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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여행/강진가볼만한곳)하멜표류기와 하멜기념관. 서양에 최초로 조선을 알린 하멜보고서의 하멜표류기와 하멜 기념관 여행


바다에서 표류하다 조선 땅의 제주도에 닿아 13년간의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겪은 뒤 지은 책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하멜표류기'입니다. 네덜란드 선원이었던 하멜이 조선에서의 참담했던 생활을 하나의 기행문으로 남긴 보고서인데 ‘난선 제주도 난파기’와 부록에 해당하는 ‘조선국기’로 조선의 지리와 풍속, 군사와 교육등 당시 사회 전반과 겪었던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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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표루기는 1666년 하멜 일행이 조선을 탈출하여 본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가 1668년 조선이란 나라를 최초로 유럽에 소개했던 책입니다. 하멜은 왜! 자의든 타의든 조선 땅에 오게 되었을까요?? 하멜은 네덜란드 사람으로 동인도회사의 선원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무역거래가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일본은 포르투갈과 교류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조총으로 한반도를 짓밟기도 했는데 단교하고 다시 네덜란드와 교류하여 유럽의 신식문물인 양학과 난학을 받아들이는 등 개혁개방을 추진하여 일본은 경제부흥을 일으키는 토대를 마련하면서 조선을 강제 병합하기에 이릅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그리 당하고서도 당시 정치꾼은 정신을 못 차리고 조선 말기에 일본에다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아픔을 당했습니다. 그 아픔이 7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져 오는 것을 보면 참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하멜 돌담길:병영면에는 하멜 돌담길이 있습니다. 호박만한 크기의 돌을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돌담길과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또한, 돌담의 높이는 2~3m로 병영성의 군사가 말을 타고 다녀 민가의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집안 내부를 볼 수 없게끔 높이 쌓았습니다. 흙 담에다 돌을 일렬로 쌓지 않고 납작한 돌을 15도 각도로 기울려 한방향이 아닌 지그재그 형태의 빗살무늬로 쌓아 견고함을 더욱 높혔습니다. 이런 형태의 담장이 네덜란드 담장의 축조 양식이라 합니다.

 

 

 


동인도회사는 1602년에 설립되어 중국과 일본,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등과 활발한 해상무역을 펼쳤습니다. 주로 동양의 향신료와 중국과 일본에서 생산된 청화백자를 유럽으로 가져가 엄청난 이윤을 남겼습니다.


 

 

 

 


하멜이 탄 배는 1653년 1월 10일 네덜란드에서 출발하여 6월 14일 타이완의 안핑까지 운항하였고 동인도 회사 본사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출발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날씨가 변하면서 악천후를 만나 배는 좌초하였고 제주도의 모슬포 인근에 겨우 닿았지만 66명의 선원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38명이었습니다. 이로써 하멜 일행은 조선에서의 험난한 생활이 시작됩니다.


 

 

 

 


제주 목사였던 이원진이 이들을 체포하여 조정에 장계를 올렸으며 하멜 일행은 제주도에서 생활하면서 네덜란드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사정하지만 효종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에 선원 6명이 탈출을 시도하였고 실패로 끝나자 효종은 하멜 일행을 서울로 압송하라는 어명을 내립니다.


 

 

 

 


효종은 네덜란드 선원의 대포, 조총 등 신무기 기술을 활용하여 당시 추진하던 불벌계획에 이용하기 위해 이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박연의 휘하에서 군사훈련을 받도록 조치합니다. 그해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들어오자 조정은 양인을 억류하고 있다는 사실이 청나라 사신에게 오해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을 우려해 하멜 일행을 남한산성에 억류시켜버립니다.


 

 

 

 


일행 중 두 명이 빠져나와 청나라사신 앞에서 자신들을 살려달라고 호소하지만, 그마저 실패로 끝나고 하멜 일행 모두 전남 강진의 병영성에서 탈출 전까지 7년간의 유배 생활에 처해집니다. 하멜 표류기를 보면 유배생활 중 전라 병영성의 병마절도사가 총 5명이 바뀌었다 합니다.


 


 

 


풀 뽑기와 가벼운 청소 그리고 산에서 나무하기 등 호의적인 병마절도사도 있었지만 혹독하게 일을 시켜 입고 있던 옷이 누더기가 될 정도로 육체적인 노동을 강요했다 합니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고 조선은 가뭄과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하멜표류기에는 이때의 상황을 “백성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산에서 도토리를 줍고 소나무 껍질을 벗겼으며 잡풀까지 뜯어 먹어야 했다”라고 당시 참담했던 상황을 기술하였습니다. 하멜 일행도 3년 동안의 생활은 말로 표현할 수없는 참담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멜 일행도 역병과 굶주림에 생존자는 22명만 남게 되었고 조정은 이들을 순천과 남원, 여수 좌수영에 각각 분산 배치하여 수용하게 합니다. 하멜과 함께 11명은 여수의 좌수영으로 옮겨갔고 이곳에서도 기다린 것은 또한, 고된 노역과 배고픔이었습니다.


 

 

 

 


하멜은 고된 노역과 질병, 굶주림에 일행이 자꾸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탈출 계획을 세웠습니다. 먼저 타고 갈 배를 구입하는 게 문제였습니다. 하멜은 닥치는 대로 돈되는 일을 시작하여  악착같이 돈을 모았습니다. 탈출계획은 착착진행되어 당시 배삯의 두배를 주고 배를 구입하였고 1666년 드디어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을 성공하여 본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가게 됩니다.. 당시 생존자가 16명인데 8명만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럼 강진군 병영성 앞의 하멜 기념관을 보겠습니다. 전남 강진군 병영면 병영성로 180 하멜 기념관은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양에 알린 하멜보고서인 하멜표류기의 저자 헨드릭 하멜(Hendric Hamel)의 생애와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 및 자매도시 네덜란드 호르큼 시와의 문화적 교류를 위해 개관하였습니다.


 

 

 

 

 

 


하멜 기념관의 건물은 타원형의 목조건물로 왼쪽 건물은 하멜이 처음 도착한 제주도를 상징하며 오른쪽 건물은 하멜이 일본 나가사키로 가기 위해 탓 던 조난선인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뜻한다 합니다.


 

 


하멜 기념관의 전시실은 ‘하멜보고서’ 외에도 하멜의 생애와 17세기 조선과 네덜란드의 사회 문화와 역사적 상황, 강진군과 네덜란드 호르큼시와 자매결연 등 주제별로 전시실을 꾸며 하멜 기념관을 더욱 알차고 풍성하게 꾸며놓았습니다. 하멜 기념관은 총 2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상설 전시 중입니다.


 

 

하멜기념관 사진으로 만나기


 

 

 

 

 

 

 

 

 

하멜보고서 원본 복제품

 

 

 

 

 

 

 

 

 

 

 

 

 

 

 

 


◆하멜기념관 관람정보안내

★하멜기념관 주소:전남 강진군 병영면 병영성로 180

하멜기념관 전화:061-430-3318

관람시간:연중 09:00~18:00

휴관일:신장, 구정, 추석, 매주 월요일

관람료:무료

주차시설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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