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부산여행/수영여행)수영사적공원. 경상좌수영 있던 곳 수영사적공원 둘러보기


부산시 수영구의 수영사적공원을 포스팅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수영은 오래전에 공군 비행장이 있었고 이곳 삼거리를 수비삼거리라 부르며 수영이란 지명을 그저 대소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수영의 지명이 조선시대에 설치된 좌수영에서 유래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맹장인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 많이 나왔던 우수영 좌수영하는 그 좌수영에서의 수영입니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바다를 끼고 있어 왜구의 빈번한 침입으로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수군절도사가 상주를 하는 주진을 각각 두 곳에다 설치했습니다. 즉 동쪽편을 관할하는 주진을 좌수영이라 하는데 경상도 좌수영은 동래였습니다. 지금이야 부산으로 지명이 바뀌었지만 조선시대에는 동래로 불렀습니다. 지금 수영공원이 있던 자리가 수군절도사가 업무를 보았던 좌수영자리로 9개 읍진을 관할하였습니다.

 

 

그 경상좌수영이 근대인 1907년(융희 1년) 일본의 군대해산령에 의해 해산 되면서 경상좌수영도 폐지가 되었습니다. 지난 토요일 오후 늦게 찾아간 수영공원은 도심 속의 작은 언덕이었습니다. 자투리 땅에는 있을 법한 쌈지공원으로 사방에 집들이 들어서 남문과 안내판이 없다면 이곳이 수군 절도사가 상주를 한 경상 좌수영이 있던 곳이라고 상상을 할 수 없었을 정도 였습니다.

 

 

좌수영 망루에 올라 수영앞바다의 상황과 왜구의 동태를 주시하였을 당시의 모습은 빌딩 숲에 가려 바다를 보고 싶다는 필자의 생각은 보기 좋게 깨어졌습니다. 좌수영을 찾아 갑니다. 어느 골목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는데 건물사이로 숲이 보여 저기 같다며 주차를 하고 갔습니다.

 

 

안용복 장군은 조선 숙종때 이곳 동래(현 수영구 수영동)에서 태어나 고기를 잡는 어민으로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의 수군인 능로군이었습니다. 안용복 장군은 울릉도와 독도를 죽도라 부르며 침범을 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에도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 영토임을 확인시키며 다시는 침범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아왔던 분으로 후세에 의해 장군으로 불려 졌습니다. 안용복 장군의 사당은 1967년 수영공원 충혼탑과 함께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수영공원을 한바퀴 돌아봅니다. 수영민속예술관을 지나면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2호인 ‘25 의용단’을 만납니다. 들어서는 입구는 굳게 닫혀 있습니다. 이런 곳은 개방을 하여 관람객이 찾도록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의 숭고한 뜻을 받드는 계기로 만들어야하는데 무슨 행사 때만 문을 개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수영성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자 수영성을 끝까지 사수하고자 목숨을 버린 성민(城民)의 의용을 기리는 곳입니다. 임진왜란으로 경상좌수사는 죽기가 두려워 수영성을 버리고 도망을 쳤지만 수영성을 지키든 수군과 성민 25명이 죽기를 맹세하며 유격전을 벌리다가 장렬히 전사 하였습니다. 1609년 인 광해군 1년에 동래부사 이안눌이 25인의 사적을 모아 정방록에 싣고 25인의 집 대문에 ‘의용’을 새겨 그 뜻을 후세에 남겼다는데서 유래를 합니다.

 

 

 

 

 

 

다시 수영사적공원 남문으로 찾아갑니다. 좌수영의 역사를 말해 주 듯 키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룰 정도로 울창하여 어디서 왔는지 재잘거리는 새소리가 너무나 반갑습니다. 남문 직전에 수영 고당이 있습니다. 일명 송씨 할매당 또는 산정머리 할매당으로 부릅니다. 일제시대 왜병의 희롱을 물리친 송씨 할매의 높은 정신을 기리며 독신묘와 함께 매년 정월 보름날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원래 수영고당은 임진왜란이전부터 있던 것으로 추측을 하지만 1936년 허물어진 건물을 중수한 뒤 지금의 건물은 1981년에 중수와 개수를 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수영고당의 오른쪽은 성주신당이며 왼쪽은 병영의 대장 앞에 세우는 독기를 안치하여 특이하게도 군기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독신묘입니다.

