m에다 총 82장의 돌로 이루어져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판박이라 해도 쉽게 수긍할 만큼 똑같이 닮았습니다. 1.2층의 탑신과 옥개석은 여러 부재를 짜 맞추었는데 다만 3층 탑신석은 하나의 돌로 만든 게 사리함을 넣는 사리공 때문이라 추정됩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다른 점은 1층 몸돌 네 면에 문(문비)을 표현했는데 문화재 여행의 초보인 저는 감은사 삼층석탑에는 찰주가 남아 있지만 고선사터 삼층석탑은 없다는 점으로 구분해야겠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초기인 686년 이전에 새웠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삼층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는 통일신라 석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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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여행/감은사지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여행) 호국용 문무대왕의 혼이 깃든 경주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 여행.


경주는 노천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많은 신라시대의 불교유적이 있습니다. 경주 남산을 위시한 경주 시내에 수 없이 많은 문화재를 보면서 신라인의 예술성과 믿을 수 밖에 없는 전설 등을 듣고 있노라면 그 속으로 자연히 빨려 들어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만큼 흥미 진지한 이야기가 있는 신라의 서라벌  속으로 달려가 봅니다.



 

 

 

이번 경주 여행은 양북면과 감포읍에 있는 문무대왕 전설의 감은사와 이견대, 문무대왕릉의 대왕암을 찾아 갔습니다. 고향이 경주라 자주는 가 보질 못하지만 그래도 여러 번 가보았던 곳이며 학창 시절 때 한번쯤 들었던 호국용 이야기와 만파식적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먼저 토함산의 추령고개(지금은 추령터널을 지나면 금방임)를 넘어 쏜살같이 내려가면 일렁이는 동해 바다가 펼쳐집니다. 바다에 닿기 전 왼쪽으로 웅장한 쌍탑이 있는곳이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의 감은사지입니다.



 

 

 

감은사지는 문무대왕이 죽어 호국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는 곳입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굴복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은 언제나 바다 건너 왜구가 걱정이었습니다. 왜구와 가까운 위치에 있던 남해안과 동해안의 경주와 울산에는 왜구의 잦은 출몰로 백성들의 핍박이 심해 부처님의 원력으로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문무왕은 감은사를 짓습니다.


 

 

 

 

문무대왕은 절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인 31대 신문왕이 부왕의 유업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며 ‘아버지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인 ‘감은사’로 이름 하였습니다. 현재 감은사지는 동탑과 서탑이 세워져 있으며 옛 절터의 흔적인 금당 터가 남아 있습니다.


 

 

 

 

금당터 아래는 움푹 파여진 모습이며 이곳으로 동해의 용으로 화한 문무대왕이 대종천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서 몸을 쉬게 하였다는 곳입니다. 1959년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는데 금당의 바닥구조는 마치 바위를 깎아 마루를 깔듯이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어 문무왕의 전설이 더욱 신빙성을 갖게 합니다.



 

 

 

금당 앞의 쌍탑을 보겠습니다. 국보 제 112호 지정된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은 682년 신문왕 2년에 창건된 감은사의 부속 석탑입니다.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탑으로 높이는 13.4m에 이중 기단 위에 몸체돌을 세우고 처마 밑은 직각으로 꺾어 5단의 계단식 받침이 층단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지붕돌 위는 곡면을 이루어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은사지 동서 3층 석탑의 특징은 하나의 큰돌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닌 수십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점이며.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서탑을 해체복원하였고 1996년에는 동탑을 해체하여 복원하였습니다. 그 때 동서 탑에서 금동제 사리함과 사리가 들어 있는 수정 사리병이 발견되었습니다.



 

 

 

 

 

 

 

 

 

 

 

 

 

 

 

 

 

 

 

 

 

 

 

 

 

 

 

 

 

 

 

 

 

 

 

 

 

 

 

 

 

 

 

 

 

 

 

 

 

 

 

 

 

 

 

 

 

 

 

 

 

 

 

 

 

 

 

 

 

 

 

 

감포읍 대본리에는 이견대가 있습니다. 신라 문무왕이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다며 수중릉을 만들었던 대왕암을 볼 수 있는 정자입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신문왕은 호국용이 된 부왕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완공하였고 이견대는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큰 이익을 얻었다는 곳으로 신문왕은 이견대에서 문무왕과 김유신이 보냈다는 대나무로 만든 피리인 만파식적를 받았던 곳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이견대는 중국의 주역인 ‘비룡재천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에서 글귀를 빌려 “큰 용이 바다에 있는 것을 보았다”다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문왕이 문무왕을 생각하며 세웠던 이견대는 없어졌지만 현재의 이견대에 세워진 정자는 1970년에 발굴하여 건물지를 확인하고 1979년에 신라의 건축 양식을 추정하여 세웠던 정자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는 해안과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암초가 있습니다. 옛날부터 대왕암, 문무대왕 수중릉이라 불렀습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을 모신 곳으로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군주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왕암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현재도 알 수 있듯이 동서남북으로 네 군대 인공수로가 있습니다. 물은 동쪽으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하여 항상 수면이 잔잔하게 유지가 됩니다. 그 속에 길이 3.7m, 폭 2.06m의 거북모양의 돌로 만든 덮 게가 놓여 있고 그 안에 문무대왕의 유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알기 위해 이곳 대왕암 발굴 계획을 세웠다가 곧 철수를 하였다 합니다. 조사를 하면 대왕암이 문무대왕릉의 전설이 맞다, 아니다는 금방 알 수 있겠지만 모든 진실을 꼭 밝혀내는 것보다도 국민의 가슴속에 각인되어 있는 위대한 문무대왕의 큰 뜻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참고:신라사람들 ‘동해지역 문화유적 답사 자료집’ http://www.isill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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