 

 

 

 

수영고당과 마주한 아치형 석문은 경상좌수영 남문으로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7호입니다. 조선시대 수영성은 낙동강 동쪽에서부터 경주까지의 해안을 방어했던 수군의 본영인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영이 있던 곳입니다. 월래 남문은 지금의 위치에서 200여m 떨어진 수영초교 자리에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수영초교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임의로 옮겨 왔던 것을 다시 원래 자리로 옮겨와 보존을 하고 있습니다. 1692년인 숙종 18년에 좌수사 장우상이 수영성을 중수할 때 세운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1993년 8월에 붕괴우려가 제기되어 해체를 한 후 다시 복원을 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동서남북 모두에 성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주작문으로 불리는 남문만 남아 있습니다. 홍예식인 돌문위에 누대 또는 누문이 있었다하며 그 규모가 6칸으로 4대문중 가장 컸다합니다. 문루위에는 큰북을 달아 시각을 알리는 북을 쳤고 이에 맞춰 성문을 여닫아습니다. 또 특이하게도 남문 입구 양쪽 돌기둥 위에는 돌로 만든 조선 개인 박견 한쌍을 배치하였습니다. 개는 도둑으로부터 집을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수영성 입구에 개를 둔 것은 아마 왜구의 침입을 잘 감시하도록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수영공원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볼거리는 천연기념물 제270호와 제311호인 곰솔나무와 푸조나무라 생각합니다. 크기와 굵기를 보면 한마디로 입이 쩍 벌어질 정도입니다. 곰솔나무는 수령이 400년으로 좌수영이 있을 때 소나무에 신이 들었다고 믿어 군신목으로 여기며 신성시 하였습니다. 높이는 22m, 둘레가 약 4.1m, 수관이 동서 19m, 남북 21.7m 로 퍼져 있습니다. 푸조나무는 좌수영성지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500살 이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목으로 여기며 지신목이라 부릅니다. 푸조나무는 수영고당 할머니의 넋이 나무에 깃들어 있어 마을을 지켜주며 나무에서 떨어져도 다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줄기가 양쪽으로 뻗어 올라 간 것을 보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닮은 나무라하여 노부부나무라 부릅니다. 웃스게 한마디 합니다. 필자도 세상을 오래 살아보지 못했지만 나무를 자세히 보고 있으며 서로 얼굴을 돌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500년을 같이 붙어살았는데 서로 잔소리에 귀 딱지가 내려 앉았는 것은 아닌지, ‘에고 화상아~~~’하는 할아버지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며 ‘이 영감탱이가’ 하며 맞받아치는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해 보며 웃어 봅니다.

 

 

수영사적공원내에는 33기 비석을 모아 둔 곳이 있습니다. 조선 인조 17년인 1639년부터 1890년 고종 27년 사이의 수군절도사와 부관의 재임 시 공덕을 칭송하여 세운 선정비로 좌수영성지 정비복원사업을 할 때 남문 주위에 흩어져 있던 것을 재임 순으로 이곳에 세웠습니다

 

 

 

수영사적공원 포스팅을 하는 중 경상좌수영 복원 기사가 떴습니다. 2026년 까지 293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복원을 완료한다는 장기계획을 세웠다며 1차로 수영구청은 먼저 16억원을 들여 남문 일대 사유지를 매입하여 남문 복원에 나선다고 합니다. 얼마나 반가운지 소식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수영사적공원에 걸맞은 위상이 안타까웠는데 이제 제 모습을 한 수영성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꼭 복원이 이루어져 돌문만 있는 남문에 누대가 올라서며 옛 모습을 한 웅장한 수영성을 기대해 봅니다.

 

 

 







728x90

+ Recent posts